어떤 이들은 선한 행위가 최종적인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견해가 복음이 가져다주는 은혜를 부인한다며 우려를 표명한다, 하지만 결코 우리는 바울보다 더 바울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디도서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은 자신의 말이 은혜의 복음과 대립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딛 2:11-12).  

회심 때 받은 은혜는 일상의 삶과 행동과 동떨어진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 인격을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그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를 받는다.  물론 우리가 지나치게 실현된 종말론을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로마서 7장 14-25절에 묘사하고 있는 것을 여전히 부분적으로 경험한다.  변화는 완전함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신자들은 아직도 여전히 육과 싸움을 계속해 나간다(갈 5:13-6:10).  신자들은 더 이상 죄의 종은 아니지만(롬 6장), 죄와의 싸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갈 5:17).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그날까지 여전히 완전함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죄와의 싸움을 계속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빌 3:12-16).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흔히 우리가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의 삶’이나 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 하나님께 맡기라’(Let go and Let God)는 수동적인 사고방식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쟁이다(엡 6:10-19, 고전 9:26, 고후 10:4, 딤전 1:18, 6:12, 딤후 4:7).  이 과정은 실패하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따라서 너무 낙관적이거나 비판적인 사고는 위험하다.

순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주목할만한 본문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바로 빌립보서 2장 12-13절 말씀이다.  이 구절에서 동사 ‘이루다’는 행하다, 하다, 성취하다를 의미한다(롬 1:27, 2:9, 7:8, 15:18, 고전 5:3, 고후 5:5, 엡 6:13).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는 ‘복종하다’라는 동사와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가히 놀랍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순종’하고 ‘행해야’ 한다.  순종이나 선한 행위 없이는 결코 구원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신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진술 때문에 바울이 혹시 은혜의 복음을 망각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런 생각을 잠재울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자신의 의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율법에 대한 순종이 낳은 의는 자신을 결코 구원하지 못한다(빌 3:9).  오히려 바울 자신의 의는 믿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다(약 1:17).  

여기엔 스스로에게서 난 의가 설 자리가 없다.  우리의 선함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생각도 결코 설 자리가 없다.  빌리보서 2장 13절 말씀이 2장 12절 말씀 직후에 이어진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 순종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결과(고전 15:9) 일뿐, 결코 인간의 고결한 성품이나 미덕의 결과로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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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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