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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6.07 회개와 믿음
  2. 2025.06.01 칭의와 행함 1
  3. 2025.05.25 행위의 필요성
  4. 2025.05.17 순종의 필요성
  5. 2025.05.10 심판과 행위 1
  6. 2025.05.03 심판과 칭의
  7. 2025.04.19 Wright의 반격
  8. 2025.03.29 Piper의 불만 1
  9. 2025.03.22 믿음과 행위의 관계
  10. 2025.03.15 행위에 따른 심판
  11. 2025.03.08 행위에 의한 칭의
  12. 2025.03.01 신자들이 받을 심판 1
  13. 2025.02.22 심판 받을 자
  14. 2025.02.13 하나님의 심판 1
  15. 2025.02.09 시작과 완성
  16. 2024.12.15 위기에 처했을 때
  17. 2024.12.01 Gyeongju
  18. 2024.11.24 Minato
  19. 2024.11.16 Tokyo
  20. 2024.11.03 선행은총 1
  21. 2024.10.27 은혜의 수단 3
  22. 2024.10.06 하나님의 은혜
  23. 2024.09.22 속죄의 범위 11
  24. 2024.09.08 하나님의 사랑 2
  25. 2024.09.01 하나님의 통치 1
  26. 2024.08.24 Las Vegas
  27. 2024.08.18 Antelope Canyon
  28. 2024.08.10 Grand Circle
  29. 2024.08.04 웨슬리와 사역
  30. 2024.07.21 칼빈과 사역 1

사실 지면 관계상 신약 성서의 나머지 부분을 상세히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신약 성서의 다른 책들을 간략하게나마 개관하더라도 선한 행위가 종말론적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선한 행위가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신약 성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며, 절대로 따로 고립된 주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7장 15-20절에 등장하는 거짓 예언자들은 그들의 삶에 나타나는 악한 열매를 통해 그 정체가 분간된다.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불에 던져지는데(마 7:19), 이는 곧 지옥에 던져진다는 의미다.  본문에 열매가 불에 던져진다고 말하기보다는 나무가 불에 던져진다고 말한다.  나무는 악을 행하는 사람의 표상이다.  거짓 예언자들은 단순히 상을 잃어버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저지른 악으로 인해 영생을 잃어버린다.

바로 이어지는 단락은 방금 우리가 옹호한 해석을 확인한다(마 7:21-23).  예수를 자신의 주님으로 고백한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눅 6:46).  사람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이적을 행하면서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 7:21).  당연히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 수 없다.  이는 예수가 그들을 향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등장하는 양과 염소 비유에서도 이와 동일한 주제가 나타난다.  이 본문의 핵심 주제는 누가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냐다(마 25:34).  동료 신자들에게 긍휼을 베풀고(45절) 선을 행하는 자들은 ‘영생’을 경험하지만(46절), 긍휼 베풀기를 거부한 자들은 ‘저주’를 받고 ‘마귀와 그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41절), 그 결과 그들은 ‘영벌’에 처해질 것이다(46절).  여기서 선한 행위가 최후의 상을 받는데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예수가 하신 말씀과도 일치한다.  그는 재림하실 때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다(마 16:27).

이러한 해석은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말씀과도 잘 조화를 이룬다.  예수 안에 거하지 않는 자들은 ‘밖에 버려져 말라버린’ 가지와도 같다(6절).  이런 가지는 ‘불에 던져 사른다’.  학자들은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놓고 논쟁을 벌이지만, 포도나무에서 잘린다는 것은 거의 확실히 예수 자신에게서 잘려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불사른다는 것이 최후의 심판을 가리킨다는 것이다(마 13:40-42).  예수 안에 계속 거하지 않는 자들은 심판 날에 멸망을 당할 것이다.  

여기서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요한복음 15장 10절 말씀과 연결시킨다면 예수의 명령과 아버지의 명령을 지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예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분이 명하신 것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의 제자들은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본문은 그들이 ‘열매를 많이 맺는다’라고 말한다(요 15:8).  여기엔 사람이 예수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열매를 맺지 않는 이들은 포도나무에서 잘릴 것이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의 필요성은 사도행전에서도 발견된다.  예수의 관한 복음을 선포한 이들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 믿음을 촉구했다(행 16:31).  또한 그들은 동시에 전혀 모순이 된다는 생각 없이 사람들에게 새 생명과 죄 사함을 받기 위해  회개하고 주께 돌아올 것을 촉구했다(행 2:38, 3:19, 5:31, 11:18, 17:30).  

사실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에 항상 서로 동행한다(행 20:21).  회개의 진정성은 신자들이 ‘회개의 합당한 일’을 행할 때 비로소 제대로 드러낸다(행 26:20).  예수 그리스도의 관한 복음을 믿는 것,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 회개의 외적 표현으로서 선한 행위를 행하는 것 등은 사도행전에서 마치 거미줄처럼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사람이 진정한 삶의 변화가 없이도 회개할 수 있다는 사고는 누가로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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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학자들은 야고보가 예수의 말씀에 상당히 의존한다는 데 동의한다.  예수는 마태복음 12장 37절에서 인간은 자신이 하는 말로 ‘의롭다 함을 받거나’(디카이오테세) ‘정죄함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여기서 사용된 미래 시제는 확실히 심판의 날(마 12:26), 즉 인간이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평가를 받게 될 때를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 우리의 논점은 바로 이것이다.  즉 예수가 우리가 한 말에 따라 이루어질 미래의 우리의 칭의에 대해 언급하신 것처럼, 야고보도 우리가 행한 행위에 따라 이루어질 미래의 칭의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바울의 가르침(롬 3:28)을 거부하지 않는다.  물론 이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하다.  먼저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거부한다.  선한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자(약 2:17, 26), ‘헛된’ 믿음이다.  즉 상응하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약 2:14).  이런 믿음이 지닌 결함은 무엇일까?  이러한 믿음은 활력과 생명력과 에너지가 결여되어 있다.  개념적으로나 교리적으로 무언가 동의하는 것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믿으면서도 귀신보다 못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약 2:19).

우리는 이것을 두 종류의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원하는 믿음은 살아 있고 능동적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배고픈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힌다(약 2:15-16).  구원하는 믿음은 그 믿음에서 나오는 행함으로 그 믿음의 실재를 입증한다(약 2:18).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해진다’(약 2:22).  오직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지만 결코 믿음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약 2:24).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Timo Laato의 말을 인용하면 ‘선한 행위는 향후 믿음의 생동성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행위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실로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를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약 2:1). 

따라서 우리가 믿을 때 우리의 것이 된 칭의는 우리의 최종적 영화를 보증하며, 이를 통해 신자들은 자신들이 믿을 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롬 8:30).  바울서신과 야고보서에서 모두 믿음과 행위는 절대 불가분 한 것이다.  믿음과 행위는 논리적으로는 분리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행함으로 얻는 칭의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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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선한 행위가 칭의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물론 야고보서를 다소 무시하는 신학자들이 있기는 하다.  어떤 이들은 야고보서의 ‘의롭게 하다’(디카이오오)와 ‘구원하다’(소조)라는 단어가 구원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야고보의 가르침을 과소평가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정해진 신학적 틀에 억지로 끼어 맞추려는 시도로서 거부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이런 해석은 나머지 신약성서와 더불어 이 본문의 가장 자연스러운 의미와 잘 부합되지 않는 의미를 이 단어에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야고보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지나치게 읽어내려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선한 행위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동시에 완전함과 혼동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야고보서 3장 2절에서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라는 야고보의 말은 주목해야 한다.  그는 자기 자신도 죄를 범한 자의 범주에 포함시킨다(‘우리가 다’).  그는 우리가 다 ‘다양한 방식으로’ 죄를 범하기 때문에 신자들이 죄를 짓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실은 선한 행위가 칭의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약화시키지는 않지만, 우리로 하여금 선한 행위가 완전함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만든다. 

우리가 상습적으로 죄를 범한다고 할지라도 신자의 삶의 태도와 방향은 반드시 의를 지향해야 한다.  우리는 최종적 칭의에 있어 선한 행위의 역할을 정확히 파악하고 신약성서에 나타난 긴장 관계를 균형 있는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선한 행위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완벽주의에도 빠지지 않기 위함이다.

야고보서 2장 12-13절 역시 중요하다.  신자들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들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마 18:21-35).  또한  최후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야고보는 심판이 임하면 하나님의 긍휼히 신자들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자신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나 자신들의 행위에 기초하여 구원을 요구할 만한 자격을 부여하지 못한다.  구원을 얻기 위한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긍휼뿐이다(롬 9:15).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긍휼히 필요하다는 사실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아무도 없다는 바울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갈 2:16).  

야고보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바울만큼 강조하지는 않지만, 야고보서를 면밀히 살펴보면 야고보 역시 선한 행위가 칭의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거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신자들은 심판날에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여전히 사람은 행위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만약 행위가 칭의의 기초가 아니라면 우리는 행위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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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선한 행위가 최종적인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견해가 복음이 가져다주는 은혜를 부인한다며 우려를 표명한다, 하지만 결코 우리는 바울보다 더 바울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디도서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은 자신의 말이 은혜의 복음과 대립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딛 2:11-12).  

회심 때 받은 은혜는 일상의 삶과 행동과 동떨어진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 인격을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그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를 받는다.  물론 우리가 지나치게 실현된 종말론을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로마서 7장 14-25절에 묘사하고 있는 것을 여전히 부분적으로 경험한다.  변화는 완전함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신자들은 아직도 여전히 육과 싸움을 계속해 나간다(갈 5:13-6:10).  신자들은 더 이상 죄의 종은 아니지만(롬 6장), 죄와의 싸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갈 5:17).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그날까지 여전히 완전함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죄와의 싸움을 계속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빌 3:12-16).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흔히 우리가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의 삶’이나 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 하나님께 맡기라’(Let go and Let God)는 수동적인 사고방식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쟁이다(엡 6:10-19, 고전 9:26, 고후 10:4, 딤전 1:18, 6:12, 딤후 4:7).  이 과정은 실패하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따라서 너무 낙관적이거나 비판적인 사고는 위험하다.

순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주목할만한 본문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바로 빌립보서 2장 12-13절 말씀이다.  이 구절에서 동사 ‘이루다’는 행하다, 하다, 성취하다를 의미한다(롬 1:27, 2:9, 7:8, 15:18, 고전 5:3, 고후 5:5, 엡 6:13).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는 ‘복종하다’라는 동사와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가히 놀랍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순종’하고 ‘행해야’ 한다.  순종이나 선한 행위 없이는 결코 구원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신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진술 때문에 바울이 혹시 은혜의 복음을 망각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런 생각을 잠재울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자신의 의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율법에 대한 순종이 낳은 의는 자신을 결코 구원하지 못한다(빌 3:9).  오히려 바울 자신의 의는 믿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다(약 1:17).  

여기엔 스스로에게서 난 의가 설 자리가 없다.  우리의 선함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생각도 결코 설 자리가 없다.  빌리보서 2장 13절 말씀이 2장 12절 말씀 직후에 이어진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 순종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결과(고전 15:9) 일뿐, 결코 인간의 고결한 성품이나 미덕의 결과로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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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행위

최후의 심판 2025. 5. 10. 10:27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는 행위에 의한 칭의를 부인하지만(갈 3:10), 또 다른 본문에서는 우리가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  먼저 로마서 2장에 기록된 바울의 행위에 관한 가르침은 놀랍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바울이 행위로는 의롭게 될 자가 아무도 없다고 주장하는 로마서 1장 18-3장 20절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마서 2장 6절에서 바울은 로마서 2장 6-11절 전체에 대한 논제, 즉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주장을 펼친다.  7-10절은 이 진술의 의미를 교차대구구조로 풀어낸다.  여기서 바울은 분명히 영생과 전혀 무관한 ‘상’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다시 말해 7절은 ‘영생’이 사람의 행함에 따라 좌우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순종의 행위가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로마서 2장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바울 서신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공통 주제이지만(고후 11:15, 엡 2:11, 딤후 2:21, 4:14, 딛 1:16, 3:8, 14),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갈라디아서에만 집중할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갈라디아서는 특별히 은혜의 복음을 다룬다.  바울은 ‘의’ 및 ‘성령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것임을 강조한다(갈 2:16, 3:2, 5, 10).  하지만 바울의 은혜에 대한 강조가 선한 행위의 중요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딛 2:11)는 선한 행위의 토대이자 기초이다(고전 15:10).  잘 알려진 표현을 의역하자면 오직 믿음은 믿음이 혼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갈 5:6).

따라서 신자들은 성령을 따라 행하고(갈 5:16),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갈 5:18), 성령으로 살며(갈 5:25), 성령의 위하여 심고(갈 6:8), 이로 말미암아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갈 5:22-23).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과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하지 않는 자는 종말론적 심판과 멸망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최종적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보다 더 확실한 진술은 없다(갈 5:19-21).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는 인간의 자율적 행위나 인간의 미덕에 의해 발생하는 행위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한 행위는 성령에 힘입어 이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이러한 행위가 영생에 필수적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성령을 위하여 심지 않는 자는 결코 영생을 경험하지 못한다.  즉, 육체의 일을 행하는 자는 천국에서 제외될 것이다(갈 6:8).

행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바울 자신이 선포하는 은혜의 복음을 악화시킨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바울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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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칭의는 율법의 행위로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 앞에 서기에 합당한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는 이 부분을 분명하게 밝힌다.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할례와 모세의 율법 준수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율법에 담긴 모든 것을 지켜야만 한다.  시내산 율법도 사람이 죄를 범하였을 때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는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여기에는 구속사적 논증도 들어 있다.  하지만 바울의 논증에 의하면 이러한 제사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히 10:1).  왜냐하면 이제는 그리스도가 오셔서 죄를 사하는 최종적인 제사를 단번에 드리셨기 때문이다(히 9:26).  따라서 이 저주를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갈 3:13).  만약 누군가 자신을 율법 아래 두고 구원을 위해 할례를 의존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밖에 없다(갈 5:2-4).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갈라디아서는 인간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의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온다(갈 3:11-12).  바울은 할례와 율법 아래서 살고자 하는 욕망을 철저히 반대한다(갈 4:21).  왜 이렇게 반대하는가?  율법은 죄를 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죄를 더 증가시키기 때문이다(롬 5:20).  다시 말해 율법 아래 사는 자들(갈 3:23, 4:4, 5, 21, 5:18)은 저주아래 있고(갈 3:10), 죄 아래 있으며(갈 3:22), 초등교사 아래 있고(갈 3:25),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서 종 노릇 하는 자들이다(갈 4:3).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의 칭의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얻는다(갈 3:8, 11, 24).  따라서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갈 3:13).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을 받았다(갈 1:14).  중간 지대란 없다.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얻지 않으면 율법을 통해 얻는다(갈 2:21).  칭의를 위해 율법의 길을 선택한 자들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십자가를 보는 눈을 상실한다(갈 3:1).

무엇보다도 할례에 의존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거리낌을 거부하는 것이다(갈 5:11).  왜냐하면 할례는 전적으로 인간의 행위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광이 하나님께 세세토록’(갈 1:5)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반면(갈 6:14), 바울의 적대자들은 자기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한다(갈 6:12-13).  요지가 무엇인가?  칭의는 결코 율법을 통해 얻을 수 없고, 행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행하지도 않을뿐더러 행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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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ght의 반격

최후의 심판 2025. 4. 19. 10:08

Wright와 Piper는 Atlanta에서 열린 2010년 복음주의 신학회 연례 총회에서 본회의 강사로 초청받아 정면 대결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Piper가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고, Thomas R. Schreiner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Schreiner는 그 자리에서 이 문제에 대한 보다 더 사려 깊은 설명을 Wright에게 촉구했다.  Justification: The Saving Righteousness of God in Christ (JETS 54, Mar 2011)에 나온 Schreiner의 말을 들어보자.  “Wright는 복음주의 진영에서 종종 도외시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주제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바울은 선한 행위가 칭의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가르치고, Wright 역시 이 본문들은 단순히 상에 대한 것이 아님을 올바르게 지적한다”

그러나 Wright는 Justification: Yesterday, Today, and Forever (JETS 54, Mar 2011)에서 칭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칭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우리 주 예수 메시아 안에 확정되어 있다. 나는 내가 ‘기초’에 관해 언급했을 때, 이것이 그리스도가 이룩하신 사역 및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시는 사역과 전혀 무관 하다고 주장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견고하고 완전한 은혜의 구조 안에서 마지막 날에 드러날 그 특정한 증거가 그 사람이 지금껏 살아온 사람의 취지와 방향이 될 것임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것은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며,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지금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 하시는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끊을 수 없는 사랑 안에 영원히 남아 계심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이 미래에 일어날 칭의는 비록 그간 살아온 삶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런 이유로 인해 믿음 곧 오직 믿음에 따라 내려진 현재의 판결을 결코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 Schreiner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내놓았다.  “나는 Wright가 지금이라도 최후의 심판이 우리의 행위에 기초하기보다는 우리의 행위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수정과 해명이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 나는 우리가 우리의 행위에 기초하기보다는 우리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Wright는 이러한 설레발 감정에 대해 주의를 당부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이 글은 Denny Burke 교수가 Atlanta 복음주의 신학회 연례 총회에 참석한 후 Wright의 주장에 대해 자신의 블로그에서 쓴 글이다.  “너무 흥분하지 말라. 나는 이 주제에 대해 내가 그동안 나의 많고 많은 진술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철회하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기초’라고 말했다. 내가 언제나 분명하게 밝혔듯이, 나는 몇몇 신학자들이 반드시 그런 의미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의미로 말하지도, 또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기초’라는 단어 자체가 성경에서 사용되는 표현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 단어에 어떤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모두 바울이 로마서 2장과 다른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요점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함을 받은 이들의 삶은 이미 변화되었고, 최종 판결은 그 변화가 제 아무리 불안전하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 변화된 삶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이다”(www.dennyburk.com/n-t-wright-on-justfication-at-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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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per의 불만

최후의 심판 2025. 3. 29. 10:44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인물은 복음주의 진영에 속한 두 명의 저명인사, 영국 신약학자 N. T. Wright와 미국 목사 John Piper다.  비록 마지막 최후의 심판에서의 행위의 역할이 두 사람 사이에 드러난 견해 차이의 핵심은 아니지만, 상당히 주목할 만한 것이었음 확실하다.  문제는  The New Perspective(새관점) 보급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인물 중 한 사림인 Wright가 최후의 심판에서 신자에게 주어질 최종의 칭의는 그가 살아온 삶 전체 기초하여, 또는 어느 정도 그 결과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는 사실을 거듭 주장해 왔다.  다시 말해 칭의는 행함(performance)에 기초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자 Piper는 The Future of justification: A Response to N. T. Wright에서 Wright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Piper가 가장 크게 우려한 것 중의 하나는 “Wright가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질 칭의가 행위에 기초하여 이루어질 것이라는 취지의 깜짝 놀랄 만한 주장”을 천명했다는 것이었다. 

Piper는 다시 한번 The Purifying Power of Living by Faith in Future Grace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신념을 밝힌다.  “우리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법정에서 우리의 믿음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공적 증거가 될 것이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에 대한 증거다. 따라서 바울이 ‘각각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고 말할 때, 그는 우리가 받을 상이 우리의 행위에 따라 주어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행위에 따라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런데 Wright에 대한 Piper의 불만은 Wright가 ‘오직 믿음’이라는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칭의에 대한 Catholic의 해석으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놓았다는 것이 Piper의 불만이었다.  Piper에 따르면 “Wright는 내가 우리의 선한 행위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대한 필수적 증거라고 말할 때 의미한 바와 다를 바 없는 의미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랬을 것 같다. 그런데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따라서 Piper는 “나는 Wright가 자신의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사실은 이것이 그가 믿고 있는 바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으면 좋겠다”라고 썼다.  

이미 살펴봤듯이, Piper는 심판뿐 아니라 심지어 행위가 한 사람의 최종적 구원에도 필수적이라는 점을 전혀 문제를 삼지 않는다.  그가 가장 크게 우려한 부분은 Wright가 최종적 구원의 궁극적 기초 혹은 근거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및 그의 완성된 십자가 사역에 대한 믿음에 있다기보다는 우리의 행위에 있다고 간주하는 듯 보인다는 것이었다.  Piper는 The Future of Justification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칭의에 대한 근거로서의 율법 준수로부터 자유롭다”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 말을 들은 Wright도 꿀 먹은 벙어리가 아니었다.  그는 Justification God’s Plan and Paul’s Vision』이라는 책으로 Piper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자신은 우리가 구원을 우리의 힘으로 얻는다거나 구원을 위해서는 완전한 삶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말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롬 6:1-11)과 성령의 내주 하심(롬 2:25-29)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고(롬 6:6-11), 율법에 순종할 수 있으며(롬 8:4), 몸의 행실을 죽이고(롬 8:13), 마침내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롬 8:13).  한 마디로 자신의 견해는 성경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연이어 말한다.  “인간은 성령이 그들 안에 역사하실 때에는 진정한 인간,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존재가 될 수 있으며, 이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율법이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들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최후의 심판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최종 판결을 이끌어내는 삶이다.  이것은 믿음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에 앞서 현세에서 사람들을 의롭다고 칭하신다면, 그것은 믿음이 그렇게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이들의 특성을 잘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Wright의 답변은 그를 비판하는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기에는 불충분했다.  최종적 구원에 대한 근거가 여전히 모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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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심판에서의 행위 역할을 설명하는 방법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하지만 그 뉘앙스(nuance)는 매우 다양하다.  Paul Barnett은 최후의 심판을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도 하고(고전 4:5) 책망을 받는 자리로 보면서(마 25:24-30), 어느 경우이든지 간에 신자는 무조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고전 3:10-15).  반면에 George Eldon Ladd는 로마서 2장 5-16절과 같은 본문들은 실제적 상황보다는 이론적/가설적 상황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Samuel L. Hoyt는 최후의 심판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영생이 아니라 상이며(계 22:12), 신자들은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과연 어느 사람의 말이 맞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한 Martin Luther의 신학사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Luther는 행위가 은혜보다 앞서더라도 그것이 구원/영생을 얻기 위한 공로가 된다는 Catholic Church의 행위 개념을 전면 거부했다.  그는 칭의(Justification)는 행위와 상관없이 전적으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Luther’s Works에서 “칭의는 기독교 교리 가운데 가장 참되고 주요한 조항으로서 결코 취소불가능하며, 최후의 심판 때까지 지속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Roman Catholic Church만이 Luther의 유일한 적수는 아니었다.  Catholic 사상이 행위에 깊이 몰두했다면 반(反) 율법주의자들은 행위를 완전히 무시했다.  따라서 Luther는 비록 행위가 칭의를 가져다주지는 못하지만, 믿음이 실제임을 증명해 준다는 차원에서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약 2:14-26).  그는 선한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은 우리 마음속에 거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면서(약 2:26), 믿음과 행위 사이의 긴장 관계를 놓고 씨름하면서도 믿음에 우선권을 주려고 애썼다. 

Luther’s Works』에서 말한 것처럼 행위는 반드시 필요하다.  문제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지 못한다.  예를 들어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행위가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하다(요일 4:16-18).  하지만 행위 자체는 두려움을 완화시켜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Paul Althaus가 『The Theology of Martin Luther』에서 강조한 것처럼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에 근거하여 값없이 받는 선물이기 때문이다”(딛 3:5).  

만약 누군가가 행위 없이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면, 그는 다시 말한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 믿는 것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말해줄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만약 당신에게 행위가 없다면 절대로 믿음 없이 심판대 앞에 서지 말라”(약 2:22).  그 이유가 무엇일까? 

20세기 후반에 와서 수많은 학자들이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행위에 따른 심판을 서로 조화시키려는 연구에 많은 애를 썼다.  또한 이 연구들은 아무래도 바울에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이 두 주제가 바울 서신 안에서 매우 날카롭게 서로 대립했기 때문이다.  

1997년에 출간된 E. P. Sanders의 기념비적인 저서인『Paul and Palestinian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s of Religion』는 바울 연구에 있어 새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Luther와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유대교가 사실은 행위에 의한 의로 규정되는 종교가 아니었음을 밝히는 Sanders의 연구는 차후 The New Perspective(새 관점)으로 불리게 된 견해를 지지하는 수많은 문헌을 마구 쏟아내는 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새 관점이 그동안 저술된 수많은 책 역시 이 문제의 행위의 역할에 집중함에 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는 지난 세기에도 어떤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여전히 안갯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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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서로를 향한 분노와 미움에 관계된 행동이 지속될 경우 심판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경고한다.  만약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는 어떤 심판이 내려질 것인가?(약 5:9).  정한 날이 다가오고 있겠지만, 심판자는 이미 문 밖에 서 계신다(계 3:20). 

Donald Bloesch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신자들은 최후의 심판을 받겠지만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는 분임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약 2:12).  따라서 끝까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무한한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요 10:28).  다시 말해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되지만, 긍휼을 베풀면 그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기뻐한다’는 것이다(약 2:13).  그런데 명목상 교인이나 신실하지 못한 ‘나일론’(nylon)  신자들에게는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

계시록에 나오는 사데 교회를 보면 ‘옷을 더럽히지 않고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니는 자들이’ 나온다(계 3:4).  사실 이들은 은혜와 순종의 응답 사이에 정교한 균형을 유지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옷은 은혜로 값없이’ 주어졌지만(롬 3:24), 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함과 충성으로 혼인을 위해 자기 자신을  예비하였기 때문이다(계 3:5).   따라서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계 19:8)인 것처럼 모든 사람은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는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계 22:12). 

이 심판은 언제나 행위에 근거해서 진행된다(마 25:41-46, 고후 5:10, 히 4:12-13).  행위는 마음에 대한 충성의 틀림없는 증거이며, 행위를 보면 믿음과 불신, 충성과 불충성을 알 수 있다.  믿음과 믿음의 행위와의 불가분의 관계에 대한 사도 요한의 이론은 예수님과 바울의 이론과도 동일하다((요 5:29, 롬 2:6).

사도신경(Apostle's Creed)은 400년 동안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정통 교리를 믿어왔던 내용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 심판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받을 심판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믿는 자들의 상급 심판을 말하는 것인가? 

여기서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심판이란 개념 자체가 사랑의 하나님(요일 4:9-10)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중 한 명이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Karl Barth다.

William J. Dalton 역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영원한 심판’은 그와 조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Aspects of New Testament Eschatology』에 나온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은 무엇보다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부당한 결론을 피하려면, 미래의 심판을 배경으로 하는 종말론적 진술이야말로 무조건 이런 배경의 부적합성을 감안하고, 이 부적합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빗나간 태도는 반세기 동안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신약 성경은 정직하게 읽어보면 이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성경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롬 3:24).  여기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롬 2:6), 즉 각자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고후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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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기록된 이 이야기는 실제로 비유가 아니라 예수께서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구성하기 위한 은유(metaphor)다.  마태는 인자를 양과 염소로 구분하는 심판을 위하여 오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먼저 예수님은 양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4-36).  그리고 염소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마 25:41-42).

이것은 마태복음에만 나오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평행구절들을 기초로 하여 본문을 비평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비유적인 요소들은 단지 목자, 양들, 염소들, 그리고 양들과 염소들의 실제적인 구분뿐이다.  이 본문에 가장 어려운 문제가 무엇인가?  죄 사함 혹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교리의 흔적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저주받은 자에게 베푸는 자비도 없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에 대한 흔적도 나타나 있지 않다.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이 본문은 개혁주의 신학 노선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골칫덩어리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험천만하게도 바울과 Augustine, 그리고 Luther의 신학에 반대하는 ‘행위에 의한 칭의’처럼 위험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Graig Keener는 The Gospel of Matthew: A Socio-Rhetorical Commentary에서 이렇게 말한다.  “본문은 이 심판이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을 분명히 선언한다”  물론이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 행위의 역할은 정확히 어떤 것인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세상이 끝나는 날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단 말인가?” 

그런데 마태복음 25장뿐만 아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이 성경 구절 역시 선한 일을 통한 구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선한 일을 통한 구원의 증거를 강조하고 있는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여 생명과 정죄 둘 중 한 결말을 맞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 지역의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는 것을 알기 원했다(롬 2:5-7).  이 구절은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엡 2:8-10),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행한대로 받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계 20:13).  진실을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받은 진리와 그 진리를 따라 행한 것에 대해 ‘해명’(解明)을 해야 한다(욥 34:11, 시 61:12, 잠 24:12, 렘 17:10, 마 16:27, 계 20:12). 

만약 ‘무익한 말’(마 12:36)이 마지막 날에 심판에 근거가 된다면, 우리가 삶 가운데 실제로 행한 것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근거가 된다(고후 5:10).  따라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에스겔 33장 30-33절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치우침이 없이 사람들이 행한 대로 주어질 것이다(고후 5:10).       

야고보 역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 5:9).  여기서 야고보는 독자를 ‘형제’로 부르는데, 이들은 곧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 앞에는 분명히 두 가지 선택이 놓여 있다.  하나는 신랄하게 불평하고 원망하며 심판을 받는 것이고(마 12:36), 다른 하나는 오래 참으며 원망하지 않고 심판을 면하는 것이다.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심판을 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야고보가 결코 의미하는 바가 아닌 것은 그야말로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아직 미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심판과정에서 완전히 면제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야고보는 분명히 여기서 심판의 최종 결과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신자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심판의 결과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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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이 받을 심판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행한 일들을 근거로 하여 보상을 받기 위한 심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나는 각 사람이 ‘믿음의 분량대로’(롬 12:3) 믿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리스도인들도 심판을 받을까?”  나에게 있어 이 질문의 대한 대답은 ‘그렇다’라고 확신 있게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민의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히 12:23).  따라서 주께서는 ‘그의 백성을 심판하실’ 것이며(히 10:30),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된 것이다(벧전 4:17).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히 9:27).  상급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위에 따른 심판 사상은 구약과 신약 전반에 나타나는 주제다(시 62:12, 렘 17:10, 단 7:10, 마 16:27, 롬 2:6, 14:10-21, 고전 3:12-15, 고후 5:10, 벧전 1:17).

그렇다면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와 신학자들도 심판을 받는가?  이들은 일반 신자와 다르게 ‘더 호되고 엄격한’(NRSV) 심판을 받을 것이다(약 3:1).  만약 이들이 무서운 심판을 받는다면 그 이유는 하나다.  잘못된 가르침을 전했을 경우에 자비 없는 심판을 받는다(눅 11:52).  개종을 주도하는 선생들이 ‘지옥의 자식’이라면 개종자들은 말한 것도 없다(마 23:15).  따라서 가르치는 권세를  가진 자는 더 큰 책임을 수반한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바울은 복음의 메시지를 최초로 전달하는 ‘씨 뿌리는 역할’을 맡았고, 아볼로는 계속해서 교육하는 ‘물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동일했다.  즉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이끄는 것과 그들이 믿음 안에서 성숙하도록 돌보는 일이었다.  각각의 종들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 여전히 책임을 지고 있었다.   

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는다’(마 12:36).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날 내가 평상시에 내뱉은 말이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마 12:37).  산 자와 죽은 자와 상관없이 자신들이 삶에서 행한 대로 판단을 받는 곳이 심판대다(벧전 4:5).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선물(엡 2:8)이 그리스도께 믿음의 순종을 해야 하는 의무를 면제시켜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아야’(고후 5:10)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롬 14:10).  그러므로 우리는 ‘나그네로 있을 때에 두려움으로 지내야 한다’(벧전 1:17).     

여기까지 분명한 사실은 “앞으로 오실 주님은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심판자가 되신다”는 것이다(행 10:42).  그러면 이 심판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떠한 사람들이 받는 것인가?  성경은 다른 사람에 대해 비평적이거나 정죄하는 태도를 가진 위선적인 비판자(마 7:1-2), 결혼 관계를 파괴시키는 ‘음행 하는 자와 간음하는 자’(히 13:4), 갑질을 밥먹듯이 하는 ‘긍휼히 행하지 아니하는 자’(약 2:13), 오래 참지 못해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약 5:9)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신약 윤리에 대한 탁월한 진술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딛 3:5)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입으로만 믿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마 7:21).  그들은 구원을 받지만 ‘불 가운데서 받은 것’(고전 3:15)이라 자신들의 상을 잃어버린다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심판에 관해서 조금 더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는 몇몇 본문을 살펴보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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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받을 자

최후의 심판 2025. 2. 22. 19:25

예수님은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한 자를 심판하실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 12:48).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생명을 거부하는 것임을 아셨다.  이들은 누구인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고전 5:13), 곧 ‘불의한 자’(벧전 2:9), ‘경건하지 아니한 자’(벧후 3:7, 유 14-15), 예수를 경배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이 세상에서 속한 사람들’(NLT/계 6:10)이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이 기다릴 수 있는 유일한 미래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 즉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히 10:27) 뿐이다.  아무리 선하고 도덕적이라 할지라도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불신자들, NLT)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계 21:8).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은 같다그렇다면 신자들은 어떠한가과연 그들도 심판을 받는가나는 문제를 차근차근 말하고 싶다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하나님의 은혜( 2:8) 그리스도가 십자가 상에서 완성하신 사역으로( 19:30) 말미암아 믿음으로 이루어진 관계에 규정된다( 5:2).  따라서 마귀는 행위를 막으려고 애쓰지 않고 믿음을 막으려고 발악에 가까운 궤계를 쓴다(눅 8:12). 

그런데 믿는 자들은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1:12), 주님과의 영원한 삶을 보장하는 영생을 현재 소유함으로써심판을 받지않는다( 3:18).  그들은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이는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때문이다( 5:24).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듯이’(요일 5:12), 신자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삶을 보장하는 영생을 현재 소유함으로써 얻었다.

NLT 영역본은 요한복음 5 24절을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결코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번역한다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1:13).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8:1).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들의 몸의 구성원이 된다는 뜻이다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다(고전 15:55). 

그런데 주목할만한 사실은 신약성경에카리스’(은혜)라는 그리스어 단어가 155 등장하는데, 100회가 바울 서신에서 언급된다는 것이다신성모독자이며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바울 사람,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6)에게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게부어졌다(딤전 1:14).  위협과 살기가 충만( 9:1)하고, 악질 중의 악질(딤전 1:9) 바울에게 어떻게 그런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실 있을까?’  질문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바로예수(딤전 1:15).  은혜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통해 주어진다(딤후 2:1).  어디에서도 얻을 없는 것이 은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말이여라는 구절은 문자 그대로신실하도다 말씀이여 번역된다목회 서신 외의 다른 곳에서는 구절을 사용한 적이 없는데(딤전 3:1, 딤후 2:11, 딛 3:8), 말을 다시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도 좋은 믿을 만한 말이 있다’(현대인의 성경).  말은참되니 너희는 말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NCV).  너희가 마음에 새기고 의지할 있는 것이다’(메시지 성경).  그러므로 진술은 전적으로 신뢰할 있고, 보편적으로 받아 들어져야 한다’(J. B. Phillip’s).  마디로 너희는 말을 믿어도 된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신뢰할만한 진술은 우리와 상관이 있는 것인가바울은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죄인 중에 괴수’인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 말한다바울은 과거를 회고하며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놀라운 인내하심을 깨닫는다바울 자신이 모든 편지를은혜라는 말로 시작하고 끝맺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그의 마지막 어구도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딤후 4:22)였다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은혜다( 5:2).  따라서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것은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것을 의미한다(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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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라는 사실(창 18:25)은 처음부터 성경 이야기의 근간이었다(창 16:5, 31:53).  하나님의 심판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고(딤후 4:1), 그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다(고후 5:10).  하나님께서 각사람의 행위를 따라(욥 34:10-11, 시 62:11-12, 잠 24:12, 사 59:18, 렘 17:10, 겔 24:14, 호 12:2).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실 것’(삼상 2:10)이며,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이다(전 12:14).  이 모든 사람에 대한 심판은 가장 은밀한 것까지 숨길 수 없는 심판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하신다.  그분은 공의와 공평으로 심판하실 것이다(창 18:25, 시 9:8, 벧전 2:23, 계 16:7).  이는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고’(시 1:5), 의인들은 ‘여호와 앞에서 노래하게’(시 98:8) 될 것임을 의미한다.  

언제 이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이 ‘정한 기약’(시 75:2) 곧 ‘여호와에게 속한 날’(렘 46:10), 다시 말해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벧후 3:7) 이미 정해 놓으셨다.  만물의 시작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것들을 끝낼 능력도 가지고 계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친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다(딛 2:14).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사 33:22). 

여기에는 이스라엘 자손만을 위한 구원뿐만(사 45:17)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구원도 포함된다(행 28:28).  따라서 새로운 창조물인 교회 안에는 국적이나 인종, 교육 정도, 사회적 지위, 부, 성, 종교, 권력의 장벽이 없어야 한다.  어떻게 이 장벽을 제거할 수 있는가?  바울은 그리스도만이 만유시요 그 모든 것 안에 계시기(표준 새번역) 때문이라고 대답한다(골 3:1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분열이나 편견이 있을 수 없다(고후 5:17).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처럼 신약 성경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하나님이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다’고 선언한다.  그날은 매우 다양하게 불렸다(롬 3:6).  ‘공의로 심판하는 날’(행 17:31.  ‘여호와의 날’(사 13:6-9), ‘주의 날’(벧후 3:10), ‘마지막 날’(요 12:48), ‘심판의 날’(마 10:15, 11:22, 12:36, 요일 4:17), ‘멸망의 날’(벧후 3:7), ‘그날’(딤후 4:8)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의 심판 개념을 발전시킨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롬 13:11)라는 말씀처럼 그날이 더 가까워졌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고’(마 3:10),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벧전 4:7), 따라서 주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이시다(벧전 4:5).  이렇게 다가올 심판은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를 포함할 것이기 때문에 우주적일 것이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설명해야 할 것이나(롬 14:12), 하나님의 세세한 조사를 견디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시 1:5).

그런데 추가적인 발전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을 수행할 사람, 즉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을 선택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마 28:18), 그분을 ‘하나님이 정하셨다’(행 10:42).  모든 인간들이(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궁극적으로 주님 앞에 설 것이다.  물론 그분은 ‘입법자와 재판관’이신(약 4:12) 예수 그리스도시다(요 5:22-23, 27).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그를)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다’(행 17:3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는 비록 아버지의 뜻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는 아니지만(요 5:30),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딤후 4:1).     

심판은 복음의 한 부분이고(롬 2:16), 복음은 진리이기 때문에(갈 2:5, 14, 엡 1:13), 하나님의 심판 역시 진리에 기초하여 이루어질 것이다(롬 2:2).   여기서 인간의 약점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육체를 따라’ 즉 사람이 정한 기준에 의해(요 8:15), 외모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요 7:24, 벧전 4:6).  따라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만한 참된 능력이 없는 우리의 판단은 언제나 공정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 주재’(Sovereign Lord)시다(계 6:10).  이 사실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수 있고(롬 2:16), 또 그렇게 하실 것이며(롬 14:12),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고전 4:5) 분임을 의미한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요 8:16), ‘의롭고’(요 5:30, 계 19:11), ‘정의롭다’(롬 2:5).  왜냐하면 그분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 때문이다(딤후 4:8).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이다(벧전 1:17, 행 17: 31, 롬 2:11, 벧전 2:23).  

그렇다면 심판받을 자는 누구인가?  그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고전 5:13),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히 10:27), ‘불의한 자’(벧전 2:9), ‘경건하지 아니한 자’(벧후 3:7, 유 14-15), 이 세상에 속한 ‘땅에 거하는 자’(계 6:10)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을 반드시 심판하신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한 자를 심판하실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 12:48). 

예수님의 첫째 지상 사명의 목적은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영생을 발견할 길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요 3:17, 8:15-16).  그런데 그분이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의 주된 목적 중 하나는 심판이 될 것이다.  거부당한 예수님의 말씀이 마지막 심판날에 모든 불신자들을 반드시 정죄하게 만든다(요 3:31-36, 5:22-23, 26-30, 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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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사람들의 감정을 깊이 자극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입에 게거품을 물고 열정적으로 논쟁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터넷은 죄성을 가진 인간들이 컴퓨터 뒤에 숨어서 심지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인신공격적인 언쟁을 일삼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사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보이는’(잠 17:28)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침묵하는 것이 더 유익을 얻을 때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동일하게 받은 은혜를 가지고 어떤 주제를 놓고 어떻게 토론해야 하는지를 배울 필요가 있다(롬 15:7, 엡 4:1-3). 

건설적인 신학적 대화의 한 가지 특징이 무엇인가?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결국 각자의 의견 차이가 무엇이며, 그런 차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대해 합의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만약 우리가 성경의 전적인 진실성을 긍정하는 데 동의하고 그러한 긍정이 모든 교리와 실천의 문제에 있어 절대적인 역할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다시 말해 신학적으로 ‘서로 물고 뜯고 싸우지 않는다면’(갈 5:15),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이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는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결국 더 강한 호소력을 행사할지도 모른다(요 13:35).  이 말의 의미를 알았으면 한다.    

사도 바울은 성경 두 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과 완성에 관해 언급한다.  먼저 빌립보서 1장 6절은 확신을 주는 말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 구절의 의미는 우리 안에서 구속이라는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통해 그 일을 이루실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때 그 일을 완수하실 것이다.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 시작되었다(엡 1:13-1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완성을 보장하신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3절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거기에는 살벌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바울은 선물을 받은 후 그것을 다시 얻으려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철저히 모순인지 설명하려고 성령을 통한 이러한 체험들에 호소하고 있다.  그는 갈라디아의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짓을 시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전통에 대한 종속과 맞바꾸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성령을 할례와 유대인의 음식 규례와 어떻게 맞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시작했던 자들이 다시 육체로 돌아가는 것, 즉 ‘완성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이 보증이 실패하는  이유는 이 보증 자체 때문인가, 아니면 이 보증을 받은 자의 실패 때문인가?  여기엔 분명히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과정이 들어 있다. 

우리는 바울에게 있어 ‘구원’은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는 것 같다.  사실 바울은 ‘구원’이라는 단어 자체를 그 과정의 최종 결과를 가리키는 데 사용하고(롬 13:11, 살전 5:8-9), ‘구원하다’라는 동사의 미래시제는 아직 소망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롬 5:9-10, 10:9, 13, 11:26, 고전 3:15, 5:5).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전형적인 의미에서 ‘구원받은 과정에 있는 자’다(고전 1:18, 15:2, 고후 2:15).  그런데 문제는 ‘이미’(Already) 시작된 것과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이 두 시제가 바울의 사고에서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시작이 완성을 보장한다는 말인가?  빌립보서 1장 6절을 읽어보면 그렇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자기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동사 시제는 바울이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역을 통해 빌립보 신자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그날까지 여전히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3절을 읽어보면 훨씬 더 조심스럽게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계속 믿음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질문은 구원의 과정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의 또 다른 측면을 검토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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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으로 불리는 내 백성이

겸손해지고 기도하며 내 얼굴을 찾고

그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며

그들의 땅을 치유하리라. 

(역대하 7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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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은총

칼빈과 웨슬리 2024. 11. 3. 15:16

‘선행은총’(Prevenient grace)은 회심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삶의 모든 부분,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련된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life)에서 행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Wesley는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에서 말한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일하신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일해야 한다. 여러분은 그분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도 일하지 않으신다. … 하나님의 은혜의 덕 안에서, 믿음의 역사와 소망의 인내와 사랑의 수고 안에서 계속하여 여러분을 보호하고, 동행하며, 인도하신다”

Wesley와 같이 Calvin도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증언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법’(laws of God)에 따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Calvin은 그리스도인이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선행 은총과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대결은 Wesley와 Calvin의 책에서 묘사되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구원 그 이상을 말하고, 그리스도인의 삶 그 이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사람 전체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 즉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혹은 ‘선행하는 은혜’(preventing grace)를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Calvin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이나 상관없이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모든 일을 주관하기 때문에 진정으로 악한 일이 없으며, 적어도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맞지 않는 일은 없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저항할 수없도록 명하기 때문에 우연히 일어나거나 예상하지 못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Calvin은 『기독교강요』 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어 신실한 사람들을 데리고 숲으로 들어간 상인이 일행을 놓치고 말았다. 숲 속을 헤매던 그는 강도 소굴에 들어갔다가 강도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이 미리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 것인지 예견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넘어갈 수 없는 한계를 정했기 때문이다(욥 14:5). 그러나 우리는 사고 범위에서는 모든 일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죽음은 자연적으로 그리고 우연히 일어나는 것처럼 여겨지겠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이 일을 이끄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Calvin은 선한 것이 하나님에게 나온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죄와 악을 포함하여) 나쁜 것들은 (사탄이 했을지라도)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Calvin은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통치의 유효한 본성을 일관되게 주장했지만, 죄와 악이 발생하는 이유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그는 모든 선한 일들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의심이 없었다.  동시에 고통이나 고난, 죄 혹은 악에 대하여 인간은 책임을 갖지만 하나님은 책임이 없다고 믿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인도를 받는 사람에게 비난의 책임을 돌리는 것인데, 이는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인다. 

반대로 Wesley는 사람들을 회심으로 불러 믿음을 갖게 하고 죄를 회개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회심으로 부르는 소명이 진정한 것인지 확인하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부름에 응답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영생뿐 아니라 지상에서의 일시적인 삶도 그러한 응답에 달려 있다.  Wesley는 Calvin의 믿음과 대조적인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실질적으로 은혜의 저항할 수 없는 성격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다.  『Predestination Calmly Considered』에 나온 Wesley의 말을 들어보자.  “주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주님의 이름으로 대사를 파송하신다. 하나님이 직접 ‘포로 된 이들에게 구원을 선포하면서’ 어떠한 제한이나 암시를 두지 않으셨다. 그러나 Calvin을 따르는 여러분은 구원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마치 하나님이 감옥 문 앞에 서서 열쇠를 손에 들고, 포로들을 불러 초대에 응답하라고 요청하면서,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유인책을 제시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가장 귀중한 약속을 주고, 순종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가장 끔찍한  협박을 하는 분으로 그린다. 그 순간에 주님은 그들에게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겠다고 이미 결정한 분으로 가정하고 있다. … 형제들이여, 그것은 우리 구주이신 하나님을 도대체 어떤 종류의 신실함을 가진 분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인가?”

Wesley는 Calvin 선생의 신앙이 성경의 가르침뿐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에도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Calvin은 구원이 전적으로 사람들의 책임 밖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이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Calvin은 인간이 자신의 영원하고 영적인 행복을 책임지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Wesley는 인간이 책임이 하나님의 통치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확신, 혹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사는 것을 결코 약화시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인간의 책임은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은혜롭게 역사하는 관계적이고 책임 있는 방식임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통치와 사랑, 정의 그리고 다른 특성들을 보다 확실하게 증명한다.

Calvin과 Wesley의 다른 유형의 은혜를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Calvin은 『기독교강요』 에서 말하는 것처럼 ‘일반적 은혜’(general grace)를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는 은혜라고 믿었다.   일반적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들 사이에 다양성이 존재하도록 하고, 그들의 죄와 악이 파멸의 길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반적 은혜는 모든 사람이 현재의 삶에서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는 유익한 증거다.  그러나 그 유익은 ‘일시적’(temporal)이다.  일반적 은혜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구원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special grace) 혹은 ‘유효한 은혜’(effectual grace)가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지는 않는다.  Calvin은 『기독교강요』 에서 말한다.  “어리석거나 부족하게 태어난 사람이라고 그 결점 때문에 하나님의 일반적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고, 일상적인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무에게도 임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구원하는 특별한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베풀지는 않지만, 유익한 일반적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베푸신다.   Calvin은 일반적 은혜가 사람 안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을 보여주고, 바로 그 이유가 사람에게 인성과 지성, 성취와 관련하여 숱한 개성과 ‘다양성’(diversity)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하나님은 사람 안에 율법을 주시는데, ‘십계명’(Ten Commandments)의 경우처럼 율법을 주는 것은 일반적 은혜의 행동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은혜는 여전히 일시적이며 인간의 구원에 직접적인 동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일반적 은혜에 대한 Calvin의 믿음은 선행은총에 대한 Wesley의 믿음과 차이가 있다.  Wesley는 선행 은총이 사람들의 구원을 돕는다고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선행 은총은 구원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을 이끌어내는 궁정적이고 건설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일반적 은혜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죄와 악의 즉각적인 영향력을 억제하는 이 세상에서의 능력과 더 많이 관련된다.  그러므로 선행 은총은 성령이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하여 사람들을 영적 성장에 참여하도록 이끌고, 안내하고, 능력을 부여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영적 삶에 더욱 역동적이고 유익한 영향을 미친다.

Wesley가 선행은총을 말할 때, 강조점은 인간의 협력자 역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한다는 데 있었다.  그 후에 사람들은 믿음과 회개로 응답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한 책임성을 갖게 되었다.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에서 Wesley는 말한다.  “구원은 은혜를 확신함으로 이루어지는데,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회개라는 말을 쓴다. 회개를 통하여 우리 자신에 대하여 보다 많이 알게 되고, 돌 같은 마음이 구원으로 나아간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구원을 경험한다. 우리는 두 가지 큰 줄기인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로 나아가게 하는 ‘은혜로 말미암아’(through grace), ‘믿음을 통하여 얻는 구원’(are save by faith)을 경험한다”

Wesley와 Calvin은 칭의의 문제에서 전혀 이견이 없었다.  Wesley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Calvin의 관점에서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거룩하게 하는 은혜에 있어서는, 잘 알려진 것처럼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Wesley에 따르면 은혜는 칭의뿐만 아니라 성화를 위해 선행적으로 유효하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정하신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수단을 취함에 있어 책임적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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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과 Wesley는 신자의 은혜의 수단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술하였다.  Calvin은 하나님이 신자들의 삶에 유효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한다고 보았고, Wesley는 하나님이 신자들과 함께 선행적으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한다고 보았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초대하고, 함께 하도록 하는 외부적 수단 혹은 지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때로는 이 ‘수단이나 지원’(means or aids)을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으로 불렀는데, 이는 하나님이 사람들의 삶, 특별히 성도들의 삶에서 은혜롭게 역사하시는 방법이나 통로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에서 믿음과 구원으로 역사하지만, 또한 그들의 삶에서 외적으로도 역사한다.

Calvin은 하나님이 교회, 설교 및 ‘성례전’(Sacrament)을 통해 어떻게 역사하는지 우선적으로 이야기하였다.  『기독교강요』에서 그는 Latin Fathers Cyprian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교회는 어머니가 된다”  조금 더 참조하면 『기독교강요』 각주 2에 인용된 구절에서 Cyprian의 가르침이 전문으로 인용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교회를 당신의 어머니로 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로 섬길 수 없다”

성례전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삶에서 은혜롭게 역사하는 ‘가시적 말씀’(visible word)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은혜의 수단들보다 중요하다.  Calvin은 “Augustine은 성례전이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각각의 형상들을 시각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가시적 말씀’으로 부른다”라고 말했다.  Calvin은 계속하여 “또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생각할 수 있는 거울이라 부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성례전은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성령이 영의 양식으로 은혜를 더해주므로, 성례전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효력을 발휘한다.

Calvin은 일곱 개의 성례전에 대한 Roman Catholic의 전통을 거부하고 오직 두 가지, ‘세례’(baptism)와 ‘성만찬’(Lord’s Supper)성경적이라고 믿었다.  세례는 심지어 ‘유아 세례’(Infant Baptism)까지, 신앙을 확인하고 강화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말했듯이 세례가 구원을 위한 조건은 아니지만 유아들이 구원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Calvin은 성만찬이 성도들이 신앙을 키워주고 확신을 강화하며 구원을 유지시킨다고 믿었다.  성만찬은 구원을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수단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우리를 유지시켜 주는 은혜의 수단으로 남아 있다.

Wesley 또한 은혜의 수단을 믿었고,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구원의 모든 단계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하였다.  그는 자신의 설교 『The Means of Grace』에서 “나는 은혜의 수단을 통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외형적인 표지나 말 또는 행동을 이해하고, 그 목적을 위하여 사람들을 파송하여, 그들이 선행하거나, 의롭게 되거나, 혹은 거룩하게 하는 은혜를 전하는 보편적인 통로가 되게 하였다”라고 말했다.   Wesley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원으로 부르고 그들을 통해 일하실 뿐 아니라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여 구원으로 부른다고 생각하였다.  그에게 은혜의 수단은 Calvin이 제안한 교회와 설교 및 성례전에 국한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은혜롭게 사람과 교회 안에서 일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은혜의 수단은 사람들의 성화와 마찬가지로 칭의에서도 중요하다.

Wesley는 여러 가지 경우로 은혜의 수단을 배열하였다.  그는 ‘제도화된’(instituted) 것과 ‘재량권이 있는’(prudential) 은혜의 수단을 구분하였다.  그는 『Minutes of Several Conversation』에서 하나님이 성경에서 제정한 은혜의 수단은 ‘기도’(prayer), ‘성경 읽기’(searching the Scriptures), ‘성만찬’(Lord’s Supper), ‘금식’(fasting) 그리고 ‘그리스도인 모임’(Christian Conference)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 모임을 통하여 Wesley는 소그룹 모임에서 가장 잘 발휘되는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성경에서 제정한 은혜의 수단들에 더하여, Wesley는 사람들이 정할 수 있는 은혜의 수단에 대하여 말했다.  이러한 은혜의 수단은 성경에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았지만, 신자들의 경험과 함께 교회의 역사에서 형성된 영적 구조에서 시도되고 증명된 방식들을 보여준다.  Wesley는 그러한 실천들이 “보이는 것과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현존의 훈련’(exercise of the presence of God)”을 포함한다고 말했다.      

Calvin처럼 Wesley도 신앙적 실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즉 은혜의 수단은 구원을 보장하지 않으며, 실제로는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그러한 은혜의 수단들에 대하여 길든 짧든 전하기 때문에, Wesley는 은혜의 수단들이 구원의 모든 단계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도움을 준다고 확신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미리 주시는 은혜의 성격을 강조하며 사람들의 회심과 인내 그리고 영적 성장을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들이 신비하게 함께 일한다고 확신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은혜의 수단이 인간의 책임 있는 행동과 함께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뜻과 은혜에서 나오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은혜의 수단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포함하여 모든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은혜의 수단을 배우고 실행할 수 있도록 그 수단들에 관하여 말한다.   사람들이 은혜의 수단을 실행하는 이유는 구원을 위한 인간의 노력과 공로에 의존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을 당신과 사람들의 관계에서 협력하는 방법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Calvin과 Wesley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중심에 하나님의 은혜가 자리한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인간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엡 2:8-9).  그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다(딛 3:5).  두 사람 모두 인간의 구원을 시작하고 유지하고 완성하는 분(욘 2:9)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완전히 동의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하는 방식에 대하여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두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롬 12:3). 

Calvin은 하나님의 은혜가 실제로 역사한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뜻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무엇을 하거나 도울 수 없다고 믿었다.  반대로 Wesley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하는 것은 선택하거나 하지 않는 자유를 준다고 믿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삶에 선행하는 은혜를 역사하게 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셨다.  그러한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지도 않고,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사역에서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지도 않는다.

만약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저항할 수 없이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생겨날까?  아마 사람은 굉장히 단순할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사람들이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렇게 해야 함을 항상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성경과 체험이 분명히 증거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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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는 Calvin과 Wesley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한 주제였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의 신앙과 가치, 그리고 실천에서 본질적인 요소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Calvin과 Wesley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리고 삶을 통하여 은혜로운 역사를 이루는 방식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두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은혜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축복을 위한 거룩한 ‘사랑’, ‘호의’, ‘감사’, 등이고, 또한 거룩한 ‘능력주심’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어원상 이 말은 그리스어 charis와 라틴어 gratia에서 왔다.   확실히 은혜는 Protestant 종교개혁의 중심적인 신앙이 되었는데, 구원과 죄의 용서에 있어서 ‘오직 은혜’(sola gratia)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행위와 노력과 공로로 스스로를 영적으로 구원할 수 없다(요 1:12).  사도 바울은 구원을 인간의 성취가 아닌 선물이라고 에베소서 2장 8-9절에서 밝혔다.

Calvin도 인간의 구원에 역사하는 힘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인식하였다.  인간의 죄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받을 사람을 택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인간은 믿음으로 응답해야 한다.  그것이 Protestant 교회가 또 다른 명제 ‘오직 믿음’(sola fide)를 확증한 이유다.  그러나 인간의 그 믿음조차 구원에 필요한 구성요건은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협력이나 공동의 행위를 의미하는 능동적인 사고는 없었다.

Wesley 역시 에베소서 2장 8-9절을 언급하면서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믿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신다.  사람은 구원과 죄 용서를 받을만한 공로가 없다(롬 3:9).  그러나 Wesley는 은혜가 아직 효과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은혜는 인간 편에서 행하는 응답의 결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언제나 효과적이게 하고 성취하는 것으로 보았다.  Wesley는 하나님에게 나와서 사람들에게 미리 주어지는, 후에 ‘선행은총’(Prevenient grace)으로 알려지는 ‘먼저 주어지는’(comes before) 은혜를 생각하였다.  그 은혜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을 이끌어내고, 유지하고, 완성시킨다.  그러므로 인간 편에서 구원을 위하여 행동하거나 보상으로 받을 만한 자격 등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vicarious)을 통해 제안한 구원의 초대에 대하여 인간은 수락이나 거부라는 두 가지 응답 중에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어야 한다.  Wesley의 선행은총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Anglo Catholic tradition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수백 년 동안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 더 나아가 두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믿고 행했는지 살펴보겠다.  먼저 Calvin은 ‘하나님의 통치 법칙’(God’s sovereign rule)으로 사람들의 삶 속에 유효하게 효과적으로 일하신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영적인 조건에서 은혜를 더하거나 덜어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 인간을 구원하고, 일시적이든 영원하든 사람을 존귀하게 하신다.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에 사람의 믿음은 ‘오직 수동적’(merely passive) 일뿐이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도들은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소망의 유일한 근거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에 연결되어 자유롭고 의로운 존재가 될 때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칭의와 관련하여 믿음은 단순히 수동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의 부족을 채우시는 그리스도에게 의지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

비록 ‘회심’(Conversion)의 결과로 사람들이 선행(good works)을 베푼다 해도, 그것은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이 점에서 Calvin은 성서와 함께 Augustine의 입장에 서는 일관된 모습을 유지하면서 “오직 은혜만이 모든 선한 행실을 가져온다”(Grace alone brings about every good work)고 말했다.

더 나아가 Calvin은 Roman Catholic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Catholic Church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돕는 협조자로, 먼저 베풀어 주신 은혜가 작용하지 않게 하거나 아니면 순종함으로 작동하게 하는 것이 사람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은혜를 ‘협력하는 은혜’(assisting grace)로 부르건 ‘수용하는 은혜’(accepting grace)로 부르건 상관없다.  Calvin은 인간에게 영적이고 영원한 삶을 향하여 갈 수 있는 진정한 능력이 없다고 믿었다.  그러한 일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고 보았다.  후에 Calvinists 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라고 설명하였다.   사실 Calvin은 ‘저항할 수 없는’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유효성을 이야기하였고, 하나님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유효하게 ‘실행하거나 성취하는’(carry out or accomplish) 방식에 대하여 말했다. 

Calvin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자연적이거나 영적인 능력이 있다는 말은 형식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강요』에서 나오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을 바라보거나 시험하는 데 대해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은 없다”

Wesley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였다.  그는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선행적인 역할을 강조하였다.  선행은총은 Wesley가 자란 Church of England 안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개념이었다.  선행은총은 ‘먼저 주어지는’(comes before), 혹은 ‘선행하는 은혜’(preventing grace)로 알려졌는데, 사람들을 하나님의 인도하기 위하여 그들의 삶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행위’(universal work)를 의미했다.  Wesley 당시에는 이 말이 ‘준비하다’(preparing) 혹은 ‘가능하게 하다’(making possible)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여러 차원과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이 거룩한 인도에 응답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성경과 관련해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는 방식과 과정은 ‘신비’(mystery)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성경에도 분명하게 남아 있다.  만일 사람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고 여겨진다면, 마찬가지로 구원에 대해서도 응답할 필요가 있다(막 16:16).  선행은총은 사람이 구원의 선물과 하나님이 주시는 다른 복들에 대하여 응답하거나 응답하지 않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구체적으로 구원의 문제와 관련하여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에서 Wesley는 선행은총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가장 큰 소망으로 삼고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것이 가장 높은 깨달음이 되며,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범하는 것을 일시적이지만 가장 먼저 느끼게 된다”라고 말했다.

반대로 Calvin은 오직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면서, 구원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즉각적인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행위를 통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인간의 입장에서 은혜를 보장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은 인간을 위한 구원의 수단이나 조건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없다.  구원을 얻겠다고 인간 편에서 할 수 있는 조건이나 사전 준비는 아무것도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선택이 무조건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Wesley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협력을 강조하는 관계성이 마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책임지는 것처럼, 어떻게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의 자연적인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Wesley가 거저 주시는 은혜를 기술한 이유이다.  물론 Calvin 은 당연히 Wesley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구원에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비록 은혜를 통할지라도, 인간에게 ‘조건부’(conditionality)를 허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능력과 위엄을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Wesley는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할 때 그들에게 진정한, 즉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아닌 역할 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 ‘준비된 영생의 선물’(gift of eternal life)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사랑하길 하나님이 바라신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이미 결정된 대로 움직이는 로봇, 즉 Humanoid Robot 같은 인간을 창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비록 하나님과 구원의 축복을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일정한 자유를 가진 인간을 창조하기 원하셨다(창 2:16-17).  이 같은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limitation of ability)가 아니라 ‘사랑의 표현’(Expression of love)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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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실제로 그를 믿는 자들의 죄 값만을 지불하셨는가 아니면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죄 값을 지불하셨는가?”  “오직 선택받은 자만을 위해 죽으셨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인가?”  만약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다면 왜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가?”라고 누군가 질문을 한다면, 그에 대한 답변은 ‘전택설’ 견해를 취하는가 아니면 ‘후택설’ 견해를 취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먼저 전택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할 것을 작정하시기 전에 이미 일부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따라 구원하지 않기로 작정하셨다는 ‘이중예정론’을 주장한다.  반면에 후택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전택설적 예정론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구원 얻을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을 미리 알고 그 사람의 믿음을 조건으로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전택설 입장은 하나님의 절대 예정을 강조하고, 후택설 입장은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선택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의 믿음이나 선행에 대한 예지와 무관하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무조건적으로 선택했는지 아니면 하나님은 유기될 자들의 죄(불신앙)에 대한 예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을 정죄받도록 예정했는지에 대한 Calvin의 ‘이중예정론’은 오늘날 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Calvin이 그리스도가 택한 자들만을 위해 죽었다는 ‘제한속죄’를 믿었는지 혹은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위해 죽었다는 ‘보편속죄’를 믿었는지에 대해서도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Calvin의 속죄 범위에 대한 논쟁은 크게 두 부류로 갈라진다.  하나는 제한속죄론을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W. R. Godfrey, R. A. Muller, J. H. Rainbow)과 다른 하나는 보편속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B. G. Amstrong, R. T. Kendall, J. B. Torrance)이다. 

이러한 Calvin의 속죄론을 가지고 Augustus H. Strong은 『Systematic Theology』에서 “Calvin은 그의 초기저서 『기독교강요』에서 속죄의 범위에 관한 자기의 결정적인 견해를 피력해 왔으나, 그의 후기 저서인 ‘주석’에서 보편적 속죄설에 동의를 표했다. 그런즉 전택설은 단순한 칼빈주의적이라기보다는 초극단적인 칼빈주의적이다”라고 말했다.  보편속죄론을 주장하는 B. G. Amstrong도 Calvin이 보편적 속죄교리를 강조하지만, Theodore Beza와 16-17세기 강성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제한속죄를 말하는 것처럼 잘못 해석되었다고 주장한다.

먼저 보편속죄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해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있다(요 1:29).  하지만 그 효과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의 주로 영접하고(요 1:12),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에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막 16:16).  이들은 많은 성경구절들 중에 중요한 두 구절 디모데전서 4장 10절과 요한일서 2장 2절을 내세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죽음은 온 인류에게 충족하나(고후 5:14), 제한된 수의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택함 받은 자의 구원을 보충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구원을 효과적으로 보증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롬 10:1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롬 10:13). 

이러한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모든’(all)이란 단어와 ‘전체’(whole)라는 말은 언제나 그 의미대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가이사가 다스렸던 당시에 온 천하 사람들에게 호적등록 할 것을 명령했을 때(눅 2:1-5), 여기서 말하는 ‘온 천하’란 로마제국 전역을 말하는 것이지(행 11:28),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모든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두 구절에서 나온 ‘모든 사람’과 ‘온 세상’은 지리적으로 다른 지역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특별히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향하신 것처럼(신 7:8, 암 3:2),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 모든 지역에 있는 택함 받은 자들을 향한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제한속죄론을 지지하는 사람 역시 그리스도는 성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사람을 위해 죽지 않을 것을 강조한다(요 6:37-40).  이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자기 백성(마 1:21)과 자기 양(요 10:15), 그리고 자기 피로 산 교회(행 20:28)만을 구원하셨다고 주장하면서 로마서 9장 11-13절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들고 나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무차별적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의 소망으로 이끌지 않으시고(요 6:44), 오직 창세전에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엡 1:4), 구원을 허락하시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그 구원에서 제외시키셨다고 주장한다.  즉 속죄의 적용은 오직 하나님의 소요된 백성만을 위한 것이지(벧전 2:9), 유기자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요한복음 6장 37-40절에 나오는 말씀은 제한속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에 특정 수효만이 택함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즉, 그리스도의 속죄가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는 않으나 모든 사람에게는 유효한 것은 사실이고(요 12:32),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지만(딛 2:11), 구원은 실제로 정한 수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보충설명을 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과 유일한 관계이기 때문에(히 2:9), 이 관계를 거부하거나 거스리는 자는 그 결과를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러한 양쪽 견해를 살펴보면 서로 간의 동의하는 부분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 것(막 16:15-16)과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것이다(행 1:8).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의 죽으심이 충분한 지불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되었는지,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의 죄 값만을 지불하였는지(마 1:21), 아니면 모든 사람들의 죄 값을 지불하였는지를 놓고 볼 때(딤전 4:10), 이것은 각 개인의 성경해석과 판단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해야 한다(롬 12:3). 

문제는 신학과 신앙에 균형 잡히지 않는 사람과 마귀에게 쉽게 충동질당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신학적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거나 쓸데없는 논쟁을 야기시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편을 갈라 분쟁을 일으키게 만든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Wayne A. Grudem이 말한 것처럼 성경은 이 난해한 교리를 매우 중요하게 따로 취급하거나 명백하게 신학적으로 자세하게 설명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 보편속죄론보다 제한속죄론이 좀 더 강력한 논리적 기반을 가진 듯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다른 교리적 혹은 실제적 문제들을 다루는 구절들에서 추론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질문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 안에 일어나는 일을 파고드는 것이기 때문에 단정해서 결론지을 수 없는 문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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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Wesley는 성경의 중심적인 교훈은 하나님의 능력(power of God) 보다 사랑(love of God)을 강조한 것이라고 믿었다.  하나님의 통치(sovereignty)) 능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능력은 성경에 나타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온전하게 읽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Explanatory Notes upon the New Testament』에 기록된 요한일서 4장 8절에 대한 주석에서 Wesley는 사랑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통치의 특성으로 하나님의 모든 다른 완전함에 따뜻한 영광을 더해 주는 특성이다”

물론 Calvin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말하였다.  『기독교강요』에 나온 그의 말을 들어보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대가 없이 기꺼이 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사랑을 경험하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일에 빠져들게 된다”  Calvin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대속의 사역이 기인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그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엡 1:4-5)’ 세워지고 굳건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당연하고 성경의 교훈에 부합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고 선포하는 말씀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다.  Calvin의 신학에서 사랑은 중요한 요소이지만 가장 우선적인 강조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강요』의 소제목들을 잠시 살펴보면 Calvin이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의 지식, 율법과 복음, 은혜의 유익함과 영향 그리고 교회에 대하여 특별하게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 장의 주제는 성서,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거룩한 역사, 신앙, 영원한 선택 등이다.  그런데 사랑은 『기독교강요』의 소제목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Calvin은 다른 저작들에서도 사랑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적어도 Wesley가 기대한 것처럼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이 문제를 조금 더 다루고자 한다.  복음주의 신약 신학자 Leon Morris는 요한일서 4장 8절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썼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말은 하나님은 사랑하신다는 의미보다 더한 것을 의미한다. 즉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할만한 대상을 찾으셨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본성이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들,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 주의(Augustinianism) 자들은 사랑과 같은 것들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Essential Attributes of God)이라는 생각을 반대한다.  예를 들어 Calvin은 이런 개념을 주의 깊게 고려하면서 신중히 반대했다.  그가 이 개념을 거부한 이유는 명확하다.  만약 하나님이 사랑과 자비의 대상으로서 모두가 아니라 어떤 이들만을 자유롭게 선택하시는 분이라면, 그 말은 곧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과 자비를 오직 제한된 이들에게만 베푸시는 분이라는 의미가 된다.  또한 이 말은 하나님이 어떤 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Calvin의 『기독교강요』는 무려 1500페이지나 된다.  이 책에서 그는 성경의 증거를 따라 기독교 교리를 요약적이지만, 전체적으로 다룬다.  Westminster Press가 편집한 『기독교강요』의 성경 색인은 한 페이지를 3단으로 구성했음에도 39페이지나 된다.  이렇게 방대하고 철저한 책에서도 Calvin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요한의 진술을 충분히 논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Calvin은 이 구절들을 무시하고, 이 주제에 대해 설명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개혁주의 신학자 Louis Berkhof도 자신의 『조직신학』 책에서 이 구절들을 한 번도 인용하지 않았다.  제한적 선택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Knowing God』의 저자 J. I. Packer 역시 이 구절에서는 논리적 모순으로 걸려 넘어졌다.  하나님의 사랑이 제한적으로 선택된 이들에게 한정된다고 주장하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은 요한일서 4장 8, 16절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이것이 제한적 선택교리 안에 있는 모순되고 어색한 점이다.  할 얘기는 많지만 여기까지만 하겠다.   

Wesley가 하나님의 사랑의 역동적인 성격을 강조한 이유 중 하나는 삼위일체(Trinity)를 관계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세 위격(three persons)이 사랑의 관계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Wesley는 성부, 성자, 성령의 본성을 지닌 삼위일체의 신비에 관하여 별로 의문을 갖지 않았다.  대신 성령을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지속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이 ‘새로운 창조’라고 보았다.  The New Creation에서 말한 것처럼 “세 분이 하나가 되는 하나님과 그 안에서 누리는 모든 피조물들의 지속적인 기쁨이다”.

Wesley가 삼위일체 교리에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Calvin이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에 비판적인 관점을 발표한 Spain 출신 의사이자 신학자인 Michael Servetus를 처형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The Works of Wesley, Vol. X』 에서 Wesley는 말하고 있다.  “나는 그 같은 용어가(삼위일체나 위격) 아주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산채로 사람을 불에 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마르지 않은 생나무로 서서히 불을 지퍼 죽이는 것은 더욱 그렇다”    차후에 이 문제도 조금 더 살펴보겠다.

Wesley는 하나님의 통치와 사랑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보완한다고 보았다.  물론 Calvin도 하나님의 통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 설명할 때 비슷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Calvin은 하나님의 사랑보다 하나님의 통치를 훨씬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Wesley는 하나님의 사랑의 동인(動因)이 하나님의 통치라고 말한다.  God’s Love to Fallen Man』에서 기록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저주받은 죽음으로 내어줄 정도였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독생자를 그것도 아버지와 동일한 영광과 위엄과 영원성을 가진 아들을 내어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Calvin이나 Calvinists과 달리 Wesley는 하나님의 사랑과 온유가 하나님의 모든 특성들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Predestination Calmly Considered』에서 그는 다시 말한다.  “성서는 ‘하나님은 정의시라’, 혹은 ‘하나님은 진리시라’고 기록하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기록하였다. 사랑은 관념적이고 한계가 없으며 ‘그의 선하심은 끝이 없으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뿐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도 확대된다. 하나님은 악인과 감사하지 않는 자들에게까지 선을 행하신다”

Wesley는 Calvinists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 대신 하나님의 통치와 능력을 강조하는 모습을 특히 염려하였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타락하거나 선택하지 못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선대 하거나 사랑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두 가지 표현 중에서 고를 수 있다. 무조건적으로 선택된 사람들 외에 구원받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면, 이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 동일하다). Calvin이 분명하게 언명한 대로 ‘살아서 수치를 당하고 영원히 죽는(in vitae contumeliam et mortis exitium)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의 영원한 지위를 생각한다면 그가 하나님의 사랑이나 선하심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Wesley의 관점에서 특별히 구원받을 사람의 선택과 유기에 대한 하나님의 역할에 집중하는 Calvin의 하나님의 교리는 『Free Grace』에서 말한 것처럼 ‘신성모독의 교리’이며, 하나님을 “더욱 잔인하고, 더욱 잘못되고, 악보다 더욱 불의한 존재로 만든다”  독일 개혁주의 전통에서 자라난 Philip Schaff는 20세기 초에 활동한 세계적인 교회사학자다.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8 vols』 에서 Calvin과 Calvinists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칼빈주의는 어거스틴 계열의 신앙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유익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제한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선택된 소수의 사람에게만 적용하고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요 3:16)을 무시하는 근본적인 오류를 갖고 있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하나님의 통치 신학이다”

Calvin과 Wesley  모두 하나님의 통치와 능력, 위엄을 믿었다.  Calvin은 그러한 믿음을 가질 때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며, 사람은 그 모든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Wesley는 그러한 믿음이 자유를 훈련하는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거룩한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고, 결과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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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를 믿었.  『기독교강요』 머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선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살며 기동 하므로’(행 17:28),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곧바로 하나님을 묵상하는 데로 생각이 옮겨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그 굉장한 재능들도 그 근본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며 사실상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생존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Calvin의 관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확언들은 성서(Bible), 혹은 그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대로 성경(Scripture)이 분명하게 가르친 내용이다.  성경의 모든 구절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 지식과 현존(presence)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Calvin은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을 말했는데, 그 능력은 ‘하나님의 전지전능’(God's omnipotence)을 의미한다.  『기독교강요』에 기록된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가 행동하실 수 있지만 때때로 행동을 멈추고 한가하게 앉아 계시거나 아니면 미리 정해 놓으신 자연의 질서를 그저 일반적인 충동을 통해서만 지속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그의 섭리로 다스리시며 자신의 뜻이 아니고서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도록 모든 일을 운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독자들은 섭리라는 말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나님이 하늘에서 한가하게 구경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열쇠를 쥐고 모든 사건을 지배하신다는 뜻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Calvin은 하나님의 섭리(God's providence)를 말하면서 영원한 형벌로 고통받게 되는 타락의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장한다면 어떻게 인간들 가운데 타락하는 이들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는 분명하게 타락을 포함하는 모든 미래의 일이 창조 이전에 이미 정하신 하나님의 의지, 혹은 명령에 의하여 일어난다고 믿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계획으로 오래전에 선택하여 구원을 받게 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있고, 반면에 멸망당하기로 결정한 사람들도 있다”  그는 계속하여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시하는 자를 저주하시는데, 이는 그가 자녀 삼기로 예정한 상속자들의 반열에서 제외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확언에 담긴 논리적인 의미에 주목하면서 실제로 굳게 믿었다.

더 나아가 Calvin은 『기독교강요』 첫 장부터 하나님이 사람에게 모든 것을 제시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사람들에게 지나친 신학적 호기심을 갖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모든 인간의 지각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먼저 예정에 대하여 질문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의 거룩한 경내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그릇된 확신으로 이 영역을 망가뜨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호기심을 만족하기는커녕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궁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Calvin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억제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가르쳤다.  인간은 자신이 갖고 있는 의문과 염려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대답할 능력이 없다.  영생(eternal life)에 관한 질문과 염려는 더욱 그렇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들의 모든 의문과 염려에 대답할 충분한 능력을 갖고 계신다.  물론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압도적인 상황을 생각한다면, 유한하고 죄 많은 인간을 도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진 유일한 하나님께 겸손하게 순종하는 것 외에 어떤 선택도 없는 것 같다.  성경이 분명하게 기술하지 않고 최소한의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문제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이 제기하는 모든 물음과 염려에 답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Wesley 역시 하나님의 통치를 믿었다.  『Thoughts upon God’s Sovereignty』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창조자로서 하나님은 만물 안에서 그의 통치의 뜻대로 행하셨다.  … 하나님은 가장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가 뜻하신 일을 모두 행하실 것이다. 그에 따라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지으시고 만물이 그 안에 있게 하셨으며, 그의 선하신 기쁨에 따라 모든 것이 보기에 좋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었다.   다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고 또한 전지전능하시더. 그의 능력과 현존에 한계가 없다는 말이다. 그는 강한 팔과 능한 손을 가지고 오른손을 높이 드셨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모든 깊은 곳에서 당신이 기뻐하는 모든 일을 행하신다.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모든 일이 가능하다. 하나님이 뜻하는 모든 일은 그와 함께 현실이 된다”

그러나 Wesley는 하나님의 주권(God's sovereignty)과 거룩하심(Holiness)을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성서적으로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은 그분의 거룩하심으로 보았고, 거룩하심이 전능하심보다 앞선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The Unity of the Divine Being』 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거룩하심은 전능하고 전지 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이다. 그분은 악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무한한 거리에 계신다. 그분은 ‘빛이시고, 그래서 그분 안에 어둠이 있을 수 없다’ 그분은 한 점 흠 없는 정의와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출애굽기 33장 17-23절과 34장 5-7절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의지로 행동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면서, 자신의 통치를 축소하지 않으신다.  실제로 Wesley는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랑과 믿음과 소망 안에서 자유롭게 하나님에게 응답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위대한 성취로 해석하였다.  확실히 인간 편에서 볼 때 의지의 능력은 확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God's Reign)를 확인하는 것이 하나님이 스스로 거룩한 능력을 제한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Wesley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보다 인간의 주도권을 주장한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와 반펠라기우스주의(Semi Pelagianism)에 반대하는 Calvin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사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를 둘러싼 기독교의 논쟁은 Wesley와 Calvin 이전부터 오랫동안 지속된 논쟁이었다.  그러나 논쟁에 기름을 부은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특별히 바울이 강하게 부정했던 인간의 선행과 공로로 구원을 말하는 모든 종류의 펠라기우스적 입장에 대한 Augustine의 정죄를 다시 소개하면서부터였다.  불행하게도 Calvin과 Augustine처럼 둘 중의 하나를 택하는 방식으로 논쟁을 전개하였다.  즉 인간의 공로로 구원을 얻듣지(Pelagianism), 공로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듣지(Augustinianism) 둘 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논쟁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교회사에서 일어났던 두 가지 관점 이상의 지평을 가지고 있었다.  Augustine이 펠라기우스주의처럼 선행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던 반펠라기우스주의자를 반박하며 주장한 것 같이, 반대쪽에는 반(半) 어거스틴주의(Anti Augustinianism)라는 부를 수 있는 입장도 있었다.  교회사에서 반어거스틴주의는 어거스틴주의(Augustinianism)를 대체하였고, Luther와 Calvin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반어거스틴주의는 Catholic Church, Orthodox Church, Anglican Church에 주로 수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하나님의 예정론(Predestination)에 대한 정통 어거스틴주의 입장과 대립하면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켰다.  반어거스틴주의 관점을 보여준 대표적 인물들로 Caesarius of Arles, Thomas Aquinas,  Desiderius Erasmus를 들 수 있고, Calvin 이전에 살았던 많은 이들이 그러한 입장을 자기고 있었다.  반어거스틴주의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인간의 구원을 주도하고, 지속하고,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라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수용할 것인지, 거부할 거인지 선택해야 한다.

Wesley는 자신이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의 자유를 함께 강조한 영국교회(Anglican Church)의 신학 전통에 충실하게 서 있다고 인식하였다.  만일 그가 Calvin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점이 있다면, 그가 자라고 교육과 안수를 받아 충실하게 봉사했던 성공회 전통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Wesley가 당대 Calvinist들의 견해에 공감하지 못한 점들이 많았던 것은 분명하다.  Wesley는 Augustine과 Calvin으로 이어지는 개신교회 전통보다 Catholic Church와 성공회 정통(Anglican tradition)이 성경의 가르침을 보다 충실하게 반영한다고 확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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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ley는 23살에 사제(Priests)로 안수받은 후에 Oxford University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성직자로서 모든 의무를 수행하며, 말씀을 전하고 성례전(sacraments)을 집례 하였다.  유럽의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성공회도 두 가지 성례전, 곧 세례(baptism)와 주의 만찬(Lord’s Supper)을 인정하였다.  부흥운동 초창기, 복음전도자 George Whitefield는 식민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Wesley에게 야외설교를 권유하였다.  처음에 Wesley는 교회당 밖에서 설교하는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후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회심하는 역사를 이루었다.  그는 성공회 지도자(Anglican leaders)들이 전통적이지 않은 사역 방식에 대하여 비판하자 ‘세계는 나의 교구다’(I look upon all the world as my parish)라는 유명한 말로 응답하였다.

Wesley는 ‘신도회’(Methodist society)라고 명명한 주중 집회를 시작하였다.  오늘날 교회에서 주중에 드리는 예배와 많이 비슷하다.  그러나 당시에 주중 예배는 아주 새로운 기획이었고, 주일 아침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와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친밀한 교제를 원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하는 것이었다.  Wesley는 다시 한번 성경이 가르쳐주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다양한 은혜의 수단에 기도와 성경공부, 금식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역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Wesley가 『Hymns And Sacred Poems』에서 “다른 경건은 없고 오직 사회적 경건(social holiness)만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공동의 친교와 책임이 없이는 거룩한 생활을 드러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소그룹 안에서 제자들을 친밀하게 성장시킨 것처럼, 다양한 모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으로 성장하고 효과적으로 사역하게 하는 분명한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실제로 감리교인들은 여러 형태의 소그룹(small groups)을 통하여 전도(evangelism)와 제자훈련(discipleship), 구제사역(ministries of compassion)을 수행하였다.

Wesley가 보여준 성령의 철저한 임재와 능동적인 역사에 대한 믿음은 창조적인 사역의 중요한 동력이었다.  Calvin과 달리 Wesley는 오늘의 세계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활동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성령이 신자들에게 ‘영적 열매들’(갈 5:22-23)과 함께 ‘영적 은사들’(롬 12:6-8, 고전 12:4-11, 엡 4:11)을 준다고 믿었다.  신자들은 이 은사들을 사용하여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은사중지론자(cessationist)들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Wesley는 신학적으로 ‘은사지속론’(continuationism)에 가까운 입장을 가졌다.  물론 그가 이러한 용어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성령이 신자들 안에서 그들을 통하여 능동적으로 역사하기 원한다고 분명하게 믿었다. 

사역에 있어서 Wesley가 남겨준 가장 큰 공헌은 감리교회의 평신도 사역자를 파송하여 각종 회의를 인도하도록 한 것이었다.  더욱이 감리교회가 놀라울 정도로 부흥하면서 교인들을 돌불 수 있는 안수받은 목회자들이 충분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평신도 사역자들이 여러 가지 지역을 순회하면서 ‘신도회’(Methodist society)를 지도하고 소그룹에 속한 신자들의 다양한 요청을 들어주었다.  특별히 안수받은 목사가 필요한 경우, 예를 들어 공식적인 예식이나 성례전을 집례 해야 하는 경우에 Wesley는 안수받은 목회자들을 신도회에 보냈다.

Wesley가 처음 시도한 가장 용감한 실천은 여성을 평신도 지도자로 파송한 것이었다.  이는 교회사에 전례가 없는 경우로, 그 역시 이 문제가 교회 부흥운동에 가져올 수 있는 잠재적인 논란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Wesley가 여성 사역자들을 신도회에 파송한 것은 어머니 Susanna Wesley의 격려에 크게 힘입은 것이고, 성령이 남성뿐 아니라 여성에게도 은사와 달란트를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고전 12:4-11).  성경은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을 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고전 14:34, 딤전 2:11-12), Wesley는 성경 본문들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여성 지도력과 관련한 가르침들은 공적인 사역에서 여성 지도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되었다고 해석하였다.  평신도 여성 사역자들은 주어진 기회에 응답하였고, 속회와 밴드 모임에서 여성 신자들을 인도하면서 효과적인 사역이 이루어졌다.

Wesley가 평생 동안 가장 놀라운 지도력을 보여준 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그가 기독교의 사회 참여를 특별하게 실천한 사람은 아니지만, 교회사에 나타난 교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너무 자주 간과하였다.  반면 Wesley는 가난한 사람들을 ‘그리스도가 돌보셨던’(Christ's poor) 사람들로 생각하면서, 그들을 돌보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자신의 설교 『The Use of Money』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에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는 명령이 수백 군데 나온다고 믿었다.  무엇보다도 구제사역을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의복, 현금을 지원하였고, 감옥을 방문하였으며, 고아원을 설립하고, 어린이들을 위하여 무료에 가까운 학교들을 세웠다.

또한 Wesley는 노예무역(slave trade)에 대하여 크게 분노하였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노예로 삼아서는 안되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살게 해서는 안 되며, 가족을 흩어지게 하거나 신체적으로 학대해서는 안 되며, 저항하는 노예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가난과 불의한 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구제 사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가난해지는 근본 원인을 개선하는 사역을 지원하였다.  그에 따라 교도소 개혁(prison reform)과 노예제 폐지(abolition of slavery)를 위한 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Thoughts upon Slavery』라는 소책자를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자유는 창조된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권리다. 때문에 인간이 만든 법은 자연의 법이 부여하는 인간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Wesley는 생애 마지막 편지를 노예폐지론자인 William Wilberforce에게 썼다.  이 편지에서 Wesley는 Wilberforce가 영국 의회에서 노예 교역에 관한 법들을 바꾸려는 노력이 정당하다며 꾸준한 노력을 요청하였다. 

Calvin과 Wesley 모두 교회 사역에 크게 기여했지만, 사역의 방법에 있어서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갔다.  Calvin은 권위를 중시하는 강력한 ‘하향식’(top-down) 방법론을 선택하였다.  그는 엄격하게 구별하여 지도자들을 선정하고, 특별히 설교와 성례전의 집례를 훈련하고 그들을 통하여 교회를 유지하는 승리주의 관점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였다.  Calvin은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에 창조적으로 응답하는 사역보다는, 개혁주의 전통(reformist tradition)이 이해하는 것처럼,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신학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에 충성하는 일에 주된 관심을 가졌다.  때문에 그는 개혁교회가 해석한 정통 기독교 신앙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 논쟁하면서, 정통주의를 선포하고 수호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교회 안에서 논쟁(polemics)과 변증(apologetics)이 필요한 경우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사역에서 그러한 부분이 중심이 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Calvin은 순수한 복음선포와 성례전의 집례를 유지하는 것이 사역의 중요한 영역이라고 이해하였지만, 오히려 신자들을 통제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Calvin은 목사와 교사들이 신자들을 훈련시키고 지키는 사람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훈련은 신학의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서 질문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요구에 혁신적인 해결을 발견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반대로 Wesley는 신자들과 사회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을 사역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혁신적이면서 성경적으로 건전한 방식을 폭넓게 수용하였다.  그는 여성 지도력의 강화를 포함하여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지도력을 함께 강화하였다.  또 이를 통하여 영적으로 뿐 아니라 물리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역을 포함해 교회 사역의 범주를 크게 확대하였다.  Wesley는 사역에 나타나는 모든 문제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따르면서 성령의 지속적인 임재와 능력을 힘 일을 때 하나님의 선교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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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의 사역론에서 가장 강점을 지닌 부분이 설교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평생 동안 수천 번 설교했는데, 특히 Geneva에서 사역하는 기간에 집중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가 궁금한 것은 Calvin은 선생인가 아니면 안수를 받은 목사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그가 언제 정식으로 목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기록도 없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방식에서 Calvin의 안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Calvin의 전기,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를 쓴 John T. McNeill은 Calvin의  안수 여부를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안수를 받았다고 믿고 있었다. 

Calvin의 사역의 우선순위는 설교와 교육, 그리고 기독교 신학을 정리한다고 믿었다.  그는 성경적 설교에서 탁월한 전통을 남겼으며, 복음적 설교를 통하여 Protestant 교회에 물려준 위대한 유산(legacy)은 엄청난 유익을 끼쳤다.  더 나아가 Calvin은 성례(sacrament) 전을 강조하면서 두 가지 성례전, 즉 세례(baptism)와 성만찬(Eucharist)을 강조했는데, 이는 Luther를 포함한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과 유사한 입장이었다.  그는 성례전의 가시적인 요소들(visible elements)인 물(water)과 떡(bread)과 포도주(wine)가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을 보여주는 증거하고 강조하면서 성례전이 하나님의 ‘말씀’(word)인 성경에서 말씀하고 보증하고 성취한 죄 사함의 표지(sign)라고 믿었다. 

그러면 유아세례(infant baptism)에 대한 입장은 어떠한가?  Calvin은 유아 세례의 유효성을 확인하였는데, 『기독교강요』에서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를 검토하기로 한다면, …. 그리스도가 제정하였고, 이 예식의 본질에 가장 부합한다”라고 보았다.  또한 Calvin은 주의 만찬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특별한 열매가 된다고 확인하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경건한 영혼들은 이 성례에서 큰 확신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거기서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의 것은 모두 우리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증거를 얻는다. 그 결과 우리는 그가 상속하신 영생이 우리의 것이라는 확신을 감히 가질 수 있다”   이 외에도 Calvin은 교회의 다양한 실천에 관심을 가졌다.  예를 들면 시편(psalter)과 교리 문답(catechism), 세례와 성만찬을 포함하여 교회 안에서 행하는 예전(禮典)과 성례전을 발전시키는 일에 주력하였다.

Calvin은  Geneva와 Switzerland를 넘어 특별히 조국 France에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모든 시간과 권한을 사용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목회자들을 임명하여 France로 보내면서 프랑스어권(French speaking land) 전체에서 『기독교강요』를 가르치 하였고, 실제로 유럽 전체로 확장된 신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종교개혁이 지속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Roman Catholic Church와 비교되는 Protestant Church의 변증(apologetics)과 논쟁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특별히 『기독교강요』에 분명하게 나타난 것처럼, Catholic Church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개신교회의 가르침들을 넘어서는 정통주의(orthodoxy)와 신학적 해석을 보여주었는데, 그의 지도력과 신학자로서의 탁월성에 기초한 것이다. 

Calvin은 사역의 지도력 형성하는 과정에서 에베소서 4장 11절 말씀을 앞세웠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gifts)을 말하지만 Calvin은 은사들을 ‘직분’(offices)으로 해석했다.  다섯 가지 직분을 소개했는데, 사도(apostles), 선지자(prophets), 복음 전하는 자(evangelists), 목사(pastor), 교사(teschers)이다.  그는 앞의 세 직분은 이미 1세기에 거의 끝났다.  오직 목사와 교사, 두 직분만이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교회 안에서 지속되는 사역이라고 보았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말한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커질 수 있도록 주님은 교회 안에 이 보물을 맡기셨다. 주님은 목사와 교사를 세우셨고(엡 4:11), 그들의 입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가르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권능을 주셨다. 그리고 신앙의 거룩한 일치와 올바른 질서를 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으셨다”    

Calvin은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의 직분은 1세기의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일시적인 직분(temporary offices)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기독교강요』 에서 말한 것처럼 그 기능들은 목회적으로 ‘순위가 낮다’(lower in rank)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사역은 특별하고 반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별히 성경의 최종적인 정경화 작업(final compilation of the Bible)이 완결되었기 때문이다.   

Calvin은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의 직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 가지 기능은 교회 안에 영구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교회가 없는 곳에 새로 세우거나 아니면 구약 시대에서 그리스도의 시대로 옮겨지는 기간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주님께서 그 후에 간혹 사도들을 세우시고 필요한 곳에 복음 전하는 이들을 세우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바로 우리 시대에 일어난 일처럼 받아들인다. 적그리스도의 공격에서 교회를 구해내기 위하여 그러한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직분들을 특별하다고 부르는 까닭은 올바로 세워진 공교회 안에 이러한 직분을 위한 자리가 없기 때문에 ‘임시직’이라고 부른다”

 『기독교강요』를 편집한 John T. McNeill은 Calvin이 적그리스도인 Roman Catholic Church의 엄청난 압제와 맞섰던 Luther를 ‘마지막 때’(end times)의 사도로 인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초기 광풍이 지나간 후에 그러한 종말론적인 직분들은 사라졌다.  따라서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들이 가졌던 목회적 기능은 Calvin이 『기독교강요』에서 말한 대로 “현대의 교사들은 고대의 선지자에, 그리고 목사는 사도에 해당된다. 그러나 목사는 각각 그에게 맡겨진 교회를 다스린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사도들과 똑같은 책임을 맡았다” 즉, 세 가지 직분은 ‘정확하게 동일한 목적’을 가진 목사에 의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교회의 후기 시대에 성취되었다.  

그렇다면 Calvin에게 있어 성령의  은사는 무엇인가?  그는 우리가 사는 지금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종결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입장이 성경에 영감을 넣어주는 성령의 역사를 더 높이는 일이라고 믿었다.  먼저 야고보서 5장 14절에 나타난 치유를 위해 기름을 바르는 것을 직접 언급한 Calvin은 이 말씀이 ‘주께서 잠시 동안 나눠주기를 기뻐하신 기적의 능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것이 오직 사도들과 관련이 있으며 ‘우리와 관련이 없고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셨다’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면서 『기독교강요』에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주님께서 행하셨던 다른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치유의 은사는 복음을 더욱 경이롭게 영원히 전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위하여 사라졌다”  이러한 주장은 Calvin 개인의 생각이라고 믿는다.

Calvin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1세기 신자들의 사도적 역사 이후에 적어도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가장 근본적인 매개는 사람이나 교회가 아닌 오직 성경(sola Scripture)이라고 믿었다.  그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며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기적이나 치유 그리고 대부분의 영적 은사들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보았다.  성경을 통하여 인생의 모든 사건들을 해석하고, 그것이 진리로 인도하기 때문에 신자들이 원하는 초자연적인 필요에 응답하는 데에는 오직 성경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또한 Calvin에게 있어 목회 사역은 오직 남성에게만 주어졌던 것 같다.  그는 여성들에게 ‘교회 지도자로 공식적으로 섬기도록’ 허용하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필요에 따른 결정’이라며 거부하였다.   『기독교강요』에서 나오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Augustine이 태어나기 이전의 관습은 우선 Tertullian의 글에서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으며 가르치거나 세례를 주거나 성찬을 집례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의 직책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더욱이 Priests의 직책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궁금한 것은 고린도전서 14장 34절과 디모데전서 2장 11-12절 말씀처럼 여자는 늘 교회에서 조용히 있거나 잠잠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Calvin은 안수로 세워지는 집사 직임을 여성들에게 맡겼다.  다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여자들이 맡을 수 있는 공적 직분은 구제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뿐이었다. 이 해석을 인정한다면 또 인정해야 한다. 집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성경에서 집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교회가 구제 물자를 분배하며 빈민을 돌보고 빈민 구제금을 관리하는 일을 맡긴 사람들이다. 그들의 기원과 임명과 직분에 대해서는 누가가 사도행전에 기록했다(행 6:3). 그러므로 사도들의 교회에는 이런 종류의 집사들이 있었고 우리도 그것을 본받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서 여성 목사 안수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싶지만 지면 관계상 여기까지만 하겠다.

교회 사역을 더 많이 지원하기 위해 Calvin은 두 개의 영구적인 직분을 논의하였는데, 장로(elders)와 집사(deacons) 직이다.  먼저 장로들은 평신도 중에서 선택하여 교회 신자들의 징계를 포함하여 지도력을 함께 하도록 하였다.  가르치는 장로들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장로들도 있었다.  그들이 맡은 가장 우선적인 역할은 교회와 사역을 안정적으로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사들은 신자들의 형편을 살피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역을 중심으로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담당하기 위하여 임명하였다.  

중복되는 문제도 있지만, Calvin은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는 영구적인 네 개의 직분, 즉 목사, 교사, 장로, 집사가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구성은 교회의 다양한 사역들(various ministries)을 완수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었다.  사실 Luther가 만인제사장설(priesthood of all believers)을 주장했지만 Calvin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교 사역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하여 교회와 사역에서 목사와 교사, 그리고 장로와 집사의 권위를 더욱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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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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