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왕

연구자료 2014. 10. 29. 14:37

이스라엘은 원래 왕이 필요 없는 국가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다른 국가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 국가’였기 때문이다(출 19:5-6).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왕을 요구했는데(삼상 8:5),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간적인 통치자를 세움으로써 더 이상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이다(삼상 8:7).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인간이 왕이 되는 것은 불행을 초래하게 되므로 선지자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왕을 세우지 말라고 경고했지만(삼상 8:10-18), 백성들은 충고를 듣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수락하시어 사울이라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셨다.  그러나 사울은 모범적인 왕이 아니었으며 백성들은 그로 말미암아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다.  바로 그러한 점이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목적이었다. 즉 인간인 왕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며 그를 의지하고 따라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보여주신 것이다.  사울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애썼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축복의 언약의 맺으셨다(삼하 7:12-16).  이 언약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으로써(눅 1:31-33), 그는 그리스도의 육신적 조상이 되는 큰 은혜를 입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으나(왕상 10:14-29), 우상을 섬김으로써 그 때문에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되는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갈라진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은 각각 여러 왕들을 거친 다음에 결국 모두 멸망하고 말았다.  이 같은 역사를 가진 왕국으로서의 이스라엘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었고 그 발단은 인간을 왕으로 섬기게 해달라고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택한 백성들이 믿고 의지해야 할 왕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역사는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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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감정은 지성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일들을 바르게 이해할 때 생긴다.

 

하나님의 자녀는 은혜로운 감정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이전보다 신적인 이들을 더 많이 알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영적이고 은혜로운 감정은 하나님의 탁월한 본성과 놀라운 완전성을 새롭게 이해할 때 생기며 그리스도의 영적인 탁월함과 충만함을 새롭게 생각하고 지성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에 속한 일들을 새롭게 알 때 생긴다.  이런 조명을 통해 성도는 과거에는 그에게 어리석게 보인 신적인 일들과 영적인 가르침을 이해하게 된다.

 

성경은 성도들만 특별히 알 수 있는 신적인 일들에 대한 영적, 초자연적 지식이 있다고 말씀한다.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이것을 전혀 알 수 없다.  이것은 확실히 신적인 일들을 알고 이해하며 인식하는 것이어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도는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고 말씀한다.  성경 전체에 걸쳐서 수없이 많은 구절들이 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요일 3:6, 요삼 11, 요 6:40, 14:19, 17:3, 12:45, 마 11:27, 빌 3:8, 10).

 

그리고 영적인 본질과 종류에 있어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 있는 지식과 완전히 다른 신령한 지식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성경은 영적인 지식이라고 부르는 신적인 지식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한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 1:9).  입증한 바와 같이 신약성경에 따르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영적인 것의 본질과 종류를 절대 경험할 수 없다고 말씀한다.

 

영적인 지식은 일차적으로

신적인 일들의 도덕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 또는 미각에 내재한다.

따라서 이런 감각에서 생긴 것이 아니거나

이런 미각이 없는 지식은 영적인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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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는 “삼위 곧 세 인격이 합해서 하나가 된다”, 혹은 “삼위는 세 하나님을 가리킨다”, 또는 “한 분 하나님이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는 설명들이 있지만 이러한 가르침들은 부분을 확대하여 하나님 전체를 설명하려는 오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주장들 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현대판 아리우스파라고 할 수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적인 임재인 성령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전혀 없는데 이들은 ‘삼위일체’라는 말이 성경에 어디에 있느냐고 따지면서 왜 성경에 없는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 골치 아프게 가르치느냐고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단들이 도전은 교회사 이천년 동안 꾸준히 있어 왔습니다.  사실 Calvin이 말한 것처럼 삼위일체 교리는 거대한 신비이지만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 교리는 성경의 기준이 되었고 정통 기독교 교리로 공식 인준되었으며 이후 바른 기독교와 이단을 구분하는 기준과 기독교 조직신학 전체의 기초를 형성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오늘날 정통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신 6:4, 약 2:19), 그 한 분 하나님께서는 각각 독립된 삼위,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으로(마 28:19, 고후 13:13),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른 기독교 신앙관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시다”, 또한 “각 위는 신적 본체를 지니신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다”라고 신앙고백을 할 것입니다.  만일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부인함으로써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또 다른 이론을 제시한다면 그는 후메내오와 빌레도처럼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딤후 16-18).  예를 들면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신 것을 부인하고 “각위는 신적 본체를 지니신 온전한 하나님”이심과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만을 믿는다면 성부가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고(요 3:17), 성자가 성부께 기도하며(요일 2:1), 성령이 우리를 위해 성부께 중보 기도를 드린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롬 8:27).  또한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은 한 분”이심만을 믿고 “각위는 신적 본체를 지니신 온전한 하나님”이신 것을 부인한다면 분명 우리는 삼위 중에 어느 분은 온전한 하나님이 아니라 아리우스파처럼 종속된 분이거나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흔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신 것을 부인하고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신 것과 “삼위는 신적 본체를 지니신 온전한 하나님”이심만을 믿는다면 결과는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주장이 되고 이것 역시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충됩니다.

 

사실 교회 역사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중요한 오류들은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부인함에서 비롯되었는데 예를 들어 예수님을 ‘주’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과 유일신의 신앙 사이를 중재하고 이 둘을 합치시키려는 해석들 중에서 교회에 의해 배척된 두 가지의 극단적 이론, 즉 ‘로고스’이신(요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부인했던 알렉산드리아 장로였던 Arius의 ‘종속설’과 하나님은 구속사의 과정에서 세 번 상이한 형태를 취했다는 Sabellius의 ‘양태론’을 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후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이 이론들을 배격하고 Athanasius의 주장에 따라 “아들은 창조되지 않았고 아버지처럼 영원하며 본질이 같을 뿐 아니라 아버지에게 종속되지 않았다”라고 선언했고, 주후 381년에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 성령의 신성도 추가됨으로서 완전한 삼위일체론이 확립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정통 교회의 삼위일체론은 본질상 하나님의 유일성과 하나님의 계시를 다 같이 보존하면서 그분 안에 신적인 서열 단계를 인정하려는 종속론과 하나님이 다른 형태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양태론에 대항하여 지금까지 싸워 왔지만 오늘날 이 교리 논쟁에는 인간적 반목과 정치적 세력에 의해 정통 교회로 자처한 집단들 속에서 그 요소들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또한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에서 본질의 통일성을 부정하는 ‘삼신론’ 역시 잘못된 가르침인데 이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한 분이심을 부인하는 것으로(신 6:4), 예를 들면 하나님에 대해 신적 본질을 말할 때 성경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한 신적 본체 안에 있는 세 인격을 증거 하지만 삼신론은 각각 다른 세 개체를 주장하는 것인데 이것은 도무지 용납될 수 없는 잡다한 이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삼위이시고 세 인격체가 모두 온전하신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혼란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세 분 중에 어느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하는가 라는 의구심을 일으킬 뿐 아니라 많은 신이 있다고 믿는 이방 종교와 흡사한 이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이 있지만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함으로서 구원론의 신학적인 토대를 무너뜨리는 Theodotus of Byzantium이 말한 “그리스도는 인성이 신성화했지만 분명히 하나님이 아니며 …성령은 신성도 영원성도 없다”라는 주장 역시 ‘역동적 단일신론’으로 잘못된 이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 그리스도인들 중에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양심에 화인이 맞지 않는 이상(딤전 4:1-2), 이러한 잘못된 사상들을 끝까지 지지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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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주님의 방법에 의한 부흥이 필요하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부흥,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부흥,

교회와 우리 사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면 이런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그분이 심판이 우리에게 닥칠 것이다.

우리 사회와 교회의 죄를 눈 감아 주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소리 높여 외쳐야 한다.

지붕 꼭대기에서 호세아의 말을 외쳐야 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논쟁하시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적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호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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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가 비방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들 가라지 교인들은 성도가 아니면서도 진짜 성도처럼 행세를 하고 있고 또한 정통 기독교가 아닌 이단들 역시 교회 간판을 걸어 놓고 참된 교회 행세하고 있는 것이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런 가짜 교회나 가짜 교인들을 바라보면서 어떤 돈 문제나 이성 문제가 생기면 모든 그리스도인 전체가 다 그런 양 비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기독교 교회 내에 소수의 목회자가 추잡할 정도로 돈과 여자 문제로 매스컴에서 시끄럽게 다루는 것을 볼 때에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방과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사실 참된 성도 때문이 아니라 가라지 교인과 삯군 목사가(요 10:12), 이단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정통 기독교 교회 안에서 마치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일으키듯 교회의 물을 흐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사단의 자식들로서(요 8:44), 마치 주님의 제자인 것처럼 활동하면서 온갖 악행을 저질러 주님이 피 값을 주고 산 교회 전체를(행 20:28), 욕되게 하고 있는데, 사실 값진 보석일수록 가짜가 많듯이 기독교의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얼마든지 거짓된 교리를 따르는 가라지 교인과 가짜 교회는 있기 마련입니다(딤후 4:3-4).

 

사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아도 거듭나지 못한 교인들 때문에 교회가 세속화됨으로 유형교회 안에서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을 제거하고 순수한 교회를 만들어 보자는 노력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3세기에 나타났던 로마교회의 장로였던 Novatian으로 당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수치스럽게도 신앙을 버리고 이방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고 그 후 박해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왔을 때 그는 그러한 배교자들은 어떠한 참회와 헌신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교회에서 배척되어야 할 것을 강력하게 말했고 만일 이런 배교자들이 교회에 다시 들어오게 된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와 정반대되는 입장을 취한 사람들로서 유형교회는 혼합된 교회이기(마 13:47-48), 때문에 교회 정화에 힘쓸 필요가 없고 되는대로 내버려 두자는 사람들인데 문제는 오늘날 노바티아누스주의자들보다 이런 방임적 태도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며 이들은 마태복음 13장24-30, 36-43절의 말씀인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들어 교회 안에서 거짓교인을 구분하려다가 참 성도가 시험에 들거나 상할 수 있으니까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실 때까지 내버려 두고(마 4:12), 우리는 이것을 구분하려고 하거나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유형교회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물론 극단적인 신앙을 가진 노바티아누스주의자들처럼 인간의 힘으로 구원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를 구별하려고 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정화’와 ‘치리’에 대해서 무관심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살후 3:14).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장15-17절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이 누가 구원받고 못 받고는 판단할 수 없겠지만(욘 2:9), 교회의 정화운동을 위한 노력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딤전 1:20).  사실 유형교회에 중생하지 못한 거짓 교인이 있다는 현실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참된 신자의 구원을 의심하기 시작할 뿐 아니라 교회 안에 커다란 혼동과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Calvin은 이 문제를 놓고『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되며 성만찬에 참가함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직을 보존하지만 이런 교회 안에 야심과 탐욕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 또 중상하는 사람들이 심히 많고 아주 불결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얼마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일시 허용되는 것은 자격이 있는 재판 기관에 의해 유죄 판결 받기가 불가능하거나 강력한 규율이 항상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교회 안에 권징이 시행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공공연한 죄로 인하여 권징 받지 않는 이상 사람들을 공동체의 교제로부터 제외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본질상 교회는 각 지체들이 자신들을 한 몸으로 의식케 하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는(엡 4:15-16),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고전 12:4-5), 은혜를 누린다는 점에서 Augustine와 Luther에 의해 “보이지 않는 교회”로 종종 불리었고 이 무형교회는 Louis Berkhor이 말한 것처럼 유형교회 안에서 상대적으로 그리고 불안전한 모습으로 구현되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지는 않지만 마지막 때가 되면 완전히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 대하여 연합된 교회는 비록 그 구성원들이 아직 죄를 지니고 있기에 ‘말씀’이 참되게 선포되고(요 8:31-32, 47, 14:23, 요일 4:1-3, 요이 9절), ‘성례’가 바르게 집행되며(마 28:19, 막 16:15-16, 행2:42, 고전 11:23-30),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권징’이 신실하게 시행될 때(마 18:15-18, 롬 16:17, 고전 5:2, 9-13, 고후 2:5-10, 살후 3:6, 14-15, 딛 3: 10-11), 교회는 거룩하게 되고 이런 공동체는 주님이 세우신 참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시는 ‘교회’에는 가라지가 섞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오직 예수의 피 값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만이 있는 반면에(계 5:9-14, 7:9-17),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지역 교회 안에는 가라지 목사와 쭉정이 교인들이 얼마든지 섞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계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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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가장 격렬한 전쟁터 중의 하나는

각 사람의 ‘내면세계’라고 믿는다.

특별히 자신을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이라 믿는 사람들은

이 싸움을 해야만 한다.

그들 중에는 가정과 직장 그리고 교회에서

무거운 책임들을 지고 

수고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우리는 공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는 사람이

내면적으로도 아주 영적인 사람이라고 

고지식하게 믿는 경향이 있다.

또한 교회가 크면 클수록 

하늘로부터 오는 축복이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과 더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내면세계를 희생해서라도

불균형하게 외적세계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유혹이 있는 것이다.

 

더 많은 프로그램,

더 많은 모임들,

더 좋은 학력,

더 많은 대인 관계,

더 많은 사업과 같은 모든 활동이 과중해서

더 이상 우리 삶을 지탱할 수 없게 되면

모든 것이 붕괴되어 무너져 버린다.

 

고든 맥도날드『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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