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공동체 어떤 진영에서는 성령의 사역을 거의 완전히 배제하고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과 능력에 의존하는데 만족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과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로 하나님의 주권(롬 11:36)과 이신칭의(롬 5:1), 그리고 성령의 열매(갈 5:22-23)를 강조한다.  반면에 다른 진영에 속한 사람들은 교회 안에 나타나는 일들 중에 성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은사주의자들과 오순절주의자들로 치유(행 4:30)와 표적(막 16:17)과 기사(행 5:12), 그리고 성령의 은사(고전 12:4-11)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 두 부류의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무 문제가 없다.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이상(마 10:32-33), 나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한다(롬 12:3).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실 때 성령으로 난 사람 안에서 성령이 미치는 영향을 묘사하시기 위해 바람의 실례를 사용하신 적이 있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요 3:8).  이 말씀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나는 성령이 오순절주의자들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표적과 기사보다 더 크신 분이라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개혁주의자들이 가진 신학에 제한받지 않는 분이시다.  우리가 바람의 기원이나 방향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성령을 알거나 통제하지 못한다.  성령은 그분의 뜻대로 자유롭게 원하시는 대로 행하신다.   

오늘날 성령과 관련해서 개혁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온 신학적 견해는 이세벨의 칼을 피해 시내산으로 도망친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난 경험에서 근거한 고요한 가운데 계신 잠잠하신 성령이었다(왕상 19장).  따라서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생각은 성령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경건한 신자들은 무질서와 혼란을 용납하지 않는다(고전 14:40).  한결같이 그분을 신사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경험했던 성령은 그리 부드럽거나 친절하신 것 같지 않았다.  왜냐하면 생각지 못한 것을 요구하신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것을 간략하게 예로 들어보겠다.     

먼저 사무엘상 19장을 보면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는 도중에 하나님의 신이 임하자 그는 라마의 나욧에 이를 때까지 계속하여 춤추고 소리치며 열광 상태에서 예언을 하며 걸어갔다.  사무엘 앞에 이르러서는 옷까지 벗어 버리고 예언을 하며, 그날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쓰러져 있었다(삼상 19:23-24).  사울이 거의 알몸에 가까울 정도로 옷을 벗고 예언을 하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 조현병 환자가 아니면 신비주의자, 이단에 속한 사람이다.  다른 하나는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하게 임하자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행동은 방언을 말하고(행 2:4-6, 11),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행 2:13).  다른 사람들 눈에 술 취한 사람으로, 귀에는 혀가 꼬부라지는 소리로 들린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렇게 보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행동은 자신들의 의지라기보다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한 것이다.  

정신과 의사이며 제3세계의 선교사로 활동한 John White 박사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When the Spirit Come with Power』에서 이렇게 말한다.  “똑같은 성경 말씀을 놓고도 어떤 사람은 감격하고 어떤 사람은 근심하고 어떤 사람은 의심한다. 마음을 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폐쇄적인 사람도 있다. 반응이 빠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제력이 강한 사람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권능에 접하게 될 때 사람들이 나타내는 반응도 다양하다는 것에 대해 그다지 놀랄 필요는 없다.”  어떠한 현상들이 나타날 때(사 6:1-5), 그것이 우리에게 색다르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편견을 가지고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행 10:9-16).  불편한 진실이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전에 일어났던 일은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아주 많이 일어날 수 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행 7:51) 독사의 자식들인 바리새인들처럼 성령의 사역을 오인하고 조롱하고, 그 사역의 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말이다(마 12:22-37).    

그렇다면 성령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한 분 안에 세 인격 즉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계신다.  성령은 성삼위의 한 위로서 다른 두 위와 동일하신 분으로(마 29:19, 고후 13:14), 하나님 안에 영원히 존재하는 신비한 관계를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함께 나누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이다(롬 8:9).  성령은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각양 은사들을 주시고(고전 12:11)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인격과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행 1:1-2), 사탄과의 대치 상태에 있는(엡 6:10-13), 그리스도의 몸(고전 12:27)인 교회를 강력하게 세우시며, 천사들도 살펴보기 원할 정도로 복음을 힘 있게 하신다(살전 1:5, 벧전 1:12).  그런데 온 세상을 미혹케 하는 사탄(계 12:9)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뿐 아니라(고후 11:14), 심지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것과 같은 이적을 행하고(계 13:13), 애굽 바로의 왕의 술객들처럼(출 7-8장), 엄청난 능력과 표적과 기적(살후 2:9-10)을 행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고 있다(고후 11:3).  

문제는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온갖 일들을 그릇되게 정당화해온 것처럼, 은사주의 교회들 역시 성령의 이름으로 온갖 종류의 비성경적인 행위들을 자행해 왔다.  이 시대는 예수님이 경고하신 것처럼 거짓 선생들의 잘못된 가르침(딤후 4:3-4)과 그들이 제시하는 증거들이 너무나 그럴듯하기 때문에 신앙이 확고하게 서 있지 않는 상태에서 믿음을 지키는 일이란 그다지 쉽지는 않다(마 24:24).  지금도 사탄은 현상적으로 성령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는 것처럼 유사한 기적들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영들 분별함이 필요한 때이다(고전 12:10).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아야 한다(요일 4:1).

논쟁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즉, 어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죄로 인한 어두움과 무지함(마 22:29) 그리고 영적 교만함 때문(고전 4:6)에 비은사주의자 입장에서는 은사주의자를 과대망상증 환자나 신비주의자, 더 심하면 귀신 들린 사람으로 오해할 때가 많다.  John MacArthur의 말을 빌리면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은 전부 마귀의 하수인이며 미혹된 사람들이다.  바리새인 기질을 가진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비판과 정죄의 칼을 마구 휘둘러 된다(마 26:52).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칼(?)에 맞아 죽었는지 모른다.  반면에 은사주의자 입장에서는 이런 체험을 하지 못하는 비은사주의자가 미지근하고 냉랭하며 영적 체험 없이 메마른 종교생활을 하는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때가 있다. 

D. A. Carson은 『Showing the Spirit』에서 이 두 부류가 상대방에 대해 상투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은사주의자들이 볼 때 비은사주의자들은 성경을 실제로 믿지 않고 주님에 대한 갈증이 없으며, 심오한 영적 체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기에는 너무 교만하고, 실제보다는 의식에 더 관심이 많고 성육한 진리보다는 명제적 진리를 선호하며, 전도하기보다는 신학 책을 쓰고 패배주의적 전망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입장에 대해 방어적이고, 예배는 무미건조하고 성령의 능력을 개인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자들이다.  반면 비은사주의자들이 볼 때 은사주의자들은 체험에 대한 현대적 사랑에 빠져 진리마저 희생시키고 있고 심각하게 비성경적이며, 특히 방언 체험을 신학적 영적 십볼렛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전도하기보다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양 떼를 빼앗아 가며, 신실하고 겸손하게 봉사하기보다는 영적인 영웅주의에 빠져 있고, 예배에 질서가 없으며 증거 본문 암기하는 이상으로 성경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다.”  

나는 이 두 부류를 양비론(兩非論), 즉 ‘그놈이 그놈’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서로 배우려 하지 않는 데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도토리 키재기다(고전 4:6-7).  물론 이러한 오해들을 통해 서로를 견제함으로 성경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몸을 혼란케 하는 극단을 피하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말씀 편에 선 비은사주의자들이 은사주의자들을 볼 때 성령의 은사들만 거론하면 행여나 성경 계시를 넘어갈까 하여 견제하고, 반대로 성령 편에 선 은사주의자들은 비은사주의자들이 성령의 주권적인 능력의 역사 자체를 제한하는 극단에 빠지지 않게 견제해주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은사주의 신학보다는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Calvin 중심으로 세워진 개혁주의 신학이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우를 범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심각한 결과물 중 하나가 성령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에 대한 기대감을 철저히 제거한다.

그들을 만한다.  우리에게 성경 66권의 말씀이 있지 않는가?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대한 자신들의 지적인 깨닫음에 지나치게 만족한다.  그 결과 성령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에 대한 기대감이 급격히 줄어들거나 심지어 그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 말씀을 증거 하면 어떤 역사가 나타나야 정상적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메마른 복음이 아니라면 말이다.  제자들이 복음을 어떻게 전했는가?  성경은 증거 한다.  ‘그들이 나가서 모든 곳에서 복음을 선포할 때에, 주께서 함께 일하시며 따르는 표적들을 통하여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막 16:20).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성경의 정경이 이미  닫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절대적이어서 논쟁할 여지가 없다.  

개혁주의 신학의 문제가 무엇인가?  Miroslov Volf가 말한 것처럼 본문에 대해 어떤 해석이 다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 다양성과 통일성 그리고 다의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영혼을 죽이는 독선적인 신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신학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정신 나간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모든 신학(오순절, 성결교, 감리교)들, 특히 ‘성령론’에 대한 것은 이들 보기에 한 마디로 잘못된 신학이기 때문에 성령의 다양한 역사들을 귀신들에 의해 생기는 현상이라고 비판을 가한다.  이러한 비판을 일삼는 자들을 향해 개혁주의 신학자 R. C Sproul는 말한다.  “개혁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신학자나 목사들이 Calvin을 원숭이처럼 흉내 내는 것도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왜 다툼과 분열이 일어나는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배제하고 자신의 의견을 고집스럽게 앞세우거나 또는 자신의 견해를 밀고 나가기 위해서 그 사람의 이름이나 평판에 상처를 주려고 악한 마음을 품기 때문이다.  이런 자가 현대판 바리새인이다(요 11:47-53).  논쟁과 다툼이 일어나는 곳에는 반드시 마귀가 진을 치고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약 3:14-16).  우리는 베드로가 사탄의 도구로 사용된 적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마 16:23).  이런 논쟁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자신이 어느 특정 신학으로 무장되어 있느냐가 아니고, 균형 잡힌 건전한 신학을 가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신학이란 신적인 것을 깊이 연구하고 숙고한 결과를 말한다.  그런데 요즘 개혁주의 신학은 거의 ‘꼰대’에 가깝다.  신학이 갑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논쟁과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이것은 Calvin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진솔한 고백으로 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얼마나 비본질적인 문제로 논쟁을 많이 일으켰는지를 알 수 있는 말이다.  

내가 만난 개혁신학 대학원의 교수들은 한결같이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진정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지금의 칼빈주의자들처럼 천방지축 날뛰거나 허접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나불거리지 않는 정통 개혁주의자들로서 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수(下手)가 아닌 진짜 ‘고수’(高手)들이었다.  하수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무엇인가?  상대방의 말에 경청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만이 옳다고 우겨대는 못된 기질이 있어 변론과 언쟁을 좋아한다(딤전 6:4).  이것이 확증편향적 사고방식과 교조주의적 성향으로 중무장된 ‘꼰대’ 신학의 특징이다.  후안무치’(厚顔無恥)에 가까운 이런 부류의 사람을 '내로남불'을 한자로 옮긴 신조어 '아시타비'(我是他非)라고 부른다.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뜻이다.  이런 자는 개인적 나르시즘이 병적으로 강해 자신만이 의롭고 올바르며 성경을 가장 바르게 해석한다고 확신한다.  과대망상증 환자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데(마 5:13-16), 이들은 ‘칼빈’ 이름을 닮아서 그런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골빈’ 짓들(신학적 논쟁)만 한다.          

우리는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J. I. Packer는 『Keep in the Step with the Spirit』에서 성령 은사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기본적인 기준으로 ‘교리’와 ‘도덕’을 제시한다.  먼저 교리적 테스트는 요한일서 4장 2-3절과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근거를 둔 것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이것이 결국 속죄의 죽음과 직결)을 인정하는 것과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가에 대한 여부이다.  도덕적 테스트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계명들을 지킨다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강조한다(요일 2:4, 3:9-10, 17, 24, 4:7-13, 20-21, 5:1-3). 만약 우리들 중에 Packer가 말한 대로 이 두 가지 테스트에 근거한 성경적 입장을 취한다면 누구든지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삼가야 할 것이다(마 7:1-5).  평생을 배워도 알지 못하는 짧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은사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어떤 정의를 내리거나, 그 지식을 가지고 상대방을 정죄하는 것은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교만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만큼 성령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Lloyd Jones의 말을 들어보길 바란다.  “오늘날 교회가 인간의 지혜와 슬기로 제도화되었고, 성령에게 기회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을 소멸하고, 성령의 능력의 현현을 거의 불가능하게 한 것이다. 지금 교회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성령을 통한 그분의 능력이 나타나, 우리가 성령의 능력만 증언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즉 우리의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찬양할 수 있도록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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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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