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사람들의 감정을 깊이 자극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입에 게거품을 물고 열정적으로 논쟁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터넷은 죄성을 가진 인간들이 컴퓨터 뒤에 숨어서 심지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인신공격적인 언쟁을 일삼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사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보이는’(잠 17:28)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침묵하는 것이 더 유익을 얻을 때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동일하게 받은 은혜를 가지고 어떤 주제를 놓고 어떻게 토론해야 하는지를 배울 필요가 있다(롬 15:7, 엡 4:1-3). 

건설적인 신학적 대화의 한 가지 특징이 무엇인가?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결국 각자의 의견 차이가 무엇이며, 그런 차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대해 합의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만약 우리가 성경의 전적인 진실성을 긍정하는 데 동의하고 그러한 긍정이 모든 교리와 실천의 문제에 있어 절대적인 역할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다시 말해 신학적으로 ‘서로 물고 뜯고 싸우지 않는다면’(갈 5:15),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이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는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결국 더 강한 호소력을 행사할지도 모른다(요 13:35).  이 말의 의미를 알았으면 한다.    

사도 바울은 성경 두 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과 완성에 관해 언급한다.  먼저 빌립보서 1장 6절은 확신을 주는 말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 구절의 의미는 우리 안에서 구속이라는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통해 그 일을 이루실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때 그 일을 완수하실 것이다.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 시작되었다(엡 1:13-1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완성을 보장하신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3절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거기에는 살벌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바울은 선물을 받은 후 그것을 다시 얻으려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철저히 모순인지 설명하려고 성령을 통한 이러한 체험들에 호소하고 있다.  그는 갈라디아의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짓을 시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전통에 대한 종속과 맞바꾸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성령을 할례와 유대인의 음식 규례와 어떻게 맞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시작했던 자들이 다시 육체로 돌아가는 것, 즉 ‘완성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이 보증이 실패하는  이유는 이 보증 자체 때문인가, 아니면 이 보증을 받은 자의 실패 때문인가?  여기엔 분명히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과정이 들어 있다. 

우리는 바울에게 있어 ‘구원’은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는 것 같다.  사실 바울은 ‘구원’이라는 단어 자체를 그 과정의 최종 결과를 가리키는 데 사용하고(롬 13:11, 살전 5:8-9), ‘구원하다’라는 동사의 미래시제는 아직 소망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롬 5:9-10, 10:9, 13, 11:26, 고전 3:15, 5:5).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전형적인 의미에서 ‘구원받은 과정에 있는 자’다(고전 1:18, 15:2, 고후 2:15).  그런데 문제는 ‘이미’(Already) 시작된 것과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이 두 시제가 바울의 사고에서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시작이 완성을 보장한다는 말인가?  빌립보서 1장 6절을 읽어보면 그렇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자기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동사 시제는 바울이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역을 통해 빌립보 신자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그날까지 여전히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3절을 읽어보면 훨씬 더 조심스럽게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계속 믿음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질문은 구원의 과정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의 또 다른 측면을 검토하게 만든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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