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기간 동안에 훈련의 내용만큼이나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다른 훈련생들과 관계를 세우는 것입니다. 사실 훈련의 성패는 다른 훈련생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느냐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훈련이 끝난 뒤 많은 사람들이남는 것은 함께 훈련했던 동역자들이라고 고백하는 것만 봐도 훈련기간 중에 다른 훈련생들과 건강한 관계를 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훈련생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적극적으로 다가가라

훈련 기간 동안에 다른 훈련생들과 좋은 교제를 나누기 원한다면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가겠다는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이서 늘 함께 삶을 나누는 이웃이 더 가까운 관계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같은 집에서 살면서 심지어 바로 앞집에 사는 사람들과도 전혀 교제를 나누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누군가가 먼저 다가가야 하는데 서로 똑같이 먼저 다가와 주기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 올 때 한번 얼굴 보고 이사 갈 때 두 번째로 얼굴을 보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고 합니다.  물론 함께 훈련 받다 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그 관심을 표현하게 됩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내가 먼저 다가간다면 건강하고 깊은 관계가 보다 빨리 세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2. 자신을 솔직히 오픈하라

건강한 관계를 세우는데 자신을 오픈하는 것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오픈하는데 익숙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작은 교회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삶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누구나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내면의 깊은 아픔과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꽁꽁 숨기고 있었던 이야기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훈련은 자신이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남모르는 아픔과 문제들을 계속 나만 가지고 씨름하면 그 씨름은 매우 힘든 싸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훈련받는 지체들과 그 문제를 나누게 되면 그 부담감이 반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건강한 관계란 이렇게 다른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문제를 함께 나눠지려는 마음과 태도를 갖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내 문제로 인식하고 함께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때 그 사람과 깊은 관계성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당신도 그렇게 당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만 진정으로 건강한 교제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들어줄 줄 알면서 자신의 이야기는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건강한 관계를 세우지 못합니다. 건강한 관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당신도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솔직히 오픈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3. 상호 책임을 지라

훈련이 계속되다 보면 어떤 훈련생의 태도가 전체 사역 반을 힘들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대부분은 문제를 일으키는 그 사람에게 진지하게 충고하고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합니다.  그러나 사역훈련의 목적에 의한 건강한 관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상호 책임을 지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상호 책임을 지려는 자세는 문제의 원인을 어떤 한 사람에게로 돌리지 않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의 책임을 함께 지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훈련시간에 자꾸 늦는 어떤 훈련생의 문제는 그 사람만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상호 책임 의식이 없는 반이라면 그 구성원 가운데저 한 사람 때문에 모두가 피해를 본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호 책임 의식을 갖는 반에서는 그 훈련생이 늦는 이유를 찾아보고 늦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함께 취합니다.  어느 사역반의 훈련생들이 더 깊은 관계를 맺을지는 명약관화(明若觀火)입니다. 상호 책임을 지는 자세는 다른 사람의 상황과 감정을 이해하려는 자세에서부터 비롯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문제를 내 문제로 인식함으로써 문제 해결을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통해 서로가 함께 세워져가는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갑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Q. 꼭 해야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미루고 있는 일이 있습니까?

Q.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시는 편인가요?

 

“나중에 시간이 나면 …을 하겠다.”는 말은 참 자주 하는 것 같습니다.  “주변을 정리하고 싶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한두 번쯤 품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엄청난 속도로 변화해가는 현대 사회에서 시간 관리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시간 관리에 관한 책들은 늘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책들을 살펴보면 일을 좀 더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에만 초점이 맞춰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나는 이 일을 꼭 해야만 하는가?  나는 이 일을 하고 싶어서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은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방법을 몰라서 시간을 관리하지 못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시간 관리에 있어 획기적일 만큼 탁월한 방법이 나왔다면 이미 우리는 그것을 어떤 채널을 통해서라도 배웠을 겁니다.  사실 가만히 살펴보면 시간에 관련된 우리의 문제는 시간관리 방법 습득과 같은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좀 더 본질에 부분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신이 중요하고 의미 있게 여기는 일에서 벗어나 그저 주어진 일들을 체계적인 방식에 따라 처리하는 것만을 반복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시간을 더욱 바쁘게 만들고 더 큰 좌절감에 빠지게 만들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의미 없는 반복을 통해서는 성취감을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꼭 살펴보아야 할 것 중에 하나가 '삶의 우선순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함께 생각하면서 시간과 관련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들을 풀어가는 지혜를 얻었으면 합니다.  우리의 능력이 어떠하던 우리 모두에게는 똑같은 양의 시간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두었으면 합니다.  이 문제는 ''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나는 늘 왜 이러지'라는 맥없는 태도를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양의 시간을 주셨다는 것은 이 부분의 해결을 위해 따로 특별한 은사를 사모해야 할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능력의 한계 안에서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삶의 우선순위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첫째,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면 낡은 것을 버려라.

계획하지 않은 시간은 나의 행동을 나의 약점의 구렁덩이에 빠지게 합니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면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실패는 더 이상 우리에게는 필요 없는 낡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그들에게 있어서 삶의 최고 우선순위는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5:8-10).  그러나 그들은 우선순위를 망각하였기에 애굽의 생활들을 그리워했습니다(16:3).  낡은 것들을 그리워한 겁니다.  그러나 낡은 것을 그리워한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광야에서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중단하고 의미 있는 일에 몰두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삶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삶이 변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의 우선순위도 바뀌게 됩니다

 

둘째. 시간의 청사진을 그려라.

계획되지 않은 시간은 내가 속한 상황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의 영향력에 의해 좌우됩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보다 다른 사람의 우선순위에 이끌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 시간을 지배하기 전에 내가 독자적으로 내 시간을 통제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보다도 내 주위의 강한 사람들이 당신의 시간을 주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 사용에 있어서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십시오.  목표, 활동, 시간 등의 계획을 세우는데 들인 1분은 계획들을 실행하는 시간 10분을 절약하게 됩니다.  계획을 수립하는 행위 그 자체에 힘입어 하는 일 모두가 전보다 더 명석하고 정확해지기 때문입니다.

 

셋째,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

가장 나쁜 시간 사용법은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일을 매우 훌륭하게 하는 것입니다.  파레토 원칙에 따르면 20%의 활동이 당신의 활동에서 80%의 가치를 낳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만약 성취할 사항이 10가지 있다면 그 중 두 가지가 나머지 여덟을 합친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일을 성취하려면 삶과 일에 가장 큰 가치를 주는 소중한 것에 전념해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지속적으로 질문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 있어서 내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당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제자훈련을 받는 여러분에게는 훈련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우선순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에서 타협에서는 안 될 요소들, 즉 영적 훈련, 지성 훈련, 휴식 그리고 가족과 특별히 친구 관계를 위한 시간들을 먼저 배려하십시오.  또한 여러분에게 맡겨진 중요한 일들에 대한 일정, 즉 훈련에 집중하는 시간, 성경묵상, 기도, 암송, 생활전도 등을 우선순위로 배려하십시오. 정해 놓은 우선순위와 계획된 시간에 따라 움직인다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작할 때 아무리 일등으로 뛴다 하더라도 끝까지 시합을 마칠 수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경주를 끝낼 때까지 뛰어야만 합니다.  최후의 승자는 경주의 모든 코스에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속도로 끝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훈련을 받는 훈련생 역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훈련을 잘 받기 위해서 우선순위를 세우셔야 합니다.  우선순위에 의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빠른 속도로 끝낼 수 있는 최후의 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망설이지 마십시오.  오늘 당신의 우선순위를 세우는데 방해되는 낡은 것은 무엇입니까?  과감하게 끊어버리십시오.  가장 효과적이고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데는 이성적인 분석보다 용기가 필요 하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시간과의 전쟁에서의 최후 승리는 머리에서가 아니라 손발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평신도 훈련 > 제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0) 2018.05.25
분별하는 법  (0) 2018.03.02
법칙이 있습니다  (0) 2017.08.25
암송의 유익  (0) 2017.07.13
어떻게 읽습니까?  (2) 2017.04.0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없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말씀은 ‘너희가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는 말씀 후에 하셨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렇게 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인가?

예수님은 가지 모두가 이유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할 없음”과 “하고자 하지 않음” 속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의 궁극적인 이율배반이 존재한다.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진술하든

우리는 어느 쪽도 무시해서는 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책임은

인간 존엄성과의 양도할 없는 측면이다.

책임은 심판 날에 마침내 드러날 것이다.

재판을 거치지 않고 형을 선고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가 위해하든지 미미하든지에 관계없이

사회적 계급을 무론하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억압적으로 짓눌려서 끓어 엎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에 대한 최후의 존경의 표시로

각자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진술할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렇다 책임은 인간에 있다.

가장 우매한 죄인에게도 일말의 결정 능력은 여전히 있으며,

실로 하나님을 향한 방자한 반항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근거로

책임을 벗어날 없다.

운명이니 형이상학적 구조나

그의 연약한 본성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의 중심인 인간 자신이

자기의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얼버무림으로써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도 죄다.

나치 전범들이 가장 자주 내세우는 변명은

단지 명령만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정은 언제나 동일하게 책임을 그들에게 물었다.

실로 십자가의 본질적인 배경은

인간의 , 책임, 죄책뿐만 아니라

이런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반응

그분의 거룩과 진노도 포함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은 성경적 종교의 기초다.

따라서 죄가 하나님의 거룩과 양립할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그것도 희생의 피를 들고 들어가는 외에는

어떤 사람도 휘장 속으로 들어갈 없었으며

만약 들어간다면 그는 반드시 죽어야 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단을 건너서

언약의 땅으로 들어가려는 때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엄밀한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너희가 사이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언약궤) 가까이 하지는 말라’( 3:4).

웃사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주제넘은 행동의 위험에 관한

분명한 교훈을 배경으로 하여 이해해야 한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피난처와 정결케 됨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말보다도 가장 두려운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것이다.

내게서 떠나가라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평신도 훈련 > 읽어볼만한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흥, 성령의 축제  (0) 2018.05.04
내 마음은 그리스도의 집  (0) 2018.02.02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0) 2017.09.22
네 신을 벗으라  (0) 2017.07.27
교회란 무엇인가?  (0) 2017.05.1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알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그분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할 있도록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일에 동참하게 하시려고

자신의 목적을 계시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

꿈을 꾸는 것은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성취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자신의 길을 계시하십니다.

'평신도 훈련 > 친밀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를 통해서  (0) 2018.04.13
성경을 통해서  (0) 2018.01.12
말씀하신다  (0) 2017.09.08
초청하신다  (0) 2017.07.19
주도하신다  (0) 2017.05.1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책은 많다그러나 존 스토트가 쓴 『기독교의 기본진리』는 그 많은 책들 가운데서도 단연코 으뜸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 책의 초판이 나온 1958년 이래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영문판은 수백만 부가 팔렸으며, 한국에서도 30년 넘게 10만부 이상 팔린 최장기 스테디셀러 가운데 한 권이다그만큼 이 책은 기독교의 복음에 대하여 체계적이며 설득력 있게 쓰여졌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이 책을 통해 훈련생에게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크게 세 가지이다첫째는 기독교가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대하여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둘째는,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셋째는 불신자들에게 기독교를 소개할 수 있는 핵심적인 교리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교리를 배우고 깨닫는데 그치지 않는다끊임없이 믿음의 결단을 요구한다.  이 책을 통해 훈련생들은 기독교의 가장 기본이 되는 교리를 정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진리 앞에서 끊임없이 삶의 결단을 요청을 받게 될 것이다.

 

올바른 접근

저자는 성경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행사하신 창조와 말씀, 그리고 행하심에 대한 진술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영역 중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영역에 본서의 관심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지혜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며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선언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행하셨다는 것도 확언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두 가지 방법으로 주도권을 행사하신 것은 인간의 필요의 특성 때문이다.  우리는 무지하기도 하지만 또한 죄에 빠져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셔서 우리의 무지를 몰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며 직접 행동도 하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기독교에 대한 탐구가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주된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한 일은 기독교 신앙이 기초하고 있는 반석이다.  둘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을 지닌 유일한 분이라는 것이 증명되면 대부분의 다른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가 신이라면 그의 가르침도 사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를 모으는 것이며 우리가 확증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거는 그리스도 자신의 주장과 그가 나타낸 특성, 그리고 죽음에서의 부활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 자신의 주장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뚜렷한 특징은 그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가 하신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을 인간의 신앙과 사랑의 합당한 대상이라고 했다.  이러한 직접적인 주장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방법으로도 그는 자신의 신성을 주장하셨다.  죄를 용서하고, 생명을 주고, 진리를 가르치고, 세상을 심판한다는 그의 주장은 하나님께만 속한 일들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무죄성에 의해 뒷받침되며 그 증거는 네 가지이다.  첫째는 예수님 자신의 견해로 그는 자신의 죄를 시인한 적도, 용서를 구한 적도, 도덕적 과오를 자각한 적도, 죄의식을 느끼신 적도 없으셨다고 하셨다.  그가 ‘회개의 세례’를 받은 것 역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였고, 또 자기를 세상의 죄인들과 동일시하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제자들의 견해이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아주 가까이 살면서 자신들끼리는 많은 다툼도 하였지만 자신들에게서 발견되는 죄를 예수님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또한 어릴 때부터 구약의 교리에 젖어 있던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죄의 보편성을 가르치는 구약교리에 의해서도 예수님의 죄를 발견할 수 없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대적들의 견해로 그들은 최소한 예수님에 대한 어떠한 호의적인 편견도 없었고 오히려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제기할 수 있었던 유일한 비난마저도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심문을 받을 때도 언제나 자신의 의롭다함을 주장하였고 빌라도도, 헤롯도, 배반자 유다까지도 그리스도의 무죄함을 시인하고 있다.  넷째는 우리 자신의 평가이다.  우리는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묘사된 예수님의 포괄적인 모습을 통해 그의 무죄성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신성과 일치하는 것으로 그 증거는 네 가지이다.  첫째는 시체가 사라졌다는 사실이며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에 대해 여러 다른 주장들이 존재하지만 어느 하나 만족할 만한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한 것들이다.  둘째는 수의가 헝클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대해 특별히 강조한 사람은 요한으로 그가 직접 경험한 버려진 수의의 모습이 갖는 세 가지 특징은 부활의 진실성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는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부활한 예수님이 10회에 걸쳐 소위 베드로가 말한 ‘택하신 증인’들에게 나타나셨음을 알고 있다.  넷째는 제자들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제자들의 변화는 부활에 대한 그 어떤 증거보다도 귀한 증거일 것이다.  왜냐하면 전혀 꾸밈이 없기 때문이다.  복음서들에 나타나는 사람들과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의 부활로 그들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었다.

 

인간의 상태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가 누구시냐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가 하신 일도 설명하고 있다.  그가 이루신 일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실제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과 우리에게 제공하고 계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게 된다.

 

죄의 실상과 인격

성경은 죄가 보편적이라고 단호하게 밝힌다.  죄는 그 성격에 따라 적극적인 죄인 위반과 소극적인 죄인 결함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러한 죄들은 어떤 도덕적 기준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그 기준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며 자신의 법을 어기고 있다.

 

죄의 결과

죄의 또 다른 측면인 그 결과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로 이것은 죄의 결과 중 가장 무서운 것이다.  인간 최고의 복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죄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단절을 가져오게 된다.  나아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그리스도를 배척하면 영원히 죽게 된다.  둘째는 자기에의 속박으로, 죄는 우리로 노예가 되게 한다.  이는 죄가 내적 부패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범하는 범죄는 내적이고 보이지 않는 병이 외적으로 드러난 증상일 뿐이다.  우리는 내적 타락으로 인해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셋째는 다른 사람과의 갈등으로 이는 죄의 필연적 결과이다.  우리의 자기 중심성은 우리의 모든 행위에 영향을 미쳐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유발시킨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며 구원에는 죄의 세 가지 중요한 결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포함된다.  구원을 가능케 한 방법으로는 첫째,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이고, 둘째, 성령을 주심을 통해서이고, 셋째 그의 교회를 세우심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의 죽음

예수님께서 죄를 위한 제물로 죽으신 사건은 성경의 중심주제이다.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베드로는 첫째, 본으로서 죽으셨고, 둘째, 죄를 담당한 자로서 죽으셨다고 지적하고 있다.  억울한 고난은 그리스도인이 부름 받은 내용의 일부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심으로 본을 보여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  그러나 단순한 본만을 보이신 것은 아니었다.  본에는 속죄가 없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한 결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의 죄를 연결시키고 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분리시켰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다시 하나님께로 복귀시키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고 죄가 없으신 구주께서 범죄 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

'구원'이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말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죄사함과 동의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계획은 첫째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 다음 점진적으로 자기중심이라는 굴레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다른 사람들과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죄사함과 화목함을 얻었으나, 자기로부터의 해방은 성령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의 교제로의 연합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위치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성 자체까지도 변화시켰다.  이러한 내적변화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이 감면되었다.  그러나 죄의 권세가 무너지는 것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해서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은 우리와 하나님은 물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사이도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성령은 몸이 하나 되게, 즉 교회의 연합을 이루게 하신다.  성령의 본질이자 첫째 열매는 사랑이다.  죄는 분리와 분열을 가져오지만 사랑은 연합시키고 화해케 한다.

 

인간이 해야 할 일

기독교 신앙이란 단순히 일련의 제안에 대해 수동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비록 진정으로 그렇게 한다 해도) 아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 즉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맡겨 그를 우리 구주와 주님으로 모셔야 하는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비용을 계산할 것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데는 주는 것과 요구하는 것이 있음을 밝히셨다.  실제로 주는 것이 값없이 제공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구하는 것도 전제였다.  주님께서는 처음 부르신 제자들로부터 그 이후의 모든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동일하게, 깊이 생각한 다음 그들의 모든 것을 바치도록 요구하셨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가장 간단하게 표현하면 ‘나를 따르라’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충성과 더불어, 자기에게서 배우고 자기 말을 순종하며 자기의 목적을 그들의 목적으로 삼으라고 권면하셨다.  그러자면 먼저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죄를 버려야 한다.  회개는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는데 있어서 첫째 요소이다.  둘째는 자기를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모든 행위의 근원인 자기 의지도 부정해야 한다.  삶의 모든 부분을 그리스도의 지배하에 두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공적으로 그리스도를 시인하라는 명령도 받았으며 우리 자신의 삶을 통해 이를 보여주어야 한다.

 

결정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결단을 내려야한다.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결정을 해야 한다.  진정한 믿음은 지적인 믿음을 신뢰의 단호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지적인 확신이 인격적인 의탁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를 영접하면 그는 그의 죽음으로 인한 모든 혜택을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주실 것이며 우리의 삶이라는 집은 그리스도의 관리 하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먼저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비극적인 일이지만 그리스도께 귀를 막고 그의 간절한 호소를 묵살해 버리는 일이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다면 그의 두드리심에 응답하여 문을 열어야 한다.  문을 여는 것은 분명한 행동으로 자신 밖에 할 수 없는 개인적인 행동이자 의도적인 행동이다.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당신은 거듭났을 때 이미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에는 특권과 책임이 뒤따른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 태어난 사람의 독특한 특권은 그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는 우리도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인 그리스도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친밀할 뿐만 아니라 확실하기도 하다.  이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안전한 관계이며 성경은 이 관계가 영원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특권과 아울러 책임을 가지는데 가장 큰 책임은 성장이다.  그리스도인이 성장해야 할 영역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지식이고, 둘째는 성결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이 성장하여 더욱 더 친밀하게 자신을 알기를 원하신다.  성장의 가장 좋은 방법은 매일 성경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이외에도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대한 의무, 즉 충성과 세상에 대해 의무, 즉 봉사와 증거를 가진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갈등을 동반한다.  그리스도께로 도피하여 세상을 무시해 버리거나 세상에 빠져서 그리스도를 잊어버리면 여러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택할 해결책이 아니다.  균형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 안’과 ‘세상 안’에서 동시에 똑같이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결코 어느 하나만을 택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제자의 삶이다.

'평신도 훈련 > 참고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의 항해  (0) 2018.03.23
성령세례와 충만  (0) 2018.01.26
부활의 증거  (0) 2017.08.19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0) 2017.05.10
기독교의 기본 진리 (5-6장)  (0) 2017.02.0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하나님의 음성을 아는 것의 열쇠는 어떤 공식이 아닙니다.

어떤 방법이라서 당신이 따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아는 것은 친밀한 사랑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를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합니다( 8:47).

당신은 다른 어떤 것도 의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올바른 공식도 옳은 방법은 아닙니다.

 

모세의 경우와 같이 불붙는 떨기나무를 본 사람이 또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공식을 숙련공처럼 사용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당신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갖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오직 그분만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어떤 방법이나 공식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에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면

당신은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정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그것이 25년이 되더라도 말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고도 받은 것처럼 얘기하면

당신은 거짓 선지자로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18:21-22).

구약성경에서 거짓 선지자에 대한 벌은 사형이었습니다( 18:20).

그것은 분명히 아주 무서운 벌입니다.

하나님께 말씀을 받는 일을 가볍게 다루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과 친밀한 관계를 갖기 원하십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구할 때,

하나님은 오직 당신이 그분만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주님의 음성 듣기를 배우고

그분의 뜻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당신이 들을 수 있는 열쇠입니다.

'평신도 훈련 > 경험하는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점을 찾기 바랍니다  (0) 2018.04.06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0) 2017.12.22
종을 통해 일하십니다  (0) 2017.08.17
인생을 조정해야 합니다  (0) 2017.05.03
순종할수록 더 알게 됩니다  (0) 2017.01.1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소귀에 읽기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무어라 아무리 말을 해도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의 답답함을 담아내고 있는 말입니다.  혹시 우리는 지금 누군가에게 이런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대상일지 모릅니다.  타인의 말을 들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리더가 없습니다.

 

1. 마음으로 듣고 있는가?

누군가 이야기를 할 때 흥을 돋워 주고 장단을 잘 맞추어 주는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격식을 갖출 필요가 없는 잡담에 있어서는 타인의 말을 듣는 것이 그리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그다지 경청의 기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생각과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이럴 때는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 여부가 그 사람과의 관계의 수준을 결정짓기 까지 합니다.  듣기 방법의 가장 이상적인 단계는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야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으로 듣는 것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상대방을 위해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나의 척도가 아닌 상대방의 척도로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척도란 그 사람 입장에서의 사고방식이나 사물을 보는 관점을 가리킵니다.  자신을 위해 듣는 사람은 자신의 척도만을 가지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오로지저 사람이 지금 하는 말이 내 척도에 맞는 거야, 안 맞는 거야?”라는 생각에만 집착합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위해 듣는 사람은 말하는 이의 척도를 가지고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에 대해 집중합니다.  결국 상대방을 위해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을 바꿔 말하면 상대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을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상대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귀만 아니라 마음도 동원해야 합니다.  “정말 저 사람이 하고자 말이 무엇일까? 어떤 심정으로 이 말을 하고 있을까?”라는 마음이 있어야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2. 듣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

마음을 대해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말하는 상대로 하여금정말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 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몸의 방향, 높이, 그리고 각도가 그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신뢰할 수 있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과 얼굴을 상대 쪽으로 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상대가 열심히 말을 하고 있는데 당신은 다른 쪽에 시선을 두고 있다면 상대는 당신에게저 사람은 내 얘기를 듣지 않는구나!” 라는 좋지 않은 인상을 주고 맙니다.  다음으로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과 얼굴의 높이를 상대와 같은 눈높이에 맞추어야 합니다.  말하는 이보다 눈높이가 너무 높으면 강압적인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눈높이가 너무 낮으면말해서 뭐하나!” 라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상대 쪽으로 약간 기울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자세는 서로 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만약 턱하니 뒤로 으스대는 자세로 듣고 있다면 상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때 닫힌 자세 팔짱을 낀다거나 다리를 꼰다거나 하지 말고 열린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일부러 과장된 미소를 지을 필요는 없지만, 만약 당신의 표정이 경직되어 있거나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다면 상대는 분명 흉금을 터놓고 말을 꺼내기 힘듭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표정이 최상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시선입니다.  시선이 우왕좌왕하면 상대는 당신에게 좋은 인상을 갖지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너무 똑바로 응시한다면 오히려 상대는 말을 꺼내기조차 힘이 듭니다.  중요한 것은 따뜻한 눈길입니다.  당신이 상대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듣고 있다는 것을 얼마나 온몸으로 표시할 수 있느냐가 포인트입니다.  근육을 단련하듯 경청에도 단련이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지만 상대를 향한 따뜻한 마음과 배려하는 자세가 습관이 되면 우리도 듣기의 달인이 될 수 있습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영화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장군과 타냐의 대화 장면이다.

장군은 타냐에게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에

타냐는혁명의 와중이고 거리는 불이 나고 복잡해서

그저 도망치는 중에…”라고 말을 얼버무린다.

그때 장군이헤어진 정말 이유는 무엇이지?”하고 다그치자

타냐는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실토한다.

사실은 아버지가 손을 놓아 버렸어요."

 

이때 장군은 타냐에게 말한다.

내가 사실을 가르쳐 주마.

코마로프는 네 친 아버지가 아니었다.

너의 아버지는 바로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이라도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았을거야.”

 

진짜 아버지와 가짜 아버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짜 아버지는 결코 딸의 손을 놓지 않는다.

진짜 신과 가짜 신의 차이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좇고 있는 세상 명예의 신이나 물질의 신은

조만감에 우리의 손을 놓을 것이다.

 

평생이라는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다 기울였던

그 안개 같은 우리의 우상들은

코마로프가 불붙는 거리에서 어린 타냐를 떼어놓았듯이

얼마 뒤에 우리를 배반할 것이다.

그리고 허무한 우상들을 좇던 우리는 외로운 패배자가 될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그 가짜 신의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E. 스탠리 존스

'평신도 훈련 >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연 속에 계신 하나님  (0) 2018.03.30
미신과 신앙  (0) 2018.01.05
의심에 대한 대답  (0) 2017.08.09
믿음과 이성과의 관계  (0) 2017.07.05
불협화음  (0) 2017.04.1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자주 패배하는가?

기도를 너무 적게 하기 때문이다.

왜 수많은 교회 일꾼들이 그토록 자주 용기를 잃고 낙심하는가?

기도를 너무 적게 하기 때문이다.

왜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불이 타오르지 않는가?

참된 기도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실패의 원인은

은밀한 기도를 하지 않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정말로 기도가 능력이라는 것을 믿는가?”

기도가 세상에서 최고의 능력임을 확신하는가?”

기도가 세상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을 움직인다고 믿는가?”

정말 하나님의 기도 명령에 관심이 있는가?”

기도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들은 여전히 효력이 있는가?”

 

사실 영적생활과 그리스도인의 사역에 있어서 실패들은

모두 기도의 결핍과 부족에 기인한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올바르게 기도하지 않으면, 올바르게 생활할 수 없고, 올바르게 봉사할 수 없다.

얼핏 보기에 엄청나게 과장된 표현 같지만,

성경에 비추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말이 사실인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이나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일은

기도하는 일임을 잊지 말자!

 

그 이유는 기도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우리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주님은 모든 기도 중 가장 놀라운 기도를 하시기 직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강론하면서 약속하셨다.

어떤 사람의 입술에서 이런 약속이 나왔다면 절대로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하신 이는 천지의 주재이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14:12-14)

 

이보다 더 확실하고 명백한 말씀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약속이 이보다 더 중요하고 더 크겠는가?

그 어느 누가, 언제, 어디서 이런 엄청난 것을 제시한 적이 있었던가?

이 약속은 제자들뿐 아니라 당신과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기도는 전능하다.

기도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능케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일을 하신다.

 

무명의 그리스도인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평신도 훈련 > 읽어볼만한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마음은 그리스도의 집  (0) 2018.02.02
그리스도의 십자가  (4) 2017.11.25
네 신을 벗으라  (0) 2017.07.27
교회란 무엇인가?  (0) 2017.05.12
신앙감정론  (0) 2017.04.20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에게 말씀해 오셨습니다.

오늘날은 성령님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성경, 기도, 환경,

그리고 다른 신자들을 사용해서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쓰는가는 하나님의 음성을 아는 열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친밀한 사랑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아는 법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독특한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음을 확신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당신의 인생과 생각을 그분께로 조정할 시기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주실 사명에 걸맞는 인격을 계발시키려고

당신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당신을 준비시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 충분한 시간을 드리십시오.

'평신도 훈련 > 친밀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을 통해서  (0) 2018.01.12
계시하신다  (0) 2017.11.17
초청하신다  (0) 2017.07.19
주도하신다  (0) 2017.05.11
기다리신다  (2) 2017.02.2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앞에서 이끄는 리더에게 리더십이 필요하듯 뒤에서 따르는 이들에게는 따르는 사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리더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지도하려고 해도 따르는 사람의 자세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나 교회의 구성원의 대부분이 리더가 아니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따르는 사람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따르는 이들이 처한 여건이나 상황이 다양한 만큼 따르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자세도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히 리더는 그런 다양한 스타일에 맞추어 리더십을 발휘하게 됩니다.  다음에 제시된 세 가지 스타일은 따르는 이들이 만나게 되는 대표적인 상황입니다.  자신의 상황과 비교해 보면서 따르는 이가 소유해야 할 법칙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1. 도제 (Apprentice)

옛날 장인들이 가진 기술을 그 밑에 있는 도제들이 배우고 연마했던 것처럼 선생이나 지도자가 가진 특별한 기술을 보고 익히기 위해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교회에서는 전도의 중요성은 강조했지만 전도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가르쳐 주지 못했습니다.  물론 구체적인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런 경우 리더는 따르는 자들을 도제로 생각하고 전도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 가르치려 합니다.  이런 상황에 놓인 따르는 이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겸손과 철저함입니다.  선생이 보여주는 것 전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철저함과 함께 선생의 가르침을 얼마나 겸손함으로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합니다.

 

2. 제자 (Disciple)

제자란 선생과 삶을 나누면서 생각과 생활을 일치시켜가며 선생이 계시지 않더라도 그와의 정신적인 교제를 계속 지속하는 위해 노력하는 따르는 이를 말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예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입니다.  그저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서 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을 훈련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리더와 따르는 이 사이에는 삶을 나누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럴 때 따르는 이에게 요구되는 것은 솔직함과 개방성입니다.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개방할 때 그것에서부터 진정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3. 동료 (Comrade)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선생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지만 실제적으로는 함께 배우는 동료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큽니다.  청소년들의 생활은 선생의 가르침보다 함께 지내는 친구들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하는데 성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서로를 통해 배울 수 있다는 열린 마음과 자기를 객관화하는 능력입니다.  동료들과는 흔히 어깨를 겨누게 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장점을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타인의 단점을 드러내기 마련인데, 서로가 서로에게 배움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을 객관적인 기준에서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좋은 학생이 좋은 선생이 되는 법입니다.  훈련이나 연습 시간을 충실히 보낸 선수가 좋은 결과를 만듭니다.  따르는 자의 자세를 바르게 가진 사람이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법입니다.  우리 모두 따르는 이에게 요구되는 겸손과 철저함, 솔직함과 개방성 그리고 열린 마음과 자기를 객관화하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평신도 훈련 > 제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분별하는 법  (0) 2018.03.02
우선순위의 법칙  (0) 2017.12.01
암송의 유익  (0) 2017.07.13
어떻게 읽습니까?  (2) 2017.04.06
관계가 어떻습니까?  (0) 2017.01.19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부활만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것은 없다.  그래서인지 그만큼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하려는 움직임 역시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부활의 증거』는 훈련생은 물론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소책자라 적은 분량이지만,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하려는 여러 주장들에 대해 그 주장이 얼마나 허구이며, 결국 부활이 역사적 사실일 수밖에 없는지에 충분히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훈련생들은 27과에서 부활의 역사성과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 그리고 부활이 가져다 준 축복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부활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감격을 어떻게 다시 회복할 것인가에 대해 배우게 된다.  따라서 이 책 『부활의 증거』는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에 대해 훈련생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 인도자에게는 부활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여러 주장들의 허구를 설명할 수 있도록 돕는 좋은 참고도서가 될 것이다.

 

부활은 우리에게 위안도 주지만 도전도 해 온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활의 메시지를 공격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믿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약 부활이 거짓이라면 즉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 전체가 하나의 사기극이 되고 말 것이다.  반대로 만약 부활이 참이라면 그것은 역사상 최고의 사건이 될 것이며, 우리의 삶은 부활의 의미에 맞게 조정하지 못한다면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부활 기사는 주로 여섯 명의 증인(마태, 마가, 누가, 요한, 바울 및 베드로)이 기록해 놓은 증언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 증언은 초대교회 전체의 증언에 의해 지지를 받는 것이었다.

 

우선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고린도전서의 저작 시기는 주후 52년에서 57년 사이로 인정받고 있다.  둘째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빈 무덤에 관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데 마가복음 역시 시기적으로 매우 이른 문서로 여겨진다.  셋째는 누가로, 그는 제3의 증인인데 우리에게 무덤에 찾아간 일과 그곳에서의 부활모습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상당한 보탬을 준다.  누가의 기록 역시 바울과 마가의 기록과 함께 매우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는 그 증언이 최소한 육안으로 목격한 증인들의 기록으로 사실 그대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활을 반대하는 이론 중 가장 극단적인 설은 그 사건자체를 고의적인 조작으로 간단히 처리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이 조작이 아니라는 증거는 압도적이다.  우선 증인의 수로, 500명가량이 최초의 목격자들로 그중 대다수가 주후56년에도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말한 교훈대로 목숨까지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만약 조작이었다면 이런 음모를 꾸민 사람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또 다른 반대이론은 부활이 전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불가능한 이유는 문서의 기록 시기가 너무 일러서 전설로 발전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부활 사건에 대한 기록에는 전설에 으레 나타나는 어떠한 이야기도 없다.  이들 부활에 대한 반대 이론들은 빈 무덤의 사실 앞에 산산이 와해되고 만다.


빈 무덤에 관한 첫 번째 이론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심리적으로 보거나 윤리적으로 보거나 불가능하다.  설사 소수 인원이 그런 짓을 했다 하더라도 고문을 받을 때나 순교할 때까지도 어느 누구도 ‘불지’ 않았다는 것과 또 교회 내부로부터 그와 같은 소문의 기미조차 전혀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을 볼 때 불가능한 일이다.  둘째는 유대나 로마 당국 혹은 아리마대 요셉이 시체를 치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불합리하고 모호하다.  만약 당국에서 치웠다면 왜 그렇다고 말함으로써 부활의 전파를 미연에 방지하지 않았을까?  만약 유대 지도자들이 치웠다면 자신의 명령에 의해 혹은 로마의 훈령에 따라 시체를 치울 때 동참한 증인들을 불러 세우지 않았는가?  아리마대 요셉이 치웠다는 주장은 더 근거가 없다.  세 번째 빈 무덤에 관한 이론은 여인들이 무덤을 잘못 찾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왜 진짜 무덤을 지적하거나 시체 자체를 제시하지 않았나 라는 질문에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넷째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과 혈액의 유실로 말미암아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즉 기절한 후 매장되었다가 소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의 반죽은 상태에 있던 사람이 소생해 세 명의 여인이 움직이기 힘들게 느꼈던 바위를 굴러 젖힌 후 못 자국 나고 상처 입은 다리로 몇 마일씩이나 걸어갔다는 주장은 도저히 믿기 힘든 것이다.

 

빈 무덤과 관해서 우리는 세 가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사도행전 및 몇몇 서신들의 부활과 관련된 기록에서 빈 무덤에 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빈 무덤에 대한 사실은 그 당시 상식이었기 때문에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도시대에 무덤이 어떤 관심이나 숭배의 장소가 되지 않고 아주 무관심하게 취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시 부활의 사실이 너무 확실했기 때문에 무덤이 무관심하게 취급된 것이다.  셋째는 빈 무덤에는 수의와 수건이 풀어지거나 어지럽혀지지 않고 마치 몸만 그저 살짝 빠져 나가거나 지나가기만 한 것처럼 그대로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또 다른 반대이론은 부활의 목격자들이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서 설득력이 없다.  우선은 오백 명의 군중이, 그리고 좀 적은 수효의 사람들이 여러 경우에 걸쳐 이러한 환상을 보았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다.  또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결코 같은 환상을 볼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 오백 명 모두가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똑 같은 환상을 보았다는 주장은 믿기 어렵다.  또 환상이란 오랫동안 원해 온 어떤 사건과 항상 관계가 있는데 제자들은 부활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슬픔과 좌절 가운데 있었으며 소망 또한 사라진 상태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심령체험은 대개 적당한 시간과 장소에서 발생하는데 부활은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 일어났다.  끝으로 망상적 강박관념은 보통 어느 정도의 규칙성을 가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빈도가 늘거나 줄면서 장기간에 걸쳐 반복되는데 부활은 사십일의 짧은 기간에만 나타났고 그 뒤에는 영원히 중지되었다.  환각을 일으킨 사람 중에 그 누구도 반복현상을 겪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이외에도 부활에 대한 증거는 첫째, 세계 곳곳에 기독교라 불리는 집단이 존재하며 이 집단은 부활의 사건을 그 기원으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당시 안식일에 열광적인 애착심을 보였던 유대인들이 부활의 사건에 근거한 주일제도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부활이 사실임을 증명한다.  셋째는 초대교회의 성공으로 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게 된 것은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넷째는 부활과 최초의 전파 사이에 있는 일곱 주라는 거북스러운 간격으로 조작이나 몽상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각색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섯째는 그리스도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힘과 부활을 예언하셨다는 것도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당시 재판시 혐의도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는 발언 때문이었다.  여섯째, 비통한 마음과 패배감으로 쌓였던 사도들이 무엇 때문에 변화를 받아 세상을 뒤엎고 어떠한 반대에도 끄덕 없는 불굴의 선교사가 될 수 있었는가라는 점이다.  바로 부활의 사건 외에는 없다. 일곱째는 전 세계에 걸쳐 내려오는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기쁨을 발견했다.  결국 개개인에 대한 부활의 궁극적인 증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나름대로 아는데 있다.  왜냐하면 이 점에서 경험의 증거가 역사의 증거를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부활하신 구세주의 약속은 아직껏 유효하다.  ‘보라 내가 문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3:30).

'평신도 훈련 > 참고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세례와 충만  (0) 2018.01.26
기독교의 기본진리  (0) 2017.11.10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0) 2017.05.10
기독교의 기본 진리 (5-6장)  (0) 2017.02.02
기독교 신학개론  (0) 2016.11.0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엘리야는 850 1이라는 숫적인 열세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가 제시한 대로

번제물과 제단을 불로 태워주심으로

자신의 역사를 보여주시지 않았다면

엘리야는 완전히 실패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마도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제단을 보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했을

자신의 발의해서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으로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행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엘리야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확인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대로 반응했습니다.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렸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리셨습니까?

물론 하나님이시죠.

그럼 엘리야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에게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만한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만이 하실 있는 일을 하시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종을 통해서

일을 하셨습니다.

'평신도 훈련 > 경험하는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0) 2017.12.22
어떤 공식이 아닙니다  (0) 2017.10.27
인생을 조정해야 합니다  (0) 2017.05.03
순종할수록 더 알게 됩니다  (0) 2017.01.12
함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0) 2016.09.2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하나님께서 태초에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빛이 있게 되었다.

이 얼마나 비이성적이면서도 단순한 일인가?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극히 합당한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매 모두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서지 않았던가?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라는 질문을 연발할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지 못하다.

이성만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해답은

너무나 간단명료하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11:3).

 

-C. H. 맥킨토시-

'평신도 훈련 >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신과 신앙  (0) 2018.01.05
진짜와 가짜  (0) 2017.10.06
믿음과 이성과의 관계  (0) 2017.07.05
불협화음  (0) 2017.04.13
신념이 강한 사람  (0) 2017.02.09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살았던 그 당시에는 조롱과 비방을 당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요한 웨슬리다.

 

그와 그의 동생 찰스와 조지 휘트필드는

영국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혁명을 막는 사람들이라고

현대 역사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웨슬리의 설교는 압제를 받으며

힘없이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소망을 가져다주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성직자들은 그를 이단이라고 불렀고

교회 밖으로 내쫓기도 했다.

그에 대한 온갖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도는가 하면

그는 온갖 죄목에 붙여져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정부와 사회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주도로

그를 반대하는 책과 전단이 나돌았다.

 

또한 그는 수십 번이나 그를 반대해서 일어난 폭도들에 의해 죽을 뻔하였다.

웨슬리는 이와 같은 것을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즉 자신이 그 사역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하루는 웨슬리가 말을 타고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며칠 동안은 아무런 핍박도 당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어느 한 사람 벽돌이나 계란을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곧 말을 멈추고 내려와 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부르짖었다.

“하나님, 혹시 제가 죄를 짓고 타락한 것이 아닙니까?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보여 주십시오!”

 

그 반대쪽 울타리 한쪽 끝에서 그 기도를 듣고 있던 한 사나이가

그가 바로 웨슬리임을 알아보았다.

“잘 됐군, 저 감리교 목사를 내가 손을 좀 봐야겠어!”

그는 벽돌하나를 집어 웨슬리에게 던졌다.

벽돌은 웨슬리를 살짝 빗겨갔다.

그러자 웨슬리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 괜찮았군요. 제가 아직도 당신의 임재하심 가운데 있었군요.”라며

펄쩍 뛰며 좋아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벽돌을 던진 지 얼마나 되었는가?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당신이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따르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로렌 커닝햄 『네 신을 벗으라』

'평신도 훈련 > 읽어볼만한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의 십자가  (4) 2017.11.25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0) 2017.09.22
교회란 무엇인가?  (0) 2017.05.12
신앙감정론  (0) 2017.04.20
부흥론  (0) 2017.03.2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에 함께 참여하도록

그분의 사람들을 초청하시는 일을 주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 일하시지

우리 계획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이미 일하고 계셨던 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적인 안목을 뜨이게 하셔서

자신이 어디서 역사하고 계신지를 보여 주는 것이

그분께 동참하라는 초청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볼 때,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인 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보여주시는 순간이

당신의 삶을 하나님께로 조정하기를 원하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이 목적하신 일은

하나님이 스스로 완수하실 것임을 보증하십니다.

'평신도 훈련 > 친밀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시하신다  (0) 2017.11.17
말씀하신다  (0) 2017.09.08
주도하신다  (0) 2017.05.11
기다리신다  (2) 2017.02.23
일하고 계신다  (0) 2016.12.2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제자훈련에 있어서 성경 암송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집니다.  그 이유는 훈련을 받는 기간에 닥치는 영적 고통과 일반적 삶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7장2-3절에 보면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 판에 새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눈동자처럼, 손가락에 매여 그리고 마음 판에까지 새기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암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 암송은 상상을 초월하여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 암송은 그 성경구절이 필요한 상황이 닥쳤을 때 마음에 기억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성경구절을 암송해두지 않아서 문제 해결의 기회를 놓치고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한 경험이 없지 않으십니까? 성경 암송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여러 가지입니다.


1.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유익을 가장 먼저 체험하고 누린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은 매번 성경말씀을 선포하심으로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마4장).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것은 그 분은 성경을 암송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시험을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2.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인생의 모든 삶의 여정은 순간순간의 결정의 기로 앞에 놓여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의 기로 앞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119:105).  다윗의 고백은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내 인생의 최선을 선택하게 하는 좋은 가이드가 될 수 있습니다.


3. 약할 때 강하게 하십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 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시119:49-50).  당신이 긴장해있거나 불안할 때 그리고 약해져 있을 때 당신의 머리 속에 암기 되어 있는 성경구절이 어떤 능력을 발휘하십니까?   이사야 40장31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시는 원천이 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을 강하게 하십니다.  연약한 모습으로 두지 않으십니다.


4. 슬플 때에 위로가 됩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15:16).  이 말씀을 표시하고 기억하십시오.  만약 당신의 책꽂이에 꽂혀있을 뿐인 성경책은 당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분명 인생에 대한 모든 해답이 그 속에 있지만 그 성경을 당신 자신의 삶 속으로 초대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저 또 다른 한 권의 책에 불과할 뿐입니다.  성경을 더 많이 마음속에 담아두십시오.  보다 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5. 전도의 도구가 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어떤 이가 당신에게 묻습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성경은 뭐라고 말하나요?”  혹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할 때 암송해 둔 성구가 참으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훈련받는 자에게는 언제나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순종” 입니다.  훈련을 지도하는 리더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훈련받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 판에 새기라” 성경암송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갑절의 은혜와 영적인 축복이 날마다 넘쳐날 것입니다.

'평신도 훈련 > 제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선순위의 법칙  (0) 2017.12.01
법칙이 있습니다  (0) 2017.08.25
어떻게 읽습니까?  (2) 2017.04.06
관계가 어떻습니까?  (0) 2017.01.19
관계에서 성장하십시오  (0) 2016.11.10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믿음과 이성과의 관계는

마치 한 개의 끈으로 연결된

두 개의 두레박의 관계와 같다.

그래서 한쪽이 올라가면 다른 한쪽은 내려온다.

즉 믿음이 보다 더 높이 올라가면

이성은 보다 더 낮게 내려온다.

 

또한 이성이 보다 더 높이 올라가면

믿음은 보다 더 낮게 내려온다.

이성이 믿음을 앞서가면

그 이성은 믿음을 약화시키고 감소시킨다.

 

루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만약 믿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왜’라는 의문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무엇 때문에’라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이성만 가지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신기하게도 믿음 안에서는 해결되기 때문이다.

'평신도 훈련 >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짜와 가짜  (0) 2017.10.06
의심에 대한 대답  (0) 2017.08.09
불협화음  (0) 2017.04.13
신념이 강한 사람  (0) 2017.02.09
어제와 내일과 오늘  (0) 2016.11.17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모든 신앙인이 하나님의 백 성이다.

교회를 성직화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명약관화하거니와,

교회는 결코 어떤 특정한 계급,

또는 신분이나 교회 내의 특정한 당국

또는 관료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교회는

온 하나님의 백성이요,

온 에클레시아이며,

온 신앙인 공동체이다.

모두가 선택된 백성이며,

왕다운 제사장이며,

거룩한 백성이다.

 

이 하나님의 백성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이 의롭게 되었으며,

성령에 의하여 성화된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두가 교회 안에서 동등하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백성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통하여

믿고 순종하며,

완전한 사랑으로 헌신하라는

요구를 받은 사람들이다.

 

어떤 의미에서도 모두가 교회 안에서 동등하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 안에도 구별은 있고,

또 그것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기본 동등성이다.

 

한스 큉 『교회란 무엇인가』

'평신도 훈련 > 읽어볼만한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0) 2017.09.22
네 신을 벗으라  (0) 2017.07.27
신앙감정론  (0) 2017.04.20
부흥론  (0) 2017.03.23
귀신들림 • 점술 • 강신술  (0) 2017.02.1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당신 안에 개발시켜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도록

당신을 준비시킵니다.

당신의 관심이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 목적

그리고 방법들이 초점 맞춰져 있는 것이 핵심입니다.

다른 어떤 관심도

당신을 잘못 인도할 것입니다.

죠지 뮬러와 같이

당신의 뜻이 온전히 없어지는 단계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어떤 일보다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당신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당신을

그분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초청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하나님을 위한 꿈을 꾸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며,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당신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평신도 훈련 > 친밀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씀하신다  (0) 2017.09.08
초청하신다  (0) 2017.07.19
기다리신다  (2) 2017.02.23
일하고 계신다  (0) 2016.12.22
순종하는 것  (0) 2016.08.25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제자훈련 2권6과를 통해 훈련생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역사적 사실이며, 왜 우리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지를 그리고 영원하고 완전한 효력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을 회복하고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삶과 인격의 변화에 대해 결단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하나하나 밝히며, 이러한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촉구하고 있는 맥스 루케이도의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는 2권6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미국 내 최고의 크리스천 작가로 세 번이나 선정된 맥스 루케이도의 단순 명쾌한 문체와 시적인 언어, 영적인 안목과 통찰력을 함께 만나볼 수 있는 이 책은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가 주는 참된 의미를 우리에게 일깨워 줄 것이다.


교만과 탐욕으로 얼룩진 우리도 사랑을 표현하고자 선물주기를 좋아하는데 순전하고 온전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즐겨하시겠는가?  하나님의 모든 선물은 그분의 사랑을 잘 드러내지만 십자가의 선물만큼 그분의 사랑을 잘 드러내 주는 선물은 없다.  십자가의 선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분은 단지 피를 흘리기만 하면 되셨다.  그러나 그분은 더 많은 것을 하셨다.  십자가의 언덕에는 하나님의 선물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 선물들은 바로 당신을 위한 것이다.  채찍질은 군병들이 십자가에 행한 첫 번째 일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세 번째 일이었다.  명령에 따랐던 것이기에 이 두 행동에 대해서 군병들을 탓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딴 생각이 있었고 예수님에게 침을 뱉었다.  침 뱉음이란 영혼에 수치를 주기 위한 행동으로 군병들이 뱉은 침은 우리 마음의 더러움을 상징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우지 않으시고 그것을 십자가로 가지고 가셨다.  죄인들에게 성인의 얼굴을 주시려고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얼굴을 취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 중 가장 멋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아는가?  다시 말해 성육신의 가장 놀라운 부분이 무엇인지 아는가?  시공의 무한성을 포기하신 것도 놀랍지만 자신의 무죄를 항변하지 않고 죄를 받아들인 것이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이다.  그리스도의 이마에 얹힌 가시면류관은 그분의 마음을 찌른 우리의 죄의 열매를 상징하는 것이다.  무죄한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천국의 면류관을 버리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다. 바로 당신을 위해서 군병들이 예수님을 땅바닥에 쓰러뜨린 후 예수님의 양팔을 벌려 손에 대못을 대고 망치를 들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제지하지도 저항하지도 않으셨다.  십자가 옆의 무리는 그리스도의 손을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기 위해 망치질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것은 우리들의 죄의 목록이었다.  망치 자루를 쥐고 있던 손은 로마 보병의 것이 아니었다.  망치를 내리치던 힘은 성난 폭동의 것이 아니었다.  사형 선고는 시기하는 유대인들의 결정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친히 못을 택하신 것이다.  우리의 죄를 자신의 희생으로 가리고 피로 덮기 위해서 그분은 못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고 그렇기에 못을 택하셨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그 손으로 당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로마인의 명령에 따라 3개 국어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진 죄 패가 있었다.  이 죄 패에는 온 세상에 다가가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망에 대한 두 가지 진리를 담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사용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죄 패를 통해 유대인들을 위협하고 조롱하려던 것이 빌라도의 의도였지만 하나님은 다른 뜻이 있었다.  빌라도는 자신도 모르게 천국의 서기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죄 패에 받아 적었던 것이다.  그 죄 패로 인해 즉각적인 열매가 맺혔고 십자가 위의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고백하였다.  둘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못할 언어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지나가는 사람들은 죄 패를 읽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하신다.  때로는 풍요의 언어로 때로는 궁핍의 언어로, 때로는 아픔의 언어를 사용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갈보리 십자가 옆에는 두 강도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두 강도는 공통점이 너무 많았다.  동일한 법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동일하게 사형을 선고 받았다.  동일한 무리에 둘러싸였으며 동일한 예수님과 동일한 거리를 두고 달려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분을 욕하는 길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은 그분께 기도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한 사람이 기도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구해주셨고, 다른 사람이 그분을 욕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냥 두셨다.  그분은 그에게 선택권을 주셨고,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길은 ‘비아 돌로로사’ 즉 슬픔의 길이다.  전통에 따르면 예수께서 빌라도의 뜰에서 갈보리로 가신 길이 바로 그 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길은 빌라도의 법정이 아니라 천국의 뜰에서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우리를 찾아 하늘의 집을 떠나시던 날 그 여정은 시작되었다.  그분의 뜻은 오직 하나, 자녀들을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성경은 이 여정을 화목하게 하심이라는 한마디로 표현했다.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온갖 고초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했다.  한걸음 나아가 그분을 대적했으며 원수가 되기까지 했다.  교만은 우리를 넘어지게 했으며 수치는 넘어진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초청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기다리신다.


성경은 우리의 행실을 우리가 입은 옷으로 표현하곤 한다.  예수님의 성품은 그분의 옷처럼 솔기가 여기저기 이어 붙인 데가 없었다.  그분은 자신이 입으신 옷처럼 나누어진 데 없이 온전하셨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리스도는 이 솔기 없는 완전한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으셨다.  수치의 옷을 입으셨다.  벌거벗음의 수치, 패배의 수치, 죄의 수치, 그분은 이음매 없는 순결의 옷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 교만과 탐욕과 이기심으로 누덕누덕 기운 우리의 추한 옷을 대신 입으셨다.  비록 우리가 죄의 옷을 입고 십자가 앞에 왔지만 떠날 때는 예수님께서 친히 내어주신 그분의 옷을 입고 떠난다.  그리스도 그분을 입고 떠난다.  예수님의 몸은 찢기셨다.  채찍질에, 가시에, 십자가의 무게와 못의 구멍으로 찢기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인 휘장을 찢어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 놓았다.  처참하게 찢긴 그 몸을 통해 영광의 문이 열린 것이다.   찢어진 휘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자신과 지성소 사이에 더 이상 장벽이 없음을 뜻한다.  우리에게는 이제 언제 어느 때든 자유롭게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와 하나님을 갈라놓던 죄의 장벽을 그분이 제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시 장벽을 쌓아 올리려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찢어진 육체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당신은 다시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  십자가를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왜 십자가에서 목마르셨을까?  그분은 목말라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셨다.  못 박히시기 전에 누군가 마실 것을 드렸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받지 아니 하셨다.  왜 그러셨는가?  당신도 아픔을 느끼리라는 것을 당신도 목마르다는 것을 그분은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자리에 서 보셨기에 당신의 마음을 아신다.  그분이 이해하시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분께 갈 수 없지 않은가?  그분이 이해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는가?  포도주 적신 해융에 담긴 예수님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나를 믿어도 좋다’  위치적 성화는 우리를 위해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며, 점진적 성화는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과 피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은 이러하다.  피는 당신을 위해 내주신 하나님의 제물로서 당신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없애 준다.  물은 당신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구원 안에서 당신을 자라나게 한다.  세월이 간다고 처음 구원 받은 날보다 더 구원 받은 자가 될 수는 없지만 구원 안에서 자라갈 수 있다.  피는 받아들이지만 물은 간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원은 받고 싶지만 변화는 원하지 않는다.  물은 받아들이지만 피는 간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를 위해 바쁘지만 그리스도와 화목한 관계를 이루지 못했다.


그분은 어떻게 공의와 자비를 둘 다 지킬 수 있으실까?  어떻게 진리와 긍휼을 함께 베풀 수 있으실까?  죄를 용납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죄인을 구원할 수 있을까?  우리의 관점으로 볼 때는 별 설득력 없는 해답 두 개밖에 없다.  그러나 그분의 관점으로 보면 세 번째 해답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신의 기준을 낮추지 않으면서 그 자녀들을 용서하는 곳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 아들에게 옮겨 놓고 십자가에서 그 죄를 벌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간음죄를 범한 다윗도, 살인범 바울도, 배반자 베드로도 그 한계를 찾지 못했다.  삶에 관한 한 그들은 바닥까지 내려갔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바닥이 없으시다.  우리는 누구나 비극을 만나며 비극의 상징물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들조차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신다.  요한에게 예수님의 죽음보다 더 큰 비극적인 일은 없었다.  그러나 빈 무덤에 도착한 요한은 그 죽음의 옷자락에서 생명의 능력을 보게 된다.  수의처럼 슬픈 것을 사용하셔서 요한의 삶을 바꾸신 것이다.  그분의 손안에서 결혼식장의 빈 포도주 항아리는 능력의 상징이 되며, 과부의 동전은 아낌없이 드림의 상징이 되며, 베들레헴의 볼품없는 구유는 헌신의 상징이 되며, 사형의 도구는 그분의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분은 죽음의 옷을 취해 생명의 화신을 삼은 것이다.


엉터리와 아이러니. 갈보리 언덕은 그 둘을 빼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라면 구속의 드라마를 그렇게 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부탁을 받지 않았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하시고 명하신 것이다. 그분은 그 시간의 각본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있다.   이 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당신의 삶의 십자가가 되려면 당신은 그 언덕에 뭔가를 가져와야 한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버리신 것을 보았다.  당신도 뭔가를 내려놓지 않겠는가?   당신의 나쁜 순간들, 화난 순간들, 불안한 순간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 밑에 내려놓아라.  그렇다면 당신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좋은 순간들만 남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 우연히 발생한 사건은 하나도 없었다.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들은 절대 우연에 맡겨지지 않았다.  하나님이 길을 고르셨다.  하나님이 못을 택하셨다.  우리 주님이 세 개의 십자가를 꽂으셨고 죄 패를 써 붙이셨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세부사항, 하나님의 주권이 그 일보다 더 철저히 나타난 적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중하게 바로 이 메시지를 남기셨다.  “내가 너를 위해 한 일이다. 다 너를 위해 한 일이다.”

'평신도 훈련 > 참고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의 기본진리  (0) 2017.11.10
부활의 증거  (0) 2017.08.19
기독교의 기본 진리 (5-6장)  (0) 2017.02.02
기독교 신학개론  (0) 2016.11.03
오직 한 길  (1) 2016.06.1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누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냈습니까?.

모세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데 쓰시기 위해 모세를 선택하셔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했던 적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출애굽기 2장 11-15절을 읽어보십시오.

모세가 자기 민족을 위한다고 스스로의 방법을 주장했습니다.

만일 모세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구원하였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마도 수천 명의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손으로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그 대가로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40년간 목자 생활을 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자기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출하셨을 때

몇 명의 인명 피해가 있었습니까?

단 한 명도 없었지요.

구출하시는 과정에서 오히려 애굽인들로 하여금 금, 은, 의복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도록 하셨습니다.

애굽은 빼앗김을 당했고,

군대는 파멸 당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단 한 명의 인명피해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방법이 언제나

최상의 방법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에

종종 교회에서 실수와 실패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겨우 계획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라는 몸의 머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머리가 되시도록 하면

얼마나 놀라운 변화를 맛보겠습니까?

그분은 우리가 60년에 걸쳐서 할까 말까한 일을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6개월도 안 걸려 끝내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우리를 통해서 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종이 아니시기 때문에

우리의 계획에 맞춰 변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므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려는지에 따라

우리 인생을 조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순종치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혹은 우리를 통해 하기 원하시는 일을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평신도 훈련 > 경험하는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공식이 아닙니다  (0) 2017.10.27
종을 통해 일하십니다  (0) 2017.08.17
순종할수록 더 알게 됩니다  (0) 2017.01.12
함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0) 2016.09.22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0) 2016.06.30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게 있었던 것과

똑같은 기질과 정신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뼈이며,

진정 그리스도와 한 영이라면 말이다(고전 6:17).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의 영혼에 찍는 그리스도의 표식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상과 이름을 새겨서

그리스도인들의 이마에 찍은 그리스도의 도장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른다(마 11:28-29).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온유와 평온과 사랑과 기질로 옷 입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리스도께서 전가하신 의로 옷 입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장식되어 있다(롬 13:14).

위대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는 스스로가 어린 양이며,

성도들 역시 어린 양이다.


이런 미덕들은

그리스도인의 심령의 본성이거나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들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본성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미덕들의 독특한 본성을 상징하시려고

비둘기를 택하셨다.

가장 적절한 상징은

사물의 독특한 본성을 가장 잘 나타내 준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기름부음을 받으실 때,

성령이 그리스도께 비둘기 같이 내려오셨다.

비둘기는 온유, 무해함, 평화

그리고 사랑의 탁월한 상징이다.

그런데 교회의 머리로 내려오신 성령은

그 지체들에게도 똑같이 내려오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영을

그들의 마음 가운데 보내셨다(갈 4:6).

만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9).

신비스러운 몸과 머리와 지체들에게는 한 영이 계신다(고전 6:17, 엡 4:4).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요 20:22).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비둘기처럼 내려오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는다(요일 2:20, 27).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는다.

그것은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그 옷깃까지 내림과 같다.

양자의 경우 모두 그것은 평화와 사랑의 영이다.


참된 성도를 구별하는 표지로서

신약성경이 가장 자주 명백하게 제시하는 것은

사랑의 미덕과 성향이다.

이런 성향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고,

자신들도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제자인지를 알게 해주는

특별히 뚜렷한 표지로서 종종 제시된다.


참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 양 같은,

비둘기 같은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성경이 매우 충분하고

분명하게 많이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본질적이며 탁월하게

복음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의 본질이며,

참된 기독교의 본질적인 정신임을 보게 된다.

성경은 야비하고, 이기적이며, 싸움을 즐기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까다롭고, 무정하며, 인색하고, 교만한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일수 있다는 것보다 터무니없는 생각은 없다.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감정론』

'평신도 훈련 > 읽어볼만한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 신을 벗으라  (0) 2017.07.27
교회란 무엇인가?  (0) 2017.05.12
부흥론  (0) 2017.03.23
귀신들림 • 점술 • 강신술  (0) 2017.02.16
성령과 그의 권위  (0) 2016.12.29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음이란 맞아도 좋고 맞지 않아도 재미있다.”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위자인 카라얀의 말이다.


오케스트라일 경우,

다른 음과 맞지 않거나 시간을 맞추지 못해

화음이 안 되게 연주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

그러나 이럴 때 성급하게 다른 음과 맞추게 하려고 한다면,

그는 유능한 지휘자가 아니다.


때로는 그 사람이 연주한 음이 다른 음보다 뛰어나 있어

고쳐야 할 것은 오히려 다른 대부분의 연주자일 경우도 있다.

음이 맞지 않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재미있는 결과를 가져올 경우까지 있다.

요즘 유행하는 음악인 모던 재즈가 그중에 하나다.


처음부터 모든 음이 완전히 맞아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경계해야할 일이다.

한바탕 부딪혀 봐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모든 연주가

그 문제에 주의하고 더욱 생각하게 되어

조금씩 발전해 갈 수 있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온전치 못한 이 세상에는

언제, 어디서나 불협화음이 있게 마련이며,

오히려 그것이 이 세상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디딤돌이 된다.

그러나 모든 음이 완전히 맞게 되면,

더 이상의 진보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실수를 전혀 하지 않게 되면,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실수를 자극제로 삼아 자기 진보의 디딤돌로 만들어라.

사람은 실수를 통해 성장할 수 있다.


-리차드 W. 디한- 

'평신도 훈련 >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심에 대한 대답  (0) 2017.08.09
믿음과 이성과의 관계  (0) 2017.07.05
신념이 강한 사람  (0) 2017.02.09
어제와 내일과 오늘  (0) 2016.11.17
진정한 승리  (0) 2016.08.04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홍수로 인하여 하수들이 넘쳐흐르는 날에는 물은 많은데도 오히려 마실 물이 없습니다.  흙탕물과 구정물이 샘물(谷泉)을 덮쳐서 맑은 물을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에도 지식의 홍수, 정보의 홍수, 미디어의 홍수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맑은 생수가 솟아나는 샘터가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홍수의 시대에 어떤 물이 맑은 샘물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런 혼탁한 때에 맑은 샘물을 찾는다면 바로 진리가 살아 숨 쉬는 그리고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번 주에서는 맑은 샘물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성경은 매일 읽어야 합니다.

신명기 17장19절에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있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매일 매일 읽기를 원하십니다.


2. 조직적으로 읽으십시오.

당신이 좋아하는 부분만을 읽지 마십시오.  성경은 모두 읽어야 합니다.  어떤 이는 시편, 잠언, 사복음서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서 하박국 선지자가 “제 글이 어땠나요?” 하고 묻는다면, 성경에 당신의 글이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대답하면 그 선지자는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성경은 전부 읽어야 합니다.  마치 편지를 마지막 부분부터 읽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어야만 합니다.


3. 소리 내어 읽으십시오.

눈은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데 마음은 엉뚱한 곳에 가 있는 경험이 있으십니까?  이런 경험들 을 많이 해 보셨을 겁니다.  해결법은 소리 내어 읽는 것입니다.  소리 내어 읽을 때는 마음이 도망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4. 줄을 치면서 읽으십시오.

약속의 말씀은 파란색으로, 예수님의 말씀 혹은 그 분에 관한 것은 빨간 색으로, 성령님에 관한 것은 초록색으로 칠하면 새로운 시각으로 성경 읽는 기쁨이 더 해지실 것입니다.


5. 계획을 세우고 읽으십시오.

좋은 습관을 만드는 것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성경 읽는 습관을 가지는 것 역시 신앙생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훌륭합니다.  습관은 계획을 세우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렇기에 훈련 교재 안에 있는 성경 읽기 표를 이용하신다면 성경 읽는 습관을 만드는 데에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또한 다른 계획으로는 하루에 15분간 성경을 꾸준히 읽는 것입니다.  통계상으로 하루에 15분간 성경을 읽으면 1년에 성경 일독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유능한 배우일수록 시나리오를 자주 읽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과신하지 않습니다.  연출자의 의중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리고 연극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전달하기 위해서 자주 읽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성경을 꾸준히 읽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어떤 일을 하기 원하시는 가를 깨닫기 위해서 입니다.  훈련기간 동안 하나님이 왜 나를 훈련 받게 하시는가 그리고 훈련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하여 성경 읽기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평신도 훈련 > 제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칙이 있습니다  (0) 2017.08.25
암송의 유익  (0) 2017.07.13
관계가 어떻습니까?  (0) 2017.01.19
관계에서 성장하십시오  (0) 2016.11.10
커트라인이 없습니다  (0) 2016.07.07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우리는 인간의 신체에 나타나는 어떤 영향력들

즉 눈물, 경련, 신음, 고함소리, 육체적 고뇌,

또는 기력의 소진 같은 것으로

그 역사가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신체에 나타난 그런 영향을 보고

사람들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아무데에서도

우리에게 그 기준을 말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런 외적 양상을 보고서

그 사람들이 성령의 영향 아래 있지 않다고 결론지울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성경에는 그런 신체상의 영향들을 배제하라는

영분별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문제에 대해 큰 소동이 일어나고 잡음이 많이 들린다고 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난 어떤 역사가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는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창세 이후로 어떤 일에서건

대대수의 사람들이 크게 감동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소란이나 소동이 없었던 적이 있을까요?

인간의 본성상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이들은 열광주의자들이 받은 인상들이

그들의 신체에 영향을 크게 미치곤 했다는 이유로

신체에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을 반대합니다.

퀘이커 교도들이 몸을 떨곤 했다고 해서

바울이 된 사울과 빌립보의 간수가 떨었던 것이

양심에 죄를 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크건 작건 신체에 미치는 영향들을 반대하는

모든 반박은 너무 경솔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반박하는 사람들은 어두움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논거도, 기준도 알지 못합니다.


오늘날 목사들은 하나님이 부흥을 일으키시는데 있어서

자신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 다른 목사들에 대해

시기심을 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시기심 때문에 참 성령을 소요한 설교자들을

마치 거짓 영의 영향을 받았거나

이성을 잃고 미쳐 버린

교만하고 가식적인 위장꾼들이며,

평화의 파괴자들로

감옥이나 족쇄에 갇혀 마땅한 자들인 것처럼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면서도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것은

부흥이 자신들의 육신적인 마음에

소중한 어떤 것을 건드리기 때문이며,

또 부흥이 자신들로 하여금 잘난 체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자신들에게서 정욕의 대상들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라사인들처럼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자기들 지역에 오셔서

그분의 영광스런 능력과 은혜를 발하심으로

군대 귀신을 물리치시고

오랫동안 군대 귀신의 포로가 되었던

가련한 사람을 구원하셨을 때

모두 경악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로 자신들의 돼지를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의 모든 무리가 와서

그리스도께 자신들의 지경에서 떠나 주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자신들의 더러운 돼지를 더 사랑했습니다.

자기 동네에 군대 귀신이 들어 있는 돼지 떼를 가지는 것이

그것들 없이 그리스도를 가지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부흥의 흠집들을 계속 열거하고 지적함으로써

부흥 속에 있는 선하고 영광스러운 것들보다

결함을 지적하기에 급급하다면

우리는 주의 일을 돕기 위해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님을 대적해 싸우는 셈이 될 것입니다.


신실하지 못한 목사들에 대한

무서운 심판이 집행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들만큼 하나님의 심판을 크게 받게 될 사람은

세상에서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그 일을 그리스도께 맡겨 두어야 합니다.

그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자요

원수 갚는 것은 그에게 속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손에서 채찍을 빼앗아 휘두르는

주제넘은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부흥론』

'평신도 훈련 > 읽어볼만한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란 무엇인가?  (0) 2017.05.12
신앙감정론  (0) 2017.04.20
귀신들림 • 점술 • 강신술  (0) 2017.02.16
성령과 그의 권위  (0) 2016.12.29
목사와 설교  (0) 2016.09.0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그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셔서

당신과의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를 추구하십니다.

그 사랑의 관계를 사실적이며 개인적이며 실제적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는 어떤 일보다도,

당신의 전 존재를 받쳐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당신을 창조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올바로 되어 있지 않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행하고 경험하는데 관련된

모든 것이 엉망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 어떤 사명을 받고 있음을 느낄 때,

사랑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하나님은 사명을 주시기 전에

당신이 관계로의 초청에 응하기를 기다리실 것입니다.

'평신도 훈련 > 친밀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청하신다  (0) 2017.07.19
주도하신다  (0) 2017.05.11
일하고 계신다  (0) 2016.12.22
순종하는 것  (0) 2016.08.25
종으로 사는 것  (0) 2016.06.2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무지는 넘어지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입니다.

악의 권세들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순수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악의 희생물이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들을 확인하고 시험해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


우리는 영들도 두 가지 부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첫째로, 지금도 성령님과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 천상의 권세들입니다.

그 다음으로, 악의 권세들과 악한 영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정말 가공할 힘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마귀는 스스로를 ‘빛의 천사’로 변형시킬 수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고후 11:14)

마귀는 그 정도로 교활하며 교묘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사교(邪敎)의 가르침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단들은 항상 언제라도 자신들의 사상을 주입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런 악의 권세들에게 대하여

아는 것이 중요성을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적 호기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본질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딤전 4:1)


점성술과 강신술,

여러 다양한 사교와 거짓 가르침과

마귀의 교리들에 대한 주목할 만한 관심이 부흥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저들의 표적들이 됩니다.

그들의 외관은 너무 그럴듯하고 너무나 가식적이며,

마치 우리의 친구들인 것처럼 나타나서,

우리의 영혼들과 기독교인의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데

한몫 해주려는 듯이 보입니다.

바로 그 점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무엇인가 알아야만 한다는

긴박성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모른다면

마귀와 그의 부하들은 자신들을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면서

여러분들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을 것이며,

바울은 그것을 디모데후서 2장26절에서 ‘마귀의 올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희생물 또는 포로가 되어 끔찍한 결과들로 인도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알아야 하며,

이것들에 대하여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전능한 권능으로 강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안전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때에만 지켜지기 때문입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에베소서 6:10-13)


로이드 존스 『귀신들림, 점술, 강신술』

'평신도 훈련 > 읽어볼만한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앙감정론  (0) 2017.04.20
부흥론  (0) 2017.03.23
성령과 그의 권위  (0) 2016.12.29
목사와 설교  (0) 2016.09.01
산상수훈  (0) 2016.08.18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대개 희망은 있어도 

실제 사업이나 일에 손을 뻗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실패 공포증에 걸려있다.


왜 실패를 두려워하는가 하면

그 일을 달성하기까지의 곤란이나 난관을 미리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실패 공포증이나 난관 기피증에 걸린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은 왜 가능한 적극적인 면은 추호도 생각하지 않고

어려운 점만 생각하는 거요.”


어떠한 일이든지 난관이 없는 것은 없다.

그러나 돌파할 수 없는 난관도 없다.

난관 앞에 걸음을 멈추지 말라.

어려운 점만을 헤아리고 있어서는

개인이나 사회나 아무런 발전도 진전도 기대할 수 없다.


사람은 흔히 이렇게 반문한다.

“그 곤란한 경우를 무슨 재주로 극복할 것입니까”하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기 일쑤다.

“신념으로서 극복할 수 있소”


곤란을 돌파하는 데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 바로 무기이다.

사람들은 특별한 재주나 수단을 찾는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재주와 수단이

바로 신념이라는 것을 모른다.

신념이 강하면 어떤 일이든지 충분히 해낼 수 있다.


-노만 빈센트 필-

'평신도 훈련 >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과 이성과의 관계  (0) 2017.07.05
불협화음  (0) 2017.04.13
어제와 내일과 오늘  (0) 2016.11.17
진정한 승리  (0) 2016.08.04
훈련된 그리스도인  (0) 2016.05.19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현대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는 바로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는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간의 죄성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신앙에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는 우리의 죄성을 정확히 파악할 때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2권5과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의 타락과 그 결과”는 훈련생들이 반드시 점검해야 할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존 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 진리』(5-6장)은 2권5과를 공부하는 훈련생들에게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을 통해 훈련생들은 기독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어진 사명이 무엇이며, 불신자들에게 기독교를 소개할 수 있는 핵심적인 교리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그가 누구신가는 물론 우리가 누구인가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실제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사실 죄는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주제다.  그러나 성경 기자들은 죄의 보편성에 대해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이며, 그 성격은 어떠한가?  성경에서는 죄를 설명하는데 몇 가지 단어들을 사용한다.  이 단어들은 그릇된 행위가 적극적인 의미에서 다루어지느냐 아니면 소극적인 의미에서 다루어지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된다.  소극적 의미의 그릇된 행위는 결함이다. 한 마디로 표현해서 그것은 과실, 실수 또는 실책이다.  달리 설명하면 표적을 향해 활을 쏘았는데 표적을 맞추지 못한 것이다.  결국 죄란 선한 것에 미치지 못하는 내적 악함, 성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적극적인 죄는 위반을 말한다.  한 마디로 경계를 넘어선 것이며 불법을 말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정의를 어기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부류의 단어들은 죄와 관련해서 어떤 도덕적인 기준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받아들인다.  그러나 기준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법을 어긴 것이다.  우리의 실패의식은 우리의 기준이 얼마나 높은가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행위 뒤에 있는 생각 즉 그 동기에 있다.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아 모든 인간이 여기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높고 의로운 하나님의 율법만큼 우리의 죄 많음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은 없다.


죄의 또 다른 측면은 죄의 결과이다.  죄의 결과 중 아마도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일 것이다.  인간의 최고의 복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고귀함에 대한 주된 주장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따라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죄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시켰다고 말한다.  죄는 필연적으로 분리를 가져오는데 이 분리란 ‘사망’ 즉 영적사망이요, 유일한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을 의미한다.  죄로 인해 생긴 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는 성경에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체험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 그 분이 아니고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굶주림이 있다.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신문에서 자극적인 뉴스를 요구하고 영화에서 도가 지나친 사랑과 범죄 이야기를 소재로 삼는 것, 수영장과 술집들, 자동차 경주와 오토바이 경주, 마약과 성과 폭력의 난무?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 만족을 찾고 있다는 증거이다.


죄가 가져온 또 다른 결과는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포로가 되게 한다.  죄는 단순히 잘못된 외적 행동이나 습관이 아니라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내적 부패이다.  우리가 속박되어 있는 것은 죄가 인간성의 내적 타락이기 때문이며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악의 오염이다.  결국 죄는 인간성에 뿌리 깊게 내재하게 되고, 우리의 자아를 통제하게 된다.  또 다른 죄의 무서운 결과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다.  죄는 우리를 자기중심적으로 바꾸게 한다.  하나님과의 가르침과는 달리 죄는 우리 자신을 첫째에 두고, 이웃을 둘째에, 그리고 하나님은 뒤 구석 어디에 두게 만든다. 이러한 근본적인 자기중심성은 우리의 모든 행위에 영향을 미치며 그 결과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을 중심으로 적응시키지 못하게 만든다.  만약 자기중심적인 자세를 자기희생의 자세로 바뀔 수만 있다면, 우리의 갈등(부딪힘)은 끝이 날 것이다.  이 자기 희생을 성경에서는‘사랑’이라고 부른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본성의 근본적인 변화이다.  우리의 죄를 폭로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목적 때문이며 이 목적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시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준비시키려는 것이다.  믿음은 필요에서 생긴다.  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께서도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자신의 병의 중함을 깨닫고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치료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평신도 훈련 > 참고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활의 증거  (0) 2017.08.19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0) 2017.05.10
기독교 신학개론  (0) 2016.11.03
오직 한 길  (1) 2016.06.16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0) 2016.03.0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