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지면 관계상 신약 성서의 나머지 부분을 상세히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신약 성서의 다른 책들을 간략하게나마 개관하더라도 선한 행위가 종말론적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선한 행위가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신약 성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며, 절대로 따로 고립된 주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7장 15-20절에 등장하는 거짓 예언자들은 그들의 삶에 나타나는 악한 열매를 통해 그 정체가 분간된다.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불에 던져지는데(마 7:19), 이는 곧 지옥에 던져진다는 의미다. 본문에 열매가 불에 던져진다고 말하기보다는 나무가 불에 던져진다고 말한다. 나무는 악을 행하는 사람의 표상이다. 거짓 예언자들은 단순히 상을 잃어버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저지른 악으로 인해 영생을 잃어버린다.
바로 이어지는 단락은 방금 우리가 옹호한 해석을 확인한다(마 7:21-23). 예수를 자신의 주님으로 고백한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눅 6:46). 사람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이적을 행하면서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 7:21). 당연히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 수 없다. 이는 예수가 그들을 향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등장하는 양과 염소 비유에서도 이와 동일한 주제가 나타난다. 이 본문의 핵심 주제는 누가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냐다(마 25:34). 동료 신자들에게 긍휼을 베풀고(45절) 선을 행하는 자들은 ‘영생’을 경험하지만(46절), 긍휼 베풀기를 거부한 자들은 ‘저주’를 받고 ‘마귀와 그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41절), 그 결과 그들은 ‘영벌’에 처해질 것이다(46절). 여기서 선한 행위가 최후의 상을 받는데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예수가 하신 말씀과도 일치한다. 그는 재림하실 때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다(마 16:27).
이러한 해석은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말씀과도 잘 조화를 이룬다. 예수 안에 거하지 않는 자들은 ‘밖에 버려져 말라버린’ 가지와도 같다(6절). 이런 가지는 ‘불에 던져 사른다’. 학자들은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놓고 논쟁을 벌이지만, 포도나무에서 잘린다는 것은 거의 확실히 예수 자신에게서 잘려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불사른다는 것이 최후의 심판을 가리킨다는 것이다(마 13:40-42). 예수 안에 계속 거하지 않는 자들은 심판 날에 멸망을 당할 것이다.
여기서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요한복음 15장 10절 말씀과 연결시킨다면 예수의 명령과 아버지의 명령을 지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예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분이 명하신 것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의 제자들은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본문은 그들이 ‘열매를 많이 맺는다’라고 말한다(요 15:8). 여기엔 사람이 예수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열매를 맺지 않는 이들은 포도나무에서 잘릴 것이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의 필요성은 사도행전에서도 발견된다. 예수의 관한 복음을 선포한 이들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 믿음을 촉구했다(행 16:31). 또한 그들은 동시에 전혀 모순이 된다는 생각 없이 사람들에게 새 생명과 죄 사함을 받기 위해 회개하고 주께 돌아올 것을 촉구했다(행 2:38, 3:19, 5:31, 11:18, 17:30).
사실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에 항상 서로 동행한다(행 20:21). 회개의 진정성은 신자들이 ‘회개의 합당한 일’을 행할 때 비로소 제대로 드러낸다(행 26:20). 예수 그리스도의 관한 복음을 믿는 것,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 회개의 외적 표현으로서 선한 행위를 행하는 것 등은 사도행전에서 마치 거미줄처럼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사람이 진정한 삶의 변화가 없이도 회개할 수 있다는 사고는 누가로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