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은 Princeton 철학과 명예교수 Harry G. Frankfurt가 쓴 책이다. 혹시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를까 해서 짤게 설명하고 싶다. 제목이 유별나지만 개소리는 세상을 더럽히고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욕(汚辱) 시킨다. 개가 짖는 소리야 당연히 개소리이니 문제가 될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개가 아닌 사람이 ‘개소리’로 나팔을 불어대면 그 사람은 인간 되기를 포기한 개가 된다. 다시 말해 개소리 같은 신학을 늘어놓으면 그는 이미 개 같은 사람 되기를 자청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놈’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 신학자나 목사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런데 ‘개소리’ 떠드는 신학자, 혹은 ‘개소리’ 짖어대는 목사라는 말을 들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잘 알았으면 한다.
독립적인 신학은 우물 안에 갇힌 한정된 신학이다. 이런 신학은 정말 답답하기에 짝이 없는 신학이다. 반면 초교파적인 신학은 언제나 풍성하게 만드는 신학이다. 그 이유는 다른 신학적 입장들과 상호작용을 통해 넓은 시야를 갖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실상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불일치하는 영역보다는 공통된 영역을 더 많이 소유하고 있다. 여기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는 몇 가지 중요한 영역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동의한다(삼상 2:6-7). Wesley의 신학적 접근법이 다른 이들의 접근법과 다를지라도, 그는 결코 하나님의 주권을 축소해서 믿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감소시키는 일체의 신학적 관점을 주장하는 데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Wesley의 비판자들은 그에게 그런 혐의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막상 그의 작품들을 검토해 보면 이런 주장들이 하나같이 ‘개소리’인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우리는 인간의 자유에 동의한다(신 30:19-20).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자유의 성격과 범위 및 작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불일치할지라도 어떤 그리스도인도 ‘로봇’(Robot) 혹은 ‘꼭두각시’ 같은 인간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느 그리스도인도 인간의 자유가 그 구성과 표현에 있어서 ‘태생적’(胎生的)이라고 믿지 않는다. 사실 Wesley가 자유의지를 믿고 가르쳤다는 혐의 아닌 혐의를 ‘카더라 통신’ 골빈 신학자와 목사들로부터 받았다. 하지만 그의 책 『Predestination Calmly Considered』에 의하면, 그는 ‘태생적 자유의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용어라고 말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우리가 소유한 어떤 자유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그는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속죄의 효력에 동의한다(벧전 3:18).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 한 번으로 충분하다(히 9:12).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그 밖에 다른 것이 필요하거나 요구되지 않는다(행 4:12). 즉 속죄 사역의 단회성은 속죄의 완전성을 나타낸다(히 10:18).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열심을 다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고전 1:23)와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행 4:10).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속죄론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것이 인간에게 작용하는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서로 의견이 불일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속죄는 우리가 구원받은 객관적인 원인이며 주관적 영향을 우리에게 미치는 무엇이다.
서론이 길어졌지만 이 말이 꼭 필요한 것 같다. 『The Letter of Rev. John Wesley, ed. John Telford, 8 vols』에 나온 Wesley의 말이다. “나는 항상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스스로 영적인 선을 행할 능력이 일절 없음을 분명하게 주장해 왔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의 선한 생각 혹은 소원조차 이를 일으키시는 성령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구원과 관련된 어떤 일과 용납됨 조차 … 회심시키는 주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로움이 우리가 구원받는 유일한 공로적 원인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Wesley 신학의 뿌리는 결코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나 태생적 자유의지 개념에 기반을 둔 그 무엇이 아니다. 그의 신학은 언제나 은혜의 신학이다. Wesley에 대해 쓸데없이 이단적 사상을 가진 신학자라고 ‘개소리’로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한다.
Calvin과 Wesley 두 사람이 이견을 보인 주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면 믿음은 인간 구원의 조건(condition)인가, 결과(result)인가 하는 것이다. Calvin의 입장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실질적인 은혜의 증거였다. 반면에 Wesley의 입장에서 보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prevenient grace)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즉 Wesley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미리 알고 계신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그는 Calvin과 그의 추종자들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을 너무 강조하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성경의 교리를 혼란스럽게 했다고 주장하였다. 만일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과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를 주장한다면 인간의 믿음은 의미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받을 사람을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Wesley는 『Thoughts on Salvation by Faith』에서 말한다. “절대적 예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혀 상황에 맞지 않는 규정을 갖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공로를 통한 구원을 거부하지 않는 한 그들의 주장은 일관성을 잃게 된다”
선행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부르고, 회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며 의롭다고 인정받는 존재가 되게 한다. 그러나 Wesley는 칭의(justification)가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칭의는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성장하는 역동적인 기회의 출발점이었다. 실제로 Wesley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을 축복하고 구원의 확신과 성화를 향하여 인내하며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Calvin과 Wesley 두 사람은 성화(sanctification)를 강조했으나, 성화에 대한 Wesley의 관점은 Calvin과 자주 구별되었다. Wesley는 『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이라는 설교에서 구원의 본질적인 성격에 대하여 말하면서 구원은 두 가지 기본적인 요소, 즉 칭의와 성화로 이루어진다고 선포하였다. 그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칭의의 문제에서 종교개혁자들과 대체적으로 동일한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구원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이견을 보인 부분은 하나님이 신자들의 삶에 얼마나 역동적으로 은혜를 베풀고 그 은혜를 미리 베풀기 원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이 성령과 협력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루기를 바라고 있다(롬 8:4). 그것이 Wesley가 전적 성화를 이야기하는 이유다.
Calvin과 Wesley는 구원론에서 많은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원의 순서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Calvin의 관점에서 은혜는 실질적, 혹은 저항할 수 없게 역사한다. 그 은혜는 선택된 사람들, 즉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에게 제한된다. 실제로 멸망할 대상으로 저주가 예정된 사람들은 영생을 믿을 의지와 능력이 없는데, 그 또한 하나님의 뜻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의 영원한 지위를 선포하거나 결정한다.
그러나 Wesley는 보편적이거나 무제한적으로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하였다. 즉 하나님은 은혜로 모든 사람에게 먼저 구원을 제시하고(롬 10:11) 다음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 선물을 받을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셨다는 것이다(막 16:16). 사람들에게 은혜가 미리 보편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한다는 것을 확인한다(벧후 3:9). 또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에 미리 정한 계획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미래를 미리 알고 생명의 조건들을 대략적으로 정할 수 있지만 특정한 사람들의 구원이나 멸망을 구제척으로 미리 결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입장은 구원의 순서와 관련하여 Wesley와 Calvin이 가지고 있는 차이의 예가 될 것이다.
Wesley는 설교 가운데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한 Calvin의 입장에 동의한 설교를 들어보자. Wesley는 이 설교의 제목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Salvation by Faith』라는 제목을 붙였다. “만일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한다면 이것은 ‘은혜 위에 은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가장 큰 은혜, 곧 구원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말로 다할 수 없는 이 선물에 대하여 감사하는 말 외에 다른 말을 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심’으로 된 것이다. 여러분은 은혜 가운데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 은혜는 구원의 원천이며,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다”
Wesley와 Calvin은 개신교회가 강조하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교리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삶(빌 2:5-8)과 죽음(마 27:50)과 부활(고전 15:20)을 통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주신 놀라운 선물이다(엡 2:8).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죄인인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를 대신 치르고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마 20:28). 그런데 Calvin이 쓴 책들을 읽어보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그 자체로 제한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이들에게 유효하지 않다고 믿었다. 구원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영생을 주기로 무조건 선택하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 또한 하나님은 영원히 저주받는 사람들도 징계하신다.
Wesley는 Calvin의 이러한 입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이 말에 오해 없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얼마든지 다른 의견과 생각을 가질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Wesley는 그리스도가 분명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었다고 주장하였다(딤전 2:6). 즉 대속(vicarious)은 제한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눅 14:15-24)은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는다(막 16:16, 요 3:18).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의 긍휼 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딛 3:5) 구원을 얻는다. 믿음이 영생의 조건이기 때문이다(엡 2: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