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진리의 성령 2016. 7. 28. 14:30

내주하시는 성령의 두 번째 일은 예수님의 의(義)를 우리 안에 심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이 일을 행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22-23절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말하며 이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노라면 예수님의 삶이 사랑, 기쁨, 화평, 인내 등으로 온전하면서도 균형이 잘 잡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열매의 궁극적인 표현입니다.  이 열매들은 예수님의 의가 삶에 실제적으로 드러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기준을 절대 거스리지 않는 완벽한 삶을 살려면 이 아홉 가지 열매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2:37-40).  성령이 일상생활에서 이 열매들을 나타나게 할 때 예수님의 의가 삶에 드러나게 됩니다.  G. I. Scofield는 “기독교인의 인격은 단순히 도덕적, 법적으로 바른 것이 아니라 이 아홉 가지 은혜를 소유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들이 합해지면 예수님의 모습이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22절에서 이 아홉 가지 특성들을 ‘열매’라고 부른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열매는 강압적으로 힘을 쓴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과일나무에 붙어만 있으면 저절로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도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니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 저가 내 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과실을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거한다’는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40번 정도 사용되고 요한서신에서 27번 더 사용된 단어입니다.  헬라어로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계속적인 강조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을 향한 끊임없는 믿음과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도 이와 동일합니다.  열매를 생산하기 위해서 자기 훈련과 노력, 그리고 금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성령께 순종하고 그 안에서 성장하면 열매는 자연적으로 생산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나 읽을 때, 혹은 묵상할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지적해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 있습니다(요 14:26).  그때 성령님께 순종하면 열매는 자동적으로 맺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두 번째로 하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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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입장에서 죽음은 세 가지 종류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육체가 영혼과 분리되는 육체적 사망으로(약 2:26), 인간이 육체적 사망을 당하게 된 이유는 인류의 시조 아담 이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를 지은 결과였습니다(창 2:17, 3:19).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이 육체적 죽음을 당합니다(롬 6:23, 히 9:27).  둘째는 영혼이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적 사망으로(요 3:3, 6), 모든 사람은 이 영적 사망의 상태로 출생합니다(시 51:5).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 영적으로 분리된 상태로 출생함을 가리킵니다(골 2:13).  이렇게 영적으로 죽은 인간은 영적인 무지의 상태 가운데 있으므로 성경과 하나님에 대하여 바로 깨닫지 못하지만(엡 4:18),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때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됩니다(요 3:16).  셋째는 육체와 영혼이 모두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지옥의 고통을 당하는 영원한 사망입니다(계 20:14).  이 영적 사망의 상태로 태어난 사람이 생전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불신자의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면 그의 육체는 물론 영혼 역시 영원한 죽음, 즉 영원토록 지옥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눅 16: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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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언자'라는 단어를 대할 때 신내림을 받은 무당을 연상하는 것 같고, 또 다른 사람들은 현대의 초자연적인 계시는 성경에 새 책들을 추가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강력하게 반대를 하면서 예언자란 이사야나 예레미야, 아니면 사도 바울 같이 오류가 없는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구약시대 선지자들이나 신약시대 사도들이 지녔던 권위를 가진 사람은 없기 때문에 예언자들과 초자연적인 계시는 신약시대의 마지막 사도가 사라짐과 더불어 종식되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 신빙성이 있는 유일한 형태의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오직 ‘성경’이라고 강조합니다. 물론 이것이 곁길로 가지 않는 가장 안정하고 바람직한 형태의 길이긴 하지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이러한 형식적인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영역을 떠나 종교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10:27),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채(요 5:37), 성경을 연구했기 때문에 경건이 없는 지식의 영역으로 들어갔고(마 23:1-7), 이것은 이들의 편견과 종교적인 교만을 강화해 주는 지식이었기 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냈습니다(마 23:13-15).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종교적 행위에 만족한다면 교만은 증가하고 편견이 강화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Paul Thigpen『Did the Power of the Spirit Ever Leaver the Church』에서 “신약시대의 교회가 출발한 이후로 하나님은 각 시대의 신자들에게 항상 복음 전도자들과 목사들과 교사들, 아울러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역자들을 주셨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에베소서 4장11절에 나오는 말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규칙적으로 장래 일을 예언하며 마음의 비밀을 말하고 정확한 느낌을 받고 꿈을 꾸며 정확한 환상을 본다는 것입니다(행 2:17).  만약 우리가 지혜롭게 이들의 사역의 가치를 인식하며 이들로부터 유익을 얻기만 한다면 이런 사람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그리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문제를 삼는 것은 이들이 실수를 범하거나 한번 예언이 맞지 않으면 그 사람을 거짓 예언자로 낙인을 찍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단지 하나의 예언이 맞지 않았다고 해서 거짓 예언자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거짓 예언자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불순종하도록 충동질하거나 그 말씀을 벗어나게 만들려 하는 사람들이지(신 13:1-5), 예언이 틀렸다고 해서 거짓 예언자라고 판단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분하는 방법은 그들의 사역의 결과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마 7:15), 이 말의 의미는 거짓 예언자에게는 비록 예언이 잘 맞더라도 나쁜 열매가 나오고 참 예언자에게는 좋은 열매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신명기 18장15-22절을 잘못 인용하여 예언하는 자가 실수하면 거짓 예언자이고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거나 해석을 하는데 이것은 사이비나 이단들처럼 성경 앞뒤 문맥을 다 빼버리고 해석하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신명기 본문을 전체적으로 보면 예언자를 대상으로 쓰여진 말씀이 아닌 것을 잘 알 수 있는데 15절에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나와 같은’이라는 단어는 예언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데 모세는 성경의 모든 예언자들 중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유일한 사람이었고(민 12:6-8), 하나님의 언약을 깊이 묵상하는 자로 사람과 하나님을 대표하는 대변인이었습니다(신 34:10-12).  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주실 것이라고 했을 때(행 7:37), 그는 메시야를 뜻하는 것으로 예수님은 예언자의 대표이시며(눅 24:19, 요 4:19),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셨지만(요 14:6, 16:13), 여기 신명기에 거짓 선지자들이 죽음을 당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저지른 실수 때문이 아니라 감히 모세를 흉내 내어 백성들을 가짜 신들에게 인도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렘 23:9-32).  그래서 더 이상 예언자가 저지른 실수를 추궁하여 사형을 내렸다는 뒷받침이 될 만한 성경구절이나 실수한 예언자를 추궁하기 위해 신명기 18장15-22절 말씀을 인용한 예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지어도 좋다는 말을 전하는 실수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단지 나단의 말을 정정하셨을 뿐 그로 인해 나단을 거짓 선지자라 고 부르지도 않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려 하는 백성들도 없었습니다(삼하 7:1-17).  심지어 어떤 경우 하나님이 주신 예언이 사람들의 조건들을 충족시켜 그 결과를 바꾸게 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있었는데, 하나는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에게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히스기야는 죽지 않고 십 오년을 더 살았고(왕하 20:1-7), 다른 하나는 니느웨 성에 대한 요나의 메시지가 성취되지 않은 경우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거짓 선지자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욘 3장).  그러기 때문에 예언을 할 때마다 정확하게 맞춘다고 해서 그를 참 선지자라고 할 수 없고, 반대로 예언이 틀렸다고 해서 거짓 선지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가령 어떤 경우 예언이 맞았다고 하더라도 참 선지자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거짓 선지자들도 강력하게 미래를 예언하고 증표를 보이기도 하며 각종 이적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 44:25, 렘 23:13, 마 7:21-23, 24:24).  따라서 누군가 예언을 할 때 그 예언을 틀린 것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열매를 봐야 하는데(눅 6:44), 만약 예언하는 사람이 발람처럼 돈을 사랑하거나(벧전 2:15-16),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을 진리인 것처럼 믿게 한다면 그를 거짓 선지자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렘 28:15).


한 가지 더 예를 든다면 사도행전 21장10-11절에 보면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그 예언은 맞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유대인들에게 결박당했다는 것과 유대인들이 바울을 로마에 넘겼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아닌 로마인들이 두 번이나 바울을 결박했고(행 21:33, 22:29), 유대인들은 단순히 이방인에게 넘겨주려고 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게 그를 죽이려 했고(행 23:12-14),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천부장을 통해 여러 차례 무력으로 구출되어야만 했습니다(행 21:27-36, 22:22-24, 23:10, 16-36).  물론 이런 결과는 후에 로마인들에게 넘겨주는 계기가 되었지만(행 28:17), 이렇게 틀리게 예언을 한 아가보를 거짓 선지자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명기 18장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은 구약 선지자와 신약 선지자의 차이를 아직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이사야나 예레미야를 예언자적 사역전체의 표본으로 삼고 오늘날 예언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기 때문에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만약 예언자의 실수가 절대 용납될 수 없었다면 분명 사도 바울은 예언을 분별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을 것이고(고전 14:29), 베드로 역시 위선된 모습과 실수를 안디옥 교인들에게 저질렀지만 그를 거짓사도라고 말할지 않은 것처럼(갈 2:11-12), 우리도 예언자들에게 어느 정도 관용을 베풀어야 하고 더 나아가 우리는 거짓 예언과 서투른 예언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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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Knox

기도의 사람 2016. 7. 21. 14:31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 평가받은 Knox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선구적 지도자였다.

그는 한때 사제 서품을 받고 로마교황청 공증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당시 개혁 신앙을 부르짖던 George Wishart의 영향을 받으면서

완벽하게 개신교도로 거듭났고

타고난 차분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의 대변자요,

지도자로서 투쟁의 기치를 들어 올리게 되었다.

가톨릭 정권의 핍박을 피해 유럽대륙으로 건너가

John Calvin 그리고 Theodore Beza 등과 교제하는 동안

신앙을 위협하는 군주에 맞서 대항할 권리와 의무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1559년 스코틀랜드로 돌아간 Knox는 가톨릭 정권에 대항해 종교개혁을 추친 했는데

잉글랜드로부터 군사, 경제적 지원을 받아 무력 충돌까지 감행하였다.

1560년 드디어 종교 개혁파가 스코틀랜드를 휘어잡았고,

이때 John Knox는 칼뱅주의에 입각한『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을 제정하고,

『녹스의 전례서』를 만드는 등,

개혁교회의 교리와 전례에 관한 연구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 가톨릭인 Mary Stuart가 다시 집권하면서

개혁파는 어려운 시절을 맞기도 했으나 Knox는 의연히 대처하였고,

1567년 Mary가 몰락한 이후 개혁교회는 다시 큰 힘을 얻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Knox 시대의 스코틀랜드는

도저히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Knox 자신부터가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대적 소명에 앞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개혁과 부흥의 횃불을 높이 든 John Knox를 통해 하나님은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다.

Knox는 누구보다 기도의 심오하고도 엄청난 위력을 알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기도하는 한 사람은 기도 아니하는 한 민족보다 강하다”고 천명하기도 하였다.

 

진실한 기도는 단 하나도 하늘에서 무위로 돌아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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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법은 일정한 범주에 속한 사람 전체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성을 지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특별법과 일정한 시기에만 효력을 지니는 한시법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율법은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하며, 한시법이었던 할례, 제사 등과 같은 의식을 제외하고는 시대를 초월하여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지닌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율법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절대적인 법인만큼 성도들은 이를 자신의 신앙이나 여건에 따라 지키고 지키지 않는 방자함을 범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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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성경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언어의 이해력이 부족해서인데, 사실 신학교에서 배울 때 신학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 교수들의 영향을 받게 되면 성경해석학의 한 입장을 취하게 되고, 만약 이러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면 결국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체계의 산물이며 그 관점이 우리의 성경에 대한 이해를 장악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그들 나름대로 성경의 증거들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성경관에 대해 그 정통성을 인정받거나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이 성경적 이신론자임을 스스로 알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뿐더러 인격적인 하나님을 성경 안에 가두어 섬기는 경향이 있고 Jack Taylor가 말한 것처럼 실제로 ‘성경을 신격화’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성경을 아는 것의 구분을 잃어버려 예수님보다는 성경을 전파하고 가르치는데 온 정성을 기울이고, 또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모토의 핵심은 성경지식을 전달하는데 있기에 “성경적인 사람이 되십시오.”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기도 합니다.  즉, 영적성장의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이 성경지식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예수’라는 명사보다는 ‘성경적’이라는 형용사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성경해석 능력이나 성경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지식과 신학적 체계를 믿고 있어 성령의 은사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과 교제하기를 거부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분야에서는 자기의 해석이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로부터 분리될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는 허접한 성경지식으로 상대방을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정죄합니다(요 7:45-49).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에게 있어 최강의 적은 일반 유대인들이 아니고 신학적인 편견을 가지고 철저히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었는데, 바리새인은 보수적이고 정치적인 사람들이며(막 7:3), 사두개인은 신학적으로 매우 진보적인 사람들이었고(막 12:18), 서기관은 학자들이었습니다(마 23:2).  이들은 성경을 경외심을 가지고 세심하게 연구한 사람들로 성경을 주관주의에서 보호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지만, 문제는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성경지식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자들이었지만 막상 메시야가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요 7:27), 심지어 대적하기까지 했습니다(요 11:53).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그토록 열심히 연구하는 성경이 바로 자신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요 5:39), 이들은 정치적인 이유와 신학적인 편견, 그리고 죽어 있는 정통으로 인해 예수님이 구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임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요 7:40-43).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듯 종교적인 사람들의 영혼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은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이미 단정해 버렸기 때문입니다(요 9:16).  다시 말해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무엇을 믿을 것인가 미리 단정해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기에 성경의 해석을 자신들의 믿고 있는 대로 단정 지은 것이고, 마찬가지로 유대 지도자들도 성경을 읽고 연구를 했지만 아무런 영향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요 5:46-47).  무엇보다도 자신의 경험해보거나 체험해 보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 무엇인가 아는 것처럼 전문가 노릇을 하거나 어떤 주장을 내세워 가르치는 것(눅 11:52)은 지옥가기로 작정한 교만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고(마 12:22-37), 솔직히 이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은 성경을 표면적으로 알아서 연구한 메마른 성경지식, Lloyd Jones의 말을 인용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완벽한 정통주의”이기 때문에 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고(마 23:15), 그 연구도 바리새인처럼 성경을 이해하기 편한 쪽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마 23장).  물론 성경적 이신론자들도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놀라우신 초자연적인 기적을 의심 없이 믿지만(렘 32:20), 문제는 그러한 성령의 놀라운 능력과 기적들이 오늘날에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히 13:8).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더 많이 아는 것이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는 말은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이신론자들은 성경의 충분성, 즉 하나님께서 현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유일한 길이 오직 ‘성경’이라고 강조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야 하는 모든 것은 성경에 있고 성경이 말하는 것만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면 우리도 침묵해야한다”라고 주장하는데, 한마디로 성경해석의 열쇠는 성경자체로 성경이 성경을 가장 훌륭하게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맞는 것 같지만 아주 잘못된 주장일 뿐 아니라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고(약 3:1, 벧후 3:16), 그 이유는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 성경 이상의 것이 필요한데(요 16:13), 그것이 바로 성경의 저자이신(벧후 1:20-21), 성령의 조명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엡 1:17-19).  오늘날 이러한 오만과 신학적 편견 때문에 은사중지론자들은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고(요 5:37),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전문지식을 너무 과신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우리를 가르쳐 주신 많은 교수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지만 그 가르침의 결과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선생에게 배워야 할 부분도 있겠지만 이들이 내리는 신학적인 어떤 주장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한 마지막 대변인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Thomas Erskine는 “성경을 신으로 삼는 사람은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바로 종교성이 강하고 성경지식을 과신하면서 은사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내려진 형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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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들이 거짓된 감정들과 다른 점 또 한 가지는

그것들이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성도들이 경험하는 미덕들과 은혜로운 감정들의 균형이 이 땅에서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 균형은 여러 가지 면에서 결함이 있다.  그것은 은혜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거나 말씀을 잘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잘못 판단하기 때문이다.  또한 본성적인 기질의 독특한 결점 때문이기도 하고, 교육의 결함 때문이기도 하고, 그 외에 다른 많은 약점들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은혜로운 감정들과 성도들이 가진 참된 믿음 사이가 소름끼칠 정도로 조화롭지 못한 경우는 결코 없다.  이런 부조화는 위선자들의 거짓된 믿음과 가식적인 은혜에서 매우 흔하게 발견된다.


성도들과 위선자들 사이에 있는 한 가지 큰 차이는 성도들의 기쁨과 위로에는 특별하게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과 애통함을 동반한다는 사실에 있다.  성도들은 처음 회심할 때도 죄를 슬퍼할 뿐 아니라 회심하여 그들의 기쁨이 자리 잡은 뒤에도 죄를 여전히 슬퍼한다.  성경은 참된 성도들을 죄를 애통해 한 적이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애통해 하는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여전히 죄를 애통해 하는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거짓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을 없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히 있다.  하지만 참된 열심을 가진 사람은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지배적이고 위험한 악을 대항하기 위해 적절하게 열심을 내지만 주로 그 열심을 자신의 죄와 싸우는데 사용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죄악을 크게 혐오하는 척 하고 자신의 내적인 부패함에 대해 많이 울부짖는 척 하지만 실제의 삶 속에서는 죄를 가볍게 여기며 죄를 짓지 않으려는 분투나 죄를 애통해하지도 않으면서 죄를 짓는다.  하지만 이런 태도를 갖는 것은 마음과 삶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신앙적인 교제에 큰 열심을 내지만,

신앙의 골방에는 열심히 적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종종 감정적으로 높이 고양되지만,

그들이 단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대화할 때는 감화를 적게 받는다면

그들의 믿음은 매우 어두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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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율법을 폐하지 않고(마 5:17), 도리어 율법을 더욱 굳게 세웁니다.  즉 은혜는 죄인의 마음속에 되어지는 하나님의 사역으로서(엡 1:6), 새로운 능력과 의에 대한 소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에(고전 15:10), 그 결과는 회심하지 못한 사람의 경우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으로 율법을 지키게 해주는 것입니다(롬 6:22, 8:4, 갈 5:22-25, 엡 5:9).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도리어 율법이 없는 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인 것입니다(고전 9:21).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딛 3:5), 성도들은 더욱 율법의 순종해야 합니다(롬 6: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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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Lewis는 “우리 안에 교만이 많을수록 그만큼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교만을 싫어한다.”라고 했고, Jonathan Edwards도 “교만은 죄라는 건물의 기초 중에서도 가장 낮은 부분에 놓여 있으며 그 일을 하는 방법이 가장 은밀하고 속임수가 많으며 찾아내기가 어렵다.”라고 했으며, Lloyd Jones 역시 “자신의 무지를 자랑하면서 떠벌리는 것은 자신의 지식이나 총명을 떠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쁘다. 교만은 어떤 형태를 띠든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죄를 범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자기 자신을 너무 위대하게 여기는 것이 ‘교만’이고, 이 교만이 다른 죄들보다 더 위험한 이유는 그것을 탐지해 내기가 어려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교만한 사람들을 찾으라고 한다면 대표적인 인물인 백성들을 가르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는데(눅 20:45-47), 이들의 교만이 얼마나 은밀한지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 위대하게 여기면서도 자신들의 그러한 교만의 죄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마 23장).  성경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벧전 5:5), 여기서 문제는 우리도 종종 다른 그리스도인에게서 교만한 모습을 발견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교만에 대해서는 보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마 7:1-5).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은 교만이라고 부르지만 나에게 있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 혹은 “진리의 말씀을 수호해야 하는 사명감”이라고 포장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교만의 정의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본다면 성경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려는 욕구인 동시(겔 28:2)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태도라고 말하고 있고(에 6:6),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경쟁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을 그분처럼 높이고 싶어 하는 마음인데(사 14:12-14). 구약선지자 이사야는 바벨론 왕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교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사실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이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분이며 모든 면에서 무한히 우월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교인들이 얼마나 교만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분명한 예를 들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눅 18:9-10).  이 비유에서 말해주는 것은 종교성이 강한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그분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기뻐했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게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눅 18:11).  이렇게 종교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눅 16:15), 하나님의 생각이 자기와 같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멸시하기 위해서 성경지식을 가지고 상대방을 비판합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지 못한 형태의 교만이 자기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강한 ‘종교적인 교만’인데(행 12:21-23), 이 교만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태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월하게 여기신다고 스스로 믿는 믿음이기도 합니다(마 6:1-2).  예를 들어 고린도에는 많은 신전들이 있었지만 Gorden Fee가 말한 것처럼 살아계신 성령의 전은 고린도교회 하나뿐이었고(고전 6:19), 이 성전은 고린도에 있는 유일한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교회였습니다(행 20:28).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만일 누구라도 고린도에 있는 주의 성전을 파괴하려 한다면 그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고전 3:17).  그렇다면 과연 고린도교회에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전후문맥을 살펴볼 때 그런 일을 할 가능성이 있는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경지식을 자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고전 3:18-21).  사실 이들은 다른 형제의 잘못을 알며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아 줄 것인가를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문제는 이들이 교회 밖에 불신자들보다 교회에 더 심한 해를 끼쳤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경지식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해서 남용했기 때문입니다(롬 2:17-24).   이러한 사람의 특징은 자신은 이미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메마르고 얄팍한 성경지식을 가지고 형제를 비판합니다.


언젠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종교성 강한 바리새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 일로 인해 걱정을 해서인지 주님이 종교지도자들을 함부로 대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마 15:1-13).  그러나 예수님은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5:14).  예수님은 자신이 눈먼 자를 보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눅 4:18),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실 것 같지 않는데 좀 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배격하신 것은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눅 11:52), 백성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서있는 눈먼 인도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마 23:15).  다시 말해 눈먼 사람이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진리를 발견한 소경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처럼(눅 18:35-43), 눈먼 사람이 거지 바디매오 같이 진리에 눈을 뜨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막 10:46-52), 진리를 눈앞에 두고 스스로 소경되기를 원했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요 9:40-41).  솔직히 종교적인 교만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눈과 귀를 멀게 만들어(요 5:37), 가르치는 자신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받는 모든 사람을 지옥으로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 23:13).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에(행 7:51), 늘 성령을 거스리거나 대적을 하는 것입니다(마 12:28-32).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의 좋지 못한 신학이나(요 4:20), 부도덕함을 보고도 그 여인에게 손을 내미는 일을 금하지 않으셨고(요 4:18),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돌에 맞아 죽기 일보직전의 여인에게까지도 망신을 주거나 내버려 두지 않으셨지만 (요 8:1-11),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스스로 소경됨은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자주 우리의 편견을 바로잡지 않고 내버려 두시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고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한다면’(고전 8:2), 예수님은 그 사람을 무지 안에서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날까지 내버려두실 것입니다(롬 2:16).  이것은 고대시대에 주어진 경고로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이러한 경고를 주기 700년 전에 이사야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라고 말했습니다(사 5:21).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가장 무서운 말씀이 있다면 로마서에 나오는 말처럼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내버려 두는”것입니다(롬 1:24, 26, 28).  물론 이런 것이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눅 13:22-27), 만약 예수님으로부터 내버림을 당한다면 그보다 더 비참한 운명은 없을 것이고 지옥의 궁극적인 고통은 뜨거운 불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부재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종교적으로 교만하거나 평생을 배워도 다 못 배울 성경지식을 가지고 무엇인가 안다고 떠들어 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실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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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 혹은 ‘제자됨’의 표지를 일상 속에서 찾을 때, 우리는 ‘순종’이란 안경을 사용합니다.  순종의 안경을 통해 제자 됨을 평가하는 것은 주님이 사용하셨던 방법입니다.  산상설교에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16-18).


Q. 당신은 순종의 안경을 통해 볼 때 어떤 제자이십니까?

Q. 당신은 순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 같지만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거룩, 이제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라는 제목의 책에서 Andrew Murray는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행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아닙니다. 순종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지식의 차원에서의 동의나 감정적 차원에서의 동감이 순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순종을 말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2. 순종에는 커트라인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까지 순종해야 하는 것일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순종에는 커트라인이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순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모든 삶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범이 된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순종의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죽기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순종에는 커트라인이 없습니다.


3. 순종은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순종해야 하는 것일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마음으로부터 출발한 순종을 해야 합니다.  신명기 30장2절은 마음과 성품을 다하는 것이 순종함에 있어 핵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우리는 마음과 성품을 다한 순종을 해야 합니다.  겉보기에만 좋은 ‘사이비 순종’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출발된 ‘온전한 순종’을 해야 합니다.


4. 순종은 평화의 열매를 가져옵니다.

만사가 형통하고 평온할 때는 누구나 순종에 대한 자신감이 큽니다.  하지만 고통 속에 있을 때는 백인백색의 반응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순종은 이런 고통 속에서 평화의 열매를 가져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가장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진정한 평화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에서 시작됩니다.  톨스토이(Tolstoi)의 걸작『전쟁과 평화』를 모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 톨스토이는 “하나님의 품에 있는 자만이 진정한 평화를 경험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에 순종하는 자만이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평화는 사람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존재 한다”고 했습니다.  순종은 우리의 내면에 평화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자가 진정한 제자이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평화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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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 죄를 용납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룩의 속성에서 비롯한 반면 ‘은혜’는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속성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율법과 은혜는 성격상 정반대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율법과 은혜는 다같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유기적인 속성에서 기인했다는 점에서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사실 죄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엡 2:8)는 율법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본질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에 대한 완전하고 영구적인 순종(롬 10:4)과 율법이 규정하는 죄인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갈 3:13),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에 율법의 성취가 없는 은혜란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과 은혜는 서로 다른 무엇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뗄 수 없는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악을 깨닫고(롬 3:20),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게 됩니다(갈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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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던 어린 시절 집 근처 5분 거리에는 기차 길과 야산이 있어 자주 동네 아이들과 산에 올라가 ‘칡뿌리’와 ‘쑥’을 캐면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배가 고프면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개떡’을 먹을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끔 야산에 올라가 개떡을 먹으면서 저 멀리 덜컹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달려오는 기차를 바라보고 있을 때 어디서 영양실조에 걸린 것처럼 비쩍 마른 ‘똥개’ 두세 마리가 나와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쉬지 않고 짖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나이에 늘 궁금했던 것은 “개들은 왜 기차만 지나가면 짖어 되는 것일까?”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기차를 운전하는 기관사가 개들이 짖는 소리 때문에 기차를 세운 적이 없었습니다.  워낙 기차소리가 커서인지 아니면 너무 빨라서인지 개가 짖어 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차는 정해진 선로를 따라 목적지를 향해 달렸지 개들이 짖는다고 해서 기차를 멈추는 정신 나간 기관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도 달리는 기차를 보고 개처럼 짖어대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 누군가 방언에 대해 적대적인 글을 쓰거나 ‘방언무용론’을 강력하게 주장할 때, 만약 하나님이 주신 방언의 은사를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개 짖는 소리에 놀라 기차를 세우는 줏대가 없는 사람일 것이고(사 26:3), 마음이 한결같고 은사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믿음의 사람은 무슨 소리를 듣든지 상관하지 않고 하늘나라 갈 때까지 방언기도를 할 것입니다.


갓난아이를 목욕시키고 난 뒤 목욕물이 더러워졌다고 해서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는 부모가 없듯이 방언에 몇 가지 조심할 점이 있다고 해서 방언 자체를 포기하거나 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신자들에게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교훈하면서(고전 14:39),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당부하고 있는데(고전 14:40),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은 ‘경건’ ‘조심’ ‘절제’ 만을 강조한다면 교회는 “성령이 없는 죽은 정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Lloyd Jones도 이런 문제를 가지고『부흥』에서 이렇게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실질상 죽은 정통은 이단만큼 나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죽은 정통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정통’, 분명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복음적인 사람들 각자에게도 가장 큰 위험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죽은 정통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존재합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는 것입니다(딤후 3:5).  사실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했듯이 예배를 거의 장례(?)식 수준으로 경건하게 아니면 예비군 훈련이나 정신교육 받듯이 드렸는데, 무엇인가 빠진 것 같은 허전한 느낌과 마음에 기쁨이 없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 없이 드려질 때 생기는 심각한 영적질병입니다.  한 마디로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빌 3:3).

 

Lloyd Jones는 『성령세례』에서 고린도교회가 은사문제로 혼란해진 것을 핑계로 현대교회가 은사문제를 회피하고 두려워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에 대해 책망을 하면서 현대교회는 은사의 혼란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교회에 은사가 나타나지 않음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와 동시에 많은 교회가 이런 역동성 없이 마치 공동묘지의 적막함과 같은 고요가 지배하고 있다고 탄식하면서 이렇게 ‘조심’과 ‘경건’이 지나쳐서 ‘죽은 정통’ 신앙이 되는 것을 극히 경계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이런 문제를 놓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세 장을 할애하여 성령의 은사들과 은사 활용의 가장 큰 동기인 사랑에 대해 논하면서 비록 많은 은사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전부 하나님에게서 나오며(약 1:17), 사랑 안에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고전 12:4-7), 이 성령의 은사들 중 하나가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2:10).  여기서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신약에 등장하는 전문 용어인데 이것은 학습을 통하여 습득한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Gordon Fee가 말한 것처럼 성령으로 감동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방언은 성령이 주신 은사(고전 12:11)로 마음으로 시작하지 않고 영에서 시작하는 것으로(고전 14:14), 다른 일상적인 언어사용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감정 상태에 따라 더 감정적일 수도 있고 덜 감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방언 말하기가 엑스터시적인 현상이거나 절제할 수 없는 이상한 현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방언은 초대교회에서 흔한 현상이었지만 때로는 혼란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방언에 대해 균형 잡힌 견해를 갖도록 도와주었는데(고전 14장), 그의 교훈은 오늘날 방언을 둘러싸고 일부 교회들에서 생기는 혼란을 해결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이 방언에 대해 Gordon Fee는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논란이 많은 것으로 바울의 논증 배후에는 고린도교인들이 특별히 방언을 선호했다는 것이 깔려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방언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인가?”  그리고 “성령충만 하면 반드시 방언을 말해야 하는가?”라는 것인데, 이 문제를 놓고 어떤 사람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충만의 증거라고 강력하게 주장을 하지만, 사실 성경의 증거와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런 견해를 지지하기가 힘든 이유는 성경에 나타난 방언은 성령의 감동과 능력이 나타나도 때로는 방언을 말하지 않는 경우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고넬료의 집에 모인 사람들이나(행 10:45-46),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방언하고 예언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행 19:6), 이들이 다 방언을 했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고, 어쩌면 일부의 사람들은 방언을 말하지 않고 대신 기쁨으로 충만하여 그들의 일상적인 모국어로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예언을 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방언하는 것이 반드시 성령충만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행전 2장4절의 경우에서 성령충만이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만들어낸 것이 분명하지만 이것은 구원받을 때 신자가 조용히 성령을 받는 것(고전 12:3)과 달리 성령께서 신자의 사명 감당을 위해 능력으로 임하실 때에는(눅 24:49), 가시적 현상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행 4:31).  사실 성령의 ‘내주사역’과 ‘능력사역’을 이해한다면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닌데 Lloyd Jones는 이것을 ‘일반사역’과 ‘특수사역’ 혹은 ‘간접사역’과 ‘직접사역’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모든 신자들은 방언을 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한다면 성경은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는 예수님의 말씀과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전 14:1)는 사도 바울의 교훈을 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즉 모든 교회가 성령의 은사들을 사모하고 추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고전 14:39).  따라서 성령은 신자들 각자에게 교회 유익을 위해 서로 다른 은사들을 주시는 것은 사실이고(고전 12:7), 무엇보다도 교회 전체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어(엡 4:12), 모든 은사들이 교회에서 나타나고 사용되도록 힘써야 하고(롬 12:5-13), 만일 신자들이 공동체에서 특정 은사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신령한 은사들을 받기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해야 하며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고후 1:11).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시는(엡 4:7),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엡 4:7, 약 1:17).  여기에는 물론 방언의 은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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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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