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심으로 낮아지신 그리스도께서는( 2:8), 잠시 보류해 두셨던 제2위 하나님으로서 신분을 회복하시게 됩니다.  이와 같이 높아지신 신분을 취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사역을 단계적으로 행하십니다.  부활( 2:31), 승천(( 16:19), 하나님의 우편의 앉으심( 12:2), 재림( 24:30)이 바로 이러한 단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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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죄가 없다고 하여 죄나 죄의 욕망의 실체를 모르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한계를 갖는 인간은 대개 경험을 통하여 어떤 사실을 알지만 전지전능하시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경험하지 않고도 신적 능력을 통하여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죄 가운데 빠진 인간의 상태를 아셨기 때문에 죄인인 인간과 동일한 고통을 당하셨으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4:15).  이와 같으면에서 죄인된 형편을 이해하여 주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는 구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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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반드시 온전한 인간이어야 합니다

둘째, 반드시 무죄한 인간이어야 합니다. 

 

셋째, 반드시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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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oyd Jones와 사역한 바가 있는 전기 작가이자 부흥 신학자인 Iain Murray는 『The Life of Arthur W Pink』에서 20세기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였던 Arthur Pink 진술은 주목할 만하다고 말하면서 그가 회심하기 탁월한 영매였으며, 훗날 그가 회심하고 거듭나면서 자신이 의사소통했던 영혼들과 다른 영매들이 부르는 모든 영혼들은 죽은 이들의 영혼이 아닌 바로 악한 영들이었다고 증언합니다이렇게 귀신이 인간의 안에 거주할 사람을  귀신들린 자( 4:24), 악한 영에들렸다라고 말하는데( 9:17, 4:33), 이런 귀신들이 자신이 점령하고 있는 사람의 입을 통해 말을 하는 것은 축귀 사역에서 일반적으로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1:23-24).  예를 들어 보통 악한 영들은이것은 집이다( 12:43-44), 혹은나는 여기에 오랫동안 살고 있었다라고 말하면서 육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피로 주고 하나님의 자녀이기(벧전 1:18-19, 고전 6:19-20), 마귀의 소유물이 없을 뿐더러 무단 침입자인 귀신들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따라서 법적인 권리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책임이며 진정으로 귀신들린 자녀의 부모처럼 귀신을 내쫓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9:18-26), 어떤 마귀도 인간의 육체를 집으로 삼고 거주할 수는 없습니다( 4:7).

 

이렇게 귀신들의 속박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일을 귀신축출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은 어떤 기술이나 방법을 따르지 않으셨고 모든 상황에서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셨기 때문에( 5:19), 사실 축귀사역에 있어 꼭 이렇게 해야만 귀신이 쫓겨나간다라는 공식은 없습니다.  Charles H. Kraft는 『Christianity with Power에서귀신축출이라는 용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들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사역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다. 그러한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적들의 수중에 있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그러한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을 본받고자 하는 우리로서는 아주 당연히 행해야 할 일인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의 의미는 축귀사역에 있어 비밀스러운 공식은 없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귀신들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나를 믿는 자는 나의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14:12)라고 말씀 하신 것처럼 오직 성령의 능력( 12:28)과 그리스도의 이름( 10:17)을 힘입을 때만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역을 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음성에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이는 것과 귀신들린 당사자 편에서의 협조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Robert G. Tuttle는 『The Partakers』에서귀신을 쫓아낼 역량을 가진 사람은 그 같은 직임을 세심한 주의로만 할 것이 아니라 오직 많은 기도와 금식 후 성령의 능력으로 해야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고( 9:29),  Lloyd Jones 역시성령의 비상한 활동이 있을 때마다 귀신들림의 나타남을 보게 된다.라고 말하면서 누가복음 1120 말씀을 인용하였는데, 여기서하나님의 손을 힘입어라는 말은 마태복음 1228절에서는성령을 힘입어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이것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기간 동안 언제나 성령을 힘입어 사역을 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5:17, 10:38).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놀라운 권세가 우리 믿는 자에게 실제적으로 어떻게 발휘될 있느냐는 것인데, 이것을 알려면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역이 마귀를 물리친 권세의 궁극적인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함이 가장 중요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마귀를 이기셨고( 4:1-13), 십자가가 바로 마귀를 결정적으로 물리친 순간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 2:15, 2:14, 12:11)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는 완전히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마귀는 이상 우리를 다스릴 없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16:11).

 

조금 더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위치는 우리가 영적 전쟁을 치르는데 있어 십자가가 견고한 영적 발판이 된다는 것으로( 2:15), 사도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 3:26).  한 마디로 칠십 인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낸 것처럼( 10:17-19), 우리에게도 마귀를 대적하여 이길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10:17).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와 야고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마귀를 대적할 것을 말했고(벧전 5:8-9, 4:7), 바울도 신자 모두에게 영적 전쟁을 위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했던 것입니다( 6:10-18).  사실 마귀가 사용하는 무기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인데( 10:10), 만일 그리스도인으로서 귀신을 꾸짖고 책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면( 16:17), 마귀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고(딤후 1:7), 더 나아가 귀신의 능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요일 4:4).  이런 문제를 가지고 John Wimber귀신들에 대한 권세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능력에 있고의심할 바 없이 우리는 귀신들을 이기기에 필요한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다라고 했고( 16:17-18), Maxwell Whyte사탄과 귀신에게는 그리스도인을 능가하는 합법적인 권리가 없다. 따라서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위임하신 권세를 받고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완전히 복종할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Thomas White는 『A Believer's Guide to Spiritual Warfare』에서지극히 높으신 예수님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믿음(11:22-24, 18:18-20)과 그분의 보혈의 능력에 대한 확신( 12:11), 그리고 우리가 부여받은 악을 대적할 권세를 사용할 용기( 10:19)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전적인 믿음( 10:38)은 어떠한 종류의 마귀의 억압이라도 물리쳐 이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인 일곱 가지 무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언제든지 마귀의 공격을 물리치실 수 있고( 4:1-11),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종종 마귀의 공격을 물리쳐 주시기도 하지만( 13:10-16), 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도 더러운 영들에게 직접 명령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마귀를 대적하면 그는 물러갈 것이고(요일 4:4), 때로는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간단한 명령이면 족할 때가 있으며( 16:18), 어떤 때에는 악한 영에게 떠나도록 명령하는 과정에서 주님처럼 성경말씀을 인용할 수도 있습니다( 4:1-11).  결론적으로 성경은 귀신을 제거해 주기를 기도하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그분이 우리에게 권세를 주셨다고 말하고 있고( 1:12), 하나님의 자녀는 그 주신 권세를 가지고 요한복음 1412절 말씀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얼마든지 믿음으로 담대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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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이끄는 리더에게 리더십이 필요하듯 뒤에서 따르는 이들에게는 따르는 사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리더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지도하려고 해도 따르는 사람의 자세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나 교회의 구성원의 대부분이 리더가 아니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따르는 사람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따르는 이들이 처한 여건이나 상황이 다양한 만큼 따르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자세도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히 리더는 그런 다양한 스타일에 맞추어 리더십을 발휘하게 됩니다.  다음에 제시된 세 가지 스타일은 따르는 이들이 만나게 되는 대표적인 상황입니다.  자신의 상황과 비교해 보면서 따르는 이가 소유해야 할 법칙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1. 도제 (Apprentice)

옛날 장인들이 가진 기술을 그 밑에 있는 도제들이 배우고 연마했던 것처럼 선생이나 지도자가 가진 특별한 기술을 보고 익히기 위해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교회에서는 전도의 중요성은 강조했지만 전도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가르쳐 주지 못했습니다.  물론 구체적인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런 경우 리더는 따르는 자들을 도제로 생각하고 전도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 가르치려 합니다.  이런 상황에 놓인 따르는 이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겸손과 철저함입니다.  선생이 보여주는 것 전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철저함과 함께 선생의 가르침을 얼마나 겸손함으로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합니다.

 

2. 제자 (Disciple)

제자란 선생과 삶을 나누면서 생각과 생활을 일치시켜가며 선생이 계시지 않더라도 그와의 정신적인 교제를 계속 지속하는 위해 노력하는 따르는 이를 말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예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입니다.  그저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서 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을 훈련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리더와 따르는 이 사이에는 삶을 나누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럴 때 따르는 이에게 요구되는 것은 솔직함과 개방성입니다.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개방할 때 그것에서부터 진정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3. 동료 (Comrade)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선생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지만 실제적으로는 함께 배우는 동료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큽니다.  청소년들의 생활은 선생의 가르침보다 함께 지내는 친구들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하는데 성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서로를 통해 배울 수 있다는 열린 마음과 자기를 객관화하는 능력입니다.  동료들과는 흔히 어깨를 겨누게 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장점을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타인의 단점을 드러내기 마련인데, 서로가 서로에게 배움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을 객관적인 기준에서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좋은 학생이 좋은 선생이 되는 법입니다.  훈련이나 연습 시간을 충실히 보낸 선수가 좋은 결과를 만듭니다.  따르는 자의 자세를 바르게 가진 사람이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법입니다.  우리 모두 따르는 이에게 요구되는 겸손과 철저함, 솔직함과 개방성 그리고 열린 마음과 자기를 객관화하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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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진리의 성령 2017. 8. 24. 11:11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계속 역사하시려면 우리는 반드시 진리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마 4:4).  바울은 고린고 교인들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자신이 주었음을 상기 시키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2).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예수 안에서 어린 아이었을 때에는 그들이 받아 먹어 소화시킬 수 있을 만큼 영적 음식만을 주었습니다.  영육 간에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성숙하려면 좋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영적성장을 위해 필요한 음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보통 책이 아닌 영적인 책이고, 성경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딤후 3:16).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말씀 속에 있는 생명을 우리 속사람에게 풀어 놓으십니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 영적 자양분을 얻게 됩니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물론 성경을 읽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해서 우리의 마음을 말씀으로 흠뻑 적셔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말씀에 복종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회개하는 심령으로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말씀을 우리에게 조명하실 때 다루어야 할 부분들을 보여주십니다.  회개할 죄들을 기억나게 해주십니다.  그때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회개하면 성령의 능력이 우리 삶에 임하여 죄의 지배력은 깨어져 나갑니다.  그리고 점차 성장하면서 예수님의 성품도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영적성숙의 공식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회개=성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사모하고 성령님께 순종할 때( 5:16), 우리는 성장하여 영적 성숙에 이르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회개하는 심령에 말씀의 씨를 심어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5:22-24).  이것이 성령의 내주사역입니다.  끝으로 성령님의 내주사역과 능력사역은 완전히 다른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초자연적인 강력한 능력사역을 하면서도 영적성숙을 위해 역사하시는 성령께 저항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능력이 초자연적으로 나타났지만 성숙하지 못한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 전체가 시끄럽고 분쟁이 심했던 곳입니다.  문제는 진리의 말씀을 배우는데 큰 중점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과 성숙의 필요성을 반드시 강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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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죄악된 행위를 저지를 아니라 죄악된 생각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3:9).  반면에 예수님은 행실과 생각에서 죄를 완전히 떠난 없으신 분입니다( 8:46).  또한 모든 인간은 과거나 현재에 지은 때문에 죄책감으로 종종 마음의 갈등을 겪습니다( 7:17-21).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 적이 없는 예수님( 5:30) 심령의 평안을 누리셨을 뿐아니라 오히려 자기에게 오는 자에게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4:27).  나아가 모든 인간은 죄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죄를 범할 육신은 쾌락을 느끼기도 합니다(요일 3:1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도 이미 간음 죄를 범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28).  따라서 예수님께서 죄의 욕망을 경험하셨다고는 전혀 생각할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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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해 낸 모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직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서서 율법으로 서로 계약을 체결하게 함은 물론( 3:19), 한 편으로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12:6-18), 또 한 편으로는 백성을 대신하여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함으로써( 32:11-14, 30-32), 참 중보자의 그림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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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만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것은 없다.  그래서인지 그만큼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하려는 움직임 역시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부활의 증거』는 훈련생은 물론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소책자라 적은 분량이지만,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하려는 여러 주장들에 대해 그 주장이 얼마나 허구이며, 결국 부활이 역사적 사실일 수밖에 없는지에 충분히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훈련생들은 27과에서 부활의 역사성과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 그리고 부활이 가져다 준 축복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부활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감격을 어떻게 다시 회복할 것인가에 대해 배우게 된다.  따라서 이 책 『부활의 증거』는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에 대해 훈련생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 인도자에게는 부활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여러 주장들의 허구를 설명할 수 있도록 돕는 좋은 참고도서가 될 것이다.

 

부활은 우리에게 위안도 주지만 도전도 해 온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활의 메시지를 공격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믿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약 부활이 거짓이라면 즉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 전체가 하나의 사기극이 되고 말 것이다.  반대로 만약 부활이 참이라면 그것은 역사상 최고의 사건이 될 것이며, 우리의 삶은 부활의 의미에 맞게 조정하지 못한다면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부활 기사는 주로 여섯 명의 증인(마태, 마가, 누가, 요한, 바울 및 베드로)이 기록해 놓은 증언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 증언은 초대교회 전체의 증언에 의해 지지를 받는 것이었다.

 

우선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고린도전서의 저작 시기는 주후 52년에서 57년 사이로 인정받고 있다.  둘째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빈 무덤에 관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데 마가복음 역시 시기적으로 매우 이른 문서로 여겨진다.  셋째는 누가로, 그는 제3의 증인인데 우리에게 무덤에 찾아간 일과 그곳에서의 부활모습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상당한 보탬을 준다.  누가의 기록 역시 바울과 마가의 기록과 함께 매우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는 그 증언이 최소한 육안으로 목격한 증인들의 기록으로 사실 그대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활을 반대하는 이론 중 가장 극단적인 설은 그 사건자체를 고의적인 조작으로 간단히 처리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이 조작이 아니라는 증거는 압도적이다.  우선 증인의 수로, 500명가량이 최초의 목격자들로 그중 대다수가 주후56년에도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말한 교훈대로 목숨까지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만약 조작이었다면 이런 음모를 꾸민 사람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또 다른 반대이론은 부활이 전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불가능한 이유는 문서의 기록 시기가 너무 일러서 전설로 발전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부활 사건에 대한 기록에는 전설에 으레 나타나는 어떠한 이야기도 없다.  이들 부활에 대한 반대 이론들은 빈 무덤의 사실 앞에 산산이 와해되고 만다.


빈 무덤에 관한 첫 번째 이론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심리적으로 보거나 윤리적으로 보거나 불가능하다.  설사 소수 인원이 그런 짓을 했다 하더라도 고문을 받을 때나 순교할 때까지도 어느 누구도 ‘불지’ 않았다는 것과 또 교회 내부로부터 그와 같은 소문의 기미조차 전혀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을 볼 때 불가능한 일이다.  둘째는 유대나 로마 당국 혹은 아리마대 요셉이 시체를 치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불합리하고 모호하다.  만약 당국에서 치웠다면 왜 그렇다고 말함으로써 부활의 전파를 미연에 방지하지 않았을까?  만약 유대 지도자들이 치웠다면 자신의 명령에 의해 혹은 로마의 훈령에 따라 시체를 치울 때 동참한 증인들을 불러 세우지 않았는가?  아리마대 요셉이 치웠다는 주장은 더 근거가 없다.  세 번째 빈 무덤에 관한 이론은 여인들이 무덤을 잘못 찾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왜 진짜 무덤을 지적하거나 시체 자체를 제시하지 않았나 라는 질문에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넷째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과 혈액의 유실로 말미암아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즉 기절한 후 매장되었다가 소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의 반죽은 상태에 있던 사람이 소생해 세 명의 여인이 움직이기 힘들게 느꼈던 바위를 굴러 젖힌 후 못 자국 나고 상처 입은 다리로 몇 마일씩이나 걸어갔다는 주장은 도저히 믿기 힘든 것이다.

 

빈 무덤과 관해서 우리는 세 가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사도행전 및 몇몇 서신들의 부활과 관련된 기록에서 빈 무덤에 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빈 무덤에 대한 사실은 그 당시 상식이었기 때문에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도시대에 무덤이 어떤 관심이나 숭배의 장소가 되지 않고 아주 무관심하게 취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시 부활의 사실이 너무 확실했기 때문에 무덤이 무관심하게 취급된 것이다.  셋째는 빈 무덤에는 수의와 수건이 풀어지거나 어지럽혀지지 않고 마치 몸만 그저 살짝 빠져 나가거나 지나가기만 한 것처럼 그대로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또 다른 반대이론은 부활의 목격자들이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서 설득력이 없다.  우선은 오백 명의 군중이, 그리고 좀 적은 수효의 사람들이 여러 경우에 걸쳐 이러한 환상을 보았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다.  또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결코 같은 환상을 볼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 오백 명 모두가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똑 같은 환상을 보았다는 주장은 믿기 어렵다.  또 환상이란 오랫동안 원해 온 어떤 사건과 항상 관계가 있는데 제자들은 부활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슬픔과 좌절 가운데 있었으며 소망 또한 사라진 상태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심령체험은 대개 적당한 시간과 장소에서 발생하는데 부활은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 일어났다.  끝으로 망상적 강박관념은 보통 어느 정도의 규칙성을 가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빈도가 늘거나 줄면서 장기간에 걸쳐 반복되는데 부활은 사십일의 짧은 기간에만 나타났고 그 뒤에는 영원히 중지되었다.  환각을 일으킨 사람 중에 그 누구도 반복현상을 겪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이외에도 부활에 대한 증거는 첫째, 세계 곳곳에 기독교라 불리는 집단이 존재하며 이 집단은 부활의 사건을 그 기원으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당시 안식일에 열광적인 애착심을 보였던 유대인들이 부활의 사건에 근거한 주일제도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부활이 사실임을 증명한다.  셋째는 초대교회의 성공으로 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게 된 것은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넷째는 부활과 최초의 전파 사이에 있는 일곱 주라는 거북스러운 간격으로 조작이나 몽상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각색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섯째는 그리스도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힘과 부활을 예언하셨다는 것도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당시 재판시 혐의도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는 발언 때문이었다.  여섯째, 비통한 마음과 패배감으로 쌓였던 사도들이 무엇 때문에 변화를 받아 세상을 뒤엎고 어떠한 반대에도 끄덕 없는 불굴의 선교사가 될 수 있었는가라는 점이다.  바로 부활의 사건 외에는 없다. 일곱째는 전 세계에 걸쳐 내려오는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기쁨을 발견했다.  결국 개개인에 대한 부활의 궁극적인 증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나름대로 아는데 있다.  왜냐하면 이 점에서 경험의 증거가 역사의 증거를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부활하신 구세주의 약속은 아직껏 유효하다.  ‘보라 내가 문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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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ica of Hippo

기도의 사람 2017. 8. 18. 13:12

기독교 3현모(賢母) 가운데 사람인 Monica

기독교 역사상 획을 그은 신앙 위인 Augustine of Hippo 친모이다.

시대 최고의 성자로 일컬어지는 Augustine 방탕한 삶에서 건져내어

기독교도로 개종시킨 것이 바로 어머니 Monica였다.

Augustine 그의 불후의 명저 『참회록』에서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Monica가 밤을 지새우며 눈물로 기도드린 세월은 10년이 넘는 것이었다.

그래도 아들이 타락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올 줄을 모르자,

그녀는 존경하던 Ambrose 주교를 찾아갔다.

그녀가 흐느껴 울며 아들을 돌이킬 방도를 묻자 현명한 주교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아들은 결단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하나님은 Monica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Augustine 돌이키셨으며,

기독교사에 길이 남을 신학자요,

종교지도자로 되게 하셨다.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였던 그녀의 눈물은

로마 전례의 축일 기도문에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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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는 850 1이라는 숫적인 열세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가 제시한 대로

번제물과 제단을 불로 태워주심으로

자신의 역사를 보여주시지 않았다면

엘리야는 완전히 실패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마도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제단을 보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했을

자신의 발의해서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으로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행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엘리야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확인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대로 반응했습니다.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렸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리셨습니까?

물론 하나님이시죠.

그럼 엘리야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에게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만한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만이 하실 있는 일을 하시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종을 통해서

일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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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던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한 적이 없으며 입에 궤사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벧전 2:22).  또한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는 죄를 알지도 못한 사람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고후 5:21).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고발에 의하여 예수님을 심문한 총독 빌라도조차 예수님에게 어떤 잘못도 없다고 인정했으며( 23:14-15), 사형을 집행한 백부장 역시 주님을 의인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23:47).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는 바와 같이 결단코 하나의 죄도 없으신 분입니다(요일 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으로 정죄받고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스스로 택하신 위대한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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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의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시도록 그들을 대신하여 희생 제물을 들고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또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장이나 선지자는 한편으로 볼 때 중보자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중보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중보자는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시켜 화목케 함으로써( 5:10),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하기 이전과 같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존재이어야 하나 구약의 제사장이나 선지자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구약의 제사장이나 선지자는 중보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시킬 수 있는 참 중보자가 오시기까지 중보자적 역할을 감당하도록 임시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참 중보자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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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당시 나는 출석하던 교회의 믿음(?)이 좋은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성령을 받으면 믿음생활을 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좋다는 말만 들었지 왜 성령을 받아야만 하고 성령을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확실하게 알지는 못했습니다.  얼마 후 다니던 교회에서 어느 성령이 충만한 사역자를 초청하여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광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경회 같은 말씀 집회가 먼저 끝나고 난 후 초청한 강사를 통해 성령받을 사람들은 교회 목사관으로 모이라는 말에 어떤 아는 분과 다른 사람들처럼 줄을 서서 초초한 마음으로 성령을 받기 위해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오랜 세월이 지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교회 안에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아무튼 앞에 서있는 사람들이 한 사람씩 목사관에 들어가 기도를 받고 뒷문으로 나갔기 때문에 그들이 성령을 어떻게 받았는지, 또 성령을 받을 때 어떠한 느낌이나 일(현상)이 일어나는지 초신자인 나로서는 너무나도 궁금했습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와서 안내하는 집사님을 따라 목사관으로 들어가 그 사역자를 통해 안수를 받게 되었는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머리에 손을 얻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두 눈을 지그시 짓누르는 것이엇습니다.

신앙이 초보인 나로서는 남들도 다 그렇게 받는 줄만을 알았고 무엇보다도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속된 말로 ‘눈깔 찌르는 안수’가 성경에 나오는 정상적인 안수인줄만 알았습니다.  사실 한 번도 안수를 받아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그 시간이 호기심과 긴장감이 넘치는 시간이었지만 그가 선 상태가 아닌 드러누운 상태에서 눈에 티슈 한 장을 덮고 손가락으로 처음에는 서서히 나중에 조금씩 강도가 높아지더니 세게 눌러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빛이 보인다고 말하자 그 사역자가 그것이 ‘성령의 불’이라고 자상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교회 신자들이 그렇게 받기 원했던 성령 받은 것으로 생각하면서 안수기도를 해주신 그 강사분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솔직히 그 당시 눈은 너무 아팠지만 그래도 성령을 받았다는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거울에 비추어진 내 눈을 보니 많이 충혈 되어 있었고 손으로  살짝 만지기만 해도 무척이나 아팠습니다.  다음날 아침 호기심이 많은 나는 거울 앞에 서서 그 사역자가 하던 대로 내 눈을 손가락으로 처음에 지그시 나중에는 강하게 눌러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놀라운 빛, 그 사이비 사역자가 말한 가짜 성령의 불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고 이상하게 누르면 누를수록 눈은 아팠지만 그 빛은 더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오늘날 성령 받은 증거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제각기 가지고 있는 신앙관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먼저 ‘방언’을 강조하는 사람은 방언을 해야 만이 성령 받은 것으로 주장하면서 오순절날 성령이 임할 때 제자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한 것을 성경적으로 제시합니다(행 2:4).  또한 하나님 앞에서 떤다는 뜻을 가진 퀘이커 교도들처럼 ‘몸에 진동’을 느끼거나 떠는 사람, 혹은 기도를 받고 쓰러져 ‘성령 안에 안식’ 하는 것을 통해 성령을 받으면 몸에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말하기도 하고(겔 1:28, 단 10:7-10, 계 1:17), ‘환상’을 봐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베드로가 성령받기 전에는 환상을 보지 못했지만 오순절날 성령을 받은 후에 기도하는 가운데 환상 본 것을 내세우기도 합니다(행 10:9-16).  더 나아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서 안수할 때 사람들이 성령 받은 것(행 8:14-17)과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제자들에게 안수할 때 그들이 성령 받은 것을 내세우면서(행 19:6), 만약 누군가 ‘불의 종’, ‘능력의 종’으로부터 ‘안수기도’를 받은 사람은 이미 그를 통해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험상 이런 것들은 성령을 받은 절대적인 증거가 될 수 없고, 무엇보다도 오늘날 불건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외부적으로 보여지는 역사가 있어야만 성령이 역사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여기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조용하고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왕상 19:11-12).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는데(요 14:16),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이 오면(요 15:26),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는  것입니다(요 16:8).  따라서 성령 받은 첫 번째 증거는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 깨닫는 것’인데, 이것은 어두움 속에서는 바른 사물을 볼 수 없듯이 타락한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인인줄을 전혀 모르고 방탕하며 살다가(롬 3:11-12), 하나님 아버지의 이끌림을 받고(요 6:44), 빛 되신 그분의 부르심을 통해(롬 8:30), 어느 날 예수님을 믿고 자신이 그분 앞에 죄인인 것을 깨닫고 애통해 한다면(마 5:4), 그는 이미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지만(갈 1:14),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그분 앞에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딤전 1:13).  그러나 다메섹에서 빛 되신 주님을 만난 후(행 9:3, 22:11, 26:13),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처럼(딤전 1:15), 성령은 죄로 병든 인간을 그리스도 앞에 세울 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간(엡 2:1)이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출 3:1-5, 사 6:1-5, 눅 5:8).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세리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Martin Luther가 말한 것처럼 날마다(마 6:12), 용서받은 죄인임을 깨닫게 되지만(눅 8:18:13),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롬 3:9-18).

성령 받은 두 번째 증거는 ‘의에 대하여 아는 것’으로(요 16:8),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는 알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적으로 모를 수밖에 없고(요 5:39),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마 11:27)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구원의 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요 1:29), 그분에  대해 올바른 신앙관을 가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성령 받은 후 예루살렘 거리로 나가 설교한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탄생(마 1:21), 대속의 죽음(히 9:12), 부활(막 16:6), 승천(행 1:11), 재림(마 25:31)과 심판(계 21:11-15)에 대해 확실히 알고 증거 했습니다(행 2:14-36).  사실 베드로는 세상적으로 배운 것은 없지만(행 4:13), 예수님에 대해서만큼은 ‘명약관화’하게 된 것처럼 성령을 받으면 세상지식에는 무지할지라도 그분에 대해서는 아는 지식이 생기고(빌 3:8), 성령을 받지 못하면 니고데모처럼 세상 교육은 많이 받아 해박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해 알 수는 없습니다(요 3:10).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으면 자기 자신에 대해 사죄의 확신을 갖게 되는데 바울은 성령 받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도 했지만 (딤전 1:15), 다른 한편으로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는 확신을 가지기도 했습니다(롬 8:31-39). 이렇듯 성령을 받으면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고(고후 13:5), 성령을 받지 못하면 구원의 확신이 생기지 않는데, 그것은 성령은 내 죄에 대해 ‘검사’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변호인’ 역할도 하기 때문입니다(롬 8:14-16).

성령 받은 마지막 증거는 ‘심판에 대하여 아는 것’으로(요 16:8), 요한복음에 보면 사탄을 세상 임금으로 묘사하고 있는데(요 14:30), 여기서 사탄의 역사는 두 가지로 외부적인 역사와 내부적인 역사로 나타납니다.  먼저 성령이 오시면 사탄은 외부적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주님은 성령의 사역을 대적하는 바리새인들과의 치열한 논쟁에서 사탄을 집 주인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마 12:24_29).  다시 말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고(막 2:17), 그 죄인이 사탄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죽어 있는 인간을 구원하려면 먼저 집 주인이 되는 사탄을 결박해야 하는데(요일 3:8), 이러한 외부적인 사탄의 역사를 성령이 오심으로 심판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눅 10:17-20).  그리고 내부적인 심판은 성령 받기 전의 내 마음은 사탄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엡 2:2), 언제나 두려움과 공포 속에 떨면서 일평생 종노릇하는 가운데 살았지만(히 2:14-15),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행 2:38), 사탄이 쫓겨났기에 두려움과 불안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평안(요 14:27)과 기쁨이 넘쳐나게 됩니다(요 16:22).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성령의 은사(고전 12장)와 상관없이 성령을 받으면 가장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진심으로 고백하고(눅 18:13-14),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가 되시며(행 4:12), 내 마음을 다스리는 분이 사탄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의심 없이 믿는다면 이미 그는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갈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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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은 위험과 고통을 전제한다.

부흥이 일어나게 하려면 고통이 있어야 한다.

부흥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기 때문에

부흥에는 고통이 있다.

부흥의 불길이 순식간에 타올랐다가

즉시 세력이 약화되어 사그라지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것은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 무지가 성령의 불을 있다.

다시 말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불이 꺼진다.

둘째, 불순종이다.

죄의 찌꺼기까지 모두 태우려고 하는 불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불순종이다.

가지 이유 말고도 다른 이유들이 있을 있다.

예를 들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인간의 게으름이나

또는 이제 먹고 살만하다고 느끼는 자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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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태초에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빛이 있게 되었다.

이 얼마나 비이성적이면서도 단순한 일인가?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극히 합당한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매 모두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서지 않았던가?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라는 질문을 연발할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지 못하다.

이성만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해답은

너무나 간단명료하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11:3).

 

-C. H. 맥킨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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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나라의 히스기야 왕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웃에 앗수르 나라 왕은 산혜립이란 사람이었습니다.

호시탐탐 유다나라를 넘보다가 마침내 쳐들어와서 금방 함락할 기세였습니다.

그 전략은 천하무적으로 이미 정평이 나있었던 군대였고,

이에 비해서 유다나라 히스기야 왕의 군대는 아주 형편이 없었고,

그들과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좀 비교를 해 보려고 해도 워낙 오합지졸이라

유다나라가 망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라는 선지자를 히스기야 왕에게 보냈습니다.

너희가 이길테니 걱정하지 말라! 너희가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과 유다백성은 별별 생각을 다 해봤습니다.

이사야라는 사람이 뭔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전했을 거야

어차피 죽을 , 하나님이 그저 위로의 말씀을 하시는구나

갑론을박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다시 한 번 여쭤보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이긴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우리가 이긴다는 징조를 보여주시길 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유다나라와 히스기야 왕에게 보낸 징조가 바로 본문입니다.

 

그것은점입가경이었습니다.

징조가 전혀 엉뚱한 것이었습니다.

내일 당장 산헤립 군대와 싸워야 하기 때문에 이길 가망성이란 전혀 없었습니다.

만약 이때 하나님께서 장갑차와 탱크 수십 만대 하고,

공수특전단 수십만 명을 하늘에서 뚝 떨어뜨려 주시면서

너희가 이길 것이니까! 걱정하지 말라하셨으면 믿었을 텐데

금년에는 스스로 것을 먹을 것이요 이년에는 거기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삼 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라고

느닷없이 먹는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꼭 그렇게 하십니다.


히스기야 왕과 그 백성들이 자기네 땅에서 난 식물을 먹으려면

이들이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히스기야 왕이 산헤립 군대에게 전쟁에 져서 전멸 당해 버리면

자기네 땅에서 난 식물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너희가 이기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거짓말이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라도

이 전쟁에서 산헤립 군대를 완전히 초전박살을 내게 하실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군대가 얼마나 초라하든 형편없든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서 약속하신 대로 히스기야 왕과 그 군대로 이기게 하셔서,

그들이 자기네 땅에서 난 식물을 먹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셔서 유다백성들이 아무런 수고도 없이

십팔만 오천 명이 하루아침에 송장이 되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의 귀한 약속을 징조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에는 수도 없이 많은 약속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말씀들을 모두 다 그대로 지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꼭 이루어 주실 줄도 믿습니다.

이것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성도가 믿음을 갖고 전진하며 찬양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이년에는 또 거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삼 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 3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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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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