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운 거룩한 감정들은 그리스도인의 행위로 드러나고 열매를 맺힌다.
거룩한 감정들은 그 감정들을 경험하는 주체인 성도에게 영향력과 효력을 미치게 되며,
그 결과로 기독교의 원리와 전체적으로 일치하고,
그 원리에 따라 규정되는 행위는
성도가 일생동안 실천하고 마땅히 행해야 한다.
믿음의 신실성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데 있다.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실제로 그렇게 요구받을 때에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사악한 삶을 살면서도 또는 그들의 행위로는 전적인 거룩함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서도 신실함 마음이 있는 척하는 것은 극도로 터무니없고 심지어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사실은 그런 사람들이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이런 명백한 사실과 맞서 논쟁을 벌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죄의 길을 따라 살면서도 자신들이 천국에 갈 것이라고 자랑하거나 거룩한 삶과 실천이 없이도 죽은 뒤에 성도들과 같이 상을 받을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자신들의 심판자를 바보로 만들 수 있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한 실천은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에 자기가 받은 은혜가 참된 은혜임을 보여 주는 최고의 증거라는 주장은 실천할 때 은혜가 온전해지고 완성된다는 성경 말씀과 일치한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서 온전케 된다(요일 2:4-5).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할 때 사도가 특별히 언급하는 그리스도의 계명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가장 큰 계명인 행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만큼 참된 은혜의 표지로서 자주 그리고 분명하게 언급되는 감정적 미덕이나 성향은 없다. 하지만 성경은 이 사랑은 행함으로 또는 사랑의 행위로 행사되고 표현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밝힌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믿음의 큰 증거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를 향하여 느끼는 내면적인 감정의 작용이라기보다는 영혼이 십계명의 두 번째 돌 판에 새겨진 모든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실천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 양심에도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신실함을 보여주는 모든 표지 가운데서 가장 주된 것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해주는 또 다른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실천이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사용될 큰 증거라는 점이다. 이 기준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될 것이고,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의 영적상태가 분명해질 것이다. 장차 하나님께서 영원한 보응을 위해 사람을 심판하실 때 사람의 영적상태를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서 헤아려 보고 판단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이고 선포적으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심판의 결과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속으로만 판단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심판이 더 의롭다는 것을 사람들의 양심과 세상에 밝히 드러내실 것이다. 그래서 최후 대심판의 날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이라고 불린다(롬 2:5).
거룩한 실천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하는 근거가 된다거나
그것이 가치 있고 탁월하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율법적이다.
그러나 거룩한 실천이 믿음을 입증하는 합당한 증거로서
믿는 이의 신실함을 증명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율법적이지 않다.
'신앙감정론 > 뚜렷이 구별해 주는 표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을 향한 갈망 (0) | 2016.12.01 |
---|---|
신앙의 균형 (0) | 2016.07.14 |
하나님을 두려워함 (0) | 2016.01.06 |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감 (0) | 2015.09.30 |
성품의 변화 (0) | 2015.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