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의 유일한 증거는 변화된 삶이다.” (The only proof of the new birth is the new life).  James Edwin Orr의 짧지만 깊은 통찰력이 담긴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법적으로 올바른 편에 서고(롬 3:24),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삶(롬 6:11-14), 즉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고후 5:17).  한 마디로 “구원을 받았다”라는 말은 단순한 말장난이나 신학적 개념이 아닌데(마 7:21),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막연히 피상적으로만 생각하여 단순히 죄의 용서를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구원의 결정적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결코 구원의 총체는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해 태초의 범죄(롬 5:12)로 야기된 죄책에 시달리는 인간이 죄인으로서의 현재 신분(롬 3:9)과 그 비참한 현재 상태(히 2:15)의 극복을 말하는 구원은 성삼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성도 각자의 전인격은 물론 전우주의 갱신을 통하여 영원한 축복을 주시고자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창 3:15),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창세(창 1:4)전부터 종말(히 9:28)까지의 전 역사에 걸쳐 다양한 단계로 진행되는 장구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구원을 이해할 때만이 그 복합적이고도 포괄적인 모든 관련 사항이 온전히 시사되는 것이고, 이와 같은 구원은 일련의 총체적 사건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먼저 성경은 구원에 대해 세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엡 2:1),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는(엡 2:13),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구원이 있고(롬 10:10), 두 번째는 이미 구원을 확증 받은 성도가 날마다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닮아가는 과정인(벧전 1:15-16), 성화에 힘쓰는 ‘지금 이루어져 가고 있는’ 현재의 구원이 있으며(빌 2:12),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각각 구원을 받지만(롬 10:9), 그 구원이 최종 실현되는 곳인(계 7:5-17), 천국에서 ‘장차 이루어질’ 미래의 구원이 있습니다(히 9:28).  즉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그 구원은 현재 이루어져 가고 있으며 미래에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실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구원으로서 (예정), 소명, 중생, 회심, 칭의, 양자까지의 사건이 발생하는 단계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구원의 단계인 성화견인, 그리고 천국의 도래로 구현될 영화의 구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이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이라는 말이 도대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또한 이것은 과연 성경적인 것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로마서 8장30절에서 어느 정도 논리적 순서들의 가능성, 즉 ‘미리 정하신’(예정), ‘부르시고’(소명), ‘의롭다 하시고’(칭의), ‘영화롭게’(영화)만을 언급하고 있지, 일목요연하게 그 순서를 명확히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9-11).  이 말씀을 쉽게 해석하면 “여러분은 한때 온갖 종류의 죄와 욕정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의 이름 안에서 씻겨 졌고(washed), 깨끗하게 되었고(sanctified), 의롭게 되었습니다(justified).” 여기에 나오는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씻김’‘깨끗케 함’ ‘의롭게 함’의 과정을 신학적으로 올바른 순서에 입각해서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순서는 잘못된 것이고,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지푸라기 같은 허접한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근거로 하여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인 ‘칭의’보다(롬 4:6), 도덕적이고 재창조적인 행위이며 오랜 기간의 과정을 통해 죽을 때 완성되는 ‘성화’를 먼저 제시했기 때문입니다(롬 6:19-22).  솔직하게 말하면 오늘날 정통신학에서 가지고 있는 구원의 서정과 다르기 때문에 개혁주의 신앙만을 고집하는 사람에게는 이 구절이 눈에 가시 같은 역할을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올바른 순서를 제시하는 대신 그들이 거듭났을 때 일어난 일들을 포괄적으로 밝힌 것을 생각한다면 이 문제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사람은 설사 성화의 열매가 없거나 자칫 죄를 범하더라도 구원의 타락 가능성이 전혀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 난해한 문제를 가지고 두 부류의 사람들로 갈라지는데, 한 부류는 칭의와 상관없이 최후의 심판에서 그 사람의 행한 삶을 통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다른 한 부류는 칭의를 받은 사람은 열매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이 취소되거나 반복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먼저 칭의의 상실 가능성을 제시하는 부류는 만약 그리스도인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거나(빌 1:27),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서 있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눅 6:46),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구절들 중에 핵심적인 구절로 마태복음 5장20절과 7장21절, 그리고 히브리서 6장4-6절 등을 내세웁니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온전한 수확, 즉 구원의 완성은 종말에 받도록 예약된 것이기 때문에 물세례 때 받은 ‘칭의’를 법정적 개념으로만 해석하는 가운데(롬 5:1), 무슨 죄를 범해도 구원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고(고전 10:12), 더 나아가 칭의는 최후의 심판에서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완전한 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마 25:30).  한 마디로 ‘이미’ 얻은 온전한 칭의를 위해서는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고후 5:10).  이러한 ‘유보적 칭의론’은 ‘이신칭의’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비위가 상하는 궤설로 들릴 것입니다.


반면에 개혁주의 전통에 의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칭의는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의로움 피로(요일 1:7), 단 한 번 주어진 완전한 선물이기 때문에(히 10:10), 의롭다함을 입은 자가 거룩하게 산다고 해서 하나님께 더 사랑을 받거나 혹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해서 덜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세상 끝 날까지(마 28:20),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요일 5:18), 많은 성경구절 중에 요한복음 5장24절과 10장29절, 그리고 로마서 8장 39절과 에베소서 1장4절을 제시합니다.  다시 말해 칭의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의 의로 여김을 받는 법적인 선언(롬 4:6), 즉 관계회복이라는 의미라면(엡 2:13),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의롭게 살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만을 가지고 하나님이 한 번 내린 의로운 판결을 취소하거나 양자로 받아들인 자녀를 저버리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최종 구원이 열매(도덕적 행위)의 결과에 의한 것이라면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유보적 칭의론은 성경적이지 않을뿐더러 신학적 모순에 빠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성도의 ‘견인’사역을 중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 부류는 칭의를 단회적 사건으로 본 것이고, 다른 한 부류는 단회적이 아닌 점진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가 가능한가?” 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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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살았던 그 당시에는 조롱과 비방을 당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요한 웨슬리다.

 

그와 그의 동생 찰스와 조지 휘트필드는

영국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혁명을 막는 사람들이라고

현대 역사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웨슬리의 설교는 압제를 받으며

힘없이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소망을 가져다주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성직자들은 그를 이단이라고 불렀고

교회 밖으로 내쫓기도 했다.

그에 대한 온갖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도는가 하면

그는 온갖 죄목에 붙여져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정부와 사회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주도로

그를 반대하는 책과 전단이 나돌았다.

 

또한 그는 수십 번이나 그를 반대해서 일어난 폭도들에 의해 죽을 뻔하였다.

웨슬리는 이와 같은 것을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즉 자신이 그 사역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하루는 웨슬리가 말을 타고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며칠 동안은 아무런 핍박도 당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어느 한 사람 벽돌이나 계란을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곧 말을 멈추고 내려와 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부르짖었다.

“하나님, 혹시 제가 죄를 짓고 타락한 것이 아닙니까?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보여 주십시오!”

 

그 반대쪽 울타리 한쪽 끝에서 그 기도를 듣고 있던 한 사나이가

그가 바로 웨슬리임을 알아보았다.

“잘 됐군, 저 감리교 목사를 내가 손을 좀 봐야겠어!”

그는 벽돌하나를 집어 웨슬리에게 던졌다.

벽돌은 웨슬리를 살짝 빗겨갔다.

그러자 웨슬리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 괜찮았군요. 제가 아직도 당신의 임재하심 가운데 있었군요.”라며

펄쩍 뛰며 좋아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벽돌을 던진 지 얼마나 되었는가?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당신이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따르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로렌 커닝햄 『네 신을 벗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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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후손으로 난 모든 인류는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아(롬 5:12), 모두 죄로 오염되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기 때문에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인간 가운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다고 하였습니다(사 59:16).  사실 인간 가운데는 하나님과 연결시켜 줄 중보자가 없습니다.   따라서 만일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중보자를 세우지 않으셨다면 모든 인간들은 죄악 가운데 신음하다가 영원히 멸망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중보자를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그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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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죄악된 행동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죄의식을 가집니다(롬 2:14-15).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으며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완전히 양심이 마비되었거나 아니면 전혀 죄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볼 때(사 53:9), 그는 양심이 마비된 완전한 악인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눅 24:47),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일을 하지 않는 완전한 의인으로 보아야 합니다(행 3:14).  실로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었으나(눅 2:7), 다른 인간과는 달리 단 하나의 죄도 지은바 없는 순결한 분이셨습니다(히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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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어느 칼빈주의자들 못지않게 진리의 말씀만을 줄기차게 강조하던 나에게 영적체험을 하고 나서 성령의 사역을 교회에 접목시켜 사역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받은 은사들은 비록 성숙하고 잘 다듬어지는 과정이 없었지만 예배 때마다 교회 성도들이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집사님 한분이 다리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데 목사님께 기도 받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일찍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눈으로 볼 수 있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기도가 끝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집사님이 어느 동양인 여성 한 분을 데리고 들어오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저 휘어지고 걸을 때마다 온 몸이 휘청거리는 저 사람이 온전하게 회복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집사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아니, 병자를 데려오려면 감기에 걸린 사람이나 발목이 삔 사람 아니면 기도해도 쉽게 날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오지, 어떻게 저런 사람을 데려 왔을까 오늘 기적이 일어날까?”  이렇게 그 동양인 여성을 앉혀놓고 기도를 하는데 입으로는 하나님께 기적을 간절히 구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믿음이 생기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치료되지 않았고 이 단어가 점잖은 표현은 아니지만 표준어이기 때문에 사용하는데 그날 ‘쪽팔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성경에는 비록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이사야는 이집트와 구스에 대한 예표로서 삼 년 동안 벗은 몸으로 지냈고(사 20:3), 호세아는 창녀와 결혼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호 1:2), 엘리사의 유골은 실제로 죽은 자를 살려냈고(왕하 13:21), 베드로의 그림자는 병자를 치료했으며(행 5:15), 바울의 몸에 있던 손수건과 앞치마는 귀신들을 쫓아냈습니다(행 19:12).  그리고 이것들보다 훨씬 더 이상한 일들이 성경 속에서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가령 누군가가 하나님의 보좌에 관한 환상을 보았다고 말하면서 그 환상 속에서 사자와 송아지와 사람과 독수리를 닮은 네 가지 생물들이 있는데 각각은 여섯 개의 날개가 있고 그 날개들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 차 있어 이 생물들이 하나님의 보좌 주변을 주야로 날아다니면서 거룩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면(계 4:6-8), 아마 주변 사람들은 이 사람이 귀신이 들렸거나 정신분열증으로 인해 환청에 시달리는 증세가 심한 병자로 판정을 내릴지도 모릅니다.  쉽게 말하면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이것을 이치에 맞는 성경적 환상이라고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눈으로 보고 들려오는 모든 이상한 것들을 다 믿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일 4:1), 그러나 이것이 단지 이상하고 황당무계한 일들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든지 비성서적이라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할 것은 “과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구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기적을 구하는 동기와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에 달린 것인데(출 10:2), 예를 든다면 세례요한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의 창을 닫아버린(눅 3:18-20), 헤롯처럼 눈으로 보고 그냥 즐기기 위해서인지(눅 23:8), 아니면 마술사 시몬같이 개인의 능력이나 인기를 얻기 위해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행 8:14-24).  그러므로 하나님의 건전한 목적을 위해 기적을 구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닌 것은(요 2:11), 복음 메시지의 진실성을 증거 하기 위해서(요 4:29, 행 8:4-8, 9:35, 42, 히 2:4), 혹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거나(마 14:14, 20:29-34, 눅 7:11-17), 복음사역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마 8:15, 행 9:36-43, 빌 2:25-30), 얼마든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9:8, 요 9:3).  사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구하며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요 6:1-5), 주님은 그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고(막 6:30-44, 눅 9:10-11),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도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면서(눅 9:1), 그들에게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7-8).


뿐만 아니라 오순절 이후에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담대하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막 16:20), 기적이 나타나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행 4:29-31).  더 나아가 룻다에 있던 제자들 역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던 다비다가 죽은 후 그녀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베드로에게 요청함으로써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구했던 적이 있으며(행 9:36-43), 야고보 역시 교회의 장로들에게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으면 서로 죄를 고백하는 가운데 병 낫기를 위해 간구하라고 권했습니다(약 5:14-16). 그러나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기적적인 응답이 언제나 일반적인 방편, 즉 의술을 통한 치료보다(사 38:21), 더 낫다고 가정해서는 안 되겠지만(눅 5:31), 무엇보다도 특별한 도움을 위한 기도가 원하는 대로 응답된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삼상 2:6-7).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면서 절실한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히 4:16)라는 말씀처럼 응답에 대한 약속을 주신(시 91:15), 하나님께 나아가 끈질긴 과부의 기도처럼 응답해 주실 때까지 간절히 구해야 하겠지만(눅 18:1-8), 여기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기적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방법을 통해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시는지 다윗처럼 신중하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삼상 23:2,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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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자신의 역사에 함께 참여하도록

그분의 사람들을 초청하시는 일을 주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 일하시지

우리 계획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이미 일하고 계셨던 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적인 안목을 뜨이게 하셔서

자신이 어디서 역사하고 계신지를 보여 주는 것이

그분께 동참하라는 초청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볼 때,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인 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보여주시는 순간이

당신의 삶을 하나님께로 조정하기를 원하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이 목적하신 일은

하나님이 스스로 완수하실 것임을 보증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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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다른 인간들처럼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잉태된 사람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입니다(마 1:18).  즉 인류의 시조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인해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죄인이 되었지만(롬 5:12), 그리스도는 아담의 혈통과는 관계없이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원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눅 1:35).  따라서 우리도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의인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그분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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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의 대상

연구자료 2017. 7. 14. 11:04

성경에는 ‘찬송’이라는 용어가 약 400회 (구약 351회, 신약 48회) 나타나는데, 이 단어가 쓰인 문맥을 살펴보면 그 대상이 ‘하나님’으로 일관하고 있다.  즉 찬송을 받으실 분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354-430)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찬양하는 것은 진정한 찬송이 아니라고 했으며, 633년의 톨레도 교회 회의(Councils of Toledo)에서는 “찬송은 노래(Can‘ticum)와 높임(Caudem) 그리고 하나님(Deity)의 세요소가 포함된 것”이라고 정의했다.  결국 하나님을 찬양의 대상으로 삼지 않은 노래는 찬송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과는 무관한 노래를 예배 도중에 부르는 것은 실로 불경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준비 찬송이라는 말도 합당치 못하다.  왜냐하면 찬송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 결코 예배를 준비하는 어떤 보조적인 성격을 지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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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에 있어서 성경 암송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집니다.  그 이유는 훈련을 받는 기간에 닥치는 영적 고통과 일반적 삶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7장2-3절에 보면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 판에 새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눈동자처럼, 손가락에 매여 그리고 마음 판에까지 새기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암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 암송은 상상을 초월하여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 암송은 그 성경구절이 필요한 상황이 닥쳤을 때 마음에 기억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성경구절을 암송해두지 않아서 문제 해결의 기회를 놓치고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한 경험이 없지 않으십니까? 성경 암송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여러 가지입니다.


1.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유익을 가장 먼저 체험하고 누린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은 매번 성경말씀을 선포하심으로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마4장).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것은 그 분은 성경을 암송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시험을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2.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인생의 모든 삶의 여정은 순간순간의 결정의 기로 앞에 놓여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의 기로 앞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119:105).  다윗의 고백은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내 인생의 최선을 선택하게 하는 좋은 가이드가 될 수 있습니다.


3. 약할 때 강하게 하십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 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시119:49-50).  당신이 긴장해있거나 불안할 때 그리고 약해져 있을 때 당신의 머리 속에 암기 되어 있는 성경구절이 어떤 능력을 발휘하십니까?   이사야 40장31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시는 원천이 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을 강하게 하십니다.  연약한 모습으로 두지 않으십니다.


4. 슬플 때에 위로가 됩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15:16).  이 말씀을 표시하고 기억하십시오.  만약 당신의 책꽂이에 꽂혀있을 뿐인 성경책은 당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분명 인생에 대한 모든 해답이 그 속에 있지만 그 성경을 당신 자신의 삶 속으로 초대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저 또 다른 한 권의 책에 불과할 뿐입니다.  성경을 더 많이 마음속에 담아두십시오.  보다 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5. 전도의 도구가 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어떤 이가 당신에게 묻습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성경은 뭐라고 말하나요?”  혹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할 때 암송해 둔 성구가 참으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훈련받는 자에게는 언제나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순종” 입니다.  훈련을 지도하는 리더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훈련받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 판에 새기라” 성경암송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갑절의 은혜와 영적인 축복이 날마다 넘쳐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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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복종하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지 않도록 자신을 억제하였으며 하나님과 친교하기 위하여 늘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것을 늘 잊지 않았고(요 8:29), 자신의 언행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마 26:42, 요 17:4-8).  또한 종교적 허식과 위선을 철저하게 배격하였고 참된 마음의 자세를 중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적인 태도와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 없이 전통과 관습만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날카롭게 책망했습니다(마 23장).  그리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인 동시에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사회의 불의한 기득권자들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반면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에 대하여 한없는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마 9:36, 막 6:34, 눅 7:13).  더 나아가 겸손하게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위엄과 권세가 있었으며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로 군림하면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 포기하고 섬김의 본을 보였고 섬기는 자로 살았습니다(요 13:15, 막 1:10, 45).  이외에도 예수님은 부모를 공경하였고(눅 2:51), 어린아이와 여인들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사람이었으며(막 10:14), 물욕이 없었고(눅 12:13-15), 겉과 속이 일치하는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요 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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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신 분으로 죄로 오염된 인간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가 없습니다(사 59:2).  물론 인간은 처음 창조될 당시에는 중보자가 없이도 하나님께 나아가 그와 온전하고도 친밀한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려 행하여 범죄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교제의 장소였던 에덴동산에서 추방됨은 물론 하나님으로부터도 단절되어 중보자 없이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창 3장).  이는 죄가 인간에게 얼마나 불행을 가져다주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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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구약은 그의 오심을 예언했고, 신약에서 그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구약에는 인간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중요한 예언이 많은 바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구약성경은 그리스도가 사람의 후손으로 태어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꾀어 불순종하게 만든 뱀에게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고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창 3:14-15).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신 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언약을 세웠는데(창 12:3, 17:7-10), 바울은 그 후손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갈 3:16).  이것은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세상에 출생한 것을 나타냅니다(마 1:1).  또한 유다 아하스 왕(B. C. 735-715) 때 이사야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예언했고(사 7:14),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는 정혼한 처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사실을 알리면서 그것은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증거 했습니다(마 1:22-23).  미가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을 예언하면서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라고 말했습니다(미 5:2).  이 예언은 왕으로 이 땅에 임하실 예수님에게 적용되었습니다(마 2:6, 요 7:42).  이상과 같이 예수님은 세상에 태어나기 수천 년 전부터 수백 년 전에 걸쳐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출생하리라고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이 예언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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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이성과의 관계는

마치 한 개의 끈으로 연결된

두 개의 두레박의 관계와 같다.

그래서 한쪽이 올라가면 다른 한쪽은 내려온다.

즉 믿음이 보다 더 높이 올라가면

이성은 보다 더 낮게 내려온다.

 

또한 이성이 보다 더 높이 올라가면

믿음은 보다 더 낮게 내려온다.

이성이 믿음을 앞서가면

그 이성은 믿음을 약화시키고 감소시킨다.

 

루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만약 믿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왜’라는 의문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무엇 때문에’라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이성만 가지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신기하게도 믿음 안에서는 해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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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라는 뜻의 헬라어 mesivth"(딤전 2:5)는 ‘중앙’, ‘가운데’ 라는 뜻을 가진 mevso"의 파생어로서 본래는 서로 적대적인 사람들의 사이에서 갈등의 원인을 해결해 주거나 화해하도록 주선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 혹은 서로 모르는 사람 사이에서 특정 내용이나 조건 또는 협약 등을 양자 모두에게 보증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된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됨으로써 신학적으로 큰 의미를 띠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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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한 인격체라는 사실은 믿으나(엡 4:30),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된 존재이거나 피조된 인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단)들도 있지만,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창 1:2)란 사실이 진리의 말씀인 성경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성령을 직접 ‘하나님’이라 호칭하고 있으며(행 5:3-4, 고전 3:16), ‘주’라고 부르기도 하고(살후 3:5),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게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신적속성’, 즉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영원성’(히 9:14)과 ‘전능성’(눅 1:35), 그리고 ‘전지성’(고전 2:10-11)과 ‘편재성’(시 139:7-10), 더 나아가 ‘거룩성’(롬 1:4)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처럼 창조(창 1:2, 욥 26:13, 시 33:61)와 섭리(시 104:30), 그리고 인간 구원의 주체이심을 보여주는데(요 3:5-6, 딛 3:5), 이는 결국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지니신 존귀함을 성령에게도 그대로 적용하는 것으로써 성령 역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으로서 예배를 받아야 할 분이심을 말해줍니다(마 28:19, 고후 13:13).  James I. Packer는 성부와 성자에게 초점을 둘 때 성령을 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성령에게 초점을 둘 때 성부와 성자를 잊어서도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오늘날 은사주의자들과 비은사주의자들이 이 점에 있어 균형을 잃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성령의 은사’라고 해서 삼위 중에 성령에게만 국한되는 사역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의 공동사역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끝이 없고 유한하지 않으신 것처럼 하나님은 풍부하고 다채로운 다양성의 하나님이신데(시 145:3), 우리의 인간적인 성향은 우리 자신이 만든 인위적인 틀 안에 제한하거나 또는 경험과 사역 양쪽에서 융통성이 없는 고정 관념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리는 모든 눈송이를 제각각 다르게 만드신 무소불능하신 창조의 하나님(욥 42:2)은 영적은사들의 풍부한 다양성, 즉 그 전체적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여러 가지 색깔로 된 다양한 실들이 섞여 수놓은 양탄자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각 사람이 받은 은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롬 12:6), 우리가 받은 은사를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사용해야 합니다(벧전 4:10).  여기서 궁금한 것은 “얼마나 다양한 은사들이 존재하는가?”라는 것인데, 이 문제를 놓고 John Stott고린도전서 12장8-10, 29-30절(열세 개의 은사)과 로마서 12장6-8절(일곱 개의 은사), 에베소서 4장11절(다섯 개의 은사)과 베드로전서 4장11절에서 나오는 두 개의 은사, 즉 ‘만일 누가 말하려면’ ‘누가 봉사하려면’이라는 구절을 제시하면서『성령세례와 충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약성경에 명기된 스무 가지의 은사가 있으며, 다양성을 사랑하시고 후히 주시는 분인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은사들을 주실 수도 있다.”  한 마디로 성경에 기록된 이 목록들이 성령의 모든 은사들을 다 망라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은사가 다양하다면 이 은사의 본질을 규명함에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은 고린도전서 12장 4-6절에서 나오는 ‘은사’‘직임’‘역사’를 비교해 보는 것인데, 사도 바울이 본문에 나오는 이 세 가지 단어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각 다른 위격과 연관시켜 기술하고 있는 것을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병행을 이루고 있는 ‘성령은 같고’, ‘주는 같으며’, ‘하나님은 같으니’라는 말은 주체적 성격을 띠고 있는 ‘동일한 성령’, ‘동일한 주’, ‘동일한 하나님’을 뜻하는 것으로 이것은 은사의 삼위일체성,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공동적 토대를 가지고 사역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문제를 놓고 Richard Gaffin『Perspectives on Pentecost』에서 성령은 성부의 약속이며(눅 24:49, 행 1:4), 성부도 로마서 12장3절과 고린도전서 12장28절 말씀을 근거해 은사(봉사를 위한 능력)들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하면서(롬 12:6-8), 승천하신 그리스도 역시 은사(사역의 직분)들을 주시며(엡 4:7-11), 성령도 다양한 은사들을 주시기 때문에(고전 12:11), 이러한 은사의 삼위일체성은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으며(고전 12:4-6), “은사는 성령 것만이 아니라 성자의 것이요 성부의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쉽게 말하면 모든 성도는 한 성령의 은사를 받아 일(사역)을 하지만 그 직무와 직무를 수행하는 양상이 각기 다른 것처럼 ‘은사들’은 성령이 주도권을 가지고 나타나시는 은사들이고, ‘직임들’은 예수님이 주도권을 가지신 봉사들이고, ‘역사들’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신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한 가지 확실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령이 은사를 주시고, 예수님은 직임을 주시고, 하나님은 역사를 주신다는 식으로 구분해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모든 은사는 성령이 중심이지만 성부와 성자와 무관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 14장17절에서 ‘성령의 내주’14장23절에서는 ‘성부와 성자의 내주’로 되어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동일하신 성령이 주시는 은사와 동일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봉사, 그리고 동일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역사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은사’ ‘직임’을 관련시켜 보면 은사는 과시나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도하시는 ‘봉사’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고, 결국 은사는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관계되어 있는데, Stott는 이 세 가지 단어를 종합해서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립니다.  “성령의 은사들은 사람들이 특정하게 각자에게 맞는 봉사의 일을 하는데 적합하도록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부여하신 일정한 재능들이다.”  그러면서 성령이 삼위 중에 실행자이시며 오늘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성령으로 행하시는 것이 사실이지만(요 15: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은사들에서도 그것들을 전적으로 성령께만 돌려서는 안 되고 삼위의 세 위격이 모두 참여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성령의 은사가 단순히 성령 활동의 표현이 아니라 성자와 성부의 주도적 활동과도 직결되어 있으며 은사는 봉사와 역사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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