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을 한지 4-5년이 지날 때쯤, 3년간 미국 남부지방 시골 동네에 살면서 처음으로 성령의 은사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가졌던 미국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교회를 다니면서 세 번 놀라운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일예배 시간에 어떤 나이가 지그시 드신 목사님께서 강대상에서 말씀을 전하시려고 할 때에 이백 명 이상의 성도들 가운데 한 여자 성도가 일어나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는데 그때 담임목사를 비롯한 모든 회중들은 고개를 숙이고 그 여성의 방언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 여성이 방언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 얼마 후에 남자 성도가 일어나 그 여성이 방언으로 말했던 것을 통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 성도가 한 문장씩 통역할 때마다 목사와 회중들은 ‘아멘’으로 화답하였고 방언통역이 끝나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든 성도들이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이러한 광경은 성령의 은사로 문제가 많은 한국교회나 한인교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꿈같은 일이고 나에게 있어서도 처음으로 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 신기하고 호기심에 눈을 뜬 상태에서 고개를 들고 모든 것을 보았는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예배가 무질서와 혼란 속에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 속에서 화평으로 질서 있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Gordon Fee는 공동체 안에서 방언이 지닌 역할에 대해 『Paul the Spirit and the People of God』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방언은 성령으로 감동된 말이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27절과 11절 그리고 142절에서 분명해진다. 현대 교회 안에서 방언을 제자리에 두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 즉 방언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사람들은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바울은 결코 방언을 칭송하는 척하면서 비난하지도 않고 방언에 대해 경의감도 갖지도 않는다. 성령에 의해 능력을 부여 받은 모든 행위에 대해서 그러하듯이 바울은 방언이 적절한 자리에 있을 때 그것을 존중한다. …방언은 본질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자나(고전 14:14), 방언을 듣는 자들(고전 14:16), 모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방언은 회중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는 통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통역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해 한 말이 아니라(고전 14:2, 14-5, 28), 하나님께 말한 ‘비밀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사도 바울이 공적인 모임에서의 방언사용과 관련해서 방언을 정죄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대단한 것으로 높이지 않은 것처럼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 방언을 해서는 안 되고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사용하는 은사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오늘날 통역이 되지 않는 방언은 공적인 모임 안에서 남용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라고 주장하는 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Fee가 이렇게 성령의 은사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을 보여주는 반면에 Richard Gaffin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방언에 대해 『Perspectives on Pentecost』에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방언도 역시 교회 창설을 위한 은사이지만 예언과 함께 교회 생활에서 철수되었다. 다시 말해 방언은 사도직과 연결되어 있던 모든 다른 창설기의 은사들과 함께 철수되었고 더욱이 예언의 경우도 그렇지만 방언의 경우도 그 기능을 사도시대에 중지된 기능과 그 이후에 계속되는 기능으로 나누어 생각할 만한 성경 해석적 근거가 없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부터 예루살렘의 멸망 때까지 계속된 언약시의 창설기 내지 전환기에 나타났던 다른 현상들과 아울러 방언은 천국이 완악하고 불신앙적인 이스라엘로부터 그 열매 맺는 백성에게로 옮겨진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시였다( 21:42-43)  그러면서 그는 고린도전서 138-13절 말씀을 가지고 성문화(성경기록)가 끝났기 때문에 방언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는 가르침은 지나친 견해이며 오류라고 강력히 말합니다.  이 말을 쉽게 요약하면 방언은 불신자들에 대한 표적으로( 28:11-12), 교회 창설기 때 있었지만 지금은 이미 중지된 은사이기에 그러한 가짜 영성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은혜의 방편인 말씀만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Gaffin의 이러한 주장에 비추어 오늘날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너무나 무질서하게 은사를 남용하거나(고전 13:1-3), 아니면 통역되지 않는 방언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특히 초청받은 사역자가 강단에서 마이크를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본인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을 할 때(고전 14:13), 그것이 무슨 대단한 영성인 것처럼 교인들도 같이 열광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Michael Green은 이런 문제를 놓고 “우리는 방언을 거절해서는 안 되고 또한 그것을 영성 전부로 보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 교회사를 찾아보면 성령의 은사를 강조했던 사역자들이 초기에는 사역을 잘하다가 끝에 가서 비난받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예를 들어 Tertullian이 가장 많이 지지했던 Montanus와 같은 사람은 말년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일을 통해 서방교회 신학자들은 성령의 사역을 금기시 했고 오직 기독론 중심의 신학을 중요시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천년 역사동안 따돌림을 받았던 성령신학이 20세기에 들어와서 회복되기 시작되었지만 아직도 성령의 은사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대교회 실정이기에 누군가 방언을 한다면 그 방언 말하기를 금할 필요는 없겠지만(고전 14:39),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통역되지 않는다면(고전 14:5), 무엇보다도 성경의 말씀처럼 그 방언은 개인의 경건을 위해(고전 14:4), 사적으로 지혜롭게 사용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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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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