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지극히 낮아지신 성자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성자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이었으나(마 11:27), 죄인들을 사랑하사 친히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 2:6-11).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요 1:1)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스스로 버리시고(요 10:18), 가장 무능한 자로 세상 권세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으셨던 것입니다(마 16:21).  그리스도의 이러한 십자가의 죽음이 인간 구원의 계기가 되어(요일 2:2),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엡 2:3), 우리가 화해를 이루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엡 2:11-22).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영원한 승리의 사건이었습니다(골 2:15).  따라서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곧이어 부활은 이러한 사실을 실증해 보인 사건이었습니다(행 2:2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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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세상을 자신과 화목케 하시며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이 그분의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실제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를 추구하심으로 시작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라고

당신을 초청하십니다.

그분은 자신과 자신의 목적과 길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당신 안에서,

그리고 당신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당신은 믿음의 발을 내디뎌야 하고,

대대적인 조정을 해야 하며,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모든 것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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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율법과 관련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한 사람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아버지라고 주장했습니다(요 10:30).  그런 반면 유대인들의 편협한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안식일을 범한 죄인이고(마 12:1-8), 장로의 유전을 무시했습니다(마 15:2).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불경스러운 자이기 때문에 처형되었습니다(마 26:57-68).  또한 정치와 관련하여 예수님은 국가 반란을 선동한 사람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완악한 유대인들이 몰아세운 누명이었지만 로마 당국자는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염려하여(마 27:24). 국사범을 처형하는 십자가형에 예수님을 정치적 죄목으로 처형한 것입니다(마 27:35).  더 나아가 하나님과 관련하여 예수님은 백성들의 죄를 지고 죽임을 당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하는 고통을 경험하신 것입니다(마 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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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처음 방언을 받았을 때 신기하기도 하고 너무 좋아 흥분된 가운데 교회에서 기도모임이 있을 때마다 곁에 있는 형제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가장 큰소리를 내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끔찍했던 것은 내가 하는 방언기도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다른 사람의 기도소리가 내 기도소리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골방(옷장)에 들어가서 기도한 것보다 교회모임에서 기도한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늘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다른 형제들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 내 마음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무지와 무식이 조합을 이루어 깨닫지 못해서였지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교만이 하늘을 치솟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기도모임이 있을 때마다 하던 일을 마다하고 득달같이 달려가서 성령이 허락해 주신 귀한 선물인 방언으로 마음껏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가끔 신비(?)주의적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처음 신앙생활을 하면서 방언을 받고 아무것도 모르는 신앙의 초보상태에서 교회에 아름다운 덕을 세우지 못하고 심각한 해를 끼쳤던 사건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때에 누군가가 성령의 은사(방언)에 대해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면 그렇게 무식하게 공식석상에서 방언을 남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방언기도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통역 없이 공적인 자리에서는 하지 않습니다.


방언을 옹알거리는 현상으로 치부하거나 방언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외국어라고 강조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오늘날의 방언은 귀신의 장난이거나 마귀가 가져다주는 거짓된 은사라고 주장을 하면서 역사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주의 종들 가운데 방언을 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을 줄기차게 내세웁니다.  여기서 한 가지가 궁금한 것은 정말 그리스도인들 중에 “방언하는 사람은 귀신에 들렸거나 미혹을 당한 사람인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를 믿기 전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들을 향해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 10:20)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을 향해 방언을 말할 때 귀신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 것을 경고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이 할 수만 있으면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고전 14:5).  무엇보다도 바울은 영적인 은사를 다루기 전에 신전에서 귀신을 섬겼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일부 고린도 신자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만일 성령의 능력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을 저주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먼저 강조하면서(고전 12:3), 한 가지 기본 원칙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자(롬 10:9), 즉 그리스도인 중에 누군가 방언을 한다면 그 사람 안에 역사하시는 분은 귀신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2:7).


Jack Hayford는 이 방언에 대해 『The Beauty of Spirit Language』에서 “오늘날 영적인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그저 신기함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원천을 간절히 구하는 것에 비롯된 것이고 그분에 마음에 더 가까이 가고자 더욱 성경적인 것을 찾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방언은 우리가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더 경건하게 높일 수 있도록 돕는 은사이다.”  Harold Horton 역시 『Gifts of the Spirit』에서 “구원받은 자의 내면에는 마음이나 생각으로 측량할 수 없는 깊이가 있다. …즉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늘의 언어를 통해 성령의 폭포수와 같은 물결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과 같다.”  이들의 말은 방언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비위가 상하고 역겨운 말들로 들리지도 모르지만 방언은 성령께서 결정하시는 대로 사용할 수 있는(고전 12:10), 놀랍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선물이지(약 1:17), 마귀에게 미혹을 당해 옹알거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은 사람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된 예언의 은사와 다르게(고전 14:3),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송이며(고전 14:2, 15, 28), 통역이 없으면 골방에서 개인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덕을 세울 수는 있지만(고전 14:3),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고전 14:11-13), 마음이 아닌 영으로 기도하는 은사로(고전 14:14-15), 얼마든지 자제력이 가능하지만(고전 14:27-28),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교회에 속한 모든 신자들이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고전 12:30).


문제는 오늘날 방언을 허락하는 교회에서 공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 사람이 통역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조용히 기도하지 않고 옆에 있는 사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소리 내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경우인데 이는 사도 바울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것이고 교회 안에서 다른 지체들에게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고전 13:1).  물론 바울의 명령에 순종하여 방언하는 사람 중에 곁에 있는 사람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한나가 기도하는 것처럼(삼상 1:13), 속삭임으로 방언하는 사람도 있지만 만약 공적으로 통역을 통해 전달할 메시지가 없으면 방언을 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할 것입니다(고전 14:28). 사실 방언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방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이유는 방언하는 사람이 열매가 없는 삶이나 교회 내에서 신비주의적 행동을 보일 때, 혹은 주변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성령충만한 것처럼 통역 없이 큰소리로 방언을 하기 때문인데 이런 지혜롭지 못한 행동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에게 모독을 받는 것처럼(롬 2:24), 하나님의 귀중한 선물이 특히 성령의 은사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온 회중이 방언으로 찬양할 수 있지만(고전 14:15), 그것은 고린도전서 14장27-28절에 기록된 순서를 따라야 하고, 무엇보다도 ‘영으로 찬미’ 하는 것은 믿는 자에게는 아름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고전 13:1), 불신자에게는 ‘미쳤다’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릅니다(고전 14:23).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면서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온 회중이 방언으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찬양하는 것입니다(고전 14:26).  다시 말해 통역이 없는 방언을 일만 마디 하는 것보다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다섯 마디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고전 14:19). 이 말은 방언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통역되지 않는 언어를 공적모임에서 사용하는 것을 바울이 비판하는 것인데, 사실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문제처럼 오늘날 누군가 개인적 가치를 그가 가진 은사로 평가할 위험이 있고 혹은 감정주의나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다 그렇다고 단정지울 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리의 말씀에 기초를 세우고(고전 3:11), 예수님의 인격과 삶에 초점을 맞추며(벧전 2:21), 주의를 기울이는 가운데 교만하지 않는다면(고전 10:12),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지(빌 2:13), 귀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요일 4:2).  그러므로 방언은 어떤 식으로든 사용자에게 덕을 세울 뿐 아니라(고전 14:4),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 않는 한 미혹케 하는 영에게 속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요일 3:7).  더 나아가 방언을 통해 무엇인가 미혹을 당했다고 생각한다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성령의 은사인(고전 12:10), 방언사용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14:5,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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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율법관에 빠져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동시에 거짓된 은혜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은혜는 율법과 별개의 것이며

율법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도덕률 폐기론’이라 불러지는바

되는대로 태만하여 빈둥거리며,

죄 짓는 생활을 살기 위해

은혜론을 악용하는 사람들의 태도라 하겠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문제가 없다.”라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며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이것은 절대 그릇되고 거짓된 은혜관입니다.

은혜의 전 목적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말하는 소위 그 은혜가

(여러분이 받았다고 말하는 그 은혜),

여러분으로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한다면

여러분은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심리적 체험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여 그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며,

그리스도가 의로웠던 것처럼 의롭게 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은사)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그것인 것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을 지키기로 열망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 14:21).


이 두 가지는 분리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은혜는 감상적인(sentimental) 것이 아닙니다.

성결은 하나의 체험도 아닙니다.

우리로 율법을 사랑하며,

이 율법을 지키도록 의욕 하게 하는

이 새 마음과 성향(disposition)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이 말씀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까지 삼년의 짧은 세월 동안

그분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영원하고 영속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다시 마태복음 7장에서 강력히 주장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입니까?

십계명과 도덕법입니다.

이 법들은 폐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을 미워하며 그의 법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율법에 굴복합니다.

기독교인 이렇게 되기를 원하며 이렇게 될 능력을 받았습니다.

성경 로마서 8장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이드 존스 『산상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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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숨이 완전히 끊긴 것이 아니고 잠시 기절했다가 살아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영혼이 떠났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완전히 죽으신 것을 의미합니다(요 19:30).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십자가형을 집행했던 로마 군병들에 의하여 확인된 확실한 사실일 뿐 아니라(요 19:33), 부활 후 그리스도께서 신령한 몸을 지니셨다는 것도 예수님께서 분명히 죽으셨음을 보여줍니다(요 20:17, 20).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들 수 있는데, 만약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면 구속사역은 아무런 효과도 없으며(갈 1:4), 사단은 예수님의 이름 앞에 굴복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눅 10:17-20).  그러나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굴복합니다(요일 3:8).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확실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깨뜨렸기 때문입니다(골 1:13, 히 2: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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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믿는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들에게는 전통이 없는 것처럼 확신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가장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이 종교적 전통에 크게 미혹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흔히 받아들인 전통들 가운데 일부를 대적하시는데(마 15:9), 성경에 보면 예수님과 그 시대 종교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의 원인은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전통에 도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감지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다(요 10:25-27).  예를 들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다고 해서 분개한 적이 있었는데(막 7:5), 사실 이 씻음의 기원은 제사장들이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손과 발을 씻었던 성막의 물두멍에서 유래된 것이고(출 30:17-21), 손을 씻는 전통은 세균을 없애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었고(마 27:24), 그저 구약성경에 있는 의식적 정결의 해석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레 15:19-31, 민 19:13).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이런 전통과 성경자체 사이를 구분하거나 인식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차원에서 성경과 전통을 동일한 권위아래 두었던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법보다 장로들의 유전(전통)에 더 많은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들의 전통 중 하나를 등한히 하셨을 때(마 15:2),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다고 확신하면서(눅 6:1-11), 죽이려고 모의까지 했습니다(막 3:6).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성인 남자는 자기의 모든 돈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말하기만 하면 쉽게 고르반(드림, 봉헌물) 서약을 할 수가 있었는데, 이것은 신명기 23장21-23절 민수기 30장1-6절 말씀을 근거하여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돈을 하나님의 성전에 헌납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했지만(출 20:12, 엡 6:1-3), 이런 전통을 핑계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바리새인들은 탐욕스러운 아들이 궁핍한 부모를 돕는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체계를 고안해 냈는데(마 15:6), 그것은 바로 부모를 돕는데 사용할 돈을 종교적 서원을 통해 이미 하나님께 받쳤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께 돈을 바치지 않았습니다(막 7:10-12).  예수님은 이 일로 인해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시길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막 7:13),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살아계신 말씀도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요 5:37-40).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들과 동일한 일을 행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우리들 역시 역사가 깊은 교회 전통에 붙잡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어떤 전통의 맹목적인 집착은 우리 모두에게 안전감과 통제력을 줄지도 모르지만 심각한 것은 이런 종류의 통제와 안정감은 종교제도와 관례를 갖도록 만들어줌으로써 수가성 여자처럼 전통을 자랑하는 종교인을 양산해 낸다는 것입니다(요 4:20-22).


물론 이 말에 심히 반박하며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이것을 자신의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나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이것이 종교적인 전통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더 나아가 사람은 존귀한 존재이지만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는 말씀처럼(시 49:20), 우리 자신도 어떤 전통에 빠지면 그러한 위험 속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전통이란 이전 세대 또는 현세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 위에 군림하는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전해진 신념이나 관습을 말하는 것인데, 솔직히 말해 우리 모두가 이 종교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골 2:8), 이것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나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데 있어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들 생각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요 8:4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경고(마 23장)는 우리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기독교인들도 얼마든지 바리새인들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마 6:8).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왜 예수님께서는 신약성경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서 바리새인들에 대해 그처럼 많은 내용을 할애에 가면서 기록하게 하셨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도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성이 강하고 죽어 있는 전통에 얽매인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마 23:3).


사도 바울은 신약시대의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전통을 중시하려는 바리새적 유혹에 굴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염려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골로새 사람들에게 ‘누가 헛된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고 말합니다(골 2:8).  이 말은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죽은 전통이 교회 안에 들어와 사람들을 사로잡으면 그들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녀의 특권으로서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요 10:27).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바울의 이러한 경고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지역교회는 하나의 전통을 세우는데 있어 불과 몇 십 년 혹은 몇 년밖에 걸리지 않는데 만약 누군가 이러한 전통 중 하나를 범하거나 감히 전통에 도전하는 어떤 문제들, 가령 예배나 찬양스타일, 혹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누군가 교회에 접목시킬 것을 건의한다면 분명 교회 내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거나 심하면 신비주의자로 몰리기까지도 할 것입니다.  즉 우리가 전통을 성경보다 우위에 놓기로 하거나 또는 우리의 전통과 다르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려 할 때면 대체로 “우리는 성경에서 무어라고 하든지 상관하지 않는다.”라고 말은 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방언을 포괄적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한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보다 자신들의 교회 전통이나 신학자들의 성경해석을 더 옳은 것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개중에는 중립적인 것도 있고 좋은 것도 있기에(고전 11:2), 실제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권면했습니다(살후 2:15).  이것은 사도들의 권위에 기초(엡 2:20)를 둔 선한 정통이지만(살후 3:6), 문제는 ‘이 백성이 입술로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 7:6-7)라는 이사야의 말처럼 종교적인 전통은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신다는 망상을 줌으로서 마치 사마리아 여자와 같이(요 4:20-24),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거나(사 29:13), 예배를 헛되게 드릴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 중에 영혼을 죽이는(마 23:15), 바리새적인 성경해석(눅 11:52)과 교회 전통을 지나치게 신뢰하거나 자랑한다면(골 2:8), 엘리야가 들었던 성령의 작고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할뿐더러(왕상 19:12),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경고하신 것이고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는 이 세대에 행하시는 성령의 새로운 사역들을 거역하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바리새인처럼 종교적인 전통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환언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죽어 있는 교회 전통에 집착한다면 인간적인 방법과 규칙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가질 수 없지만 만약 그분과 진정한 교제를 원한다면 교회 안에 잠재되어 있는 결함이 많은 무익한 전통에 얽매여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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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하고 잔인한 사람 산헤립(Sennacherib)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왕(B.C. 705-681)으로서 그 이름은 “신이 형제들을 강하고 번창하게 하였다.”라는 뜻이다.  그는 사르곤 2세(SaragnⅡ)의 아들인데 장자는 아니었으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는 용맹하였으며 또한 정의를 실현하는 강인한 기상이 있었다고 한다.  사르곤 2세가 죽고 그가 왕위에 오르던 해에 강력한 갈대아족 비트 야킨(Bit Takin)의 족장 무로닥발라단(Merodach Baladan / 본명은 말둑 아발 아디나)이 사르곤 2세에 패하여 망명해 있던 엘람(Elarm)에서 돌아와 엘람의 도움을 얻어 바벨론의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산헤립은 반란자 무로닥발라단을 정벌하려고 출정하였다.  한편 무로닥발라단은 앗수르와 적대관계에 있던 갈대아족과 아람족들, 그리고 아랍 족속들을 규합하여 연합전선을 구축했으나 기스(Kish)근처에서 패하고 말았다.  산헤립은 바벨론을 약탈한 후 약 208,000명의 죄수를 추방하였으며 니느웨에서 훈련받은 원주민 벨 이브니(Bel Ibni)를 왕위에 앉혔다.  이러한 와중에서 유다 왕 히스기야는 반(反)앗수르 동맹에 가입하라는 므로닥발라단의 선동을 받아(왕하 20:12-13), 에그론의 친(親)앗수르 통치자 파디(Padi)를 체포하였다.  이러한 연고로 앗수르의 서방 정벌이 감행되었고 이때 예루살렘이 포위당하였으므로 유명한 실로암 못이 건설되었다.  서방의 정벌을 끝내고 돌아간 산헤립은 그들의 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하다가 두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 의해 살해당하였다(왕하 19: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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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히 12:2).  일반적으로 십자가형은 국가 반란자나 흉악한 범죄자들에게 시행되던 로마의 형벌이었고 히브리인들도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보았습니다(신 21:22).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사 53:4).  그것은 백성들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벧전 3:18).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놓았고(막 10:20), 빌라도와 백부장의 고백처럼 죄 없는 의인이었으나 법정에서 십자가형이 선언되었습니다(눅 23:13-25).  빌라도나 유대인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만 죄 없는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받는 것은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받으신 것이었습니다(사 53:4-5, 벧전 2:24).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습니다(갈 4:4).  이미 구약시대부터 여러 차례 증거 되어 왔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으로 그분의 뜻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시 22:1, 마 26:47),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는 죽음이었습니다(시 22:6-8, 막 15: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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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것이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지는 것이 반드시 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것,

이것이 이기는 것이다.

미워하는 것,

이것이 지는 것이다.

사랑으로써 이기는 것,

그것만이 영원한 승리이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

자랑하지 않는다.

교만하지 않는다.

오래 참는다.

 

그리하여 영원히 승리하여

영원한 평화를 가져온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싸움이 그치는 때는

사랑이 승리를 차지했을 때뿐이다.

 

-우찌무라 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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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을 묘사하면서 육체로부터 영혼이 떠났다고 증거하고 있는데(마 27:50), 이것은 육체적인 사망이었습니다(막 15:37, 계 1:18).  또한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마 27:46), 지옥의 고통과 같은 극심한 고통을 맛보았다고 말하는데(히 5:7), 이것은 영원한 사망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기 때문에(히 4:15), 하나님과 단절되는 영적 사망은 전혀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육체적 사망과, 영적 사망, 그리고 영원한 사망 이 세 가지의 죽음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죽음은 육체적 사망과 영원한 사망이었습니다.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경우 영원한 죽음은 신성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아버지의 신적 사랑과 중보자의 위격으로부터 거두어 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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