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는 서로를 향한 분노와 미움에 관계된 행동이 지속될 경우 심판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경고한다.  만약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는 어떤 심판이 내려질 것인가?(약 5:9).  정한 날이 다가오고 있겠지만, 심판자는 이미 문 밖에 서 계신다(계 3:20). 

Donald Bloesch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신자들은 최후의 심판을 받겠지만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는 분임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약 2:12).  따라서 끝까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무한한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요 10:28).  다시 말해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되지만, 긍휼을 베풀면 그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기뻐한다’는 것이다(약 2:13).  그런데 명목상 교인이나 신실하지 못한 ‘나일론’(nylon)  신자들에게는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

계시록에 나오는 사데 교회를 보면 ‘옷을 더럽히지 않고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니는 자들이’ 나온다(계 3:4).  사실 이들은 은혜와 순종의 응답 사이에 정교한 균형을 유지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옷은 은혜로 값없이’ 주어졌지만(롬 3:24), 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함과 충성으로 혼인을 위해 자기 자신을  예비하였기 때문이다(계 3:5).   따라서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계 19:8)인 것처럼 모든 사람은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는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계 22:12). 

이 심판은 언제나 행위에 근거해서 진행된다(마 25:41-46, 고후 5:10, 히 4:12-13).  행위는 마음에 대한 충성의 틀림없는 증거이며, 행위를 보면 믿음과 불신, 충성과 불충성을 알 수 있다.  믿음과 믿음의 행위와의 불가분의 관계에 대한 사도 요한의 이론은 예수님과 바울의 이론과도 동일하다((요 5:29, 롬 2:6).

사도신경(Apostle's Creed)은 400년 동안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정통 교리를 믿어왔던 내용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 심판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받을 심판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믿는 자들의 상급 심판을 말하는 것인가? 

여기서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심판이란 개념 자체가 사랑의 하나님(요일 4:9-10)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중 한 명이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Karl Barth다.

William J. Dalton 역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영원한 심판’은 그와 조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Aspects of New Testament Eschatology』에 나온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은 무엇보다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부당한 결론을 피하려면, 미래의 심판을 배경으로 하는 종말론적 진술이야말로 무조건 이런 배경의 부적합성을 감안하고, 이 부적합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빗나간 태도는 반세기 동안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신약 성경은 정직하게 읽어보면 이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성경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롬 3:24).  여기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롬 2:6), 즉 각자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고후 5:10).  

'최후의 심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Piper의 불만  (1) 2025.03.29
믿음과 행위의 관계  (0) 2025.03.22
행위에 의한 칭의  (0) 2025.03.08
신자들이 받을 심판  (1) 2025.03.01
심판 받을 자  (0) 2025.02.2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