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각성과 죄에 대한 깨달음이 있은 후에
어떤 일정한 순서를 따라 위로와 기쁨이 뒤따른다는 사실로는
그 감정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매우 두 가지 다른 상태에 있게 된다. 처음에는 정죄의 상태이고 다음에는 칭의와 축복의 상태다. 사람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지성과 이성에 맞게 다루신다. 그래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감각적으로 자각할 수 있도록 이 두 상태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일치하며 또한 합당한 듯하다. 먼저 그들은 정죄의 상태 속에 있는 자신들을 감각적으로 체험하여 자신들이 심각한 재난과 두려운 비참함 속에 있다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 이어서 그들은 구원과 행복의 상태를 체험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먼저 그들이 처해 있는 절대적으로 극심한 빈곤의 상태를 체험하고 나서 그리스도의 충분성과 그리스도를 통해 다가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시기 전에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시는 것이 사람을 다루는 하나님의 방식이다(출 2:23, 5:19, 신 8:2, 16, 눅 8:43-44, 마 15:26, 고후 1:8-10).
하나님께서 옛 성도들에게 자신을 특별히 나타내신 사건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분께서 일반적으로 먼저 자신을 두려운 분으로 나타내신 후에 위로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아브라함(창 15:12-13), 모세(출 3:7), 엘리야(왕상 19장), 다니엘(단 10장), 사도 요한((계 1장)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교회를 다루시는 것처럼 성도 개개인을 두려운 천둥과 번개 속에서 율법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교회를 몽학 선생 아래 두어서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시온 산에서 나오는 기쁨 복음의 소리로 교회를 위로하시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의 죄와 비참에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전에 그들의 크고 두려운 죄악과 그것 때문에 자신들이 비참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방식이라면 사람들에게 종종 마음에 큰 고통과 근심이 생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하다(행 2:38, 16:30).
다른 한편으로는 위로와 기쁨이 큰 공포와 지옥에 대한 놀라운 두려움에 뒤이어 왔다는 것이 반드시 그 위로와 기쁨이 바른 것이라는 증거는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양심의 죄를 자각할 때 종종 공포감이 뒤따르기는 하지만 죄는 공포감을 느꼈다고 깨닫는 것이 아니며 공포감은 종종 다른 원인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성령이 죄를 깨닫게 하고 각성케 하셔서 큰 두려움을 느꼈다 하더라도 그들의 두려움이 반드시 참된 위로를 낳을 것이라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이 사실은 거짓 겸비함과 거짓된 굴복과 가짜 위로가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충분히 입증된다. 사울은 비록 위대한 왕이었지만 이 교만한 왕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그가 미워했던 신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서도(삼상 24:16, 26:21), 여전히 계속해서 그에게 원수로 행했다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각하고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여전히 하나님께 원수로 남아 있으며 끝까지 계속 그렇게 남을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한다.
경험상 우리는 최고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과 그리스도인들의 회심 과정에서
성령을 헤아릴 수 없고 추적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령이 영혼 안에서 일하시는 단계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께 맡겨 두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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