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

진리의 성령 2016. 9. 29. 15:00

성령의 내주사역의 또 다른 한 가지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의 인격을 통해 표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죄 자체와 죄가 끼치는 영향력 때문에 매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분은 죄를 보셨을 때 하나님의 열심에 감동되어 죄를 바로 잡으셨습니다(요 2:14-12-17).  사람들이 배고파하는 것을 보시고 측은히 여기사 그들을 먹이셨습니다(마 15:32).  아픔을 보시고 불쌍히 여겨 고쳐주셨습니다(마 14:14).  목자 없는 양같이 헤매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히 여겨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막 6:34).  성령께서 우리를 예수님처럼 닮아가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의 마음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이는 일에 우리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해 주는 것들을 종종 ‘동기부여 은사’라고 부릅니다.  로마서 12장3-8절에 동기부여 은사가 나옵니다.  다른 것은 다 생략하고 ‘예언’에 대해 간략하게 말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예언 그러나 오늘날에도 예언은 반드시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 예배를 드릴 때 예언이 있었고(고전 14:26),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 형제들에게 예언하기를 사모할 것을 말했으며(고전 14:1, 39),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자녀들이 예언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욜 2:28).  그리고 베드로가 오순절 날 설교할 때 요엘서 2장을 인용하면서 말세에는 자녀들이 예언할 것을 설교했고(행 2:14-18), 또한 성경은 예언을 멸시치 말 것을 명령합니다(살전 5:20).  여기서 하나 중요한 것은 모든 예언은 반드시 시험을 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개인의 말인지 혹은 거짓된 귀신의 속삭임인지 말씀을 통해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고전 14:29, 요한일서 4:1).  오늘날에 예언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성경에 기록된 은사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외에 ‘섬김’, ‘가르침’, ‘권면’, ‘구제’, ‘다스림’, ‘긍휼’의 은사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이 모든 것에 부름을 받았지만 성령께서 이 중 하나를 기본은사로 주십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성장하고 섬기는 가운데 자신이 주는 자, 섬기는 자, 인도하는 자, 가르치는 자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를 위해 하는 모든 일들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주시고, 만져 가시는 이 은사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은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마음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사를 사모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사 중에 잘못되거나 나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약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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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연적인 원인으로 죽음에서 부활까지의 기간이 짧았기 때문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흘 동안 무덤에 계셨으나 실제로 무덤에 머문 시간은 금요일 저녁부터 주일 새벽까지 35시간 전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신은 못에 박히고(마 27:35), 창에 찔려(요 19:34), 피를 흘리는 등 심하게 손상되었기 때문에 하루만 지나도 부패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매장 기간이 짧아 시신이 부패하지 않았다는 것은 적합한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원인을 그리스도의 특성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여 죽임을 당했으나(마 20:28), 그 자신은 죄가 없었기 때문(히 4:15)에 썩어짐에 종속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행 2:31).  인간이 죽어 그 시신이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죄의 결과였습니다(창 3:19).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혼이 육체에서 떠남으로써 실제적으로 죽으셨으나 하나님은 죄 없는 예수님의 시신이 썩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행 13: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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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교리

은사중지론 2016. 9. 24. 15:28

교리(敎理)라는 한자어 용어는 “가르침에 담긴 근본원리”, 또는 “특정 종교가 제시하는 이법(理法)” 등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데, 이를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정의한다면 ‘기독교 교리’란 하나님의 특별계시로서 신앙의 절대근거인 성경의 가르침에 담긴 인간 구원에 관한 근본진리를 조직적이고 논리적으로 체계화 한 기독교 신앙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공동체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교리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엡 5:23)와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각 지체로서(엡 4:16), 각 교회가 일치 통일을 이루기 위한 근거로서도 교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또한 교회가 세상에 대해 진리를 선포하고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의 공격에 저항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바 그 진리의 내용을 체계화한 것이 바로 교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거대한 풍차를 향해 싸우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돈키호테처럼 스스로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진리를 수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진리의 내용을 체계화한 교리를 가지고 마치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형제를 향해 공격하는 것입니다.  Lloyd Jones의 말을 인용한다면 “성령을 소멸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간구하는 잘못”을 서슴치 않고 범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교리가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만약 교리 때문에 서로 물고 뜯고 싸운다면 그런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교리’는 갖다 버려야만 할 것입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미국에서 제자훈련을 잘 가르치기로 이름나 있고 오래 전 한국에 가서 목회자들을 위한 제자훈련 세미나를 인도한 Bill Hull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사로 한국이나 미국에서 제자훈련을 교회에 접목시킨 목회자들은 이 분이 아주 오래 전에 쓴 『목회자가 제자를 삼아야 교회가 산다』라는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분의 또 다른 책인『성령의 능력에 관한 솔직한 대화』를 읽다보면 Bill Hull 목사는 대학교 시절부터 오순절 계통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강하게 주장했던 사람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던 분이 Talbot School of Theology를 들어가고 나서부터 그의 신앙관이 변하기 시작했는데 책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2년 뒤 그토록 성령의 은사를 주장하던 나는 성령의 은사가 중단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성령의 은사들 즉 방언, 신유, 기적, 그리고 예언과 같은 것들은 이제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만약에 아직도 이런 은사들을 활용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싸구려 연기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마귀의 도구로 전락한 자들일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내 주위에 있는 매우 경건하면서도 훌륭한 강해설교자들의 영향 때문이다.”  그 당시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학적 교리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자 그렇게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고 주장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성령의 역사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으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Talbot School of Theology의 공식적 입장은 전통적인 은사중단주의인데 ‘은사중지론’이란 특별계시인 신약정경 완성과 더불어 모든 예언적 은사가 중단되었다는 주장으로 사도와 예언자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졌으므로(엡 2:20), 사도의 역할이 끝난 것처럼 예언자 역할도 A. D. 1세기말에 종료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의 은사는 초대교회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사중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상당수의 세대주의자들과 개혁주의 신앙과 언약신학 노선에 서있는 자들로 많은 신학자들이 있지만 대표적인 사람은 Robert L. ReymondRichard B. Gaffin을 들 수 있고, 특별히 은사중지론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오늘날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목회자들 중 한 사람이 제가 좋아했던 John F. MacArthur입니다.  물론 드물긴 하지만 Talbot School of Theology을 공부한 친구 목회자들 중에 성령의 사역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튼 Bill Hull 목사는 신학교 시절 주제 강의 시간에 늘 풀리지 않는 문제가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 대한 주해로 헬라어 본문을 찾아봐도 성령의 은사가 중단되었다는 것이 설득력이 없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신학대학원에 가서 공부하면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 은사들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결론짓기를 오늘날에도 성경에 기록된 모든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여기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은 것은 A. D. 1세기말에 모든 은사가 끝났다고 배웠기에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그다지 환영하는 편은 아니었고, 물론 개인적으로 방언기도를 했지만 누군가 예언이나 환상, 혹은 꿈을 꾸었다고 하면 지금 기록된 성경 66권의 말씀이 있는데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느냐고 책망을 하면서 그런 것들은 마귀가 주는 것이라고 반박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역사에 대해 반박했던 것은 정식 신학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은사들과 영성훈련의 광범위한 분야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었고, 무엇보다도 대학원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면서 그 좁은 틀(교리) 안에 갇혀 다른 견해와 체험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심하는 가운데 신랄하게 비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었고 나중에 그것을 깨닫고 보니 성령의 놀라운 역사에 대한 영적인 갈급함이었습니다.  사실 지금은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균형 잡히게 강조하는 이유는 그럴만한 특별한 사건이 있었는데 목회를 관두려고 마지막 금식에 들어갔을 때 남들이 말하는 ‘성령의 불’ 받는다는 것을 뜨겁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것은 개인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만큼 확실한 것은 너무나 은혜스러운 것이었고 거의 서너 시간 내내 내 자신의 초라함과 비참함을 절실히 느끼면서 성령의 임재와 은혜와 사랑을 몸으로 직접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성령을 빼놓고 말씀만 강조하면 죽은 정통주의 신앙생활을 할 가능성이 많은데 Lloyd Jones는 『부흥』에서 죽은 정통주의는 교리적으로 지극히 정통이지만 전혀 생명이 없고 인간이 만든 제도에 묶여서 예배에 생명력이 없어 성령을 소멸한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딤후 3:5).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서 이단 못지않게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죽은 정통주의'라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또한 말씀을 빼놓고 예언과 환상과 치유와 은사를 너무 강조하면 신비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데 이것 역시 오늘날 현대교회의 심각한 문제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는다면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역사와 능력이 지금도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사역의 모델이 예수님이시고(히 13:8), 분명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의 삶에서 말씀과 성령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또한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고(요 15:26, 16:13), 모든 성령의 역사는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기에(엡 6:17),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만약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거스리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아무 쓸모없는 메마른 성경지식(교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진리의 말씀을 의심 없이 믿는다면(마 21:21), 그 말씀에는 능력이 따르게 되어 있고(고전 4:20),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히 4:12), 그 역사는 지금도 믿는 자속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막 16: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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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를 부르신 것과

그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성경의 인물들과

어떻게 함께 일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출애굽기 2-4장을 살펴보면

모세의 유년기와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들도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게 되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모세 당대에 무언가 하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비록 광야의 도망자 신세로 있었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계획에 꼭 맞게 준비되어 있었으며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그분의 뜻 한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여러 번 모세와 이야기하려고 초청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모세와 관계를 맺으시고 지속시키셨습니다.

이 관계는 사랑에 기초한 것이었고

하나님은 매일 모세를 통해서

그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데

쓰임 받은 장본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하시고자 하면

한 개인이나 그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암 3:7).

하나님은 그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의 일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에 역사하기 시작하시면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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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장사되어 무덤(마 28:57-61)에 삼 일간 계셨으나(눅 18:33), 다른 사람의 경우와 달리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습니다(시 30:3).  즉 예수님의 시신은 전혀 부패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보다 천년 이전에 살았던 다윗에 의해 이미 예언되었고(시 16:10), 부활 이후 그리스도를 만났던 사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행 2:31-32)와 바울에 의해서도 이러한 사실은 확인된 바가 있습니다(행 13: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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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은 교회에서 덕을 세우는 참으로 유익한 은사이긴 하지만(고전 14:3), 잘못 사용되면 주관론에 빠지기 쉬운 은사이기도 합니다.  2세기 말에 Montanism이 일어나면서 예언의 은사는 일반적인 가르침을 전달하는 측면에 있어 많은 제한을 받게 되었는데, 사실 Montanism은 지하 운동으로서 특히 기성교회에서 만연해 가는 형식주의와 세속성에 대해 저항하며 존속하였지만 문제는 이것이 너무 지나쳐 성경의 교훈보다 더 나아가게 되는 잘못된 실수를 범했던 것입니다.  또한 Edward Irving은 탁월한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이며 유능한 설교자이었으나 그가 1820년에 런던에 센세이션을 일으킬 때 Robert Baxter는 영적인 사람으로 한동안 Irving Movement에 참여했던 핵심 인물이었지만 무엇인가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어느 날 성령의 메시지를 전달하라는 계시를 받았으나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더욱 심각했던 것은 아내와 자식과 직업을 버리라는 하나님의 음성(계시)을 듣고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도 없이 떠나 버렸을 당시 그가 고백하기를 주님의 사랑이 과거보다 뜨거웠고 행복이 더 컸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의 예언들이 성취되지 않는 것을 보고 결국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와 후회를 하면서 자신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그리고 속죄 등을 다 고백했지만 자기 속에 있는 영이 성령이 아니라 악령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고 그로부터 구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성령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 특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언을 하는 사람 중에 마치 자신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권위적이며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대화를 언제든지 필요할 때마다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자신을 대단히 신령한 사람으로,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만을 특별하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비록 크게 소리를 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느끼는 감정이나 느낌, 혹은 모든 생각을 성령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가정 하에 행동하거나 말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은 자신의 육적인 연약함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계획이나 마귀의 탓으로 돌릴 뿐 자신의 인간적인 요소를 조금도 참작하지 않는 믿음 같지 않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매 순간 자신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씀해 주시므로 자신은 아무런 결정을 내릴 이유가 없다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하는데, 솔직히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가장 심각하고 위험한 문제점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의 경험을 초월하거나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능가할 정도로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시편 기자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중단 없이 메시지를 받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이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말한 것처럼(시 13:1),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기간을 참고 견디어내야 했으며(시 28:1, 39:12, 83:1, 89:46, 109:1), 무엇보다도 구약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요구를 받는 대로 예언을 수시로 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나라가 혼란한 시기에 군대장관들과 백성들은 자기들이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바벨론 왕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피난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알아봐 달라고 예레미야에게 부탁했지만 기도한지 열흘 후에야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렘 42:1-7).  그리고 신약시대의 사도들 역시 오늘날 주님의 음성을 항상 듣는다는 어떤 사람들의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메시지를 원할 때마다 받으면서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종종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았다고 했고(고후 4:8),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3:9).  이것은 사도들이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다 분명한 지시를 받고 싶지만 어느 정도 참고 기다리는 시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의 음성을 언제든지 듣는다고 주장하거나 자신만이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람에게 있어 또 다른 문제점은 자신의 주장과 실제의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런 사람은 자신의 예언사역 안에서 진정한 열매를 나타내고 있지 않으며(마 7:15-20), 오히려 자신이 가는 곳마다 분쟁과 혼란을 야기 시키고 최악의 경우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하고 자기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나누었다는 의심쩍은 대화들을 교묘히 사용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부류의 사람은 한 교회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 특징인데 만약 자신의 신뢰성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교제하는 중에 상실하게 되면 그 즉시 자신의 예언사역을 인정해 줄 사람들이 있는 다른 교회로 옮겨갑니다.  사실 이런 사람은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마음이 열린 교회의 지도자(목사)로부터 권면과 조언을 받아야 하며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음의 상처와 거부감을 치료받아야 합니다.  만약 이들이 자신의 내면 속에 깊이 잠재되어 있는 영적교만을 철저히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통로가 된다면 교회 안에서 유익한 사람이 되겠지만(고전 10:24, 12:7),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그 귀중한 예언사역을 불명예스럽게 만들어 그분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이고, 더 심하면 귀신에게 철저하게 조종당하는 가운데 교회에 덕을 세우기보다는 오히려 해를 끼치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자신만이 항상 하나님을 음성을 듣고 예언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일단 그를 경계하는 가운데 분별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사들을 막무가내로 비판하기 전에 먼저 분별해야 하는 이유는(요일 4:1), 교회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지만 정령주의와 체면술의 영향, 그리고 악령도 얼마든지 모방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내면의 감정을 의지하거나 보도된 내용이 놀라움을 줄지라도 흔들리거나 주변사람들의 평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성령의 지시적인 인도함을 받아(행 8:26, 13:2), 성령께서 무슨 행동을 금지하시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바울은 성령의 직접적인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옳은 줄 알고 전하려고 했지만 성령은 그것을 금지하셨습니다(행 16:6-7).  이것은 바울이 이성과 지성을 사용하고 행동했지만 그것이 성령의 뜻이 아니었기에 막으신 것이고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일에 있어 성령의 인도함을 받되 진리의 말씀 위에 견고히 서서 영들을 분별하는 가운데(요일 4;1),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되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히 물리쳐야 하며(살전 5:21), 무엇보다도 말을 조심하는 가운데(마 12:32),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하겠지만(살전 5:19), 항상 하나님의 음성만을 듣고 움직이겠다는 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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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는 사람이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하였고 빌라도는 그 요청을 들어 주었습니다(마 27:57-58).  요셉은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러 무덤 문을 막았습니다(마 27:59-60).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자고 제의하였고 빌라도는 그 요청을 수락했으며 그들은 무덤 입구의 돌을 인봉하고 굳게 지켰습니다(마 27:62-6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으며(눅 24:1-12), 그 후 사십 일간 세상에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행 1: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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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은 삯꾼 목자의 설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릎으로 사는 사람은 두려워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지 못하도록

지옥의 세력을 규합한다.

따라서 기도를 방해하는 지옥의 세력을 이기려면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값싸게

.아무에게나 퍼주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능력을 받으려면

그분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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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 적대 세력에 의해 우연히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결코 이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약시대부터 이미 여러 차례 예언되어 왔습니다(창 3:15, 시 22:1, 16, 사 50:6, 53:7-9, 단 9:26, 미 5:1, 슥 11:12-13).  둘째, 구약시대부터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예표적으로 보여준 사건들이 많았습니다(창 22:6-10, 출 12:1-14, 레 1-5장, 16:29-34, 26:31-33).  셋째, 예수님께서도 미리부터 자신의 죽으심을 아시고 준비하며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마 16:21, 막 9:30-32, 눅 13:31-34).  이와 같은 여러 사실들로 볼 때 그리스도의 죽음은 결코 예기치 못하게 우연히 닥친 것이 아니라 인간 구원을 위해 이미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준비된 것입니다(갈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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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극단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의 준비에만 의지하여 더 이상은 바라지 않고,

어떤 이는 준비를 경멸하여

성령의 역사와 감동과 영감에만 의지하는 경향을 가집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는 결단코 되지 않습니다.

늘 둘을 겸해야 하고 “둘이 함께” 가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이나 기름 부으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아는데 가장 훌륭한 접근방식은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그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기 전에

나는 모든 설교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설교하기 전에

이 성령의 감동과 기름 부으심을 기다리며 간구합니까?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의 최대의 관심사였습니까?

설교에서 이보다 더 철저하고 노골적인 시금석은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께서 설교자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사람의 노력과 열심을 초월하여 성령에 의해 쓰임을 당해,

그를 통해 성령께서 일하시는 도구가 되는 위치에서

설교사역을 수행하도록 성령을 통해

설교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아주 뚜렷하고 명백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강에서 올라올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후에 이것을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셨는데,

그의 고향에 나사렛의 회당에서

그것을 설명하여 말씀하셨다고 누가복음 1장18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 부으시고…’

 

내가 강조하는 싶은 것은 요단강에서 주님께서 있었던 일은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 자신마저도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이 독특하고 특별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지 못하였다면

땅위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임무를 행사하지 못하셨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정말이지 이것은 예수님에게도 그러합니다.

 

누가복음 마지막 장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제자들은 3년 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으면서

그분의 설교와 교훈을 들어왔고 모든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그분과 개별적인 대화와 교제를 나누는 유익을 누렸던 것입니다.

제자들 모두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장사지냄을 목격했습니다.

그보다 더 한 것은 그의 육체적인 부활의 사실을 모두 다 목격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생각하기를 이 사람들이야말로

이제 전도하러 나갈 완벽한 상태에 있구나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교훈에 의하면

그들은 아직 그런 위치에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필요한 모든 지식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란 충분하지 않아 더 필요한 무엇이 있었던 것인데,

그것은 성령의 권능과 기름부음과 나타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에게마저 이것이 필요하였다면

이 일을 전하려고 하는 다른 모든 이들에게는 얼마나 더 질실하게 필요하겠습니까?

 

“예,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조금도 고민할 것이 못 됩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은 사도시대에 끝났으니 우리와 관계없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 모든 것을 사도시대에만 국한시킨다면,

어떤 경우에는 그것들이 사도들에게만 해당되고,

어떤 경우에는 우리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것을 구별할 때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한단 말입니까?

여러분의 판단의 척도가 무엇입니까?

나의 답변은

성경이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될 것을 의도하고 있으며

모든 성경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식을 가질 수도 있고,

준비할 때 면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하심이 없이는 아무런 능력도 가질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설교한 것은 아무런 효과도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설교자의 노력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단지 도구요 통로이며 수단일 뿐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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