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5.05.25 행위의 필요성
  2. 2025.05.17 순종의 필요성
  3. 2025.05.10 심판과 행위 1
  4. 2025.05.03 심판과 칭의

야고보는 선한 행위가 칭의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물론 야고보서를 다소 무시하는 신학자들이 있기는 하다.  어떤 이들은 야고보서의 ‘의롭게 하다’(디카이오오)와 ‘구원하다’(소조)라는 단어가 구원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야고보의 가르침을 과소평가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정해진 신학적 틀에 억지로 끼어 맞추려는 시도로서 거부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이런 해석은 나머지 신약성서와 더불어 이 본문의 가장 자연스러운 의미와 잘 부합되지 않는 의미를 이 단어에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야고보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지나치게 읽어내려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선한 행위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동시에 완전함과 혼동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야고보서 3장 2절에서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라는 야고보의 말은 주목해야 한다.  그는 자기 자신도 죄를 범한 자의 범주에 포함시킨다(‘우리가 다’).  그는 우리가 다 ‘다양한 방식으로’ 죄를 범하기 때문에 신자들이 죄를 짓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실은 선한 행위가 칭의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약화시키지는 않지만, 우리로 하여금 선한 행위가 완전함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만든다. 

우리가 상습적으로 죄를 범한다고 할지라도 신자의 삶의 태도와 방향은 반드시 의를 지향해야 한다.  우리는 최종적 칭의에 있어 선한 행위의 역할을 정확히 파악하고 신약성서에 나타난 긴장 관계를 균형 있는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선한 행위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완벽주의에도 빠지지 않기 위함이다.

야고보서 2장 12-13절 역시 중요하다.  신자들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들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마 18:21-35).  또한  최후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야고보는 심판이 임하면 하나님의 긍휼히 신자들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자신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나 자신들의 행위에 기초하여 구원을 요구할 만한 자격을 부여하지 못한다.  구원을 얻기 위한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긍휼뿐이다(롬 9:15).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긍휼히 필요하다는 사실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아무도 없다는 바울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갈 2:16).  

야고보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바울만큼 강조하지는 않지만, 야고보서를 면밀히 살펴보면 야고보 역시 선한 행위가 칭의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거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신자들은 심판날에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여전히 사람은 행위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만약 행위가 칭의의 기초가 아니라면 우리는 행위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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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선한 행위가 최종적인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견해가 복음이 가져다주는 은혜를 부인한다며 우려를 표명한다, 하지만 결코 우리는 바울보다 더 바울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디도서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은 자신의 말이 은혜의 복음과 대립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딛 2:11-12).  

회심 때 받은 은혜는 일상의 삶과 행동과 동떨어진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 인격을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그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를 받는다.  물론 우리가 지나치게 실현된 종말론을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로마서 7장 14-25절에 묘사하고 있는 것을 여전히 부분적으로 경험한다.  변화는 완전함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신자들은 아직도 여전히 육과 싸움을 계속해 나간다(갈 5:13-6:10).  신자들은 더 이상 죄의 종은 아니지만(롬 6장), 죄와의 싸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갈 5:17).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그날까지 여전히 완전함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죄와의 싸움을 계속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빌 3:12-16).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흔히 우리가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의 삶’이나 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 하나님께 맡기라’(Let go and Let God)는 수동적인 사고방식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쟁이다(엡 6:10-19, 고전 9:26, 고후 10:4, 딤전 1:18, 6:12, 딤후 4:7).  이 과정은 실패하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따라서 너무 낙관적이거나 비판적인 사고는 위험하다.

순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주목할만한 본문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바로 빌립보서 2장 12-13절 말씀이다.  이 구절에서 동사 ‘이루다’는 행하다, 하다, 성취하다를 의미한다(롬 1:27, 2:9, 7:8, 15:18, 고전 5:3, 고후 5:5, 엡 6:13).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는 ‘복종하다’라는 동사와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가히 놀랍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순종’하고 ‘행해야’ 한다.  순종이나 선한 행위 없이는 결코 구원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신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진술 때문에 바울이 혹시 은혜의 복음을 망각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런 생각을 잠재울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자신의 의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율법에 대한 순종이 낳은 의는 자신을 결코 구원하지 못한다(빌 3:9).  오히려 바울 자신의 의는 믿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다(약 1:17).  

여기엔 스스로에게서 난 의가 설 자리가 없다.  우리의 선함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생각도 결코 설 자리가 없다.  빌리보서 2장 13절 말씀이 2장 12절 말씀 직후에 이어진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 순종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결과(고전 15:9) 일뿐, 결코 인간의 고결한 성품이나 미덕의 결과로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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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행위

최후의 심판 2025. 5. 10. 10:27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는 행위에 의한 칭의를 부인하지만(갈 3:10), 또 다른 본문에서는 우리가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  먼저 로마서 2장에 기록된 바울의 행위에 관한 가르침은 놀랍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바울이 행위로는 의롭게 될 자가 아무도 없다고 주장하는 로마서 1장 18-3장 20절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마서 2장 6절에서 바울은 로마서 2장 6-11절 전체에 대한 논제, 즉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주장을 펼친다.  7-10절은 이 진술의 의미를 교차대구구조로 풀어낸다.  여기서 바울은 분명히 영생과 전혀 무관한 ‘상’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다시 말해 7절은 ‘영생’이 사람의 행함에 따라 좌우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순종의 행위가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로마서 2장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바울 서신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공통 주제이지만(고후 11:15, 엡 2:11, 딤후 2:21, 4:14, 딛 1:16, 3:8, 14),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갈라디아서에만 집중할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갈라디아서는 특별히 은혜의 복음을 다룬다.  바울은 ‘의’ 및 ‘성령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것임을 강조한다(갈 2:16, 3:2, 5, 10).  하지만 바울의 은혜에 대한 강조가 선한 행위의 중요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딛 2:11)는 선한 행위의 토대이자 기초이다(고전 15:10).  잘 알려진 표현을 의역하자면 오직 믿음은 믿음이 혼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갈 5:6).

따라서 신자들은 성령을 따라 행하고(갈 5:16),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갈 5:18), 성령으로 살며(갈 5:25), 성령의 위하여 심고(갈 6:8), 이로 말미암아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갈 5:22-23).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과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하지 않는 자는 종말론적 심판과 멸망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최종적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보다 더 확실한 진술은 없다(갈 5:19-21).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는 인간의 자율적 행위나 인간의 미덕에 의해 발생하는 행위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한 행위는 성령에 힘입어 이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이러한 행위가 영생에 필수적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성령을 위하여 심지 않는 자는 결코 영생을 경험하지 못한다.  즉, 육체의 일을 행하는 자는 천국에서 제외될 것이다(갈 6:8).

행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바울 자신이 선포하는 은혜의 복음을 악화시킨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바울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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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칭의는 율법의 행위로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 앞에 서기에 합당한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는 이 부분을 분명하게 밝힌다.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할례와 모세의 율법 준수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율법에 담긴 모든 것을 지켜야만 한다.  시내산 율법도 사람이 죄를 범하였을 때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는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여기에는 구속사적 논증도 들어 있다.  하지만 바울의 논증에 의하면 이러한 제사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히 10:1).  왜냐하면 이제는 그리스도가 오셔서 죄를 사하는 최종적인 제사를 단번에 드리셨기 때문이다(히 9:26).  따라서 이 저주를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갈 3:13).  만약 누군가 자신을 율법 아래 두고 구원을 위해 할례를 의존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밖에 없다(갈 5:2-4).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갈라디아서는 인간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의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온다(갈 3:11-12).  바울은 할례와 율법 아래서 살고자 하는 욕망을 철저히 반대한다(갈 4:21).  왜 이렇게 반대하는가?  율법은 죄를 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죄를 더 증가시키기 때문이다(롬 5:20).  다시 말해 율법 아래 사는 자들(갈 3:23, 4:4, 5, 21, 5:18)은 저주아래 있고(갈 3:10), 죄 아래 있으며(갈 3:22), 초등교사 아래 있고(갈 3:25),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서 종 노릇 하는 자들이다(갈 4:3).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의 칭의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얻는다(갈 3:8, 11, 24).  따라서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갈 3:13).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을 받았다(갈 1:14).  중간 지대란 없다.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얻지 않으면 율법을 통해 얻는다(갈 2:21).  칭의를 위해 율법의 길을 선택한 자들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십자가를 보는 눈을 상실한다(갈 3:1).

무엇보다도 할례에 의존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거리낌을 거부하는 것이다(갈 5:11).  왜냐하면 할례는 전적으로 인간의 행위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광이 하나님께 세세토록’(갈 1:5)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반면(갈 6:14), 바울의 적대자들은 자기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한다(갈 6:12-13).  요지가 무엇인가?  칭의는 결코 율법을 통해 얻을 수 없고, 행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행하지도 않을뿐더러 행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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