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여러 신앙 감정을 동시에 체험했다는 사실은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데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도 모조품이 있다. 바로, 사울, 아합,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에도 가짜가 있다(출 9:27, 삼상 24:16, 26:21, 왕상 21:27, 민 14:39-40). 여호와를 경외하면서도 동시에 우상들을 섬겼던 사마리아인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도 모조품이 있다(왕하 17:32-33). 시편66편 3절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 때문에 원수들도 그께 굴복하지만 그런 경외와 굴복은 가짜다. 홍해에서 하나님께 찬송을 불렀던 이스라엘 자손들과 문둥병이 치료되는 기적을 체험한 앗수르의 나아만처럼 그분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에서도 모조품이 있다. 돌발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마 13:20),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처럼(요 5:35), 영적인 기쁨에도 모조품이 있다. 예후와(왕하 10:16), 회심하기 전의 바울과(갈 1:14, 빌 3:5), 믿지 않는 유대인들처럼(행 22:3, 롬 10;2), 열심에도 가짜가 있다.
일반적으로 거짓된 감정이 높이 고양될 때 다른 많은 거짓된 감정들도 함께 체험하는 것 같다. 나사로를 기적으로 다시 일으키신 후에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를 맞이한 다수의 군중들은 동시에 아주 많이 신앙심으로 감동된 것 같다. 그들의 마음은 찬탄으로 가득한 것 같았고 또한 그리스도가 밟고 가시는 길에 옷을 깔면서 까지 큰 경외심과 사랑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크고 선한 일을 크게 감사하며 큰 목소리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찬양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곧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믿고 하나님 나라를 진지하게 열망했으며 그 나라를 크게 소망하고 많이 기대하면서 그 나라가 곧 나타날 것을 고대했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은 소망으로 가득 찼고 그들의 외치는 소리는 크게 고조되어 온 예루살렘이 그들의 소동 소리로 가득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내 아들아 기뻐하라 너의 죄가 사람을 받았느니라”고 말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을 때 이전에 그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적도 없고 그분께 자신의 마음을 드린 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이 말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 그 사람의 마음에 아주 다양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또는 연이어서 생겨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 결과 이제 그 사람의 마음은 경탄과 감사로 가득 차게 되고 그는 입을 열어 그가 체험한 것을 늘어놓게 된다. 동시에 자신이 체험한 것들을 경시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격렬한 반감을 가지게 되며 노골적으로 그들과 자신을 분리시키면서 마치 자신의 편에 속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듯 행동한다. 이런 사람은 인간의 본성을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초자연적으로 간섭하지 않으면 이런 일들이 그런 방식으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에게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참됨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사랑의 모조품에서 다른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양자의 경우 모두 사랑은 감정의 원천이며
다른 감정들은 그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다.
'신앙감정론 >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는 표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교적 행위와 의무의 피상적 실천 (0) | 2013.12.11 |
---|---|
감정의 체험 순서 (0) | 2013.10.30 |
사랑의 피상적 표현 (0) | 2013.08.08 |
성경이 갑자기 떠오름 (0) | 2013.06.26 |
감정의 자가 생산 여부 (0) | 2013.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