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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7.29 칭의와 성화

“거듭남의 유일한 증거는 변화된 삶이다.” (The only proof of the new birth is the new life).  James Edwin Orr의 짧지만 깊은 통찰력이 담긴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법적으로 올바른 편에 서고(롬 3:24),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삶(롬 6:11-14), 즉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고후 5:17).  한 마디로 “구원을 받았다”라는 말은 단순한 말장난이나 신학적 개념이 아닌데(마 7:21),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막연히 피상적으로만 생각하여 단순히 죄의 용서를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구원의 결정적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결코 구원의 총체는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해 태초의 범죄(롬 5:12)로 야기된 죄책에 시달리는 인간이 죄인으로서의 현재 신분(롬 3:9)과 그 비참한 현재 상태(히 2:15)의 극복을 말하는 구원은 성삼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성도 각자의 전인격은 물론 전우주의 갱신을 통하여 영원한 축복을 주시고자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창 3:15),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창세(창 1:4)전부터 종말(히 9:28)까지의 전 역사에 걸쳐 다양한 단계로 진행되는 장구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구원을 이해할 때만이 그 복합적이고도 포괄적인 모든 관련 사항이 온전히 시사되는 것이고, 이와 같은 구원은 일련의 총체적 사건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먼저 성경은 구원에 대해 세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엡 2:1),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는(엡 2:13),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구원이 있고(롬 10:10), 두 번째는 이미 구원을 확증 받은 성도가 날마다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닮아가는 과정인(벧전 1:15-16), 성화에 힘쓰는 ‘지금 이루어져 가고 있는’ 현재의 구원이 있으며(빌 2:12),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각각 구원을 받지만(롬 10:9), 그 구원이 최종 실현되는 곳인(계 7:5-17), 천국에서 ‘장차 이루어질’ 미래의 구원이 있습니다(히 9:28).  즉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그 구원은 현재 이루어져 가고 있으며 미래에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실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구원으로서 (예정), 소명, 중생, 회심, 칭의, 양자까지의 사건이 발생하는 단계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구원의 단계인 성화견인, 그리고 천국의 도래로 구현될 영화의 구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이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이라는 말이 도대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또한 이것은 과연 성경적인 것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로마서 8장30절에서 어느 정도 논리적 순서들의 가능성, 즉 ‘미리 정하신’(예정), ‘부르시고’(소명), ‘의롭다 하시고’(칭의), ‘영화롭게’(영화)만을 언급하고 있지, 일목요연하게 그 순서를 명확히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9-11).  이 말씀을 쉽게 해석하면 “여러분은 한때 온갖 종류의 죄와 욕정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의 이름 안에서 씻겨 졌고(washed), 깨끗하게 되었고(sanctified), 의롭게 되었습니다(justified).” 여기에 나오는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씻김’‘깨끗케 함’ ‘의롭게 함’의 과정을 신학적으로 올바른 순서에 입각해서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순서는 잘못된 것이고,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지푸라기 같은 허접한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근거로 하여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인 ‘칭의’보다(롬 4:6), 도덕적이고 재창조적인 행위이며 오랜 기간의 과정을 통해 죽을 때 완성되는 ‘성화’를 먼저 제시했기 때문입니다(롬 6:19-22).  솔직하게 말하면 오늘날 정통신학에서 가지고 있는 구원의 서정과 다르기 때문에 개혁주의 신앙만을 고집하는 사람에게는 이 구절이 눈에 가시 같은 역할을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올바른 순서를 제시하는 대신 그들이 거듭났을 때 일어난 일들을 포괄적으로 밝힌 것을 생각한다면 이 문제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사람은 설사 성화의 열매가 없거나 자칫 죄를 범하더라도 구원의 타락 가능성이 전혀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 난해한 문제를 가지고 두 부류의 사람들로 갈라지는데, 한 부류는 칭의와 상관없이 최후의 심판에서 그 사람의 행한 삶을 통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다른 한 부류는 칭의를 받은 사람은 열매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이 취소되거나 반복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먼저 칭의의 상실 가능성을 제시하는 부류는 만약 그리스도인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거나(빌 1:27),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서 있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눅 6:46),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구절들 중에 핵심적인 구절로 마태복음 5장20절과 7장21절, 그리고 히브리서 6장4-6절 등을 내세웁니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온전한 수확, 즉 구원의 완성은 종말에 받도록 예약된 것이기 때문에 물세례 때 받은 ‘칭의’를 법정적 개념으로만 해석하는 가운데(롬 5:1), 무슨 죄를 범해도 구원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고(고전 10:12), 더 나아가 칭의는 최후의 심판에서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완전한 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마 25:30).  한 마디로 ‘이미’ 얻은 온전한 칭의를 위해서는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고후 5:10).  이러한 ‘유보적 칭의론’은 ‘이신칭의’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비위가 상하는 궤설로 들릴 것입니다.


반면에 개혁주의 전통에 의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칭의는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의로움 피로(요일 1:7), 단 한 번 주어진 완전한 선물이기 때문에(히 10:10), 의롭다함을 입은 자가 거룩하게 산다고 해서 하나님께 더 사랑을 받거나 혹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해서 덜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세상 끝 날까지(마 28:20),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요일 5:18), 많은 성경구절 중에 요한복음 5장24절과 10장29절, 그리고 로마서 8장 39절과 에베소서 1장4절을 제시합니다.  다시 말해 칭의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의 의로 여김을 받는 법적인 선언(롬 4:6), 즉 관계회복이라는 의미라면(엡 2:13),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의롭게 살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만을 가지고 하나님이 한 번 내린 의로운 판결을 취소하거나 양자로 받아들인 자녀를 저버리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최종 구원이 열매(도덕적 행위)의 결과에 의한 것이라면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유보적 칭의론은 성경적이지 않을뿐더러 신학적 모순에 빠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성도의 ‘견인’사역을 중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 부류는 칭의를 단회적 사건으로 본 것이고, 다른 한 부류는 단회적이 아닌 점진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가 가능한가?” 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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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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