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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20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처음 방언을 받았을 때 신기하기도 하고 너무 좋아 흥분된 가운데 교회에서 기도모임이 있을 때마다 곁에 있는 형제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가장 큰소리를 내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끔찍했던 것은 내가 하는 방언기도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다른 사람의 기도소리가 내 기도소리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골방(옷장)에 들어가서 기도한 것보다 교회모임에서 기도한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늘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다른 형제들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 내 마음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무지와 무식이 조합을 이루어 깨닫지 못해서였지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교만이 하늘을 치솟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기도모임이 있을 때마다 하던 일을 마다하고 득달같이 달려가서 성령이 허락해 주신 귀한 선물인 방언으로 마음껏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가끔 신비(?)주의적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처음 신앙생활을 하면서 방언을 받고 아무것도 모르는 신앙의 초보상태에서 교회에 아름다운 덕을 세우지 못하고 심각한 해를 끼쳤던 사건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때에 누군가가 성령의 은사(방언)에 대해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면 그렇게 무식하게 공식석상에서 방언을 남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방언기도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통역 없이 공적인 자리에서는 하지 않습니다.


방언을 옹알거리는 현상으로 치부하거나 방언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외국어라고 강조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오늘날의 방언은 귀신의 장난이거나 마귀가 가져다주는 거짓된 은사라고 주장을 하면서 역사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주의 종들 가운데 방언을 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을 줄기차게 내세웁니다.  여기서 한 가지가 궁금한 것은 정말 그리스도인들 중에 “방언하는 사람은 귀신에 들렸거나 미혹을 당한 사람인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를 믿기 전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들을 향해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 10:20)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을 향해 방언을 말할 때 귀신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 것을 경고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이 할 수만 있으면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고전 14:5).  무엇보다도 바울은 영적인 은사를 다루기 전에 신전에서 귀신을 섬겼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일부 고린도 신자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만일 성령의 능력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을 저주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먼저 강조하면서(고전 12:3), 한 가지 기본 원칙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자(롬 10:9), 즉 그리스도인 중에 누군가 방언을 한다면 그 사람 안에 역사하시는 분은 귀신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2:7).


Jack Hayford는 이 방언에 대해 『The Beauty of Spirit Language』에서 “오늘날 영적인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그저 신기함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원천을 간절히 구하는 것에 비롯된 것이고 그분에 마음에 더 가까이 가고자 더욱 성경적인 것을 찾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방언은 우리가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더 경건하게 높일 수 있도록 돕는 은사이다.”  Harold Horton 역시 『Gifts of the Spirit』에서 “구원받은 자의 내면에는 마음이나 생각으로 측량할 수 없는 깊이가 있다. …즉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늘의 언어를 통해 성령의 폭포수와 같은 물결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과 같다.”  이들의 말은 방언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비위가 상하고 역겨운 말들로 들리지도 모르지만 방언은 성령께서 결정하시는 대로 사용할 수 있는(고전 12:10), 놀랍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선물이지(약 1:17), 마귀에게 미혹을 당해 옹알거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은 사람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된 예언의 은사와 다르게(고전 14:3),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송이며(고전 14:2, 15, 28), 통역이 없으면 골방에서 개인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덕을 세울 수는 있지만(고전 14:3),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고전 14:11-13), 마음이 아닌 영으로 기도하는 은사로(고전 14:14-15), 얼마든지 자제력이 가능하지만(고전 14:27-28),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교회에 속한 모든 신자들이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고전 12:30).


문제는 오늘날 방언을 허락하는 교회에서 공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 사람이 통역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조용히 기도하지 않고 옆에 있는 사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소리 내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경우인데 이는 사도 바울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것이고 교회 안에서 다른 지체들에게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고전 13:1).  물론 바울의 명령에 순종하여 방언하는 사람 중에 곁에 있는 사람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한나가 기도하는 것처럼(삼상 1:13), 속삭임으로 방언하는 사람도 있지만 만약 공적으로 통역을 통해 전달할 메시지가 없으면 방언을 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할 것입니다(고전 14:28). 사실 방언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방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이유는 방언하는 사람이 열매가 없는 삶이나 교회 내에서 신비주의적 행동을 보일 때, 혹은 주변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성령충만한 것처럼 통역 없이 큰소리로 방언을 하기 때문인데 이런 지혜롭지 못한 행동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에게 모독을 받는 것처럼(롬 2:24), 하나님의 귀중한 선물이 특히 성령의 은사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온 회중이 방언으로 찬양할 수 있지만(고전 14:15), 그것은 고린도전서 14장27-28절에 기록된 순서를 따라야 하고, 무엇보다도 ‘영으로 찬미’ 하는 것은 믿는 자에게는 아름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고전 13:1), 불신자에게는 ‘미쳤다’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릅니다(고전 14:23).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면서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온 회중이 방언으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찬양하는 것입니다(고전 14:26).  다시 말해 통역이 없는 방언을 일만 마디 하는 것보다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다섯 마디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고전 14:19). 이 말은 방언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통역되지 않는 언어를 공적모임에서 사용하는 것을 바울이 비판하는 것인데, 사실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문제처럼 오늘날 누군가 개인적 가치를 그가 가진 은사로 평가할 위험이 있고 혹은 감정주의나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다 그렇다고 단정지울 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리의 말씀에 기초를 세우고(고전 3:11), 예수님의 인격과 삶에 초점을 맞추며(벧전 2:21), 주의를 기울이는 가운데 교만하지 않는다면(고전 10:12),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지(빌 2:13), 귀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요일 4:2).  그러므로 방언은 어떤 식으로든 사용자에게 덕을 세울 뿐 아니라(고전 14:4),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 않는 한 미혹케 하는 영에게 속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요일 3:7).  더 나아가 방언을 통해 무엇인가 미혹을 당했다고 생각한다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성령의 은사인(고전 12:10), 방언사용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14:5,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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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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