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저자들은 한결같이 칭의와 구원은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행위가 칭의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선언한다. 특별히 바울은 이 두 주제 즉,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동시에 행위는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모두 긍정한다는 사실을 더한다면, 이것이 하나의 모순으로 간주될 가능성은 더욱더 희박해진다. 왜냐하면 이 두 주제는 바울신학의 핵심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여러 서신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사고에 혼동을 일으킨 것일까?
야고보를 비롯한 다른 신약 성경의 저자들 역시 칭의와 구원이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가르치면서도 또한 그들은 우리가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긍휼히 필요로 하며, 또 그 구원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이 문제는 여전히 어려운 난제로 남아 있다. 안타깝게도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 두 진술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들은 이 두 진리가 정확히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우리에게 설명해주지 않은 채 이 두 진리를 동시에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신학적 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먼저 이 견해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두 본문만을 여기서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 본문은 에베소서 2장 8-10절이다. 이 본문은 신자들이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다고 분명하고 단호하게 가르친다. 행위는 결코 구원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이며, 세상과 육체와 마귀에게 종노릇 하고,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엡 2:1-5). 그럼에도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새로운 피조물이다(엡 2:10). 그 결과 그들은 이제 선한 일을 한다.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자들은 이제 선한 일을 할 것이며, 또 선한 일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바울이 에베소서 2장 8-9절에서 한 말을 감안하면, 이 선한 행위는 구원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이 선한 행위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결과 또는 필연적 열매다.
두 번째 본문은 야고보서 2장 14-26절 말씀이다. 우리는 야고보가 행위 자제가 본질적으로 사람을 의롭게 하거나 구원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야고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행위를 유발하지 못하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히 지적 수준에 그치는 ‘믿음’(약 2:19), 즉 상응하는 행위가 수반되지 않고 신학적 명제만을 수용하는 믿음은 결코 구원하거나 또는 의롭게 하지 못한다. 물론 구원하지 못하는 믿음도 존재한다. 하지만 야고보는 아브라함과 라합이 보여준 믿음과 같이 선한 행위를 유발하는 믿음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무튼 야고보는 행위가 칭의의 기초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진정한 믿음과 사실상 ‘죽고’, ‘헛된’, ‘지적’ 믿음을 서로 대비시키면서 진정한 믿음은 당연히 선한 행위로 표출되기 마련이라고 가르친다(약 2:17, 20, 26).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야고보의 가르침이 바울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바울 역시 ‘믿음의 순종’(롬 1:5, 16:26)과 ‘믿음의 역사’(살전 1:3)를 언급하면서 행위는 믿음의 결과라고 가르친다.
더 나아가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도 믿음은 행함을 낳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친다. 왜냐하면 같은 구절에서 사랑에서 나오는 ‘수고’와 소망에 뿌리를 둔 ‘인내’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모든 소유격은 행동 또는 행위의 원천을 나타낸다. 바울도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행위가 최후의 심판에서 필수적이지만, 이 행위가 어디까지나 믿음의 열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를 의지하는 믿음의 결과라고 믿는다.
따라서 신약 성서가 일관된 증거를 제시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행위는 칭의에 필수적이지만, 칭의나 구원의 기초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함을 요구하시고(마 5:48)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기 때문이다(롬 3:23). 그러므로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삶에 필수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증거 또는 열매다. 요약해서 말하면, 우리는 구원과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얻지만, 이 믿음은 언제나 행위를 유발하는 살아 있고 활력이 넘치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