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Calvin과 Wesley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한 주제였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의 신앙과 가치, 그리고 실천에서 본질적인 요소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Calvin과 Wesley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리고 삶을 통하여 은혜로운 역사를 이루는 방식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두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은혜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축복을 위한 거룩한 ‘사랑’, ‘호의’, ‘감사’, 등이고, 또한 거룩한 ‘능력주심’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어원상 이 말은 그리스어 charis와 라틴어 gratia에서 왔다. 확실히 은혜는 Protestant 종교개혁의 중심적인 신앙이 되었는데, 구원과 죄의 용서에 있어서 ‘오직 은혜’(sola gratia)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행위와 노력과 공로로 스스로를 영적으로 구원할 수 없다(요 1:12). 사도 바울은 구원을 인간의 성취가 아닌 선물이라고 에베소서 2장 8-9절에서 밝혔다.
Calvin도 인간의 구원에 역사하는 힘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인식하였다. 인간의 죄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받을 사람을 택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인간은 믿음으로 응답해야 한다. 그것이 Protestant 교회가 또 다른 명제 ‘오직 믿음’(sola fide)를 확증한 이유다. 그러나 인간의 그 믿음조차 구원에 필요한 구성요건은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협력이나 공동의 행위를 의미하는 능동적인 사고는 없었다.
Wesley 역시 에베소서 2장 8-9절을 언급하면서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믿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신다. 사람은 구원과 죄 용서를 받을만한 공로가 없다(롬 3:9). 그러나 Wesley는 은혜가 아직 효과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은혜는 인간 편에서 행하는 응답의 결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언제나 효과적이게 하고 성취하는 것으로 보았다. Wesley는 하나님에게 나와서 사람들에게 미리 주어지는, 후에 ‘선행은총’(Prevenient grace)으로 알려지는 ‘먼저 주어지는’(comes before) 은혜를 생각하였다. 그 은혜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을 이끌어내고, 유지하고, 완성시킨다. 그러므로 인간 편에서 구원을 위하여 행동하거나 보상으로 받을 만한 자격 등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vicarious)을 통해 제안한 구원의 초대에 대하여 인간은 수락이나 거부라는 두 가지 응답 중에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어야 한다. Wesley의 선행은총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Anglo Catholic tradition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수백 년 동안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 더 나아가 두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믿고 행했는지 살펴보겠다. 먼저 Calvin은 ‘하나님의 통치 법칙’(God’s sovereign rule)으로 사람들의 삶 속에 유효하게 효과적으로 일하신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영적인 조건에서 은혜를 더하거나 덜어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 인간을 구원하고, 일시적이든 영원하든 사람을 존귀하게 하신다.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에 사람의 믿음은 ‘오직 수동적’(merely passive) 일뿐이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도들은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소망의 유일한 근거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에 연결되어 자유롭고 의로운 존재가 될 때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칭의와 관련하여 믿음은 단순히 수동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의 부족을 채우시는 그리스도에게 의지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
비록 ‘회심’(Conversion)의 결과로 사람들이 선행(good works)을 베푼다 해도, 그것은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이 점에서 Calvin은 성서와 함께 Augustine의 입장에 서는 일관된 모습을 유지하면서 “오직 은혜만이 모든 선한 행실을 가져온다”(Grace alone brings about every good work)고 말했다.
더 나아가 Calvin은 Roman Catholic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Catholic Church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돕는 협조자로, 먼저 베풀어 주신 은혜가 작용하지 않게 하거나 아니면 순종함으로 작동하게 하는 것이 사람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은혜를 ‘협력하는 은혜’(assisting grace)로 부르건 ‘수용하는 은혜’(accepting grace)로 부르건 상관없다. Calvin은 인간에게 영적이고 영원한 삶을 향하여 갈 수 있는 진정한 능력이 없다고 믿었다. 그러한 일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고 보았다. 후에 Calvinists 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라고 설명하였다. 사실 Calvin은 ‘저항할 수 없는’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유효성을 이야기하였고, 하나님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유효하게 ‘실행하거나 성취하는’(carry out or accomplish) 방식에 대하여 말했다.
Calvin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자연적이거나 영적인 능력이 있다는 말은 형식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강요』에서 나오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을 바라보거나 시험하는 데 대해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은 없다”
Wesley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였다. 그는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선행적인 역할을 강조하였다. 선행은총은 Wesley가 자란 Church of England 안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개념이었다. 선행은총은 ‘먼저 주어지는’(comes before), 혹은 ‘선행하는 은혜’(preventing grace)로 알려졌는데, 사람들을 하나님의 인도하기 위하여 그들의 삶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행위’(universal work)를 의미했다. Wesley 당시에는 이 말이 ‘준비하다’(preparing) 혹은 ‘가능하게 하다’(making possible)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여러 차원과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이 거룩한 인도에 응답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성경과 관련해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는 방식과 과정은 ‘신비’(mystery)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성경에도 분명하게 남아 있다. 만일 사람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고 여겨진다면, 마찬가지로 구원에 대해서도 응답할 필요가 있다(막 16:16). 선행은총은 사람이 구원의 선물과 하나님이 주시는 다른 복들에 대하여 응답하거나 응답하지 않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구체적으로 구원의 문제와 관련하여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에서 Wesley는 선행은총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가장 큰 소망으로 삼고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것이 가장 높은 깨달음이 되며,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범하는 것을 일시적이지만 가장 먼저 느끼게 된다”라고 말했다.
반대로 Calvin은 오직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면서, 구원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즉각적인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행위를 통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인간의 입장에서 은혜를 보장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은 인간을 위한 구원의 수단이나 조건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없다. 구원을 얻겠다고 인간 편에서 할 수 있는 조건이나 사전 준비는 아무것도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선택이 무조건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Wesley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협력을 강조하는 관계성이 마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책임지는 것처럼, 어떻게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의 자연적인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Wesley가 거저 주시는 은혜를 기술한 이유이다. 물론 Calvin 은 당연히 Wesley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구원에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비록 은혜를 통할지라도, 인간에게 ‘조건부’(conditionality)를 허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능력과 위엄을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Wesley는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할 때 그들에게 진정한, 즉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아닌 역할 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 ‘준비된 영생의 선물’(gift of eternal life)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사랑하길 하나님이 바라신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이미 결정된 대로 움직이는 로봇, 즉 Humanoid Robot 같은 인간을 창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비록 하나님과 구원의 축복을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일정한 자유를 가진 인간을 창조하기 원하셨다(창 2:16-17). 이 같은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limitation of ability)가 아니라 ‘사랑의 표현’(Expression of love)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