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회자가 쓴 “몰매 맞을 각오로 올린 글, <한국교회의 오적(五賊)>”이라는 글을 기독교 신문을 통해 읽은 적이 있었다.  이분의 글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감정을 흥분시키는 드럼은 교회 음악에 적합하지 않고, 십자가를 가려버린 노래방 수준의 대형 스크린과 주여를 외치는 복창기도, 그리고 단체 급식하듯 나누어 주는 성찬식과 젊은이들이 입는 청바지와 티셔츠의 개념 없는 싸구려 복식(服飾) 등을 문제 삼았다.  그러면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교회 외부의 핍박보다 무서운 것은 교회가 조용히 병들어 가는 것이라고 글을 썼다. 

삼일이 지나서 다시 SNS에 “오적사건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사고문을 게시했다.  “나와 다른 것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종교개혁의 무게에 너무 짓눌려 제 마음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미숙함이 있었고 편향과 편견이 컸으며 음악에 대해 비전문가인 제가 너무 난체 했다”라고 말하면서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    

이분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시인하는 용기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도대체 종교개혁 하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드럼을 치는 것이나 스크린을 띠워 찬양을 드리고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주여 삼창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 분이 말대로 종교개혁의 무게에 너무 짓눌려 남들이 모르는 무슨 심오한 진리를 얻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형제들을 무시하다가 무수한 여론 몰매를 맞고 사과문을 냈다.  무엇보다도 음악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바리새인 기질과 종교적 자긍심을 갖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무엇일까?  요란한 드럼과 대형 스크린, 통성 기도와 급식처럼 나눠주는 성찬식, 그리고 청바지와 티셔츠가 한국 교회를  병들게 만드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를 병들게 만드는 원인은 따로 있다.  그것은 목회자와 교인들의 세속화와 변질된 복음, 우상숭배와 같은 성전건축과 진영 논리에 빠진 교인들 간의 분열, 그리고 물질을 절대시 하는 맘모니즘(mammonism)이다.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독선과 편견으로 가득 찬 교단 신학 논쟁이 교회 타락의 원인이다.   

또 다른 목회자 한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글을 하나 올려놓았다.  궁금한 것은 이분은 도대체 얼마나 성경적으로 목회를 하기에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처럼(행 7:51) 입만 열면 저렇게 “성령을 거스려 말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유튜브에 올려놓은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님처럼 설교를 하고 베드로나(행 2장), 바울처럼 설교하는 줄 알고 기대하며 보았다(행 22장).  그러나 1분 이상을 설교를 들을 수가 없었다.  내 눈과 귀가 보고 듣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왜냐하면 비성경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분의 설교는 원고를 가지고 앵무새처럼 읽어 내리는 스타일이다.  마치 아동 문학가 강소천의 동시(童詩) ‘닭’을 읽는 것 같았다.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모금 입에 물고 구름 한 번 쳐다보고”  한 번은 설교 노트를 보고 다른 한 번은 교인들을 쳐다보는 것도 코미디 같은 일이다.  성령을 거스리며 머릿속에 입력된 것이 없는 목사가 출력이 가능할 수 있을까?(눅 12:12). 

만약 성경적으로 설교를 한다면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에는 주님이 설교 노트를 가지고 메시지를 전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설교 원고를 가지고 메시지를 전달하면 비성경적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자신은 성경적으로 행하지 않으면서 다른 형제가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마 7:3), 지옥의 판결을 피하지 못하는 독사의 새끼들인 바리새인이나 하는 짓이다(마 23:33).  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된 목사이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주님의 음성 듣는 것을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 때에 겸손은 사라지고 교만만 극성을 부리게 된다.  이들은 이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율법을 비판하는 것 말이다.  이것은 율법을 주시고 율법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다.  무서운 죄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고 멸하기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약 4:11-12).   

혹시 놓치는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오순절 교단에 소속된 목회자나 성결교 교단에 소속된 목회자, 그리고 감리교단에 소속된 목회자와 침례교단에 소속된 목회자들 중에 교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성질이 더럽고 사나운 American Pit Bull Terrier처럼 물고 늘어지는 것을 아직까지는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유독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목사들은 항상 신학 논쟁을 통해 서로 물고 뜯고 난리 부르스를 친다(갈 5:15).  그 이유가 무엇일까? 

예를 들어 E. P. Sanders에 의해 시작해서 James Dunn을 거쳐 존경받는 성경학자 중의 한 사람인 N. T. Wright가 바울에 대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을 내세웠을 때, 다른 교단 신학자들은 관심이 없어서인지 아무런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반면에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먹잇감을 만난 더러운 Hyena들처럼 일제히 비판하는 일에 앞장을 섰다. 

먼저 John Piper가 자신의 책 The Future of Justification』으로 Wright를 비판하면서 반박했다.  혹시나 놓치는 것이 있을지 몰라 Piper의 책을 두 번 반복해서 읽었다.  N. T. Wright 책도 같이 읽었다.  하지만 이미 학계에 알려진 것처럼 주석적 근거가 너무 빈약(?)했기 때문에 Piper가 완패당하고 물러났다.  여기에 발맞추어 ‘망둥이가 뛰니까 꼴뚜기도 뛴다’라는 말처럼 한국의 신학자들도 기존의 구원론을 뒤엎고 종교개혁 자체를 부정하는 ‘옛 관점’과 대비되는 ‘새 관점’에 대해 일제히 공격 모드로 비판하는 일이 있었다.  정말 다시 한번 묻고 싶은 것은 도대체 종교개혁이 무엇이길래 이것을 빌미로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일삼느냐는 것이다(딤후 2:23).  나하고 틀리면 다 이단인가?  용각산은 소리가 없는데 이것만큼은 시끄러운 ‘개소리’다.  특별히 목회의 열매는 없으면서 신학 논쟁에 열 올리는 목사들 말이다.       

개혁주의 신학에 따르는 가장 대표적인 유혹이 무엇일까?  아마 ‘종교적 자긍심’에 사로잡혀 다른 형제에 대해 불신자 못지않게 행동하는 것이다(마 5:13-16).  이런 자긍심은 개혁주의 전통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이 쉽게 빠지는 치명적인 전염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이 시대에 범람하는 이단들과 우상들을 향해 비판하기보다는 자신이 배운 신학을 가지고 비판하지 말라는(마 7:1),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가운데 다른 형제들을 향해 비판한다(고전 4:5).  야고보는 이런 목사에게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고 수사의문문을 던진다(약 4:12). 

예를 하나 더 든다면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를 ‘자본주의’보다 영혼에 더 해로운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Rick Warren 목사가 사역했던 Saddleback Church를 다른 나라의 문물(文物)을 지나치게 배척하는 극단적 태도를 가진 ‘국수주의’의 유혹보다 더 큰 위협으로 여긴다.  무엇보다도 다른 교단이나 교파의 그리스도인에게서 발견되는 신학과 신앙에 근시안적으로 몰입하면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돈키호테처럼 신학의 칼을 무지막지하게 휘둘러 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칼(?)에 맞아 죽었는지 모른다.  앞으로도 주님이 오실 때까지 미친 백정의 칼날은 쉬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John Bunyan의 『천로역정』을 읽고 ‘허영의 시장’에 도사린 교활한 유혹에 대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사실 신학 논쟁을 업으로 삼는 자는 거듭나지 못한 사울처럼 신학적 위협과 살기만 등등하다(행 9:1).  목회는 안중에도 없다.  이들은 영적으로 교만하고 위선적인 바리새인 같은 자신의 추한 모습을 돌아보지 못하고(눅 18:9-14), 허구한 날 남의 허물만을 지적하고 들추어내는데 여념이 없다(민 12:8).  현대판 바리새인들이다(요 8:6).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다고 떠벌리면서 사랑이 없이 Calvin의 5대 강령이라는 TULIP 만을 가지고 논쟁을 일삼는다.  TULIP 교리를 빼놓으면 할 말이 없는 것 같다.  이것은 다른 기독교 전통과 신학을 무시하는 행위는 복음이 가져다주는 급진적인 은혜와 긍휼을 반영하지 못한 허세다.  영적으로 병든 것이다.  이들은 개혁주의 전통이라는 거대한 저택의 화려하게 장식된 ‘칼빈주의’라는 대문(大門)에 환각 상태로 빠진 것처럼 매료된 자들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장자교단이라는 명목아래 가부장적인 행실과 태도를 교활하다 못해 능수능란하게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만약 개혁주의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른 형제의 소위 단순함과 무지함을 비난할 만큼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신학적 체계에 불과하다면 그 ‘골병’든 신학은 개나 돼지에게 갖다 주어야 한다(마 7:6).  이 신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한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을 훼손하면서까지 영혼을 살리는데 일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논쟁만을 일으키는 신학이라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것을 가르치는 자들에게는 분명 ‘화’가 있을 것이다(마 23:15). 

나는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의 첫 번째 질문에 주의하지 않는 개혁주의는 사이비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개혁주의가 아닌 짝퉁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사나 죽으나 당신의 단 하나의 위로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여기에 대한 답은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고전 6:19-20), 사나 죽으나(롬 14:7-9), 몸과 영혼이 모두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고린도전서 3:23; 디도서 2:14)”.  나머지 답은 너무 길어서 생략하겠다.  이 질문의 답이 말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 마음을 유쾌하게 해 주고 아드레날린(Adrenaline)처럼 감칠맛이 나는 듣기 좋은 말을 들려주는 신학 체계가 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신학적 용어 하나를 가지고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것도 아니다(갈 5:15, 26).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독생자의 형제자매이자 양자 된 특별한 백성 됨을 드러내지 못하는 논쟁적 개혁주의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말이다.     

진정한 개혁주의는 디모데전서 6장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장관으로서의 품위를 지키지 않고 의원들의 질문에 반문 화법으로 따박따박 대꾸하며 언쟁을 일삼는, 속되게 말하면 ‘주둥이 싸움’ 신학이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우리를 똑똑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거나 용어 하나를 가지고 논쟁을 하기 위한 지적인 틀도 아니다.  일관된 논리와 이론적 매력으로 눈먼 교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는 복잡한 신학체계는 더더욱 아니다.  달리 말하면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본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어 성령의 풍성한 열매 맺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개혁주의든 골빈주의든 그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John Stott의 말을 빌리면 평신도에게 유익이 없는 논쟁을 일삼는 것은 확실히 병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목회자가 주어진 목회에 생명을 받치지 않으면 그 목사는 100%로 삯꾼이다(요 10:10-15).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논쟁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미련한 양들은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 목사가 어떤 목사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목사가 복음 외에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면 그 교회를 떠냐야 한다.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발육이 덜 된 미숙아처럼 논쟁과 말싸움을 일삼는(딤전 6:4), 스스로를 개혁주의라고 나팔을 부는 자들은 John Calvin이 『기독교강요』에서 한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우리 종교의 토대가 겸손이라는 John Chrysostom의 말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하지만 Augustine의 다음의 말은 특히 그렇다. 가장 호소력 있는 중요한 원리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 한 웅변가가 첫째도 ‘전달’이요, 둘째도 ‘전달’이요, 셋째도 ‘전달’이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무엇인지 내게 묻는다면 나 역시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답할 것이다”  개혁주의의 가장 중심적인 덕은 논쟁이 아니라 ‘겸손’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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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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