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용 음악

연구자료 2017. 6. 29. 12:26

‘예배용 음악’이란 교회 음악을 용도에 따라 분류한 것 가운데 한 부분이다.  예배용 음악은 주악과 찬양(성가)대의 찬양과 회중 찬송으로 구분된다.  1. 주악 : 예배의 처음과 끝 또는 필요한 때에 악기로 연주되는데 보통 전주, 간주, 후주로 나뉜다.  ① 전주(Prelude) : 예배를 시작하기 약 10분 전쁨의 시간에 교인들의 마음을 가다듬고 예배를 분비하도록 엄숙하고 신앙적인 곡을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② 간주(Interlude) : 성찬식이나 헌금할 때 등의 예배 중간에 연주하는 것이다.  ③ 후주(Postlude) : 예배가 끝난 후 회중이 나갈 때에 기쁨과 승리의 느낌을 주는 장엄한 곡을 연주하는 것을 가리킨다.  2. 찬양(성가)대의 찬양 : ① 입례송(Introit) :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사랑을 찬양하며 회중들의 마음을 영적인 것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다.  첫 송영이라고도 한다.  ② 기도송(Response to Prayer) : 대표기도에 대한 응답송으로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내용이다.  ③ 찬양(Anthem) : 찬양/성가대의 음악 가운데 제일 중요한 부분으로서 보통 오르간이나 피아노로 반주한다.  ④ 축도송(Benediction) : 축도가 끝난 후 이에 화답하는 음악으로서 보통은 아멘송이 사용되지만 상삼위를 찬양하거나 아니면 성도들에게 복이 있기를 간구하는 내용의 곡도 쓰인다.  3. 회중 찬송 : 회중 찬송은 종교 개혁 이후부터 대두되었는데 이는 예배하러 모인 회중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가리킨다.  이상과 같은 예배용 음악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이므로 기쁨 마음과 정확한 곡조로, 알맞은 속도와 크기로 그리고 반주에 잘 맞추어서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불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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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우리와 같이 모든 인간의 특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전혀 죄가 없다는 점에서 다른 인간과 구별됩니다(히 4:16).  즉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았고 죄에 대한 욕망도 가지지 않으셨습니다(요 8:46).  반면에 모든 사람은 죄를 범했습니다(롬 3:9). 성경은 모든 사람이 범죄 함으로 죄 없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합니다(롬 3:23).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완전한 인간이시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자신의 죄에 대한 응징의 죽음이 아니라 다른 죄인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벧전 1: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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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교파 국제 기독교 선교단체인 YWAM의 모토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리자'인데,

이 단체가 주로 하는 사역이 '전도', '선교', '구제'사역이라고 한다.

교회가 전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고,

다양한 영역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섬길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

전 세계 도움이 필요한 곳에 섬기는 일로 사역을 감당하는 곳이 바로 YWAM이다.



               YWAM 학생들과 지역 주민들도 참석 



               맨 앞에 있는 학생들은 춤을 추면서 찬양



               말씀을 증거하는 Loren Cunningham



  가장 인상이 깊었던 시간 


아내와 같이 참석했던 목요저녁예배는 

찬양, 기도, 간증, 헌금, Performance Dance, 설교, 중보기도로 드려지는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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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나열방대학  (0) 201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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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신 후 배고픔을 느끼셨고(마 4:2), 이른 아침부터 온종일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신 후 곤하여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깊은 잠이 드셨습니다(막 4:38).  그는 먼 길을 걸은 후 지쳐 우물가에 앉아서 쉬기도 하셨고(요 4:6), 십자가를 져야할 시간이 임박했을 때 매우 괴로워하셨으며(마 26:38),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고통을 느끼셨고, 창에 찔려 물과 피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요 19:34).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사람이 아니시고 순수한 ‘신’이었다면, 이런 모든 인간들이 느끼는 감각과 욕구를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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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Charies H. Spurgeon이 설교를 하다가 말고 잠시 멈추고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젊은 청년, 자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장갑은 돈을 주고 산 게 아니라 주인에게서 몰래 훔쳤지”  예배가 끝난 뒤 얼굴이 창백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한 젊은이가 Spurgeon에게 다가와 개인적인 신앙상담을 요청했습니다.  그 청년은 가지고 있던 장갑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 물건에 손을 댄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목사님만 아시는 비밀로 해주신다면 다시는 이런 나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도적질을 했다는 말을 들으면 충격을 받아 돌아가실 지도 모릅니다.” 이 간증 이야기는 『C. H. Spurgeon, Autobiography, Volume 2, The Full Harvest』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것은 Spurgeon이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거나 신학과 교리를 잘 알아서 이런 초자연적인 정보(지식)를 알아낸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의 자서전에 실려 있는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들도 있습니다.  “언제가 음악당에서 설교하고 있을 때 나는 의도적으로 군중들 가운데 있는 한 사람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기 제화공 한 분이 앉아 있습니다. 그는 주일마다 가게 문을 엽니다. 그 가게는 지난주일 아침에도 문을 열었고 그는 9펜스를 벌어 그 중에 4펜스를 이윤으로 남겼습니다. 그의 영혼은 4펜스에 사단에게 팔렸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 음악당에서 나의 말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 외에는 어떤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나 내가 말한 것이 옳은지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누군가를 지목해서 말한 그와 비슷한 수십 번의 사례를 더 말할 수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런 Spurgeon의 체험들이 ‘사적인 계시’와 ‘성경의 계시’를 혼동하는 사람에게는 누군가가 지속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전하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항5조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의 충분성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계시’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데서 나온 신학적 편견이고, 더 나아가 Wayne Grudem과 D. A. Carson이 말하는 것처럼 조직신학의 용어와 성경의 용어를 혼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설교할 때 사용했지만 그것을 ‘지식의 말씀’이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고 해서 성령께서 그를 통해 이루신 일의 실체를 바꾸어 놓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Spurgeon의 신학과 사역을 후세의 전기 작가들이 기록한 내용과 함께 살펴본다면 대부분의 칼빈주의 신학자나 목사들은 지식의 말씀 같은 초자연적인 은사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이런 은사가 초대교회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는 잡설에 가까운 결론을 내리겠지만, 사실 그의 자서전에서 말했듯이 Spurgeon 자신의 증언은 우연히도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드러내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의 충분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사의 똑같은 기간 어떤 영적인 은사가 상대적으로 흔하지 않았거나 없었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그 은사의 사용에 반대하셨거나 은사의 유효성을 부정하셨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보지는 말아야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고 근심케 만드는데 기여하는 불신과 배교, 그리고 신학적 무지와 개인적인 부도덕으로 인해 교회사의 시기에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자주 나타나지 않은 것이지 성경에 기록된 은사가 중단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오늘날 자기 백성들에게 은사를 베푸시기를 원하시는지 판단하기 위한 최종적 기준은 성경말씀이지만(계 22:18-19), 문제는 교회사의 어떤 사람들, 예를 들어 Augustine, Luther, Calvin, 등등의 생애 속에 특별한 체험(방언, 예언, 환상)이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그런 경험이 현재적 유효성을 의심하기 위한 이유로 언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바리새인 같은 신학적 편견과 무지에서 나온 것이지(눅 11:52),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은사들이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않을 뿐더러(고전 14:39),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방언을 말하거나 다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2:29-30).  그러기에 과거 그리스도인들의 실패나 성공이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궁극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노시스’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 비해 신약성경에서는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는 단어이지만(눅 11:52, 롬 11:33, 15:14, 고전 8:1, 엡 3:18, 빌 1:9, 3:8, 딤전 6:20, 벧후 1:6, 3:18), 사도 바울이 고린도신자들에게 ‘지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고전 12:8), 이 은사가 다른 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아홉 가지 은사들을 기록하면서(고전 12:8-10), ‘지식의 말씀’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고린도신자들이 하나님의 신비인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가지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골 2:3)에 대해 풍성하고 온전히 이해하는 가운데 믿는 자에게 주어진 계시된 비밀, 즉 지식 안에서 자라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고전 1:5, 엡 4:13-16).  하지만 바울이 이 지식을 성령의 은사에 포함시켰을 때는 무엇인가 더 큰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전서 13장2절 말씀인 ‘내가 …모든 지식을 알고’(고전 13:2)라는 구절과 고린도전서 14장6절 말씀 ‘지식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슨 유익이 유익하리요’라는 두 구절을 비교해보면, 여기서 말하는 ‘지식’(고전 12:8)이란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적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지식의 말씀의 은사란 이 은사를 받은 자안에서 자리 잡은 특징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와서 듣는 이의 마음을 쪼개는 사적인 특별한 계시, 즉 초자연적인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그의 성품을 알아보셨을 때(요 1:48)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항아리에 물을 채웠고 그 물을 떠서 연회장으로 가져다주라고 하인을 명하셨을 때(요 2:1-12), 분명 예수님께서는 이 은사를 가지고 사용하셨고(요 4:18), 베드로에게도 이 은사가 있었으며(행 5:3-4, 9), 구약성경에 나오는 엘리사 역시 이런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왕하 5:20-26).  따라서 이 은사는 일반적으로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성령께서 즉각적으로 주시는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이 은사를 소유한 사람은 개인의 유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고전 12:7).  그리고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성령께서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중요한 은사이고(고전 12:11), 오늘날에도 이 은사를 받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를 받고 오랫동안 진리의 말씀을 통해 잘 다듬어지는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하나님의 말씀과 열매 맺는 삶을 통해 훈련되어 있지 않는 미성숙한 사람이 무분별하게 시행하거나 혹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랑 없이 사용한다면 매우 위험할 수 있는 은사이기도 합니다(고전 13장).  여기서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위험부담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선물(약 1:17)인 은사 자체를 거부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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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

진리의 성령 2017. 6. 15. 14:26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바울은 유대교에서 뜨는 별이며 명문가의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가브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고, 그 당시에는 누구보다도 구약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종교지도자로서 인정받고 존경받아 장래가 보장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바울에게 나타나셨고, 그는 주님을 만나자마자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바울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발견했던 것을 찾았습니다.  이 발견은 다른 모든 것에서 돌이켜 예수님께로 붙는 것이며, 그분만큼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 필요한 것입니다.  회개는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것으로 그분과 교제하는데 방해되는 것은 주저 없이 십자가 아래 내려놓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잠시 모든 것을 중단하시고, 이 중요한 단계를 거쳤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취미, 관심사, 사람, 여가활동, 일, 재능 등등을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던 것들을 적어 목록을 만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에게 “내가 이것들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그곳에 계속 두었는지를”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내 삶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의지하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내가 추구하는 것들 중 또 하나의 추구 목록인지를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이런 것들에서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다면 다음과 같이 기도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사랑의 예수님, 지금 이 순간 주님의 발 앞에 다음 것들을 결단하고 내놓습니다(목록표를 읽으세요). 나는 주님만을 의지하고 내 삶의 만족을 주님에게서만 찾기를 원합니다. 내가 나의 의지를 드려 결단 하고 내 몸을 주님께 산 제물로 드립니다. 내 삶을 주님의 선하고 온전하신 계획으로 인도하시도록 내 권리를 주님께 드립니다. 나를 취하시고 인도하시고 사용하시어 이 땅에서 온전히 주님의 뜻을 이루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진심어린 이 기도가 끝났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첫 걸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회개하는 마음을 유지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항상 따라만 가시면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그분의 역사를 여러분 속에서 이루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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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어머니로부터 출생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지극히 평범했던 한 여인 마리아로부터 출생하셨습니다(마 1:25).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그는 난지 8일 만에 다른 모든 유대 사내아이들처럼 할례를 받았고(눅 2:21), 보통의 어린이들처럼 나이를 먹음에 따라 키가 자라고 지혜가 더하여졌습니다(눅 5:52).  그의 가족들로는 목수였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야고보와 요셉, 시몬과 유다 등 여러 형제가 있었습니다(마 13:55-16).  이러한 사실들로 그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삶을 사신 완전한 사람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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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많은 교회의 최대의 관심사가 

돈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이 있는가?

그러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는

이러한 현대교회의 최대 관심사에

하등 관심이 없었다.

우리는 지금 돈을 강조하지만

그들은 기도하는 것을 강조했다.

우리는 돈을 많이 내는 사람이 중요한 자리에 차지하지만

과거에는 기도하는 사람이

존경을 받았다.

초대교회에 수많은 성도들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지옥을 뒤흔드는 강력한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현재는 그런 사람이 가물에 콩 나듯 드물다.

명심하라.

기도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는 없다.

기도하든지 아니면 죽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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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이 인간의 모든 속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나사렛 사람으로 불려진(마 2:23), 예수님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 인간으로 출생하여 그 지혜와 키가 점차 자라가며(눅 2:52), 지정의를 지닌 하나의 인격체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참되고 완전한 한 인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마 1:25, 롬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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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예언

예언사역자 2017. 6. 3. 12:18

처음 성령의 사역에 대해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할 때 가장 관심을 가지고 사모했던 은사(고전 14:1)는 ‘치유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였습니다(고전 12:9-10).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시간이 나는 대로 성령의 은사에 관한 서적들을 수백 권 이상을 탐독하며 책을 읽고 연구하는 가운데 내용들이 너무 추상적이고 마음으로 와 닿는 것이 없어, 읽고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접 은사 집회를 참석하는 가운데 눈으로 보고 몸과 마음으로 섭렵하기를 원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예언의 은사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할 수 없었기에, 사실 서너 번 걸쳐 먼 곳은 비행기를 타고 가서 집회에 참석을 해보았고 짧게는 2-3시간, 길게는 10시간 이상을 운전하는 가운데 다양한 은사 집회들을 여러 번 참석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중 Global Awakening 사역자인 Randy Clark 집회와 아프리카 복음전도자인 Reinhard Bonnke가 강사로 참석한 선교 집회, 그리고 Dallas Seminary 구약학 교수였던 Jack Deere 목사의 세미나를 들으면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이들의 균형 잡힌 사역이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성령의 사역자들, 물론 이들을 판단하실 분은 예수님이시지만(롬 14:4), 이들에게서는 복음에 관한 예수님의 증거보다는 ‘치유’와 ‘예언’, 그리고 은혜 받은 ‘간증’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열 명중 여덟 명은 복음보다는 표적과 기사에 많은 시간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참된 예언’이란 예언 사역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계 19:10)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 바르게 쓰임을 받았던 성경에 기록된 예언사역자들은 언제나 모세와 같이 주님의 영광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출 33:18).  만약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떠한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그것이 스스로의 힘과 경건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기적을 통해 예수님만을 바라보도록 인도했습니다(행 3:12).  예를 들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마 11:13)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면서(막 1:2),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조차 풀어드릴 수 없는 가장 하찮은 종으로 여기면서(막 1:7),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어야 하며(요 3:29), 오직 주님만을 높이는 가운데 자신을 일절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마 3:11).  세례 요한이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자신을 열렬히 추종하는 자들에게(마 3:5), 스스로의 한계를 분명히 주지시켰고, 사람들의 관심을 오직 예수님에게로 돌리게 하였습니다(요 3:26-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 요한 보다 더 큰 사람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9-11). 이렇듯 세례 요한의 삶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 온전히 받쳐진 반면에 오늘날 예언사역자들이 실수하는 것은 예수님을 증거 하기보다는 거창한 ‘예언’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예언과는 정반대가 되는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언사역자들이 저지르는 또 다른 실수 중에 하나는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거나 또는 자신이 잘못을 범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태도인데, 여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오늘날 유명하다는 예언사역자들 중에 백 퍼센트 정확한 예언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예언을 분별하라고 말한 것처럼(고전 14:29), 신약의 예언은 구약의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과 달리(출 9:1, 민 22:38, 신 18:19, 삼상 10:18, 겔 33:7), 얼마든지 실수하거나 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4:1).  얼마 전 어떤 사람의 글을 읽다가 의구심이 생긴 적이 있었는데, 그의 글에 의하면 자신은 오랫동안 주님의 음성을 가려내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께서 말씀을 주시면 자신에게 주어진 예언을 진리의 말씀으로 검증하고 그 검증된 대언은 정확성에 있어 단 한 번도 틀려본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솔직히 이러한 궤변은 신약에서 말하는 예언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이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물고 뜯고 싸울 수 있는 논쟁거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말하는데(고전 13:9), 이 사람은 자신의 육적인 연약함과 죄성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롬 7:17-25),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실제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대부분이 예언사역 안에서 진정한 삶의 열매가 없거나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허다하게 많다는 것입니다(마 7:15-23).


단언하건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음의 상처와 영적교만을 철저히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통로가 되지 않는다면 예언사역을 불명예스럽게 만들거나 그 다듬어지지 않는 예언을 통해 교회를 어지럽히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입니다.  오래 전에 D. A. Carson은 구약 선지자가 참된 예언자로 인정되면(삼상 3:19), 그 예언의 내용에 대해서 점검하는 일은 없지만(민 22:38), 신약의 예언자는 그 예언의 내용을 조심스럽게 점검받아야 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살후 5:20-22), 만약 누군가 성령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 중에 자신만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일단은 요주의 인물로 경계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요일 4:1).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든지 아니면 메시지의 느낌을 받든지 간에 예언에는 불순물이 섞일 수 있는데(살전 5:20-22), 그 이유는 우리의 생각과 사상이 우리가 받은 메시지에 묻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예언사역자들은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을 하나님이 주시는 느낌으로 잘못을 범할 때가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스스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신령한 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일반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면 그 사람을 신뢰하지만, 만약 예언자가 실수를 한다면 자신이 예언한 것에 대해 신뢰성을 잃어버릴 것을 우려하기 때문에 쉽게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단’, ‘사이비’, ‘신비주의’, ‘교주’로 가는 첩경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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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의 종류

연구자료 2017. 6. 1. 12:24

성경에서 찬송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분류했다(엡 5:19, 골 3:19).  이러한 노래들은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그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시’(Psalm): 이는 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부른 노래로서 주로 시편 9편을 가리킨다.  이 노래를 부르는 방식은 두 가지로서 응답송과 교성(交聲)이 있다.  ‘응답송’은 찬양대와 회중이 서로 응답하듯 번갈아 부르는 것이며, ‘교성’은 찬양대가 둘로 나뉘어 부르는 것을 말한다.  ② ‘찬미’(Hymn): 이 노래는 보통 찬양이라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훈계의 내용이 들어간 것을 가리킨다.  즉 시편 9편을 제외한 성경의 여러 노래들을 기초로 하여 교리나 예배에 필요하게끔 창작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뜻한다.  ③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 이것은 보통 신앙적인 노래를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하여 붙인 이름으로서 성도의 신앙적 체험에서 우러난 찬송을 의미한다.  따라서 각 시대와 지방에 따라 독특한 신앙의 내용이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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