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vin과 Wesley는 교회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과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물론 두 사람이 사역하는 모습은 유사점이 많았지만 차이도 분명했다.  Calvin은 공식적인 사역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이른바  하향식’(top-down) 방식으로 권위를 앞세웠다.  그는 성경의 가르침을 기초하여,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는 말씀을 강조하면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수행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사역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을 선포하고 성례전(sacrament)을 올바르게 집례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God's Sovereignty)과 은혜(grace)의 승리를 축하하는 의미다.

그러나 Wesley는 성경에 분명하게 언급된 내용만을 사역의 범주로 제한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과 교회를 인도하고 능력을 주는 성령의 지속적인 임재와 역사를 통하여 사람들과 사회의 요청에 창조적이고 책임적으로 응답하는 것이 사역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Wesley는 Calvin보다 훨씬 더 혁신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켰다.  특별히 평신도 지도력을 강화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사역이란 이 세계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응답이다.  즉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마 28:20).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근거하여 사역을 정립하려 했지만, 교회사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역이 발전해 온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몇 가지 분명한 영역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말씀(고전 4:6)과 성례전(고전 11:23-34)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역, 혹은 묵상(막 1:35)이나 열심 있는 경건 생활(요일 2:6)을 강조하는 사역,  전도(마 28:18-20)를 목적으로 하는 실천적인 사역, 그리고 성령의 은사(롬 12:6-8) 중심의 사역, 혹은 에큐메니칼(ecumenical) 사역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설명하는 방식을 한두 가지로 단순화할 수 없다.  두 가지, 혹은 세 가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회나 교파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또한 다른 영역에 비해 한 가지 영역이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경우 다른 영역들을 2차적이나 3차적이 되기도 한다.  반면에 앞에서 언급한 모든 영역들을 최소한 조금씩이라도 수행해야 한다고 이상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을 통해 말한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고전 12:12).  한 몸은 많은 지체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서로 다른 은사들을 소요한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 몸 안에 있는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바울의 관심사였다.  이 유비는 종종 개체 교회들을 지칭하지만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렇게 이해하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교회들과 교파들은 서로 보완적인 사역을 수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Calvin과 Wesley를 비교하면서 한쪽이 옳고 다른 쪽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앞서 언급한 사역의 모든 영역을 대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  그러나 그들의 사역 방식과 사역에 대한 가르침은 두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다시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었노라’(고전 12:22-23).  여기서 말하는 ‘약하게 보이는’ 지체는 그 몸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지체들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눈에 잘 띄지도 않을뿐더러 전면에 나서서 자신들의 은사를 발휘하지도 않은 채 늘 뒤에 머물러 있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들을 사용하고 있다면 사실상 그 몸에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존재들인 셈이다.  교회에는 눈에 잘 띄는 지체들도 필요하지만 그렇지 못한 지체들도 모두 필요하다.  어느 누구도 자기 외에 다른 지체를 그리스도의 몸에서 하찮다고 괄시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한두 사람(목사와 장로)에게만 지나치게 영광이 집중되어서도 안 된다.  그 이유는 고린도전서 12장 25-27절에서 설명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다양한 사역의 영역이 있는 것처럼 지도력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다.  이러한 다양성은 교회사뿐 아니라 성경에서도 볼 수 있다.  때문에 사역이나 목회자의 지도력에 있어서 특정한 방식이 올바르고 다른 방식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한 관점은 성경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오직 개혁주의 교회에서 늘 나팔을 부는 것처럼 말씀 사역만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균형 잡힌 성령의 사역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Calvin은 교회사에 나타난 신학적 거인이다.  무엇보다도 사역에 있어서 그의 지도력과 신학적 공로를 결코 폄훼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alvin의 탁월함이 모든 개신교인들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모범은 될 수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Calvin을 목회자의 모범으로 인정하는 사람들도 실제 생활에서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Wesley의 모습이 오히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하지 못하면서 실제로 따르는 실제적인 모범이라고 확신한다.  이 말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것은 양쪽 진영에서 수 십 년을 몸 담아 신앙생활해 왔고, 양쪽 진영에 속한 모든 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진심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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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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