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보면 사도에 대해 네 가지로 분류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물론 ‘사도’라는 단어를 놓고 어떤 서열로 분리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도에 서열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사도라고 해서 다 같은 사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도의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로 성경은 예수님을 '사도'라고 부르고 있고(히 3:1), 여기서 ‘사도’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보냄을 받은 사람’(요 3:17), 또는 ‘위임을 받은 자’들을 의미하며 주님은 모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머리 위에 계십니다(엡 1:22).  그리고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골 1:18), 공생애 사역에서 세상에 구원의 좋은 소식을(사 61:1), 가져오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이며(막 1:38), 위임을 받은 자였습니다(눅 4:18-19).  또한 예수님은 고향에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실 때 자신을 ‘선지자’라고 칭하시기도 하셨고(마 13:57, 눅 4:24, 요 4:44,, 행 7:37), ‘복음 전도자’의 직임에 가지고 계셨을 뿐 아니라(마 1:21),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셨으며(요 10:11, 히 13:20, 벧전 2:25), 동시에 교사이기도 하셨습니다(마 5:1-2, 9:35, 막 1:21-22).  따라서 예수님은 각 사역의 은사에서 홀로 한 서열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그토록 가장 높은 서열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골 1:15-18).

 

두 번째는 어린양의 사도들로서 계시록에 보면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들에 대해 언급하는데(계 21:14), 이 어린양의 사도는 오직 열두 명뿐이고(마 10:2-4), 예수님을 따랐던 이 열두 사도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 두 번째 서열 안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어린양의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의 사역 현장 속에서 늘 함께 다녔던 증인이어야만 하고(행 1:21),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할 사람이어야만 합니다(행 1:22).  이러한 자격을 가진 어린양의 열두 사도들은 나중에 신약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데 사용된 사람들이었습니다(엡 2:20).  어떤 사람들은 맛디아가 아니라(행 1:23), 바울이 어린양의 사도로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바울이 어린양의 사도로서 자격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을 눈으로 목격한 증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적에 중생도 하지 않은 사람으로 그분의 부활을 직접 본 증인도 아니고 나중에 세월이 흘러 예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행 9장), 그를 은혜로 불러주셨을 때 비로소 주님을 만났습니다(고전 15:8).  그러므로 어린양의 사도들은 맛디아를 뽑으므로 끝났지만(행 1:26), 또 다른 사도의 직임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보내심을 받은 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열두 사도들 외에 더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고전 15:5-9).

 

세 번째는 바울이 속해 있는 사도의 서열로 이들 역시 신약 성경의 교리적인 토대가 형성되는 것을 도왔기 때문에 두 번째 사도들처럼 토대적인 사도들과 선지자들로 간주되어야 합니다(엡 2:20).  왜냐하면 신약 성경의 복음이 이들에게 계시되었고(갈 1:16), 특히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의 많은 부분을 썼으며 그리스도에 관한 신비한 계시를 사람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직접 받았고(갈 1:12), 복음의 계시를 초기 신약 성도들에게 전파했기에(엡 3:3-5), 더 이상 오늘날 교회의 기초에 무엇인가를 더하기 위한 부가적인 계시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새 언약의 계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갈 1:8).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뺄 수도 없을 뿐더러(계 22:18-19), 오늘날 교회의 기초를 놓을 수 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동일한 수준의 권위와 똑같은 서열을 받은 사도와 선지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이미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사이비 교주’가 아닌 이상 오늘날 누구든지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에 속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1장 21-22절에 보면 사도의 자격이 나오는데 이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바나바는 사도의 자격이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성경은 그를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행 14:14).  다시 말해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의 사도는 없을지라도 네 번째 서열에 속한 사도들은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도’라는 단어는 지금보다 초대교회 시대에 더 폭넓게 사용된 것만은 사실인데 문제는 오늘날 그 용어를 많이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 ‘사도’라는 말을 사용하면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라는(눅 6:13), 헬라어는 앞서 말했듯이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의 ‘아포스돌로스’로부터 번역된 말이지만(막 3:13-15), 더 정확하게 말하면 ‘특별한 대표’나 ‘특별한 사자’라는 뜻으로 바울은 빌립보에 보내는 사자로서 에바브로디도에 관해 말하는데(빌 2:25), 여기서 ‘사자’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바로 ‘아포스돌로스’입니다.  비록 바울은 ‘사자’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사도로 부르고는 있지만 그는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구체적인 의미에서 사도의 직임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즉, 그에게 ‘사도’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것은 ‘대표자’로서 또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구제 헌금을 위해 디도를 보내는 것처럼(고후 8:23), ‘회중의 대표’로 위임받아 보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물론 그는 두 번째나 세 번째 서열의 사도는 아니었고 신약 성경의 기초를 놓지도 않았지만 바울이 여기서 ‘사도’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어떤 모임에 한 사람을 대표로 보내는 것처럼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를 보낸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단순히 사역에서 바울을 돕기 위해 빌립보 교인들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요 13:16), 또는 ‘대표자’(고후 8:23)라고 볼 수 있고 성경 어디에도 그가 바울처럼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사도적 직임의 완전한 활동범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복음의 메시지를 가지고 보냄 받은 자들로서(롬 10:15), 어느 정도 사도적 직임에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어떤 영적인 방향에 따라 특정한 메시지나 사역을 가져오기 위해 성령으로부터 위임받은 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사/선교사가 한 도시에서 교회를 세우도록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면 그는 네 번째 서열에서 어느 정도 사도적 직임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도시에 파송된 모든 목사가 다 사도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은 아니고 만약 어떤 사람이 바나바와 사울처럼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면(행 13:4), 그는 네 번째 서열에 있는 사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나라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참으로 성령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자가 있다면 그들이 바로 사도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사역의 중요한 특징들 가운데 한 가지는 교회를 세우고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행 2:42).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서 많은 이방인 교회들이 사도 바울에 의해 세워졌는데(행 13-20장), 오늘날 진정한 선교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특정한 나라 사람들에게 어떠한 사역, 즉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시작하고 세울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는 성령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란 의미에서 네 번째 서열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Wayne Grudem은 오늘날도 효과적인 개척자들/선교사들이 있기 때문에 ‘사도’라는 단어를 넓은 의미에서 이해한다면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데 사실 용어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고전 2:4), 그리고 삶과 사역자의 열매입니다(마 7:20).  만약 이런 표징들이 없다면 그는 사도직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볼 수 있고(고후 12:12), 진정으로 성령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면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면서 돌아다니지 않는 겸손함이 있는데 오늘날 그런 점에서 많은 사람이 실수를 범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주님이 보내심을 받은 네 번째 서열의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도들이 어디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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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의 남녀가 모였다.

그들에게는 첨단의 음향시설도,

성경 인쇄소도,

10만 명의 설교자도,

신학교들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세상을 뒤집어엎었다.

『열방을 위한 그리스도』라는 잡지는

500만 명의 성령 충만하다고 말한다.

거기에다가 기성 교단들에도

성령 충만한 신자들이 수백만 명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와 교회에 만연된 ‘사상’(史上) 최악의 죄악들은 무엇인가?

소금은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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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유익 가운데 하나는 다른 곳에서 찾거나 얻을 수 없는 진리를 제공하는 것인데, 사실 종교 개혁자들이 남긴 유산들 중에 위대한 것이 있다면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것과 사적 해석의 원리를 들 수 있고, Martin Luther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문맹자가 아닌 이상 스스로가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성경의 사적 해석의 문제로 자신의 이단성에 대해 1521년 4월17일 재판이 열렸던 독일 보름스에 소집된 신성 로마 제국의 의회에서 자신의 글들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주장이 성서와 이성에 근거해 오류가 없는 한 철회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개인의 판단이나 견해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 반면에 Luther는 개인에게 성경을 스스로 읽고 해석하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비록 독일인들에게는 그가 영웅이었으나 보름스 의회를 통해 이단으로 비쳐진 그를 오늘날 용서받지 못할 이단으로 매도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도화된 현대 교회에 환멸을 느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가 주장한 사적인 해석 원리가 극단적 주관주의를 허용하는 빌미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자신이 발견하고 싶은 것을 성경에 넣어 해석하려는 악한 성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람도 완전하게 성경을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한성과 죄성 때문에 성경 속에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과도하게 부과하는 경향이 있는데 D. A. Carson은 『Exegetical Fallacies』에서 “해석자 자기대로는 본문의 뜻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너무도 자주 단순히 자기 생각을 본문 속에 집어넣고 있다. 만약 자기 스스로 성경을 읽다가 생기는 많은 의문들을 허용하게 되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잃을 것이기 때문에 많은 성경교사들과 목사들은 물려받은 전통을 내던져 버리지 않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자신이 배운 정통 신학과 신앙을 가지고 성경의 어떤 구절을 읽거나 해석할 때 편견 없이 분문에 귀를 기울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성경을 해석할 때 기발함보다는 본문에 충실하려는 열망과 함께 공평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류에 빠지는 전문가들 중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자기 분야에 연결시키고 싶어 하는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 실제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분명히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그 결과 그들은 종종 ‘소름끼치는 허튼소리’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신학자와 목사들 중에 성경이 다른 부분을 배제한 채 어느 한 부분만을 과장하거나 무절제한 사변과 주관주의적 해석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오늘날 논쟁이 심한 ‘방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사실 성경의 권위에 대해 똑같이 고차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방언을 성령세례의 결정적인 증거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방언의 은사는 더 이상 참된 은사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은 Athanasius, Augustine, Anselm, Luther, Calvin, Jonathan Edwards, Charles Spurgeon 등을 내세우면서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들 중에 방언을 한 사람이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방언을 인정하는 사람 주로 오순절 계통의 신자들은 방언이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증거라고 말하면서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30절‘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라는 구절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 방언을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고, 물론 성령세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문제가 달라지겠지만 성령세례와 상관없이 방언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R. C. Sproul는 『The Mystery of the Holy Spirit』에서 이 문제를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 역사상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위대한 인물들 중에 성령세례를 받았으나 그 증거로 방언을 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방언은 불신자들에 대한 표적으로(고전 14:22),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특징적인 심판의 표시로(사 28:11-13),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누군가 방언을 하면 성경적인 방언이 아니고 옹알거리는 잡소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Palmer Robertson은 『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에서 “방언은 징조이지만 이제는 필요 없다. 사실상 방언이 존재했던 시기에도 방언은 계시의 한 양식으로서 역할을 했다. 이는 통역된 방언이 예언과 똑같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 교회는 교회의 보편적인 특징을 확립하는데 더 이상 표적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방언을 통해 공급될지 모르는 새로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계시 역시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경은 예언된 말씀의 완전한 성취를 보존하기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예언적 메시지는 불필요하다”  한마디로 방언은 오늘날 더 이상 계속되는 은사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방언을 즐겨 사용하는 아프리카 복음 전도자 Reinhard Bonnke“신학을 가르치기 위해 사도행전을 사용했던 안 했던 간에 상관없이 어떤 주장을 사용하더라도 방언에 대한 기록은 충분하다. 당신에게 방언이 없다는 가르침이 무슨 매력이 있는가?”  다시 말해 누군가 방언이 없다고 주장해도 방언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가령 방언하는 사람들 중에 방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거나 방언하지 않는 사람 대부분은 방언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데, 문제는 이런 사람이 방언에 대한 해석을 할 때 Carson이 말한 것처럼 종종 “소름끼치는 허튼소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 중에 ‘exegesis’(석의)와 ‘eisegesis’(자기해석)을 구분하지 못해 성경을 해석할 때 오류와 왜곡을 낳게 되는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R. C. Sproul이 말한 것처럼 본문에 없는 의미를 본문 안으로 집어넣어 해석하려는 주관주의의 문제와 싸워야 합니다.  Lloyd Jones도 이런 문제를 놓고『성령의 주권적 사역』에서 “어떤 이가 성경의 일부분을 제거한다면 몹시 통탄할 만한 범죄이다.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 모두의 사명이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방언은 우리 스스로에 의해 시도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다. 사람은 그가 원할 때마다 방언을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방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말하는 언어이기 때문에(행 2:4),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방언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Wayne Grudem은 방언 말하는 것(고전 14:15, 18, 28)은 마음대로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함).  따라서 모든 것을 분별하고 좋은 것을 취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고(살전 5:21), 만일 방언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면(고전 12:7), 성령은 우리에게 자신의 덕을 세우는(고전 14:4), 이 귀중한 은사를 허락해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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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1권1과에서 개인의 간증을 다루는 것은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데 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오픈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끄셨는가를 발견하고 앞으로 내 삶을 어떻게 인도하실지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제자훈련을 통해서 더욱 당당한 간증자가 되어야겠다는 기대와 결심을 할 수 있도록 돕는데 목적이 있다.  데이브 도슨의 『효과적인 간증: 간증문 작성법』은 이점에서 제자훈련 1권1과의 좋은 참고도서라고 할 수 있다.  간증의 필요성과 효과적인 간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간증문을 작성할 때의 유의점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어 있고, 실제 간증문을 어떻게 써야 될지에 대한 좋은 가이드와 구체적인 실례를 제공하고 있다.  소책자라 분량도 부담이 없는 만큼 한 번쯤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아래는 대략의 내용이다.

 

간증은 하나님께로 향한 당신의 순례 기록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효과적인 도구의 하나이다.  간증이 효과적인 증거가 되는 이유는 첫째,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경험한 바를 듣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고, 둘째는 아무도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반박할 수 없으며, 셋째는 개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게 나눌 수 있고, 넷째는 다른 사람도 자신의 삶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도록 할 수 있고, 다섯째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버리게 할 수 있다.  효과적인 간증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민감한 필요에 대해 파악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삶 가운데 건드리거나 자극을 받으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영역이나 필요가 존재한다.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간증을 나눌 때 자신의 민감한 필요를 중심으로 간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이 자신의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할 때 비로소 사람들은 당신을 진실하며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게 되어 자신의 민감한 필요를 당신에게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필요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도와주셨는가에 대해 나누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삶, 믿게 된 경위, 믿음 후의 삶의 변화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전했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삶에서는 자신을 청중들과 동일시하면서 그들의 민감한 필요를 드러냈고, 믿게 된 경위에서는 왜 제자가 되었으며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해 밝히고 있다.  끝으로 믿음 후의 삶의 변화에서는 자신의 민감한 필요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해결되었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간증을 나눌 때 주의해야 할 점으로는 첫째, 자신의 지난날을 다 이야기하지는 말 것, 둘째, 바울의 간증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 민감한 필요를 상세히 설명할 것, 넷째, 복음을 명확하게 소개할 것, 넷째, 민감한 필요의 해결책을 설명할 것, 다섯째, 신중하게 나눌 것, 여섯째, 1인칭을 사용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설교를 하려 들지 말 것, 일곱째, 자신의 간증의 가치를 인식할 것, 여덟째, 사실을 말할 것, 아홉째 기도할 것 등이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당신의 간증에는 주님을 만나기 전 당신의 삶 가운데 있었던 민감한 필요를 사실적, 구체적, 그리고 개인적으로 간결하게 써야 한다.  믿게 된 경위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믿은 후 변화에서는 당신의 민감한 필요와 관련지어 예수 안에서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를 설명하되 설교로 발전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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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악한 세상에서는 목회자와 교인들 사이에

큰 의견 차이와 논쟁이 생기기도 합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은 다른 어떤 인간관계에서보다

더욱 평화롭게 지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목회자와 교인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어떤 다툼보다

여러 면에서 가장 불행하고 끔찍한 결과를 가져 오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자주 목회자와 교인 사이에 

이런 분쟁이 생깁니까?

교인들은 목회자와 때로는 교리적인 문제로,

때로는 교회 행정적인 문제로,

때로는 사례비 문제로 다툽니다.

때로 이런 다툼은 아주 오래 지속됩니다.

 

그러나 심판 날 충분하고 완전하며 

영원한 결정이 내려지게 될 것입니다.

무한한 빛과 진리와 공의의 원천이신

오류가 없는 재판관께서 논쟁하는 양편을 심판해 주실 것이며

진리가 무엇이며, 누가 옳은지,

누가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맞는지를 선언해 주실 것입니다.

그 날은 이 인간 세상에 있었던 모든 분쟁을 결론짓고

모든 실수를 바로 잡으며

모든 불의한 재판관 오류와 혼란을 종식시키는 

위대한 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과 심판은 

완전한 진리와 공의에 따라 시행될 것입니다.

신실한 목회자들에게는 영광스러운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단 12:3).

또한 목회자를 잘 영접하고 잘 대접하여 준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마 10:40-41).

신실한 교인들과 신실한 목회자들은 

서로 기쁨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살전 2:19-20).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실한 목회자들을 악하게 대했던 사람들은

심각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 10:14-15).

한편 신실하지 못한 목회자는 

가장 두려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겔 33:6, 마 23:1-33).

 

그러므로 목회자와 교인들 사이에 분쟁이 영원히 해결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따라 선고 받고 보상받을 것입니다.

영원한 기쁨과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영원한 부끄러움과 고통을 당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심판 날 다시 만날, 분쟁하는 목사와 교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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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저술가이자 성직자인 Thomas Adams는 “삼위일체는 오직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성의 판단으로 그 신비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는데 사실 이 교리는 신학자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분으로서의 하나님(신 6:4, 갈 3:20)과 세 분으로서의 하나님이(고전 8:4-6, 요일 5:20, 고전 3:16), 동시에 있는 이 신비한 현실에 대해 “삼위 하나님을 한 본체와 세 실체”로 대비되는 개념의 용어로 표현을 하고는 있지만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어의 한계가 분명히 제안된 표현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께서 완전히 일체를 이루시는 한 본체요, 존재가 영구불변한 실체이고, 또한 상호 절대 독립된 삼위, 곧 세 분의 인격체이기도 하지만(시 2:7, 마 3:16-17, 행 5:3-4), 바로 세 분인 동시에 한 분이라는(딤전 1:17), 사실을 추호의 차이나 기울어짐이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상호 모순이 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는 신비하게 구현된 그분만의 독특한 존재 양식이라고 볼 수 있는데 만약 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초월하여 구현된 진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연계와 인생에 '유비'(類比)시켜 이해하고자 한다면 혹은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하거나 부분적인 이해에 그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초대 교부들은 삼위일체를 표현하기 위해 유비를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Augustine이 『Of Faith and the Creed』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 영혼의 구조를 끌어내기 위해 유비를 사용했지만 그가 나중에 고백한 것은 유비와 흔적을 자연과 인간에게서 발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사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Calvin은 이 문제를 놓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유비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구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 인간사에서 비유를 든다는 것이 관연 타당한가 하는데 대하여 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옛날 사람들은 가끔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저들은 자신들이 소개하였던 그 유추의 전부가 매우 부적당하다는 것을 동시에 고백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여기서 그러한 일체의 무분별한 행동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를 부적당하게 소개함으로써 사악한 사람에게 비방의 기회를 무지한 사람에게 망상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그 구별에 대하여 묵과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지만(딤전 2:5), 성경은 성부(갈 1:3), 성자(요 1:1), 성령(딤후 3:16)을 구별하기 때문에 매우 신중한 마음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유비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유비들을 포함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접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이 교리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한 인간 안에 있는 “지, 정, 의”를 연합하여 말하는 것이나 나무의 세 부분인 “뿌리, 줄기, 가지”, 혹은 물의 세 형태인 “물, 증기, 얼음”을 통한 유비들은 오히려 기독교의 독특한 삼위일체 교리를 훼손하거나 오해에 빠뜨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유비로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실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의 여러 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연과 생명으로부터 취한 많은 비유들,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어 반석과 같고(사 26:4), 돌보심에 있어 목자와 같다는(시 23:1-3), 표현을 사용은 했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이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아무런 비유도 들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 어느 유비도 삼위일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Louis Berkhof이 말한 것처럼 다소 가치는 있겠지만 모두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표현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마 28:19), 이 말은 분명 다른 인격체를 이야기 하면서도 가족관계에 있어 긴밀한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Philip Melanchthon이 말했듯이 이 교리는 연구하는 것보다는 그냥 믿고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낫을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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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당 건축 문제를 두고 수많은 분쟁과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세상 사람들 보기에도 그렇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다지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흔히 ‘교회’라고 할 때는 단지 눈으로 볼 수 있는 교회, 즉 건물로서의 예배당을 이야기 할 때가 많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의 교회란 단순한 건물 그 자체가 될 수 없고(마 24:1-2),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마 16:16), 그분과 연합된 선택받은 자들의 모임을 ‘참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엡 4:15-16).  다시 말해 비록 외형적으로 구체적인 형태를 띠지는 않지만 실질적인 교회란 눈에 보이는 건물에 있지 않고(롬 12:1),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도가 서로 교통하듯’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성전이나(눅 18:10), 집에서(몬 2절), 아니면 다락방(행 1:13-14), 그 어느 장소와 상관없이 두 세 사람이 모여(마 18:19).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면(요 4:21-24), 그곳이 바로 주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교회에는 구성원들 모두가 죄인인(롬 3:9),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엡 2:8), 그리고 이렇게 모인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 혹은 ‘그리스도의 몸’(골 1;18), 또는 ‘그리스도의 신부’(계 22:17), 더 나아가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계 21:2).

 

이렇게 불리어지는 교회는 눈에 보이는 “유형/가견적 교회”와(고전 1:2, 살전 1:1, 몬 1-2절),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불가견적 교회”로(엡 1:10, 골 1:18, 24), 구분될 수 있는데 이것은 구교 당시 종교 개혁을 하기 전에는 이런 구분이 없었지만 종교 개혁 때부터 구분하게 되었고 이 구분을 처음 시도한 사람이 Martin Luther였으며, John Calvin은 이 문제에 대하여 강조하기를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는 교회의 양상(樣相)이 아니라 영적 교회와 조직적 교회의 양면(兩面)을 말한 것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먼저 넓은 의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는 현재까지 구원받은 자들뿐만 아니라 아직 부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나 장차 구원받게 될 모든 피택자(被擇者)들까지 포함하고 좁은 의미에서는 현재 지상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피택자들로 구성된 교회를 가리키는데 이 무형교회는 교파와 교단과 상관없이 거듭난 참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이지만 본질상 영적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참 신앙을 소유하며 참된 영적교제를 이루고 있는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하고(엡 1:22), 하나가 되어 있는(갈 3:28),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들’이지만(벧전 2:9), 오직 하나님만이 이 무형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다(딤후 2:19).

 

이 무형교회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보편적 또는 우주적 교회는 무형적이다. 이 교회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그 아래 하나로 지금까지 모여 들었고 지금 모여 들고 있고 장차 모여 들게 되는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몸이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의 충만이다”  Louis Berkhof도 무형교회에 대해 “이 교회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영적이며 영적인 본질이 육안으로 식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누가 이 교회에 속하였고 누가 이 교회에 속하지 않았는지를 결정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은 신비적인 연합이다. 예컨대 거듭남, 참된 회개, 참된 믿음,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제, 등과 같은 구원의 복들은 모두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외형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을 보고 영적 변화의 외적 증거들을 볼 뿐이지 실제로 그 사람의 마음이나 영적인 상태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누가 참 신자인지 거짓 신자인지를 구분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아시며(민 16:5), 이 무형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삶과(롬 12:1-2), 예배를 통해(요 4:23-24),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히 12:33), 즉 보이지 않는 교회에 참예하게 됩니다.

 

반면에 유형교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이 지상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하며 구원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 주님께서 세우신 조직을 가리키는데 Wayne Grudem은 유형교회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립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불신자)들이 볼 수 있는 대로의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참된 신자들 그리고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를 아는 사람들이 보는 대로의 교회를 가리킨다”  이 말의 의미는 무형교회는 거듭난 신자들을 포함한 교회인 반면에 유형교회는 인간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교회로서 비록 참된 신자의 눈으로 볼 때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불신자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거듭나지 않는 자도 포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는 두 개의 교회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이 두 교회의 구성원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유형교회 구성원 가운데 장차 구원에 이르지 못할 가라지가 섞여 있을 수 있고(마 22:14, 25:32), 아직 유형교회의 구성원인 되지 않았으나 장차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무형교회의 구성원이 세상에 남아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행 13:44-48).  쉽게 말하면 무형교회에 속한 교인이 반드시 유형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유형교회에 속한 교인이 반드시 무형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형교회 안에는 예수님이 경고하신 것처럼 양의 탈을 쓴 거듭나지 못한 거짓 목사들과(마 7:15), 후메내오와 빌레도와 같은 거짓 선생들(딤후 2:16-18), 그리고 회심의 경험은 전혀 없고 육신적인 복(빵)만을 추구하는 거짓된 교인들도 많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요 6:26-27).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이 문제를 놓고 Augustine의 말을 인용하여 “밖에도 양이 많고 안에도 이리가 많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 이름과 외형만 있고 그리스도는 전혀 없는 위선자들이 많이 섞여 있다”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알곡에 가라지가 섞일 수 있다는 것인데(마 13:24-30), 사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LutherCalvin이 교회의 무형적인 면을 많이(물론 사도로부터 끊임없이 계승되어온 유형적인 거대한 조직이라는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에 반대해서) 강조했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 것은 주께서 자신의 백성, 즉 누가 참 신자인지 거짓 신자인지를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딤후 2:19).  그러나 우리가 이 두 가지 형태의 교회를 간과해서는 안 될 이유는 만약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유기체로서의 교회와(롬 12:15, 엡 3:6), 조직체로서의 교회를(마 18:15-17, 행 6:1-6), 무시하는 ‘무교회주의’가 되기 쉽고, 반대로 눈에 보이는 유형교회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외형적 제도만을 강조하는 가톨릭교회와 같은 ‘교회 지상주의’로 빠지기 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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