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당신은 소그룹원들과의 관계가 어떻습니까?

소그룹원들과의 사랑의 관계는 영적 성장의 기초가 됩니다.


제자훈련의 또 다른 성장영역은 바로 대인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서 성장하는 것이 제자훈련의 또 다른 목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좋은데, 대인관계가 건강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건강한 성장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자훈련을 통해서 대인관계의 성장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1. 투명해지십시오.

대인관계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결국 상대방이 나를 알고 내가 상대방을 알아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특별히 개인의 입장에서는 나 자신을 상대방에게 개방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내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상대방이 섬기는 것은 내가 아니라 ‘가짜의 나’가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 자신을 상대방에게 과감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여러분이 개방하는 것과 개방하는 내용이 훈련생들 모두에게 유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벗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2. 민감해지십시오

투명해진다는 것은 내 자신을 상대방에게 열어놓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민감해진다는 것은 상대방의 필요와 상대방 자신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알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상대방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상대방과 친밀감 있는 관계로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투명하지 않은 나 자신이 ‘가짜의 나’ 이듯이 상대방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나에게 허상의 존재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절대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에게 민감해진다는 것은 상대방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수용하십시오.

수용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기 때문에 다르다는 사실 자체는 서로에게 굉장한 존재의 부담이 됩니다.  다른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불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자훈련을 통해서는 우리는 상대방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상대방의 장점과 단점, 상대방의 기질 심지어 상대방의 사회적 위치나 경제적 위치 모두를 비판 없이 그대로 인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수용한다는 것은 사랑의 기초입니다.


4. 갈등을 피하지 마십시오.

어떤 관계이든지 자연스럽게 순탄하게 성장하는 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갈등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갈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입니다.  대부분의 대인관계는 갈등을 어떻게 성숙하고 건강하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그 성장이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갈등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어느 정도의 희생과 손해를 감수해야만 성장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제자훈련 안에서 대인관계의 성장을 경험하고 싶다면 갈등을 피하지 마십시오.  갈등을 해결하려는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하시듯 갈등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 누구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성숙을 이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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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뜻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애굽으로 가기를 원하셨으며

그 결과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이행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땅을 주기 위하여

모세에게 자신의 거룩하심,

자비하심, 능력, 자신의 이름, 목적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많은 핑계를 대면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는 과연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용하셔서

뜻을 이루실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심했습니다.

또한 백성들이 자기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가 사명을 이루기에 충분할 정도로

말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세 가지 경우 모두에서 모세는

자기의 능력을 의심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그는 믿음의 갈등에 접하게 된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그가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무엇을 하시려는지

모세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 계시는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라는 하나님의 초청이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조정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음을 믿고,

그의 직업과 처가를 버려두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삶을 조정한 후에야

그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세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자기 힘으로 혼자 해보겠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이 이미 일하고 계신 곳으로 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크기에 해당하는 일을

당신의 삶을 통해 행하시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그렇게 엄청나고 중요한 일에

자신이 쓰임 받았음을 깨닫고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가를 느꼈을 것입니다.

모세는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은 모세를 쓰셔서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 순종의 단계가 올라감에 따라

모세는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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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문제의 모든 측면 중에서

오늘날 성령의 권위만큼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관심은 우리 주님의 인격과 권위에 쏠려 있다.

물론 성경과 그 권위에도 많은 관심이 쏠려 있다.

그러나 그에 비해 성령과 그의 권위에 대해서는 얼마나 듣고 있는가?


감히 내 의견을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의 어떤 국면도 이와 같이 비극적이리만큼

소홀히 취급되고 잘못 이해되어 온 것은 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이 질문을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할 때,

우리 스스로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사실상 이 질문에서 우리는

오늘날 복음주의자가 가지고 있는 약점의 주된 근원을 다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소홀히 취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 중 하나는 체면과 위엄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이 위엄이란 말은 

내가 볼 때 19세기 중엽에 사용되기 시작한 치명적인 단어이다.

그 세대의 선조들은 큰 신앙적 각성과 부흥의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였다.

그들 자신의 위엄 또는 지위에 대하여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즈음에

이와 다른 사상이 들어와

사람들은 위엄을 갖춘 예배의식의 필요성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목사의 회심이나 성령충만함,

그리고 이에 따르는 영적 통찰력과 권위보다는

목사의 지적훈련이나 지식구비에 더 큰 강조점을 두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일이 행해진 것은

‘위엄을 갖춘’ 형식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한 결과 중 하나는

교회가 점점 형식과 의식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일종의 학문과 지식에 대한 자랑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대중 교육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사람들은

교회를 좀 더 유식한 목회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마치고 대학교에 다니게 되면

‘구식설교’에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한마디로 ‘체면’이란 일반적인 범주에 드는 것으로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을 소멸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와 밀접한 관계된 것으로서

또 다른 이유는 ‘열렬한 믿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리는 지나친 행동이나 감정에 두려움을 품고 왔다.

성령의 역사와 사역을 매우 강조하는 여러 분파나 교단 이야기를 들을 때,

즉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저들은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저들이 하는 행동을 보라.

절제할 줄을 모르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것을 너무 두려워하여

스스로 반대편 극단으로 이끌려 가도록 내버려둠으로써

성령을 소멸하고 슬프게 하는 죄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신이라는 비난이 복음주의자들에게 가해진 적이 있었다.

이러한 비난은 200년 전 조지 휘트필드, 존 웨슬리,

그리고 이들의 추종자들에게 가해졌고,

이들은 끊임없이 감독들과

그 외의 사람들에 의해 ‘광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비난을 염두에 두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이 감정적으로 고양되어,

때로는 거의 자제력을 잃게 되는 것이

마치 근본적으로 잘못되기라도 한 것처럼,

이러한 비난을 두려워하고 겁내는 것 같다.

나는 결코 지나친 것이나 광신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처한 위험은

이러한 것들을 너무 두려운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로이드 존스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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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세상에서 항상 일하고 계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을 구속하려고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시기에

자신이 하고 계신 일을 아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어디서 일하시고 계신지를 보고

그분께 동참했습니다.

당신도 하나님이 어디서 일하고 계시는지를 주시하는

이 동일한 패턴을 따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실 때,

그분의 역사에 동참하십시오.

자기의 영적 은사, 개인적인 욕망, 기술, 능력 혹은 자원의 관심을 두지 말고,

하나님의 사명에로의 초청에 

당신의 관심을 집중시키십시오.

하나님의 사명에로의 초청을 이해하고 나면 순종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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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날,

다시 말해 온갖 두려움과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날은

한 주간 가운데 겨우 이틀뿐이다.


그 이틀 중에서 하루는 ‘어제’다.

비록 실수와 근심, 통증과 고통, 과실과 실책으로 가득 차 있지만

어제는 영원히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세상에 있는 돈 전부를 주고도 어제를 다시 살 수는 없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다른 하루는 ‘내일’이다.

비록 수많은 역경과 짐 덩어리가 기다릴지라도

다른 한편으로 희망찬 약속과 성취가 있다.

그러나 내일도 또한 어제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곳에 있다.

내일의 태양은 휘황찬란한 광채를 발하며 떠오르든,

구름이 가려서 떠오르든 반드시 떠오른다.

그렇지만 내일이 오기 전에

우리는 내일에 관해서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일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단 하루가 남는다.

그것은 바로 ‘오늘’이다.

결국 모든 사람은 오늘의 싸움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오늘의 싸움에서 어떠한 경우에는 쓰러지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제와 내일이라는 장엄한 영원의 시간에

우리가 갖는 모든 마음의 짐을 갖다 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제라는 시간이나 내일이란 시간에 모든 걱정과 근심을 두어

오늘이란 시간을 소홀히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우리는 단지 오늘만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직 ‘오늘’이라는 현실에만 충실하자.


-윌리엄 바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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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훈련의 목표를 분명하게 세우셨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훈련의 목표를 세워보십시오.


제자훈련의 훈련영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두 번째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장하지 않으면 결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올바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에 대해서 아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하게 만들어가려면 무엇보다 상대방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교제하고 관계를 맺는 존재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어떤 친밀감이 나눠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에 하나님에 대해서 충분히 안다고 자신할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묵상하기를 중단해도 될 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연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묵상하십시오.  그래서 그 분에 대해서 더욱 깊이 알아 가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 민감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친밀해지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려고 하고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영적 민감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나님이 지금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런 내적질문을 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민감함은 아니지만 민감함은 항상 이런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의 자산이 됩니다.  여러분의 영적 안테나를 하나님을 향해 펼쳐놓으십시오.  그분의 음성과 뜻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그분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왕이시고 주인이십니다.  여러분의 전인격, 전존재가 모두 그분의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의무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요구하신다고 확신하는 바를 피하거나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분께 순종하십시오.  순종을 부담이나 의무로 여기지 마십시오.  순종은 부담이나 희생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통로요 축복의 열쇠입니다.  순종하십시오.  그 순종은 하나님과의 더욱 친밀한 교제를 만들어줄 것입니다.


4.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를 그대로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그분을 신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계획보다 더 완벽하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의지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나의 노력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에 달려있음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의지하십시오.  그분의 사랑과 약속 안에 거하십시오.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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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큰 일』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은 전체 기독교의 핵심이요 총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구원과 축복은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하심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러한 삼위일체의 교리는 우리의 신앙으로서 고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2권4과 ‘삼위일체 하나님’은 단순한 교리에 대한 지식의 습득이 아닌 훈련생의 신앙고백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  2권4과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신 사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으로 마무리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아래는 2권4과 참고도서인 루이스 벌코프의 책『기독교 신학개론』의 2장 신론 중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에서 발췌한 것이다.


성경은 한 하나님이 삼위(3인격)로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한 분이시나, 이 한 분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는 삼위(3인격)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삼위는 분리된 세 인격이 아니라 신적 본질이 존재하는 세 형태인 것이다.  신적 존재에 있어서의 이러한 자기 구별은 삼위가 서로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신적 본질이 삼위로 분할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삼위는 각자가 완전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전체를 이루고 있다.  그 위들은 그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한 위가 다른 위에 종속되지 않지만 존재의 질서로 보아 성부가 제1위요, 성자가 제2위요, 성령이 제3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순서는 창조와 구속사역에 있어서도 보여 지고 있으며 이들 삼위는 인격적 특성에 의해서 구별된다.


삼위일체의 성경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우선 구약에서는 하나님에게는 1위 이상의 있다고 말하는 구절이 많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자신을 복수형으로 말씀하셨으며(창 1:26; 11:7), 여호와의 사자는 신적인격(위)으로 묘사되었으며(창 16:7~13; 18:1~21; 19:1~22), 영은 확실한 인격으로 불리워졌다(사 48:16; 63:10).  이 외에도 삼위가 다소 명백히 지시된 곳도 약간 있다.  신약에서는 삼위가 명백히 언급된 구절들이 많다.   예수님의 세례에서(눅 3:21,22), 예수님의 고별강화에서(요 14~16장), 예수님의 대 명령에서(마 28:19), 사도의 축복에서(고후 13:13), 또한 그 외 구절에서(눅 1:35; 고전 12:4~6; 벧전 1:2)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에게 적용된 성부라는 이름은 ① 모든 창조물의 근원으로서 ② 이스라엘 선민의 아버지로서 ③ 하나님의 영적 자녀인 신자들의 아버지로서 성경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한층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이 명칭은 삼위일체의 제2위와 관련하여 제1위에게 적용되었다.  구속사역의 계획, 창조와 섭리의 사역, 구원설계에서 삼위일체를 대표하는 사역, 이 모든 일들은 물론 다른 두 위도 여기에 참여하지만 그러나 특수적으로 성부의 일로 돌려진다.  삼위일체의 제2위는 ‘아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어진다.  성자의 인격적 특성은 그가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생하셨다는 것이다.  성자의 발생 교리는 필연적으로 삼위일체의 제1위와 제2위가 부자관계를 가지신다는 성경적 묘사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은 성자의 신성에 대해 명확히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명칭을 성자에게도 적용되었고 성자에게도 하나님의 속성들이 있음이 발견되며 하나님의 사역들이 성자에 의해서 성취되었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존영도 그에게 돌려졌다.  성자의 사역은 성자는 모든 창조와 구속의 중보적 원인이 되셨으며 특히 구속사역은 성자의 성육신과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성령의 인격만큼 많은 사람에게 의심 받은 신성은 없으나 성경은 성령을 분명한 한 인격으로 묘사하고 있다. 애정, 의지와 같은 인격적 특성들이 그에게 주어졌으며 발언, 탐구, 증거, 명령, 계시, 노력, 조정과 같은 인격적 행동을 하신다.  성령과 다른 위와의 관계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셨다.  때문에 성령은 다른 위와 더불어 가장 친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성령의 신성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의 명칭들을 그에 붙였으며 하나님의 완전성들이 그에게 주어졌고 하나님의 사역들이 그에 의하여 시행되었고 하나님의 존영도 그에게 허락되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중 특히 성령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역은 창조와 구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완성케 하는 것이다.  자연의 영역에서 성령은 생명을 발생하여 창조사역에 완성을 가져오신다.  성령은 특수한 임무를 위해 인간을 영감하고 인간에게 재능을 부여하시며 구속의 영역에서 구속 사업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준비하시고 그리스도에게 권능을 주신다.  성령은 성경을 영감하시며 교회를 형성 확장하시며 교회 안에 계셔서 새 생명의 원리로 내재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교회를 가르치시며 보호하시고 모든 진리 안에서 교회를 인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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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를 부르신 것과

그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성경의 인물들과

어떻게 함께 일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출애굽기 2-4장을 살펴보면

모세의 유년기와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들도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게 되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모세 당대에 무언가 하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비록 광야의 도망자 신세로 있었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계획에 꼭 맞게 준비되어 있었으며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그분의 뜻 한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여러 번 모세와 이야기하려고 초청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모세와 관계를 맺으시고 지속시키셨습니다.

이 관계는 사랑에 기초한 것이었고

하나님은 매일 모세를 통해서

그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데

쓰임 받은 장본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하시고자 하면

한 개인이나 그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암 3:7).

하나님은 그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의 일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에 역사하기 시작하시면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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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극단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의 준비에만 의지하여 더 이상은 바라지 않고,

어떤 이는 준비를 경멸하여

성령의 역사와 감동과 영감에만 의지하는 경향을 가집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는 결단코 되지 않습니다.

늘 둘을 겸해야 하고 “둘이 함께” 가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이나 기름 부으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아는데 가장 훌륭한 접근방식은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그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기 전에

나는 모든 설교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설교하기 전에

이 성령의 감동과 기름 부으심을 기다리며 간구합니까?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의 최대의 관심사였습니까?

설교에서 이보다 더 철저하고 노골적인 시금석은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께서 설교자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사람의 노력과 열심을 초월하여 성령에 의해 쓰임을 당해,

그를 통해 성령께서 일하시는 도구가 되는 위치에서

설교사역을 수행하도록 성령을 통해

설교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아주 뚜렷하고 명백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강에서 올라올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후에 이것을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셨는데,

그의 고향에 나사렛의 회당에서

그것을 설명하여 말씀하셨다고 누가복음 1장18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 부으시고…’

 

내가 강조하는 싶은 것은 요단강에서 주님께서 있었던 일은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 자신마저도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이 독특하고 특별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지 못하였다면

땅위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임무를 행사하지 못하셨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정말이지 이것은 예수님에게도 그러합니다.

 

누가복음 마지막 장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제자들은 3년 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으면서

그분의 설교와 교훈을 들어왔고 모든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그분과 개별적인 대화와 교제를 나누는 유익을 누렸던 것입니다.

제자들 모두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장사지냄을 목격했습니다.

그보다 더 한 것은 그의 육체적인 부활의 사실을 모두 다 목격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생각하기를 이 사람들이야말로

이제 전도하러 나갈 완벽한 상태에 있구나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교훈에 의하면

그들은 아직 그런 위치에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필요한 모든 지식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란 충분하지 않아 더 필요한 무엇이 있었던 것인데,

그것은 성령의 권능과 기름부음과 나타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에게마저 이것이 필요하였다면

이 일을 전하려고 하는 다른 모든 이들에게는 얼마나 더 질실하게 필요하겠습니까?

 

“예,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조금도 고민할 것이 못 됩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은 사도시대에 끝났으니 우리와 관계없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 모든 것을 사도시대에만 국한시킨다면,

어떤 경우에는 그것들이 사도들에게만 해당되고,

어떤 경우에는 우리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것을 구별할 때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한단 말입니까?

여러분의 판단의 척도가 무엇입니까?

나의 답변은

성경이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될 것을 의도하고 있으며

모든 성경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식을 가질 수도 있고,

준비할 때 면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하심이 없이는 아무런 능력도 가질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설교한 것은 아무런 효과도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설교자의 노력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단지 도구요 통로이며 수단일 뿐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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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세상을 자신과 화목케 하시며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이 그분의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실제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를 추구하심으로 시작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라고

당신을 초청하십니다.

그분은 자신과 자신의 목적과 길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당신 안에서,

그리고 당신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당신은 믿음의 발을 내디뎌야 하고,

대대적인 조정을 해야 하며,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모든 것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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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율법관에 빠져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동시에 거짓된 은혜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은혜는 율법과 별개의 것이며

율법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도덕률 폐기론’이라 불러지는바

되는대로 태만하여 빈둥거리며,

죄 짓는 생활을 살기 위해

은혜론을 악용하는 사람들의 태도라 하겠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문제가 없다.”라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며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이것은 절대 그릇되고 거짓된 은혜관입니다.

은혜의 전 목적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말하는 소위 그 은혜가

(여러분이 받았다고 말하는 그 은혜),

여러분으로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한다면

여러분은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심리적 체험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여 그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며,

그리스도가 의로웠던 것처럼 의롭게 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은사)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그것인 것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을 지키기로 열망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 14:21).


이 두 가지는 분리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은혜는 감상적인(sentimental) 것이 아닙니다.

성결은 하나의 체험도 아닙니다.

우리로 율법을 사랑하며,

이 율법을 지키도록 의욕 하게 하는

이 새 마음과 성향(disposition)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이 말씀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까지 삼년의 짧은 세월 동안

그분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영원하고 영속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다시 마태복음 7장에서 강력히 주장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입니까?

십계명과 도덕법입니다.

이 법들은 폐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을 미워하며 그의 법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율법에 굴복합니다.

기독교인 이렇게 되기를 원하며 이렇게 될 능력을 받았습니다.

성경 로마서 8장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이드 존스 『산상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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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것이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지는 것이 반드시 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것,

이것이 이기는 것이다.

미워하는 것,

이것이 지는 것이다.

사랑으로써 이기는 것,

그것만이 영원한 승리이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

자랑하지 않는다.

교만하지 않는다.

오래 참는다.

 

그리하여 영원히 승리하여

영원한 평화를 가져온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싸움이 그치는 때는

사랑이 승리를 차지했을 때뿐이다.

 

-우찌무라 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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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 혹은 ‘제자됨’의 표지를 일상 속에서 찾을 때, 우리는 ‘순종’이란 안경을 사용합니다.  순종의 안경을 통해 제자 됨을 평가하는 것은 주님이 사용하셨던 방법입니다.  산상설교에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16-18).


Q. 당신은 순종의 안경을 통해 볼 때 어떤 제자이십니까?

Q. 당신은 순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 같지만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거룩, 이제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라는 제목의 책에서 Andrew Murray는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행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아닙니다. 순종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지식의 차원에서의 동의나 감정적 차원에서의 동감이 순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순종을 말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2. 순종에는 커트라인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까지 순종해야 하는 것일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순종에는 커트라인이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순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모든 삶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범이 된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순종의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죽기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순종에는 커트라인이 없습니다.


3. 순종은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순종해야 하는 것일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마음으로부터 출발한 순종을 해야 합니다.  신명기 30장2절은 마음과 성품을 다하는 것이 순종함에 있어 핵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우리는 마음과 성품을 다한 순종을 해야 합니다.  겉보기에만 좋은 ‘사이비 순종’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출발된 ‘온전한 순종’을 해야 합니다.


4. 순종은 평화의 열매를 가져옵니다.

만사가 형통하고 평온할 때는 누구나 순종에 대한 자신감이 큽니다.  하지만 고통 속에 있을 때는 백인백색의 반응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순종은 이런 고통 속에서 평화의 열매를 가져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가장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진정한 평화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에서 시작됩니다.  톨스토이(Tolstoi)의 걸작『전쟁과 평화』를 모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 톨스토이는 “하나님의 품에 있는 자만이 진정한 평화를 경험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에 순종하는 자만이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평화는 사람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존재 한다”고 했습니다.  순종은 우리의 내면에 평화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자가 진정한 제자이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평화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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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에서 역사하시는 일의 기록입니다.

성경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과 목적과 계획과 방법을 제시합니다.

성경은 단순히 하나님과 어떤 특정 인물의 관계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그분이 각 개인과 가지셨던 관계를 기록한 책입니다.

성경의 초점은 하나님과 그분의 일하시는 일에 맞춰져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항상 세상과 연관되어 계심을 계시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떠나시거나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로부터 멀어지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 세상에서의 구속의 역사를 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도하시고

선택하신 사람들을 역사에 참여시키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그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 전체를 통틀어 볼 때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해서 잃어버린 세상을 구속하실 때가 되었을 때,

아들에게 열두 명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의 목적을 이루도록 준비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려고 할 때,

자신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한 사람, 혹은 여러 명의 종들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그들에게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인생을 하나님께로 조정하라고 초정하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십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경험하려면,

하나님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태초부터 활동하고 계셨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를 통해 이것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행하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오셨다고 밝히셨습니다(요 5:30, 6:38, 8:29).

예수님은 아버지가 하고 계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고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있어 아버지가 어디서 일하고 계시는지를 보여주는 계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라는 아버지의 초청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주위에서 활동하시는 것은

하나님께로 당신의 인생을 조정하고

그분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라는 초청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주위에서 일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엘리사와 그의 사환이 도단이란 도시에서

아람사람들의 군대에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사환은 겁에 질려 있었지만 엘리사는 여유만만 했습니다.

엘리사가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문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주님이 사환의 눈을 열었을 때,

비로소 그는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활동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어디서 일하고 계신지를

당신에게 알려주시지 않는 한,

당신은 그것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어디서 일하고 계신지 계시하시면,

그것이 바로 당신으로 하여금

그분의 일에 참여하라는 초청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활동을 아는 것은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성과 그분이 주도권을 잡고

당신의 영적인 눈을 열어 그것을 보도록 하시는데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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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잃어버린 세상을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자신과 화목케 하는 사명에 동참자로의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당신이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순종을 요구하는 종의 자세를

가장 잘 보여준 본보기이십니다.

당신이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을 주님의 빚으시기 좋게 되는 것과

주님께 쓰임받기 위해 그분의 손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하나님을 당신을 준비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통해 자신의 일을 하심으로써

바라보고 있는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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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2권3과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에서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신성과 인성이 구원자 되심의 필수적인 조건임에 대해 배우며,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시고 다른 구원의 방법이 없음에 대해서 깨닫게 된다.  나아가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 되심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설득할 것인가에 대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논증하고 있는 브리안 메이든의 『오직 한 길』은 2권3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소책자라 적은 분량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임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만든 다른 종교들과 끊임없이 비교해 가며, 왜 예수님만이 오직 한 길인지에 대해 보여주는 이 책은 기독교가 오직 한 길을 주장하는 것은 편협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랑의 표현임을 보여주고 있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에는 여러 갈래가 있음을 종종 얘기한다.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노력을 기울이면 모두들 정상에 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어느 종교를 택할 것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모두 정상에서 만나게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같은 신에게 이를 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곳에 이른다는 보편구원설을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고 종종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을 전혀 가르치시지 않았다.  그는 모든 종교가 진리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종교적인 일에 성실하면 충분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신을 숭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며 우리는 참 하나님을 섬겨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여러 ‘길’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시기는커녕, ‘내가 곧 길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주장하셨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역시 이러한 그리스도의 궁극성과 유일성을 믿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의 유일성에 대한 이러한 신약의 믿음을 어떻게 설명하고 변호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기독교가 하나님께 이르는 많은 길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오해는 기독교가 단지 하나님과 도덕에 대해 가르칠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있다.  이러한 오해로 본다면 만약 다른 종교에서도 기독교와 유사한 이상들을 갖고 가르치고 있다면 기독교는 분명히 유일무이한 종교가 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는 단순한 윤리나 도적, 아름다운 이상들이 아니다.  단순히 종교적이거나 윤리적 이상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주창하는 있는 것이다.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만들어 주는 것은 역사적 사실들이지 우리의 이상이나 윤리, 경험들이 아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같이 종교 지도자들의 통찰력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서 행하신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며 또 이런 사건들로 인해 우리의 구원이 성취되었다.  만일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메시지는 소멸될 것이다.

 

기독교가 다른 모든 종교들과 구별되는 신조 중 하나는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교리로 그가 참 하나님이며 참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의 가르침 때문에 중요한 인물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절대적으로 독특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사건은 모호하고 신화적인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며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단연 독특한 것이 된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 자신이 자신의 창조주를 거역했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종교로 만드는 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이지만 성육신이 그 자체로 신약의 중심 메시지는 아니다.  하나님은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즉 인간을 죄로부터 구하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  전 인류는 죄에 빠졌고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그의 법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실제로 인간으로 오셔서 그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셨다.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하지만 그렇게 살 능력이 없는 완벽한 삶을 그분께서 사셨고, 우리가 당해야 마땅할 죽음을 그분께서 당하셨고, 받아야 마땅할 벌을 그분께서 받으셨다.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모두 우리가 지켜낼 수 없는 행동과 이상들의 집합체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선적으로 교훈이나 가르침과 모범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이다.  우리에게는 구원이 필요하며 예수님께서 홀로 우리의 구속을 위해 돌아가셨다.  이제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  더 이상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나사렛 예수가 주장한 신성이 사실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갈보리에 바쳐진 예수의 희생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입증되었다.  예수님의 부활과 들리심은 유일한 것으로 예수님만이 사망을 정복했다.  다른 종교지도자들 중 아무도 육체적으로 죽음에서 살아난 자가 없으며 죽었다가 살아나는 신에 대한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여도 개념뿐이지 역사적 사실로서 제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 빈 무덤은 신화나 아름다운 환상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들이 다소 차이는 있지만 공로와 행위의 종교이며 우리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로 구원을 우리가 힘써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행과 무관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선한 일에 열심을 품어야’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지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아니라 전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럼 왜 다른 많은 종교들이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가장 적절한 설명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그래서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끊임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혼자 힘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는 불완전하며, 부분적으로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진리 자체에 도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그들이 구원을 받게 될지 아닐지는 여전히 불확실한 채로 남겨둘 수밖에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느 누구도 기독교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복음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들도 부르셔서 회개와 새 생활에 이르게 하실 수 있지만, 그래도 그들은 구원의 확신의 근거를 갖기 위해서는 복음을 듣는 것이 여전히 꼭 필요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이 편협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선함과 지혜로 하나님을 찾았고, 그래서 그들만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자만심과 편협함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관용을 혼동하고 있다.  잘못되어 가고 있는 자에게 겸손하고 온유하게 얘기해 주는 것은 당연하며 가능한 한 솔직하고도 설득력 있게 잘못을 일깨워주는 것이 가장 자비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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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성이 있다.

혹시 당신의 현재 모습이 회개하지 않은 사람과 닮아 있지는 않은가?

당신의 진정한 속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라.

 

첫째: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한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 안에서

영원히 사는 천국의 완벽한 성결의 삶이나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국의 축복을 소망하는 것보다

땅에서 안락함이나 돈이나 명예를 축적하는 것에 관심이 온통 쏠려 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공언하지만,

그 마음이 하나님보다는 세상과 육신의 즐거움에 고정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결코 느끼지도 맛보지도 못한다.

 

즉, 하늘보다 땅을 더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보다 육신의 즐거움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요,

아직 회개하지 못한 죄인이다.

 

반면 회개한 사람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을 분별한다.

장차 하나님과 누리게 될 영광을 확실히 믿고

세상 어떤 것보다 그 소망에 마음을 기울인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나 인간의 모든 쾌락을 준다고 유혹해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영원토록 그분을 사랑하고 찬양하며 사는 삶을 택한다.

 

또한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고,

하나님 외에는 자기 영혼을 채워줄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하늘을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겠다고 단호히 각오한다.

회개한 사람은 한마디로 세상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 높이며

땅에서 잘되는 것보다 하늘에서 잘되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긴다.

 

둘째: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육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여긴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도 물론 말씀을 듣고 읽으며,

외적으로 신앙적인 의무를 수행하고 추잡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영원한 영광을 얻는 것을

인생의 으뜸가는 일로 삼지 않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부수적인 것으로 끝나버린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세상의 쓰레기 옆에 갖다놓는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세상과 절교하면서까지 

하늘을 얻을 마음이 추호도 없기 때문에

육신의 즐거움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하나님을 버린다.

 

반면, 회개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구원받는 것을 인생의 주된 목표와 관심으로 삼는다.

이생에서 받은 모든 은혜와 축복을

또 다른 삶으로 향하는 여정의 도구로 여기며

하나님 안에서만 피조물을 사용한다.

 

회개한 사람은 죄를 멀리하고,

자기 삶에서 죄를 제거하기를 갈망하며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간절히 기도한다.

혹 죄를 범했다면 

그것이 그의 마음과 삶의 방향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즉시 일어나 뉘우치고 회개하며

죄로 아는 것을 감히 고의로 저지르지 않는다.

회개한 사람은 하나님과 영광의 소망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서

세상 그 무엇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셋째: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영혼의 의사이신 그리스도께 치료 받기를 거부한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겉으로 신앙생활을 할지라도

자기 영혼을 그리스도께 절대 내맡기지 않으며,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명령에도 

결코 고분고분하게 순종하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죄인들을 죄책감과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하고 온전히 치유하여,

하나님께 인도하는 영혼의 의사이신 주님께 다스림 받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회개한 사람은 자기가 전에 죄로 사망했던 자임을 알고 있다.

하나님과 불화하여 천국의 소망을 상실하고,

영원한 형벌에 처할 위험에 처했던 자임을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구속의 선물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인생의 구세주로 믿고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을 얻기 위해

자신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내맡긴다.

 

회개한 사람의 심령에는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

회개한 사람의 삶은 그를 위해 친히 목숨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그렇다! 회개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리처드 백스터 『회개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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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이 잘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은 과식을 피한다.

그는 신경 안정제나 수면제 등 의사나 약사의 처방에 따르지 않은

일체의 약의 복용을 주의 깊게 피한다.

 

그리고 그는 수면시간을 스스로 다스린다.

만일 정욕의 문제로 마음이 혼잡해지면

그는 불순한 생각을 몰아내고

깨끗한 생각으로 마음을 채우며,

건설적인 활동을 하기 위한 방법들을 생각해 낸다.

그에게 있어 모든 자기 탐닉과 끊임없는 유혹들을

마땅히 정복되어야 할 골리앗이 된다.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습관을 고칠 수 없다고 불평하는 것을 듣는다.

그들은 자신의 패배주의가

그러한 실패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들의 말은 성령께서 필요한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성령을 소유하지 못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종종 흡연, 음주, 도박, 욕설 등을 끊을 수 없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내주하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그런 습관들을 끊을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악한 습관들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으로 우리의 심령을 충만케 하는 일이 필요하다.

 

-윌리엄 맥도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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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당신과의 사랑의 관계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당신이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관심 밖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이 당신을 그분의 임재로 채우시면,

당신이 할 일을 지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할 때에도

그분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당신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입니다.

당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당신의 길입니다.

그분이 당신의 지도입니다.

그분의 지도를 하루하루 따라가면

당신은 항상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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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을 보면 하나님은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느냐는 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네 가지 중요한 요소를 보게 됩니다.

출애굽기 3장,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경험한 것이 한 예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 대개는 그 개인에게 독특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모세는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아! 이것이 내가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구나.

나의 선조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들의 떨기나무 경험을 가졌고

이번 것은 내 떨기나무 경험이구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독특한 경험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들은 사람은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알았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독특한 방법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모세는 그것이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었겠습니까? 아니죠.

모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해서 간증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의 백성들에게 모세에게 말씀을 주신이가

그들 조상 하나님이 자신이셨음을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말씀하셨을 때 말씀을 받은 사람은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았다.

모세는 하나님이 그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어떻게 일하기를 원하시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그토록 많은 핑계를 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수께끼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메시지를 명확하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가 그분과의 만남이다.

모세가 이런 말을 했다면 얼마나 어리석게 들렸을까요?

“불붙은 떨기나무와의 아주 좋은 만남이었어.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게 나를 이끌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당신에게 진리를 보여주시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신 것은 

구약의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법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성경, 기도, 환경, 교회를 통해서 말씀하시면

당신은 그것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그분과의 만남입니다.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하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 14).

 

빌립은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앞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것과 동일하게

제자들도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것이 

곧 하나님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듣는 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지나 사도행전 그리고 현재로 넘어가면

우리는 종종 우리 마음의 모든 고정관념을 바꾸게 됩니다.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그의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기를

멈추신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성령님과의 만남이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도행전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부터 현재까지 

하나님은 성령으로 그의 사람들에게 말씀해 오셨습니다.

 

성령님은 항상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언제 어느 때든지

자신이 선택하신 방법으로 당신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당신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시고,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며.

아버지께 들은 말씀을 당신에게 해주시며,

무슨 일이 닥칠 것인지 알려주시고,

예수님을 증거 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정말 그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까?

그렇지요!

하나님이 당신을 쓰시고자 하실 때,

하나님이 어디서 일하고 계신지를 가르쳐 주실까요?

물론입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어려움이 있습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심장부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헨리 블랙가비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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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자기 개방이 훈련의 성과를 좌우한다는 점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에는 타인의 오픈에 어떤 태도로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훈련의 과정이 서로에게 유익하고, 서로를 세워주는 시간이 되기 위해서는 분명 자기 개방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자기 개방이 제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현명하게 타인의 개방을 받아주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세가 타인의 개방을 현명하게 받아주는 자세일까요?

 

1. 비밀은 절대로 지키십시오.

대부분 문제가 되는 경우는 훈련생들을 믿고 말한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돌아다닐 때입니다.  남에게 쉽게 공개하기 어려운 아픈 상처나 문제를 들었을 때, 그 이야기를 또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상식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남의 말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데 있습니다.  아니면 주의한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제3자에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말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흔히“이건 절대 비밀인데......” 혹은 “어디 가서는 이런 얘기하지 마세요. 집사님이니까 이야기하는데”라면서 시작되는 대화가 이런 종류입니다.  자신은 비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느낄지 모르지만 실상은 제3자에게 남의 비밀을 퍼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어디에 가서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당신의 기분은 어떨까요?  조금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우리의 태도는 쉽게 고칠 수 있습니다.  소그룹에서 나온 이야기는 절대로 비밀을 지켜야 합니다.  비밀이 유지되지 않으면 자기 개방은 물 건너가고 맙니다.

 

2. 오픈한 내용을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자기 개방을 현명하게 받아주는 또 한 가지 자세는 개방하는 그 내용을 가지고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과거가 어떠했든지 문제 삼지 마십시오.  남이 알면 어려운 문제를 용기 있게 이야기한 사람은 더 이상 그 문제로 계속 판단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습관은 주로 자기 가치관이 뚜렷한 사람에게서 발견됩니다.  평소에 자신의 도덕적 가치와 사회적 신념이 분명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제자훈련은 남을 판단하기 위해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의 허물을 잘 덮어주고 부족한 부분을 도와주는 훈련의 시간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오픈한 내용이 자신의 가치관에 비추어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더라도 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는“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 눈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다른 사람들도 각자가 가진 눈으로 나를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3. 다른 사람의 오픈을 타산지석의 기회로 삼으십시오.

누구나 실수할 때가 있고, 누구에게나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오픈한 것은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언젠가 나의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오픈한 내용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경험한 것을 토대로“나는 어떤가?” 또 “나의 가족은 어떤가?”를 살펴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항상 “나라면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을까?”를 생각하는 자세를 가지십시오.  결코 자만하거나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한 당신의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변수들을 염두에 두십시오.  그리고 문제의 근원이 되는 부분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문제 해결을 위해 당신이 취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결단은 무엇인지를 결정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십시오.

 

내가 오픈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잘 받아주고 그것을 절대로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어떠한 것을 오픈하더라도 나를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도와주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만나면 그와 어떠한 일이든지 함께 하고 싶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 사람이 나에게 “오픈해줘서 고맙다”며 “자신에게 큰 유익이 되었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앞으로 내가 그 사람을 더 잘 섬기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는 길은 다른 사람의 오픈에 현명하게 반응하는 훈련에서 비롯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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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는

당신이 하나님이 관해서 무엇을 믿고 있는가를 드러냅니다.

당신이 한 가지를 믿으면서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영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믿는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이 최선이라는 사실 또한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전지하십니다.

즉,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식을 갖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과거, 현재, 미래, 그 무엇도

하나님의 지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하나님이 당신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

그분의 인도하심은 항상 옳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여러 가지 길을 보여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당신이 가장 좋은 것을 고를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몇 가지를 보여주셔야

당신이 옳은 길을 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맨 처음에 옳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즉, 못하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목적하신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신다면

그분이 당신에게 행하실 힘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당신의 삶이 놓여져 있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많은 생각들을 다시 재배열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판이하게 달라서

때로는 틀렸거나 미쳤거나 불가능한 것처럼 들립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고 의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당신에게 최선임을 믿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오직 그분이 하나님이시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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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2과 ‘하나님은 누구신가?’ 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중요성과 더불어 이러한 지식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지에 대해 살펴보게 된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해하고 이러한 속성에 대해 어떠한 태도와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에 대해 자기점검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여러 속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빌 하이벨스의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는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특히, 이 책은 조금은 딱딱해 질수 있는 교리적 주제에 대해 삶 속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풍부한 예화를 통해 쉽게 설명해 간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기를 원하는 훈련생들과 인도자에게 권할만한 책이다.

 

기독교의 힘은 우리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 속에 들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정한 실체, 즉 인품과 성품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찾고 있는 하나님의 첫 번째 성품은 전지성이다.  그분은 영원하고 본질적이며 포괄적이고도 절대적으로 완벽한 지식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사물들이 되어가는 이치와 방법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 사물들의 일상적인 생활에 대한 세부항목들까지도 세세히 알고 계신다.  특히 이러한 하나님의 전지성은 자연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알기를 원하시며 실제 우리의 필요와 죄를 포함한 모든 것을 낱낱이 헤아리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눈물과 고통, 상처에 대해 결코 무심하지 않으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두 번째 하나님의 속성은 무소부재성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기독교에 대한 가장 놀라운 진리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저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들과 사랑이 넘치는 관계를 맺으시며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사모하신다.  하나님의 임재를 묵상할 때 우리는 위선과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게 되고, 우리는 더 이상 가장할 필요가 없으며 두려움을 일으키는 그 문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세 번째 속성은 전능함이다.  전능하다는 말은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다 감동적인 사실은 하나님은 기꺼이 그리고 몹시도 그의 능력을 우리와 나누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다리가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네 번째로 하나님은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기뻐하시기도, 슬퍼하시기도, 분노하기도 하신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안에 자리한 그 감정들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을 감동하게도, 마음을 아프게도, 화를 돋구게도 할 수 있다.  우리에게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에 함축된 또 하나의 의미는 우리가 표현 없이 사는 삶에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는데, 그 성품에는 그의 표현력을 투영하는 것도 포함된다.  하나님은 우리 역시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시기를 바라신다.

 

다섯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되시기를 기뻐하신다.  이는 그분이 하시는 일의 중심이며,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뜻하는 본질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피난처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믿는 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 쏟아 부었고 값진 피난의 순간들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의 피난처에 들어가는 다음 단계는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를 하나님께 쏟아 놓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를 감싸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섯째로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성품과 우리를 향하신 그의 행위, 그분이 제정하신 율법, 그리고 그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이 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부당한 일을 방관하지 않지만 우리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우리를 마음대로 다루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통해 의의 혁명을 이루시기를 바라시며 이를 위해 우리는 의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  옳고 그름의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며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림으로 불의의 본성적 사슬을 끊어 버려야 한다.

 

일곱째로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시다.  여기서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 성향을 말한다.  마땅히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터무니없는 축복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지며 하나님은 용서를 베푸시는 가운데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실재적이어서 그 현장에는 반드시 변화가 따른다.

 

여덟째로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은 하나의 이론이나 신학적 용어가 아니라 우리의 경험을 통해 확신한 사실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확신은 우리로 하여금 헌신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기에 우리들과 약속을 체결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될 것을 기대하신다.  우리의 불성실로 슬퍼하시고 우리의 성실함에 기뻐하신다.

 

아홉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인생은 수많은 결정들로 가득 차 있고 결정의 결과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바뀐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훌륭한 안내인과 표지판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나약하고 의존적인 존재가 아닌 더 성숙하고 현명해지는 방식으로 인도하신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주신 안내판은 성경과 성령의 증거, 현명한 사람들의 충고와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이다.

 

열 번째로 하나님은 끊임없이 베푸시는 분이시다.  이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여 토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아낌없이 베푸시는 가운데 기뻐하신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에게 베푸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 변화는 우리가 먼저 그의 선하심에 마음을 열 때 비로소 생겨나기 시작한다.  우리를 향한 그의 관대하심을 볼 때,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의 불변성은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와 요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기꺼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동하시고 행동하시고 응답하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성품에 있어서만은 일관성을 유지하시는 분이다.  그의 권능, 임재, 지식, 약속, 은총, 관대하심 등 성품은 변함이 없으시다.  오늘날 모든 상황들은 신속히 변화하고, 전문가들은 가장 성공한 사람들이란 변화에 대처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변화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즉 소용돌이치는 변화의 바다에서 닻을 달아 내리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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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적인 순종만이 올바른 순종이다.

머뭇거리며 순종하는 것은 불순종과 같다.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브라함이 행한 것처럼 ‘이 날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창 17:23).

 

그러나 우리는 임무를 자주 연기하며 즉시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전혀 행치 않는 것보다는 행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것은 반쪽짜리이며 불충분한 임무수행이다.

따라서 연기 되었던 임무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축복을 가져오지 못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즉시 행하는 모습 속에 그분의 완전한 축복이 깃들 것이다.

‘이 날에’는 창세기의 가르침이다.

 

-찰스 카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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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교회에 기대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은 ‘친교’이다.

그 외의 대답으로는 ‘훌륭한 설교’, ‘음악’, ‘프로그램’,

‘자녀들을 위한 청소년 활동’, ‘편안한 마음’ 등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자기 취향에 맞는 교회를 찾아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맥처치’(MaChuech) 심리이다.

오늘은 맥도날드에서 ‘빅맥’을 먹고, 

내일은 웬디스에서 ‘샐러드’를 즐긴다.

 

이처럼 교회는 소비자의 취향에 맞추는 소매점이 되었고,

신앙은 일개 상품으로 전략해 버렸다.

현대인들은 교회와 목사를 자주 바꾼다.

심지어는 거래 은행이나 단골 식료품 가게를 갈아치우듯이

쉽게 바꾸어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종교 소비자들의 욕구는 여론 조사에 잘 나타나 있다.

유에스에이 투데이에서 시행한 조사에 의하면

전체 미국인 중 56퍼센트가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데,

그 중 45퍼센트는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26퍼센트는 “마음의 평화와 정신적인 안정” 때문에

교회에 출석한다고 응답했다.

이 조사 결과 교리 문제는 그리 중요시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순수성을 

분별해 낼 수 있는 척도는 무엇인가?

이것은 중요하고 실제적이 질문이며,

기독교 신앙이 형성된 이래로 계속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이다.

이 문제들에 대한 기준은 성경이 제공하고 있으며,

초기 교회의 신조들은 

그 성경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니케아 회의에서 결정된 니케아 신조에서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를 이야기 하고 있다.

 

교회는 우선 하나가 되어야 한다. 

곧 일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곧 모든 교인은 의로운 사람을 살아야 한다.

교회는 보편적이어야 한다. 

곧 그 범위가 우주적이다.

교회는 사도적이어야 한다. 

곧 사도들의 가르침에 뿌림을 두며 그 가르침들을 선포해야 한다.

 

교회가 성경적인 믿음에 일치하며 

교회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증거는

바로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며, 

세례와 성찬을 수행하며,

제자훈련과 그 맡은 바 책임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를 위협하는 것은 

주일 아침마다 친숙한 얼굴로 눈에 띄지 않게

교회 문을 슬그머니 들어오는 

세상의 문화적 가치와 관행의 교묘하면서도 점진적인 수용이다.

세상적인 타협적으로 수용하는 행위는 

언제나 복음의 날카로운 칼날을 무디게 만든다.

 

교회는 문화와 세대에 예민해야 한다.

복음 전도의 방법은 

상대방의 배경과 연령과 이해 수준에 따라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구별해야 할 차이점이 있다.

교회가 전도의 테크닉과 진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대는 변해도 진리를 변하지 않는다.

 

교회는 언제나 성경과 그 역사적인 신앙고백 위에 서 있다.

성경과 신앙고백을 토대로 하는 교회는 

세상의 반감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언제나 세상의 반감을 샀다.

 

오늘날의 교회는 반감을 사는 대신,

거의 무의식중에 점차 세상적인 것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아주 작은 것, 

거의 의식할 수 없는 것부터 시작된다.

 

가령 죄와 회개에 대해 

본격적으로 가르쳐 본 일이 없는 목사라든지,

성경에 나오는 날카로운 말씀의 칼날을 변질시켜 

무디게 만들어 버리는 목사로부터,

‘풍성한 삶’이 곧 중상류층의 풍족한 생활을 의미하는 양, 

적당히 설교하는 목사들,

죄와 사악한 행동을 책망하기 꺼리는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그 타협은 시작된다.

 

찰스 콜슨 『이것이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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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본질 세 가지는

당신이 그분의 뜻을 알고 행하는데 있어

특별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뜻은 항상 최선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며 순종할 때,

하나님은 항상 당신과 당신을 불러내신 세상을 위한

최선의 길로 당신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당신은 절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옳은지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말입니다.

그분의 인도는 항상 옳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당신은 스스로의 능력, 힘 또는 자원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셔서 하라고 하신 일이라면

하나님 자신이 당신에게 능력을 주시고 성취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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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과정에서 자신을 개방하는데 익숙해져 있으면 사역 반에서는 좀 더 빨리 자신을 오픈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 개방의 정도에 따라 훈련의 열매가 달라집니다.

 

1. 자기 개방의 필요성

실제로 자기 개방은 훈련의 성과를 높이는데 크게 작용합니다.  따라서 가능한 한 빨리 자신을 오픈하고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훈련을 제대로 받는 지름길입니다.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나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알게 되면 괜히 나만 손해를 보는 듯 한 느낌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실체를 숨기고 다른 모양으로 포장하면 할수록 훈련의 효과는 떨어지게 됩니다.  나를 포장하고 숨길수록 그것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고, 이러한 노력에 들어가는 에너지는 결국 훈련을 위해 쏟아야 할 힘을 빼앗고 말 것입니다.

 

2. 자기 개방의 수준

그러나 자기 개방이라고 해서 아무것이나 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개방이 훈련에 효과적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말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자기 개방은 함께 훈련받는 훈련생들에게 위로와 격려, 도전과 경고가 되는 수준에서 실시되어야 합니다.  자녀의 치명적인 개인문제, 배우자와의 부부싸움 또는 배우자의 부도덕한 생활 등 부정적인 부분을 오픈하는 경우에는 정말 이 이야기를 오픈하는 것이 함께 훈련받는 훈련생들에게 유익한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반대로, 긍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훈련생들과 비교되는 것은 오픈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 개방은 신세 한탄이나 자기 자랑의 기회가 결코 아닙니다.

 

3. 자기 개방의 자세

자기 개방은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나의 삶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 인식 속에서 삶을 오픈해야 변화를 위한 구체적인 적용과 결단이 가능하게 됩니다.  또한 자기를 개방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현재의 삶에서는 아직 문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훈련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키심으로써 나의 가정과 생활을 변화시키실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한번 밖에 없는 훈련의 기회를 통해 어떤 결과를 얻기 원하십니까?  변화와 성숙의 기회로 삼고 싶습니까?  아니면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훈련을 받으시겠습니까?  이 모든 차이의 결과는 바로 당신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 개방을 통해 변화와 성숙의 기회를 만들어보십시오.  자기 개방을 통해 열매를 맺도록 많은 노력을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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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심령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법은 매우 다양합니다.

사람들은 먼저 자신들이 나면서부터 비참한 상태였다는 것과

자신들이 처해 있는 영원한 멸망의 위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사람들이 이런 깨달음에 사로잡게 되자

두 가지 결과가 생겼습니다.

하나는 즉각 자신들의 죄악 된 행실을 버리게 되었고,

더 방탕한 사람들은 이전의 악과 방종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결과는 사람들이 구원의 수단을

아주 진지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교회 예배와 사적 모임에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하나님이 갑자기 그들의 눈을 여셔서

마음으로 그분의 은혜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의 충만함과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분의 의지를 깨닫게 하실 때,

사람들의 감정이 때로 어떻게 움직이며 반응하는가 보는 것은

아주 경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에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생각으로 좌절하고

죄책감 때문에 깊은 수렁에 잠겨

도무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없는 자들이라 스스로 여겼었는데,

이제는 기쁨과 놀라움으로 심장이 방망이질 쳤습니다.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기쁨과 뒤범벅되었습니다.

때로 그들은 혼절하기까지 했습니다.

 

성령의 회심시키시는 역사는

신앙의 위대한 일들이 확실히 실재한다는 것을

수시로 비상하게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일들이 얼마나 신성하고 탁월한지를 맛보았습니다.

그것은 수백 권의 책에 담긴 논증을 읽는 것보다

그들에게 더 크게 확신시켜 줍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니며 사악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낮추는 것은

그들이 받은 빛과 기쁨에 정비례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처럼 하나님에 대해 비상하게 깨닫게 됨으로써

구별되었던 사람들이 잘난 척하거나 

스스로 대단한 척하거나

혹은 광신자들처럼 자족하는 분위기를 풍긴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온유함과, 온건함, 

자신을 불신하고 낮추는 영이 충만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회심했다고 여겨지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재 속에 엎드리고 싶어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집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놀라운 회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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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들은

하나님의 본질, 활동 혹은 성품을 계시합니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해 주실 때,

당신은 하나님을 경험으로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당신은 하나님보다 친밀하고 개인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분을 알게 됨에 따라

당신은 경배와 감사와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기 원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의 방법 중에 하나는

그분의 이름을 시인함으로써 경배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 대한 보다 깊은 지식을

당신에게 주시는 방법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시간을 투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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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

평신도 훈련/묵상 2015. 11. 25. 15:26

훼방과 간음과 살인이 끔찍한 죄악들이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거절하는 죄보다는 가볍다.

 

우리 모두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잃어버려야 할 경우에도

그리스도만은 간직하자.

그리고 친구들을 배반해야 될 경우에도

자기 목숨을 아까지 아니하시고

죄악을 구원하시려고 피와 땀을 흘리셨던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인 구세주만은 소중히 지키자.

 

우리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의 구주를 모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찰스 H. 스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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