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친분이 있는 목사님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방언’과 ‘예언’에 대한 주제로 옮겨지면서 적지 않게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목사님이 생각하는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귀신들린 사람이 옹알거리는 소리이고 예언은 성경이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말하면서 아주사의 부흥과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한마디로 계시가 종결되었기 때문에 계시에 수반하는 모든 은사도 종결되었는데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께 직접 방언을 하고 나서 귀신이 옹알거리는 소리라고 말을 하든지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고 나서 이것이 환청에 시달리는 것인지 그분의 음성인지 분별해야 할 것이고 본인이 체험해 보지도 않은 것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거나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제 개인기도 시간에 방언을 하고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기다릴 때 주님께서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말씀하실 때가 있다고 말하자 그분의 얼굴색이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어떻게 성령의 은사에 대해 그렇게 열려 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물었는데 “목사님 보시기에 제가 귀신이 들렸거나 ‘과대망상증’에 걸린 환자처럼 보이시나요?”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기사와 표적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귀신의 역사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데 왜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놀라운 역사가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생각한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인데(행 4:1-22), 이들에게 있어 진리는 자신의 신학과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눈앞에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이 나타나도 사탄의 역사라고 비난합니다(눅 11:14-23).  바로 이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며 이 죄를 짓는 사람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하는데(막 3:28-30), 그 이유는 자신의 판단이 주님보다 더 옳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요 8:15).  그렇다면 이 죄를 범한 자는 사함 받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반면에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마 12:32).  이 말은 인자가 성령보다 지위가 낮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기간 중에 그분의 메시야 신분을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사실 ‘인자를 거역하는 말’‘성령을 거역하여 말’을 실제로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어쩌면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분의 자비하심을 의지하여 겸손하고 경외하는 모습으로 나아간다면 이는 우리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자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역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주님과 요한의 대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이 주를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귀신을 좇아내는 일을 행하고 있었을 때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으로 생각했던(마 10:1), 요한은 분노에 가까운 명령으로 그 사람에게 이 일을 다시는 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고 예수님께 말합니다(막 9:38).  놀라운 사실은 이런 배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요한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노발대발하시면서 “그 사람이 행하는 것은 귀신의 역사야!”라고 단정해서 말씀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이에 대해 매우 포용적인 마음을 가지고 “금하지 말 것”‘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는데(막 9:39-40), 이 말씀의 의미는 설사 주님을 따르지 않더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다면 그들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무당이나 무속종교를 통해 병을 고치는 역사가 나타났을 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이름을 의지해서 병을 고쳤느냐는 것입니다(행 4:10).  분명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귀신의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고 거기에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곳에는 가장 존귀하신 예수의 이름이 없기 때문에(마 1:21), 그것은 귀신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다면 그러한 역사를 무조건 귀신들이 행하는 일로 쉽게 단정지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분별이 필요하겠지만(요일 4:1), 대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요 8:15), 좋은 태도를 갖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스스로의 신앙상태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요한처럼 배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내편이 아닌 사람을 무조건 모두 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분명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유대인 마술사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처럼(행 19:13-16),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기적을 행한다면 그는 주님을 반대하는 자가 아니며(눅 11:23), 만약 이런 사람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와 은사를 귀신의 일로 치부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을 금하신 적이 없는데 인간이 진짜니 가짜니 판단하는 것은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고(마 12:36-37), 만약 누군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성령의 사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가마리엘이 한 말을 기억해야 하며(행 5:34), 여러분이 성령의 사람이라면(롬 8:14, 고전 2:14-15),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을 입술로(잠 18:21), 모독하는 죄는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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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목사님이 큰 교회에서 그를 담임목사로 초빙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어떤 작은 교회에서 그 목사님에게 전화를 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곳에 오셔서 담임목사님으로 사역해 줄 수 있으시겠습니까?”

“글쎄요, 안 되겠는데요”라고 그 목사님이 즉시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여기서 하나님이 주실 임무를 기다리고 있어.

나는 너무나 많은 교육을 받았어.

나는 그것보다는 좀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해”

 

그 목사님의 응답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보셨습니까?

당신이 작은 일에 충성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큰 임무를 맡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인생과 성품을 작은 임무에게 맞게 조정하신 후

나중에 그것을 통해서 큰 임무를 맡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시는 지점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자신을 조정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을 경험으로 알게 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당신의 삶에서

당신을 통하여 일하시는 경험을 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을 하나님께로 맞추고

하나님이 당신을 어디로 인도하시든 따라가는 그런 관계를 맺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임무가 작든, 중요치 않든 간에

당신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마 25:21),

말을 듣고 싶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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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 연방대법원에서 벌어졌던 “Lawrence v Texas”사건에서 6대3으로 텍사스 주의 ‘소도미법’(Sodomy law), 즉 동성 간의 성적 행위를 규제하거나 처벌하는 것이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려졌는데 당시 대법원은 결혼에 관계된 개인적인 결정과 개인적 취향에 따른 성행위는 미국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에 해당한다고 판시했고 같은 해 11월 매사추세츠 주 최고법원 판사 네 명이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막는 일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판결 이후 나머지 주들도 속속 ‘소도미법’을 폐지시켰는데 오늘날 미국내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주는 하와이를 비롯해 뉴욕, 워싱턴, 캘리포니아, 코네티컷, 델라웨어, 아이오와, 메인, 뉴햄프셔, 뉴저지,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메릴랜드, 매사추세츠, 미네소타, 등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런 와중에 미국을 대표하는 장로교단 중에 하나가 2014년 6월19일 221차 총회에서 목회자가 동성결혼을 주례할 수 있으며(동성애자의 결혼을 법이 허용하는 주 교회 내에서 집례 할 수 있다는 안을 통과시켰고), 결혼의 주체를 “남자와 여자 사이”(between a woman and a man)가 아닌 “두 사람 사이”(between two people), 즉 ‘사람’과 ‘사람’으로 바꾸는 안을 통과시켰고 더 충격적인 이야기는 낙태 도중에 살아서 태어난 아이를 처분(살해)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결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런 결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교단에 소속된 목회자들이 교단을 떠나지 못하고 총회 결정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만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사실 이들이 교단을 떠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만약 교단을 떠나기 위해서는 교회가 불이익을 감당해야 하는데 문제는 재산과 건물을 포기해야 하는 어려운 과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교단 법에 따르면 소속 교회의 건물은 원칙적으로 교단에 속한 것이고 무엇보다도 교단을 탈퇴하려면 노회와 재산 분배에 대한 논의를 거치거나 재산 일부(건물 반납)를 포기 혹은 부과된 부담금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 일례로 미네소타 주 미네아 폴리스에 있는 Hope Presbyterian Church는 교단을 떠나는 조건으로 120만 불 상당의 지교회 건물을 포기했고 같은 교단에서 9번째로 큰 대형교회 중의 하나인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Menlo Park Presbyterian Church는 2012년에 설립된 신생 보수 교단인 Evangelical Covenant Order of Presbyterians로 옮기면서 노회에 약 900만 불이란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는 대가로 교회 재산 전체를 유지한 채 교단을 탈퇴했습니다.  한마디로 건물과 돈에 대한 욕심을 과감하게 포기한 교회만이 이 교단을 떠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교회는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편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것은 “동성애를 죄라고 말할 수 있는가?”  또는 “동성결혼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이 논쟁에 대해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 있는 각 교단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 동성애에 대한 시선이 나누어지는데 남침례교(SBC), 연합감리교(UMC), 미국침례교회(ABCUSA), 전미복음주의협회(NAE), 하나님의 성회(AG), 미국개혁장로교(RCA), 등은 반대 입장을 확고히 했고 반면에 미국루터교(ELCA), 미국장로교(PCUSA), 성공회(Episcopal Church)의 경우 동성애자도 이성애자와 같이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성결혼을 찬성하고 지지했습니다.  John Stott는 이런 문제를 놓고 오늘날 현대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윤리적 도전 가운데서 동성애 논쟁만큼 급진적인 것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타종교 가톨릭 그룹인 “Call to Action”에 의하면 동성애는 죄라고 전통적인 자신들의 입장을 강하게 고수해 왔던 로마 가톨릭 교회조차도 미국에 있는 사제 중 약 40퍼센트가 성향에 있어 동성애자라는 충격적인 상황에 직면에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2003년 미국천주교(Catholicism) 주교 의회에서 발표한 “동성간 결합(Homosexual unions)은 결혼이라고 불릴 수 없고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 동안 신뢰하는 가운데 맺는 관계”라는 성명을 뒤집어 엎은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동성애에 대한 문제는 과거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고 우리 사회에서 익숙하지 않았던 현상이었지만 이것이 대중에게 공개되면서 사람들의 반응은 두 부류로 갈라지는데 한 부류는 동성애에 대해 혐오감을 갖는 ‘Homophobia’, 즉 ‘동성애 공포증’ 혹은 ‘동성애 혐오’를 갖는 사람들과 다른 한 부류는 ‘Homophilia’, 즉 동성 간에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면 결혼을 해도 무방하다고 보는 ‘동성애 옹호’자들로 나누어집니다.  여기서 동성애 공포/혐오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은 동성애자들이 비도덕적인 행동(항문교접)과 무서운 전염병(에이즈)을 옮길 수 있기 때문에 심한 거부감을 갖는 것이고 반면에 동성애를 애호하는 자는 결혼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하는 것 같이 서로 사랑하고 헌신하는 관계라면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없으며 누구와의 성관계를 갖는 일에 있어 정부와 사회는 개인의 성적취향을 막을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하는 것은 동성애에 대한 문제는 선과 악에 속하지 않는 제3의 영역 ‘아디아포라’(adiaphora), 즉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립적인 문제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동성애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보이고 있고(레 20:13, 롬 1:27), 물론 동성애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아니지만(요일 1:9), 만약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가증한 짓임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레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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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로맨틱한 것을 연상하는 사람이 있고,

사랑이 뭐냐고 물어 본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 ‘사랑’이라고 정의합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아마도 자기 부모요, 남편이요, 아내요, 자식이요, 형제일 것입니다.

남남이라면 보기 싫으면 안보면 됩니다.

서로 틀어지면 헤어져 버리면 그 뿐입니다.

그러나 남편, 아내, 자식, 부모한테는 그게 잘 안 됩니다.

피붙이인데 밉다고 수틀린다고 안보겠다고 해서 안보면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게 아닙니다.

미워도, 싫어도, 원수 같아도, 그래도 내 남편이요, 아내요, 자식인데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렇다고 숙명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나를 살피셔야 합니다.

내가 말도 안 되는 행동을 다 하고 별별 기막힌 죄를 다 짓고 다녀도

하나님께서 나를 오래 참아주시고 끝까지 용서해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셨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오래토록 참아주시고 무조건 용서해주셔서

오늘 이 자리까지 인도해 주셨듯이 지금 보면 미워죽겠는

저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언젠가는 구원해 주셔서

천국백성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믿고

그때까지 참고 끝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내 기준을 가지고 조급하게 내 남편, 내 아내, 내 형제를 정죄하는 자리에 서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에 나같이 미련한 것도 불쌍히 여겨주시고 기다려주신 그 하나님께서

언제 가는 저 사람도 변화시키셔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물론 속이 터질 때도 있고 오장육부가 뒤집어 지는 것 같은 때도 있지만

그래도 참고 견디며 기다리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어떤 ‘폼’ 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실상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아직 주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많이 부딪혀 가면서도

하나님께서 저 사람도 반드시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을 믿고

끊임없이 참고 이해해 주고 용서해 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저 사람은 능력이 있어!

뭔가 큰일을 하는 사람이야!

이런 소리 들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저 사람은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야!

저렇게 망신을 당하고도 참는 것을 보니까 저 사람은 오장육부도 없는 사람이야!

이런 평가를 받으려고 애쓰십시오.

물론 쉽지 않습니다.

하루아침에 되지도 않습니다.

성경말씀 몇 번 읽고 금식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노력하셔야 하고 기도해야 하며 성령님께 도움을 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참는 일을 바로 시작하십시오.

다음에 시간 있을 때 하겠다고 말하지 마시고 지금부터 시작하십시오.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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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혼 제도

연구자료 2014. 9. 10. 08:05

룻기에 보면 룻이 자기 남편이 죽은 후에 가까운 친척과 결혼하여 집안의 대(代)를 잇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본래의 수혼(嫂婚) 제도와는 약간 다른 점이 있다.  즉 신명기 25장5-10절 말씀에 의하면 남편이 죽었을 경우에 남은 여자는 죽은 남편의 형제와 결혼하여 자손을 낳아 죽은 자의 이름으로 대를 잇게 해야 하는데 룻은 남편의 형제와 결혼한 것이 아니고 가까운 친척 보아스와 결혼하였던 것이다.  또한 룻기에서는 죽은 자의 부인과 결혼할 경우 죽은 자의 기업을 물러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는데(룻 4:5), 신명기에는 그러한 내용의 기록이 없다.  하지만 룻기에 나오는 룻과 보아스와의 결혼은 유다와 다말과의 사건과(창 38장), 더불어 명백하게 이스라엘의 수혼 제도를 설명하고 있다.  다말은 원래 유다의 며느리였는데 그녀의 남편 엘이 죽자 유다는 엘의 동생 오난으로 하여금 다말과 동침케 하여 형의 대를 잇게 하려고 하나 오난은 자신의 임무를 회피하였다(창 38:8-9).  또 다른 동생도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자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와 성관계를 맺어 아이를 갖었다.  이 사건은 그 윤리성보다는 수혼 제도의 엄격성을 강조하는 데에 더 중점을 두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룻기의 기록에 의하면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더구나 기업을 무르게 되는데 이는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수혼 제도와는 많이 다르다.  기업 ‘무를 자’의(히/고엘), 의무가 첨가된 것이다.  이는 수혼 제도의 범위가 가족 간에 씨족 간으로 확대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며 동족간의 혈통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의 융통적인 운용(運用)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제도는 이스라엘 여자가 다른 이방 민족의 남자와 혼인하는 것을 방지하고 죽은 남자의 이름을 이스라엘에서 지키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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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사무실에 계약 문제로 아내와 함께 들리게 되었는데 Leasing Agent인 Susan과 모든 서류에 대한 일을 다 마치고 나서 사무실에서 나오려고 할 때 그녀의 왼쪽 발 전체에 orthopedic boot를 신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어보자 발가락 안에 있는 부러진 뼈를 2주 후에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마음에 감동이 와서 기도해 주어도 괜찮은지 물어보았을 때 Susan은 쾌히 승낙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무릎을 끊고 간절한 마음으로 치유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치유의 능력을 풀어 이 여성의 발가락에 부러진 뼈를 수술하지 않고 깨끗하게 고쳐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 그녀를 만났을 때 우리에게 이렇게 간증을 했습니다.  자신이 기도를 받고 나서 2주 후에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X-ray를 찍어보더니 부러진 뼈가 사라졌고 발가락이 정교하게 붙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의사가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말을 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수술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것은 Susan은 무신론자인데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과 상관없이 깨끗이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의 사역을 알기 전에는 ‘병 고치는 은사’(고전 12:9)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치유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조차 놀라운 일로 생각했는데 물론 성령께서 모든 일을 행하신다는(고전 12:11), 사실을 알았지만 기도할 때마다 거의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깊은 좌절감과 당혹감 속에서 치유를 위한 기도를 포기해 버리고 싶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이 사역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계속해서 치유를 위한 기도를 통해 성령이 행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의지할 때 그분에 대한 나의 믿음과 신뢰가 커져 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누군가 “믿음을 갖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럴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먼저 실천을 통해 배우게 되며 무엇보다도 믿음은 그러한 방법을 통해 자라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달란트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과감히 활용하지 않는다면 그분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빼앗아 잘 활용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것처럼(마 25:14-30), 예수님은 우리가 그것을 단순히 보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실수를 무릅쓰고라도 활용하기를 기대하고 계시기 때문에 믿음을 키워 나아가는 일 역시 실천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두 가지 일, 즉 복음을 선포하고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라고 명령하셨으므로(마 10:5-8, 눅 9:2, 10:9), 은사 받는 일에 있어 이 두 가지 일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님이 주신 은사를 잘 활용하고 발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과 치유사역의 형태에도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충실하게 사역을 행하면서 그러한 것들 가운데 과연 어떠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는가를 발견해 내어야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어떤 영역에서 은사를 받았는지를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내는 것 같지만 우리가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께서 명하신 일을 담대하게 행하기를 시작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일정한 형태의 치유사역을 형성해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치유사역은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데 성령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분의 뜻에 따라(고전 12:11), 각기 다른 치유의 은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든 종류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만(약 5:16),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종류의 ‘육체적 질병’, 또 다른 사람은 ‘마음의 병’이나 ‘귀신축출’, 그리고 ‘신체의 특정부위’에 대해서 잘 낫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들의 치유를 위한 기도를 통해 사역을 행하기를 원하신다고 믿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시면서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눅 10:19),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자를 고쳐주라고 분부하셨으며(눅 9:1-2), 나중에는 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제자로 삼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마 28:20).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에 의해 도구로 쓰임을 받고자 원한다면 그분과 함께 실패를 무릎 쓰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하고 만약 기도해서 아무런 효과도 없더라도 치유를 위한 기도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행하는 일에서 결코 많은 열매를 거둘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은사가 마찬가지겠지만 ‘병 고치는 은사’란 끊임없는 실천과 믿음을 쌓아가는 점진적인 배움의 과정이기에 우리는 실수하는 일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을 충분히 점검해 본 후에 다시 한번 시도해 보아야 하고 치유 받지 못한 사람이 있더라도 그러한 실패와 좌절감 속에서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의 도구로서 이러한 사역을 행할 의무가 있는 제자들의 면면히 흘러 내려오는 계열에 속해 있기에 우리는 그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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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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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거룩한 감정들은 주로 신적인 일들에서

드러나는 도덕적 탁월성을 사랑하는데서 비롯된다.

달리 표현하면 신적인 일들에서 드러나는 도덕적 탁월성이 아름답고 향기롭기 때문에

신적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거룩한 감정들의 시작이며 원천이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속성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도덕적 속성이다.  다른 하나는 본성적인 속성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능력이나 지식들이다.  따라서 사람 안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이중으로 존재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도덕적 또는 영적 형상으로 그분의 거룩하심 즉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성을 닮은 형상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본성적 형상으로 사람의 이성과 지성, 자연적 능력과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이 포함되는데 이것들은 하나님의 본성적인 속성들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본성의 아름다움이 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있는 것처럼 모든 신적인 일들의 아름다움도 그러하다.  성도가 아름다운 것은 그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성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이 성도의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도의 거룩함이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아름답고 밝은 것은 그들이 마귀가 아닌 거룩한 천사이기 때문이다(단 4:13, 17, 23, 마 25:31, 막 8:38, 행 10:22, 계 14:10).  모든 다른 종교보다 기독교가 탁월하고 아름다운 것은 기독교가 매우 거룩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탁월한 것은 말씀이 매우 거룩하기 때문이다(시 119:140).

 

다양한 피조물들의 본성은 자신들이 좋아하고 누리고 있는 것에서 서로 다른 본성을 드러낸다.  참된 성도들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도 그런 차이가 있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거룩한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맛볼 수 없다.  그것은 그들에게 완전히 숨겨져 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으로 거룩한 일들의 선함과 거룩함을 알 수 있다.  성도들에게는 초자연적인, 가장 고상하고 영적인 감각이 있는데 성도들은 이 감각으로 신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준으로 여러분은 스스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고 기뻐하는지,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는지, 천국을 소망하고 있는지를 시험해 볼 수 있다.

 

은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본성적인 속성들뿐만 아니라

이런 속성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해주는데

이 아름다움은(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방식에 따르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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