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감정이 매우 크게 발휘되거나 아주 높이 고양되는 것 자체는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성경은 종종 우리가 매우 높이 고양된 감정들을 품도록 요구한다. 그래서 율법의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마치 말로는 그 정도를 표현하기 부족한 듯이 반복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런 말씀도 있다. ‘의인을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시 68:3). 같은 시편에서 성도들은 종종 ‘즐거운 소리로 외칠지어다’ 라고 요구받으며 누가복음 6장23절은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신다. 최고로 완벽한 경건을 소요하고 있는 천국의 성도들과 천사들 역시 그들이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사역을 보고 묵상할 때 감정적으로 크게 감화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신앙 감정이 단지 크게 고양되었다는 사실은 그 감정들이 반드시 영적이고 은혜로 말미암았을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영적인 일들을 판단할 때 확실하고도 무오한 기준인 성경은 매우 높이 고양되기 했지만 영적이지도 않고 구원에 이르게 하지도 못하는 신앙 감정이 있음을 분병하게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의 감정이 크게 고조되었지만 그것들이 결국에는 헛것이었으며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말씀한다(갈 4:11). 이스라엘 자손들도 홍해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 때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 크게 감화되어 그분을 찬송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잊어버렸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내시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큰 감화를 받은 무리는 그분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극도로 그리스도를 높이면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사도 요한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렇게 야단법석을 떤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보고 감동을 받은 까닭이었다(요 12:18). 하지만 그리스도께는 당시에 참된 제자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빨리 이 야단법석이 끝이 나 버렸던가? 그리고 이전처럼 예수님을 향한 무리들이 크게 외쳤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외침이었다. “호산나, 호산나”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이었다.
신앙 감정이 매우 높게 고양된다 할지라도
참된 신앙과 완전히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정통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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