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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1.31 Kyoto
  2. 2024.01.28 Japan
  3. 2024.01.21 주권과 자유 2
  4. 2024.01.14 보편 속죄 1
  5. 2024.01.07 형벌 대속 1

Kyoto

Picturesque/여행 2024. 1. 3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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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evangelicalism)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절대 주권자라고 말한다(욥 42:2).  하나님에게는 자신의 피조물을 다스릴 주권과 능력 모두가 있다고 주장한다(시 135:6).  그것이 선하건 악하건(욥 2:1) 간에 모든 천사를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다스리신다(빌 2:10).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이미 일어났고 앞으로 일어날 사건(잠 21:1),  즉, 앞으로 존재하게 될 모든 것과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나아갈 방향을 인도해 주신다(출 9:16).  따라서 그분은 마음에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엡 1:11).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일을 정하실지는 그분의 선하신 기쁨과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엡 1:5). 

성경에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에 대하여 수많은 구절들이 드러나 있다(시 115:3, 잠 16:9, 단 4:34-35).  이미 충분한 성경구절들을 위에 열거했지만, 에베소서 1장 11절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성경적 이유를 조금 더 제시하겠다.  먼저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해 주고 있고 기본 주제는 영원 전부터 계획된 우리의 구원이다(엡 1:4).  이 구절에 따르면 신자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에 따라 구원받기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엡 1:9).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목적과 뜻을 따라 구원에 대한 예정(predestination)을 포함하여 자기의 계획을 실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때에 그것이 이루어지게 하신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God's sovereign rule)와 인간 구원에 대한 선택(choice for salvation)을 말해 주고 있다.

먼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계획)에 따라’(11절)라는 구절에 관하여 주석가들이 제시한 바에 따르면 제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한글 성경에서는 ‘뜻’과 ‘계획’을 중복하여 번역하고 있지 않고, 두 개 중 하나만을 선택해서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혹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그런데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 ‘뜻’(Thelema)은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게 의도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을 말한다.  반면에 ‘계획’(Boule)은 목적을 위해 사려 깊게 생각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획’을 나타낸다.  따라서 11절의 정확한 해석은 John Eadie의 말대로 ‘심사숙고하여 세워 놓은 계획’을 가리킨다.      

Brooke Foss Westcott는 『St. Paul's Epistle to the Ephesians』에서, 이 구절의 근본 핵심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과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가장 현명하게 이루어지도록 숙고(熟考) 한 후에 선택(choice)을 하신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구절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Charles Hodge가 말한 것처럼 일어난 사건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일이라는 것(롬 8:29)과 하나님의 선택(요 15:16)은 예견된 행동이나 인간의 공로 등과 같이 하나님의 무관한 것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반드시 이루어지고 이루시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렘 33:2).

하나님의 생각은 완벽하고 절대적이며 자신이 목적과 뜻을 따라 모든 것을 신중하게 선택하시고 성취하신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어떻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루어 내실까 하는 것이다.  물론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생각해 보면(창 1:3), 다른 행위자를 사용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능력 하나로 충분히 그리고 단독적(stand-alone)으로 모든 것을 수행하시는 일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인간(요 15:16)과 천사(히 1:14) 등의 대리(代理)를 통하여 이루어 내신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피조물에게 발휘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구속이라는 특별한 문제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의 구원 방법인 예수님 조차도(행 4:12) ‘하나님이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가 되었다’(행 2:23).  의사 누가는 ‘할당하다’, 혹은 ‘배치하다’라는 군사적 용어를 사용하면서까지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라고 진술하고 있다(행 13:48).  사도 바울도 ‘원하는 자로 말미암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롬 9:16).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게 하신다’(롬 9:18).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모든 구문(構文)들 중 최고로 강한 구문이다.  성경은 인간 사건을 포함하여 우주 전체를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것을 증거 한다.      

만약 성경이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분명 Calvinist들은 열광할 것이다.  Calvin이 Geneva에서 살벌하게 목회하던 것처럼 TULIP에서 벗어난 모든 신학과 신앙을 이단(異端)으로 규정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망나니 같은 서슬 퍼런 신학적 칼 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나팔을 불어댈 것이다(요 16:2).  바울이 가장 좋은 본보기다.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에 가졌던 신학은 ‘카타르시스’(Catharsis)다.  이 병이 무서운 이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응어리’를 밖으로 분출할 때 쾌감과 희열을 느끼는 데 있다.  다른 신앙을 가진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을 통해 성취감을 가진다(행 9:1-2).  심각한 것은 그 일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것이다(행 26:9-11, 갈 1:13-14, 빌 3:6).  이 증세에 대한 의학적 판단은 정신 질환의 일종인 사이코패스(Psychopath)다.              

그런데 하나님도 Calvinist들이 독선에 빠져 절대적 주권만을 강조할 것을 아신 것 같다.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인간의 책임을 균형 있게 강조하는 John Wesley를 준비하신 것을 보면 말이다.  먼저 J. I. Packer의 『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에서 나온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모두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인이 이 두 개의 사실을 모두 받아들여야 오해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는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학적 ‘카르텔’(Kartell)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를 성경적으로 제시하겠다.  신구약 성경은 자유가 전제되어 있는 선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아담과 이브는 금단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로봇이 아닌 이상 순종할 것인가 불순종할 것인가는 이들의 선택이었다.  결과는 불순종이었다(창 3장).  아론이 범죄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슷한 선택을 제시했던 사람이 모세였다.  줄 한번 잘못 서서 죽음을 맛보아야 했던 사람들이 삼천 명이었다(출 32:25-29).  예배드리는 문제는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선 여호수아의 마지막 설교 속에는 선택이 있었다(수 24:15).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 강력한 메시지다(마 6:24).  엘리야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사이에 머뭇거리지 말 것’을 재촉하였다(왕상 18:21).  혼합 종교가 판치는 시대에 하나만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통해 중요한 선택을 주셨다.  요한복음 5장 40절 말씀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은 선택을 잘못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한탄하셨다(눅 13:34).  예수님도 불가항력적 은혜(?)가 자유로운 선택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설득적인 것이지 강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요일 4:9-10).  C. S. Lewis의 말을 인용하면 “하나님은 강간을 못 하신다. 사랑을 호소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의지를 제압(制壓) 하는 건 하나님의 계획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상 명령을 통해서도 마지막 선택권을 주셨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하나님은 누구도 멸망의 심판을 받지 않기를 원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요 5:24).  하나님은 모두가 구원받기를 소망하시지만(벧후 3:9)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요 5:40).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눅 7:30)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들은 절대 주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사실상 거절할 수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성경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거절할 수 있으며 실제로 거절한다는 것이다.  주권적인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 앞에 이행할 의무를 펼쳐 놓지만 동시에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자유가 있도록 Remote control로 조종받는 Robot이 아닌 지, 정, 의를 가진 한 사람 인격체로 창조하셨다.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은 자유로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은 인간에게 어느 정도 미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에 의해 모든 것이 짜인 각본대로 결정된다면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엡 2:8)라면 우리가 구원받는 데 있어(롬 10:9-10)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주관(主管) 하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피조물인 인간에게 자유가 있으며 이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하는가?  만약 두 개의 신앙 중 하나만을 믿는다면 구원이 주어질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둘 다 믿어야 하는 것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책임 모두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관계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이것이 매력적인 주제이긴 하지만 특별히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신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절대적 주권과 자유의지의 문제는 Augustine과 Pelagianism 사이에서 살벌한 논쟁을 일으켰던 주제이다.  칼빈주의(Calvinism)와 네덜란드 개혁주의자(Dutch Reformist) 사이에서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못지않게 쓰디쓴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행 23:6-10).  이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Calvinist들이 심하게 논쟁하면서 영적으로 얻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딤 3:9).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딤후 2:23)을 위한 것이라면 이것도 없어져야 할 전통이다(딤전 4:7,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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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 속죄

칼빈과 웨슬리 2024. 1. 14. 11:25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가 모든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셨는가(요일 2:2), 아니면 그가 이미 알고 계셨던 구원받을 자들만의 죄 값을 지불하셨는가?(요 17:9)  이 부분에서 Calvin과 Wesley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Calvin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였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롬 8:22).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결국 택함을 받은 사람들만 대속(vicarious)의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보았다(롬 8:33).  이것은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가 모든 사람(딤전 2:6)을 대신하지 않고 오직 선택(election)된 사람만(요 17:9)을 위해 죽었다는 뜻이 된다. 

『기독교강요』에 나온 Calvin의 말을 들어보자.  “성경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고도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받는 사람들과 멸망당할 사람들을 오래전에 확정하셨다고 말한다. 선택된 사람들에 관해서 이 계획은 그들의 인간적 가치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값 없이 베푸시는 자비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멸망당하는 사람의 입장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고 정당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이 되고, 그 결과 생명의 문을 닫으셨다고 볼 수 있다” 

‘제한적 대속교리’라는 표현은 Calvin이 명시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용어다.  하지만 후대의 Calvin 추종자들이 이 교리를 받아들이고 발전시켜 Calvin의 신앙 체계 안에서 논리적 함의(含意)가 되었다.  지면관계상 여기서는 생략하겠지만 특별 구속(particular redemption) 혹은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교리는 Calvinism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는 매우 복잡하고 골치 아픈 문제다.  왜냐하면 같은 개혁주의 진영 안에 전택설(Supralapsarianism)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과 후택설(Infralapsarianism)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신학적 견해를 가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어떠한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가?”(사 55:8-9). 

타락 전 선택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다음에 죄를 세상에 허락하셔서 그 죄로부터 선택받은 그들을 구원하신다고 말한다.  반면에 타락 후 선택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죄를 세상에 허락하시고 그다음에 죄로부터 선택받은 일부를 구원하신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이 신비를 해결하도록 하기 위한 자료나 뒷받침할 만한 성경구절들이 지극히 제한적이다.  양쪽 진영 모두가 옳은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사색적이고 그럴듯한 논리를 가지고 서로 잘났다고 나팔을 불어댄다.  이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라지만, 추상적인 신학적 용어(타락 전, 타락 후, 수동적 순종, 능동적 순종)들을 가지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신학이 개혁신학인 것 같다.      

이 문제를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Calvin의 요한복음 3장 16절 주석에 기록된 말을 들어보자.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초대하는 것을 볼 때, 그가 온 세상에 대하여 호의적인 관용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은 과연 생명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여기서 ‘모든 사람들을 예외 없이 초대하는 것을 볼 때’  이 말을 주목해야 한다.  내가 난독증이 걸리지 않은 이상, 이 말은 확실하게 무제한적 속죄(unlimited atonement)를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저는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는 구절을 생각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제로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의 죄 값을 지불하신 것이다(딤전 2:6).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 문장에서는 Calvin은 또 다른 입장을 보여준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약속되어 있다. 하지만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모든 이가 볼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그를 찾고 구하는 택함 받은 자들의 문만 열어 주신다”  Calvin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혼자 힘으로는 올바른 것을 선택할 수 없는 인간의 전적 무능력(Total Inability)을 강조했던 학자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찾고 구하는 택함 받은 자들’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궁금한 것은 “전적으로 부패한 사람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Reformed Theology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Calvinist들은 이에 대한 답변은 분명 이럴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아무런 조건 없이 구원을 위해 어떤 이를 무조건 선택하고 성령의 유효적인 부르심, 즉 항거할 수 없는 은혜를 그에게 적용시켜 구원이 일어나게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협력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님만의 주권적인 은혜로운 일이다”  이런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고 말꼬리를 잡고 물고 늘어진다면 쓸데없는 논쟁과 논란을 야기시킬 것 같아 여기까지만 하겠다.  솔직히 Calvin 자신도 이 문제를 가지고 오락가락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전자에서는 ‘보편속죄론’ (universal atonement)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최종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선택받은 사람들, 즉 ‘제한속죄론’(unlimited atonement)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Wesley는 대리 대속(penal substitution)이 어떤 식으로든 제한적(limited)이란 입장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인류에 대한 보편적 구속(universality redemption)을 제시하였다.  그러자 Calvin 추종자들, 특별히 극단적 칼빈주의자(Hyper Calvinism)들은 Wesley의 보편주의(universalism)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들이 거침없이 비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공격은 Wesley의 선행은총(prevenient grace)과 구원의 수용과 거부에 대한 결정을 인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강조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에서 나왔다.  마가복음 16장 16절에 의하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구원을 제공하지만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선물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속죄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자(요 12:32, 딛 2:11), ‘온 세상’을 위한 것이며(요일 2:2), 하나님의 구원은 조건적이다.  여기서 Wesley가 말하는 그 조건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다(요 3:15).  다시 말해 믿음에 의해서이며,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막 16:16).  지면 관계상 몇 군데의 성경구절을 인용하겠지만, 특별히 성경이 믿음에 의해 조건 지어진 구원을 가르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요한복음 3장 18절, 3장 36절, 사도행전 16장 31절의 구절들을 주목해야만 한다.   물론 Wesley의 이러한 주장에 Calvinist들의 답변은 뻔하다.  “만일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온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을 믿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Wesley는 그리스도의 복음(고전 15:1-4)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관해 말할 때, 성경은 우리를 기계적인 피조물이나 로봇으로 보지 않았다(계 22:17).  즉 복음을 수용하든지 거부하든지 간에 선택할 수 있는 인격적인 피조물, 즉 참된 인간으로 보았다(마 23:37).  달리 말하면 속죄 사역의 범위에 있어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지 않는 한 어떤 죄인이라도 구속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강조하기를 서슴지 않는다(요 5:40).  더 나아가 선악과에 관해 아담에게 하신 말씀 안에는 잘못된 선택(불순종)을 벌하시겠다는 약속을 잊지 말아야 한다(창 2:16-17).  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셨더라도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사용하여 고의적으로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거나(히 10:29), 가지고 있는 양심과 믿음마저도 얼마든지 파선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딤전 1:19).

작금의 Calvinist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오직 하나다.  Calvinism의 5대 강령에 하나인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를 강조하는 것이다.  외적 소명(external call)이 아닌 내적 소명(internal call)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강력한 입장이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Calvinist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다고 보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고 믿었다.  때문에 오직 하나님이 창세 전에 선택받은 사람들만 구원을 받아 영생의 유익을 누린다는 믿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교리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온건 칼빈주의자(Moderate Calvinist) Norman Geisler는 TULIP의 맨 마지막 항목만을 인정하는 신학자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아무 문제도 없다.  누구든지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믿으면 된다(롬 12:3).  궁극적으로 속죄에 관한 가르침은 신비를 포함하고 있다.  그 어떤 인간적인 유비(類比)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죽게 하시는 일의 비밀을 다 아는 것처럼 독선과 독단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Wesley의 말을 인용하면 “속죄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려 든다면 결국 목적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미로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 ‘미로’(迷路)에서 헤매는 사람들이 있다.  신학적 ‘카르텔’(Kartell)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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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는 우리에게 자격이 없는데도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는 다채로운 선물들을 가리킨다(약 1:1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분명코 받아야 할 심판과 형벌을 자비롭게 유보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용서와 구원, 그리고 영생이라는 참으로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선물들을 허락하셨다.  우리에 대한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소송이 우리를 유죄(有罪)라는 필연적인 판결로 이끌어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요구한다.  구원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닌’ 것처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엡 2:9).  구원을 얻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갈 2:16).  사람의 믿음 그 자체는 ‘행위’로 여겨져서도(갈 3:2), 누구든지 자랑할 근거로 여겨서도 안 된다(고전 1:29).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구원하셨는가?(요 3:16).  하나님은 우리가 의로운 일을 행하여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의 자비하심 때문에 구원을 주셨다(딛 3:5).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딛 3:3)라는 구절을 생각하면 실제로 우리에게는 의로운 일을 행할 능력이 일절 없었다(롬 3:27).  구원은 사람의 노력이나 선행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딤후 1:9)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다(요 4:10).   

그렇다면 하나님은 구원을 어떻게 준비하셨는가?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벧전 2:24)과 부할(롬 1:4)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분은 인류의 죄를 사하였고(요일 2:2),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요 14:6)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셨다(고후 6:16). 조금 더 보충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성경은 죄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의 표준 구절로 로마서 1장 18절-3장 20절을 제시한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롬 3:23).  이것이 형벌을 대속할 존재가 필요한 이유였다.  죄를 속하지 못하는 동물의 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히 10:4).  오직 그리스도의 피, 곧 그의 죽으심만이 우리의 죄를 없앨 수 있었다(히 9:25-26).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것 말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다른 길이 없었다(행 4:12).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징벌하심으로써 자신의 정의와 거룩하심을 충족시키신다(롬 3:25).  그와 동시에 그분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의롭다 하심을 선포하신다(롬 3:26).  Justin Taylor의 말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에게로 향하지만 성자가 죄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가 그에게 쏟았진 것이다.    

교회사에는 이러한 대속(vicarious)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와 몇 가지 중요한 관점들이 등장하였다.  먼저 구속과 동의어로 쓰이는 대속(代贖)이라는 단어는 사전적 의미로 남의 죄를 대신 받는 것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그 흘리신 보혈(寶血)로 인류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한 일을 가리킨다(히 9:12).  영어 어원으로 ‘한 번에 이루어진’ at-one-ment라고 부른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준비하시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지 정리하고 있다.   

사실상 신학자들 사이에서 속죄(atonement)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질문은 중요하면서도 이견(異見)이 많은 문제로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형벌 대속’(penal substitution)의 지위에 관한 문제는 종종 그 논쟁의 핵심으로 제기된다.  특별히 형벌 대속이라는 견해는 속죄에 대한 표준적인 개혁주의적 접근법의 특징을 이룬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복음주의 사상가들이 그런 접근법을 수용해 왔는데, 그중에는 Charles Hodge, William Greenough Thayer Shedd, Louis Berkhof, John Murray, Lean Morris, John Stott 같은 학자들이 있다. 

그런데 형벌 대속론의 뿌리는 John Calvin의 저작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Calvin은 역사적인 대속(atonement)의 교리를 확정하였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예수는 죄의 결과로 희생 제물(sacrifice)이 되어(히 10:14) 무서운 심판(롬 5:16)과 영원한 죽음(롬 5:14)을 받아야 할 인간들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다(마 20:28).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을 통해 죄인들을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데 필요한 값을 치르셨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우리가 죄가 없는 판단을 받는 이유는 우리가 징벌을 받아야 할 죄를 범했지만, 그 죄가 하나님의 아들의 머리로 옮겨졌지 때문’이라고 말한다(사 53:12).  그러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 징벌(punishment)을 직접 감당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Calvin의 대속교리는 인간의 행위를 대신한 예수의 객관적인 구원 사역에서 법적 측면을 강조했기 때문에 때때로 ‘형벌적 대속론’(penal substitutionary theory)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대속적 희생을 가리킨다(막 10:45).  즉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다(마 20:28).  여기서 대속물(ransom)은 노예를 속박에서 풀어주기 위해 치르는 대가(代價)였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속전(贖錢)을 치르셨는데, 거기에 요구된 대가는 십자가의 죽음이었다(갈 3:13).  후에 베드로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였다고 기록했다(벧전 1:18-19).  이 희생으로 사람이 지은 죄의 형벌을 용서를 받게 하시고(롬 5:9), 의를 전가하시고(고후 5:21),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이 화목을 이루게 하셨다(롬 5:10).  예수 그리스도가 죽을 때 우리의 죄 값을 치렀다는 의미에서 형벌상의 사건이고,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의미에서 대리(代理) 대속이다.

그렇다면 Wesley는 징벌을 대신하는 대속의 관점에 대해 어떤 신학을 가지고 있는가?  그는 The doctrine of original sin: according to scripture, reason, and experience』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한 징벌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그분은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징계를 받으셨다”  특별히 Wesley의 설교들 가운데 그가 펠라기우스주의자(Pelagian)와도 구별되어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설교가 “On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 Works (Bicentennial Edition)이다.  여기서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요약했다.  “기독교 체계 내에서 속죄 교리는 가장 중요하다. 이는 이신론과 기독교 사이를 구별시켜 주는 중요한 점이다”  이 설교는 당시 만연하던 ‘선천적 의지론’과 자신의 견해를 절대적으로 구별하려는 그의 의도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개혁주의 전통 내에 있는 신자들과 함께 Wesley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보았다.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믿음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며(엡 2:1-3), 그 진노를 달래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히 10:12) 즉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로’(히 9:12)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히 10:14).  그리스도는 우리가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 우리 대신 죽으셨고 스스로 우리의 죄(고후 5:21)와 죄책(갈 3:10)과 형벌(요 1:29)을 짊어지셨다.   

이렇게 Wesley는 복음의 본질인 우리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의 중심성을 확고히 인정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속이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유효한 가에 대해서는 Calvin의 주장과는 엇갈렸다.  다시 말해 Wesley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온 세상의 모든 죄를 위한 것’이지 단지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드시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대속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 것’(사 53:6)처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이 있는 반면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막 16:16)이 있다는 것이 Wesley의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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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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