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밖으로 표현한 감정이 참된 성도들의 마음에 들고
호응을 얻을 만큼 크게 감화력이 있고 기쁨을 준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신앙 감정의 본질이 어떠한지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개연적인 신앙의 모습을 발견할 때 그들을 예수 안에 있는 형제로서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사람들의 사랑을 얻고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주 아름답고 밝아 보일 때에는 제일 수준 높은 사람들도 속을 수 있다. 확실하게 신앙을 고백하여 탁월한 성도라고 인정받던 사람들이 신앙에서 떨어져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흔하게 일어난다. 이들은 많은 신앙 감정을 함께 경험할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사랑과 매우 비슷한 감정을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형제들에 대한 일종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고 죄에 대한 슬픔과 신앙과 영혼을 유익하는데 열정적으로 관심을 보일 수도 있으며 엄청나게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입으로 아주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하게 입증된 것은 이런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곳에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이 사단의 속임수와 사람의 사악하고 기만적인 심령과 섞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성령을 부으시는 때에 신앙을 고백하던 사람들을 봄에 핀 꽃들에 비유할 수 있다. 나무에는 수많은 꽃들이 피어 있고 그들은 모두 아름답고 탐스러운 과실을 맺을 것 같았다 잠시 있다가 시들어서 떨어져 나무 밑에서 썩을 꽃들도 대부분은 잠시 동안 다른 것들과 같이 아름답고 화려하게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향기로운 냄새를 낸다. 그래서 여름 태양으로 익은 열매가 될 꽃들과 말라서 비틀어질 꽃들을 눈으로는 구별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회심자들이 믿음을 이야기할 때 아름다워 보이고 매우 향기나 보일 수 있으며 성도들은 그들이 감동적으로 이야기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끝나버릴 수도 있다.
그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성이나 성경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닐뿐더러 반성경적이고 성경의 말씀들과 정반대가 된다. 성경은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그렇게 판단하라는 말은 단 한마디로 하지 않고 주로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열매들로 판단하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그 사람의 영적상태를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다른 사람들의 영적상태를 우리는 알 수 없다고 명백하게 가르치는 성경에 배치되는 것이다(계 2:17). 로마서 2장29절은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말씀한다. 마지막 구절에서 사람이 내면적 유대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때 사람의 무능력을 지적하고 결정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일임을 보여준다(고전 4:5).
참된 성도들에게는 누가 참되게 믿는 자들이고 누가 아닌지를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는 영이 없다.
성경은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불확실하며 속기 쉬운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한다(삼상 16:7, 사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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