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5.06.21 구원 받지 못한 믿음
  2. 2025.06.14 계명을 지키는 자
  3. 2025.06.07 회개와 믿음
  4. 2025.06.01 칭의와 행함 1

신약성경 저자들은 한결같이 칭의와 구원은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행위가 칭의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선언한다.  특별히 바울은 이 두 주제 즉,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동시에 행위는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모두 긍정한다는 사실을 더한다면, 이것이 하나의 모순으로 간주될 가능성은 더욱더 희박해진다.  왜냐하면 이 두 주제는 바울신학의 핵심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여러 서신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사고에 혼동을 일으킨 것일까?  

야고보를 비롯한 다른 신약 성경의 저자들 역시 칭의와 구원이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가르치면서도 또한 그들은 우리가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긍휼히 필요로 하며, 또 그 구원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이 문제는 여전히 어려운 난제로 남아 있다.  안타깝게도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 두 진술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들은 이 두 진리가 정확히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우리에게 설명해주지 않은 채 이 두 진리를 동시에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신학적 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먼저 이 견해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두 본문만을 여기서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 본문은 에베소서 2장 8-10절이다.  이 본문은 신자들이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다고 분명하고 단호하게 가르친다.  행위는 결코 구원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이며, 세상과 육체와 마귀에게 종노릇 하고,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엡 2:1-5).  그럼에도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새로운 피조물이다(엡 2:10).  그 결과 그들은 이제 선한 일을 한다.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자들은 이제 선한 일을 할 것이며, 또 선한 일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바울이 에베소서 2장 8-9절에서 한 말을 감안하면, 이 선한 행위는 구원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이 선한 행위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결과 또는 필연적 열매다.     

두 번째 본문은 야고보서 2장 14-26절 말씀이다.  우리는 야고보가 행위 자제가 본질적으로 사람을 의롭게 하거나 구원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야고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행위를 유발하지 못하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히 지적 수준에 그치는 ‘믿음’(약 2:19), 즉 상응하는 행위가 수반되지 않고 신학적 명제만을 수용하는 믿음은 결코 구원하거나 또는 의롭게 하지 못한다.  물론 구원하지 못하는 믿음도 존재한다.  하지만 야고보는  아브라함과 라합이 보여준 믿음과 같이 선한 행위를 유발하는 믿음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무튼 야고보는 행위가 칭의의 기초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진정한 믿음과 사실상 ‘죽고’, ‘헛된’, ‘지적’ 믿음을 서로 대비시키면서 진정한 믿음은 당연히 선한 행위로 표출되기 마련이라고 가르친다(약 2:17, 20, 26).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야고보의 가르침이 바울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바울 역시 ‘믿음의 순종’(롬 1:5, 16:26)과 ‘믿음의 역사’(살전 1:3)를 언급하면서 행위는 믿음의 결과라고 가르친다.  

더 나아가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도 믿음은 행함을 낳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친다.  왜냐하면 같은 구절에서 사랑에서 나오는 ‘수고’와 소망에 뿌리를 둔 ‘인내’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모든 소유격은 행동 또는 행위의 원천을 나타낸다.  바울도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행위가 최후의 심판에서 필수적이지만, 이 행위가 어디까지나 믿음의 열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를 의지하는 믿음의 결과라고 믿는다.  

따라서 신약 성서가 일관된 증거를 제시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행위는 칭의에 필수적이지만, 칭의나 구원의 기초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함을 요구하시고(마 5:48)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기 때문이다(롬 3:23).  그러므로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삶에 필수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증거 또는 열매다.  요약해서 말하면, 우리는 구원과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얻지만, 이 믿음은 언제나 행위를 유발하는 살아 있고 활력이 넘치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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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주에 이어 선한 행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다른 본문들을 조금 더 설명하겠다.  베드로전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공명정대하게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한다(벧전 1:17).  오직 선한 것을 추구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자만이 종말론적인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벧전 3:10-12).  베드로는 시편에서 이 땅에서의 삶을 언급하는 본문(시 34:12-14)을 인용하면서 이를 모형론적인 해석을 통해 종말론적인 삶에 적용한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구약성서를 인용하는 신약성서 저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장 5-11절에서도 신자들이 부지런히 실천에 옮겨야 할 경건의 덕목을 자세히 열거한다.  각 사람의 부르심과 택하심은 경건한 행위에 의해 확인되고 검증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덕을 실천하지 않는 이들은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벧전 1:11)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상과 관련이 있기보다는 누가 천국에 들어갈 것인지와 관련이 있다.  이것이 베드로후서가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거짓 선생들의 문제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고백했지만, 경건하지 못한 삶 때문에 종말론적 심판에 처해질 운명에 놓여 있었다(벧후 2:1-22, 유 1:4-23). 

더 나아가 요한일서도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저자는 독자들이 예수를 믿었고, 또 그를 그리스도로 시인했기  때문에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를 원한다(요일 2:21-23, 3:23, 4:2, 15, 5:11-13).  하지만 이러한 확신은 순종 없이는 불가능하다.  예수를 진정으로 아는 이들은 예수의 계명을 지킨다(요일 2:3-6).  수시로 죄를 짓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보지도 못했고 구원에 이를 만큼 알지도 못한다(요일 3:6).  요한이 죄를 짓는 이들은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의 말은 이보다 더 분명할 순 없다(요일 3:8).  

사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죄가 없는 자들이 아니라(요일 1:8), 죄의 특성이 지배하는 삶을 살지 않는 자들이다(요일 3:9, 5:18).  그들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라 살며 자신들의 의로운 삶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 임을 보여준다(요일 3:10).  다시 말해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요일 4:7-8).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예수를 믿는 자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사람의 결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임을 분명히 한다(요일 5:4-5).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은 신자들에게 이기고 승리할 것을 촉구한다(계 2:7, 11, 17,26, 3:5, 12, 12:11, 21:7).  이기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오직 이기는 자만이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며(계 2:7), 오직 이기는 자만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계 2:11).  만일 어떤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면, 그는 이기고 승리하고 끝까지 견딜 것이다(계 3:5).  따라서 이기는 자들은 최종적 유업을 차지하게 될 것이지만, 악을 따르고 살인, 거짓말, 음행 등을 추구하는 자들은 불 못에 던져지고 둘째 사망의 해를 입게 될 것이다(계 21:7-8).  오직 선을 행하는 자만이 최종적 유업을 받게 된다.

이렇게 요한은 계시록에서 신자들이 끝까지 인내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계 13:10).  짐승을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는 영원한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계 14:9-11).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에게는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 필요하다(계 14:12).  예수님도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셨다(마 24:13).  따라서 죽은 자들이 각자 행한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계 20:11-15)은 요한계시록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와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악을 행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는 반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구원을 받는다.  자신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이유가 그들이 선을 행했기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요한은 그럼에도 이 새 생명은 이를 갈망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며(약 1:17), 따라서 선한 행위는 생명에 대한 공로나 대가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엡 2:9, 딛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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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면 관계상 신약 성서의 나머지 부분을 상세히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신약 성서의 다른 책들을 간략하게나마 개관하더라도 선한 행위가 종말론적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선한 행위가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신약 성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며, 절대로 따로 고립된 주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7장 15-20절에 등장하는 거짓 예언자들은 그들의 삶에 나타나는 악한 열매를 통해 그 정체가 분간된다.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불에 던져지는데(마 7:19), 이는 곧 지옥에 던져진다는 의미다.  본문에 열매가 불에 던져진다고 말하기보다는 나무가 불에 던져진다고 말한다.  나무는 악을 행하는 사람의 표상이다.  거짓 예언자들은 단순히 상을 잃어버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저지른 악으로 인해 영생을 잃어버린다.

바로 이어지는 단락은 방금 우리가 옹호한 해석을 확인한다(마 7:21-23).  예수를 자신의 주님으로 고백한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눅 6:46).  사람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이적을 행하면서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 7:21).  당연히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 수 없다.  이는 예수가 그들을 향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등장하는 양과 염소 비유에서도 이와 동일한 주제가 나타난다.  이 본문의 핵심 주제는 누가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냐다(마 25:34).  동료 신자들에게 긍휼을 베풀고(45절) 선을 행하는 자들은 ‘영생’을 경험하지만(46절), 긍휼 베풀기를 거부한 자들은 ‘저주’를 받고 ‘마귀와 그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41절), 그 결과 그들은 ‘영벌’에 처해질 것이다(46절).  여기서 선한 행위가 최후의 상을 받는데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예수가 하신 말씀과도 일치한다.  그는 재림하실 때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다(마 16:27).

이러한 해석은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말씀과도 잘 조화를 이룬다.  예수 안에 거하지 않는 자들은 ‘밖에 버려져 말라버린’ 가지와도 같다(6절).  이런 가지는 ‘불에 던져 사른다’.  학자들은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놓고 논쟁을 벌이지만, 포도나무에서 잘린다는 것은 거의 확실히 예수 자신에게서 잘려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불사른다는 것이 최후의 심판을 가리킨다는 것이다(마 13:40-42).  예수 안에 계속 거하지 않는 자들은 심판 날에 멸망을 당할 것이다.  

여기서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요한복음 15장 10절 말씀과 연결시킨다면 예수의 명령과 아버지의 명령을 지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예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분이 명하신 것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의 제자들은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본문은 그들이 ‘열매를 많이 맺는다’라고 말한다(요 15:8).  여기엔 사람이 예수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열매를 맺지 않는 이들은 포도나무에서 잘릴 것이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의 필요성은 사도행전에서도 발견된다.  예수의 관한 복음을 선포한 이들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 믿음을 촉구했다(행 16:31).  또한 그들은 동시에 전혀 모순이 된다는 생각 없이 사람들에게 새 생명과 죄 사함을 받기 위해  회개하고 주께 돌아올 것을 촉구했다(행 2:38, 3:19, 5:31, 11:18, 17:30).  

사실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에 항상 서로 동행한다(행 20:21).  회개의 진정성은 신자들이 ‘회개의 합당한 일’을 행할 때 비로소 제대로 드러낸다(행 26:20).  예수 그리스도의 관한 복음을 믿는 것,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 회개의 외적 표현으로서 선한 행위를 행하는 것 등은 사도행전에서 마치 거미줄처럼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사람이 진정한 삶의 변화가 없이도 회개할 수 있다는 사고는 누가로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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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학자들은 야고보가 예수의 말씀에 상당히 의존한다는 데 동의한다.  예수는 마태복음 12장 37절에서 인간은 자신이 하는 말로 ‘의롭다 함을 받거나’(디카이오테세) ‘정죄함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여기서 사용된 미래 시제는 확실히 심판의 날(마 12:26), 즉 인간이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평가를 받게 될 때를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 우리의 논점은 바로 이것이다.  즉 예수가 우리가 한 말에 따라 이루어질 미래의 우리의 칭의에 대해 언급하신 것처럼, 야고보도 우리가 행한 행위에 따라 이루어질 미래의 칭의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바울의 가르침(롬 3:28)을 거부하지 않는다.  물론 이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하다.  먼저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거부한다.  선한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자(약 2:17, 26), ‘헛된’ 믿음이다.  즉 상응하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약 2:14).  이런 믿음이 지닌 결함은 무엇일까?  이러한 믿음은 활력과 생명력과 에너지가 결여되어 있다.  개념적으로나 교리적으로 무언가 동의하는 것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믿으면서도 귀신보다 못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약 2:19).

우리는 이것을 두 종류의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원하는 믿음은 살아 있고 능동적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배고픈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힌다(약 2:15-16).  구원하는 믿음은 그 믿음에서 나오는 행함으로 그 믿음의 실재를 입증한다(약 2:18).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해진다’(약 2:22).  오직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지만 결코 믿음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약 2:24).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Timo Laato의 말을 인용하면 ‘선한 행위는 향후 믿음의 생동성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행위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실로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를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약 2:1). 

따라서 우리가 믿을 때 우리의 것이 된 칭의는 우리의 최종적 영화를 보증하며, 이를 통해 신자들은 자신들이 믿을 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롬 8:30).  바울서신과 야고보서에서 모두 믿음과 행위는 절대 불가분 한 것이다.  믿음과 행위는 논리적으로는 분리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행함으로 얻는 칭의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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