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만나보고 싶었던 분이 한 사람 있었는데, 이분은 게이바를 운영하면서 40년간 동성애 세계 속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극적으로 벗어난 탈동생애 운동가이며 사역자의 길을 걸어가는 목사님으로 오래 전 이 분의 간증을 감명 깊게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동성애자의 세계가 어떠한 곳인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를 오랫동안 몸으로 직접 겪었던 사람이기에 이분만큼 동성애자들의 세계를 훤히 아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동성애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고 성경을 기초로 해서 여러 서적들과 자료들을 참조한 적은 있었지만 이분처럼 그러한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동성애자의 세계가 어떠한지를 자세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가령 동성애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그들과 상담을 통해 어느 정도 동성애자가 겪는 심적인 고통이나 질병에 대한 지식을 조금은 알 수 있겠지만 그 어두운 세계 속에 살면서 몸(?)으로 경험한 사람만큼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동성애자에 대해 무엇인가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 동성애자의 세계 속에서 더러운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동성애자는 이러 이러한 사람이다.”라고 어떤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그다지 신빙성이나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은 세계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의학적인 용어로 ‘공상허언증’에 걸린 사람이고, 성경적으로 말하면 거짓말을 좋아하는 마귀의 자식(요 8:44)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보면 야고보의 믿음은 변절된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죽은 후에도(행 12:2), 여전히 열 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아 있어 그를 대신할 자(사도)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반면에 가룟유다의 신앙은 그리스도를 배반했기 때문(요 18:3)에 그가 목매어 죽었을 때 그를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행 1:15-20). 따라서 베드로는 사도로 선택받을 만한 사람의 자격을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라고 오순절 날 일백 이십 명 앞에서 제시합니다(행 1:21-22). 여기서 베드로는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의 사역 현장 속에서 늘 함께 다녔던 증인이어야만 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할 사람이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증인의 자격은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사람이어야 하는데(요일 1:1), 만일 체험해 본적이 없다면 그 일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자신이 체험해 본적이 없는 분야에 대해 논할 기회가 생긴다면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하게 행동하는 것이고(잠 14:12), 하나님 앞에 위증죄를 범하지 않는 일이지만(시 24:3-4), 더 나아가 자신이 체험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혹은 자신이 배운 신학/신앙과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되었거나 틀렸다고 억측을 부리거나 궤변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면 사도행전에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외쳤는데(행 7:55-58), 오늘날 누군가 교회에서 이렇게 설교를 했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납니까? 분명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는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이렇게 말하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서계시지 않고 앉아 계십니다. 앉아 계신단 말입니다! 당신은 그것도 모릅니까?” 사실 예수님은 자신이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고(마 26:64, 눅 22:69), 신약 저자들의 증언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막 16:19, 행 2:35, 7:55-56, 롬 8:34, 골 3:1, 히 10:12, 12:2), 여기서 하나님의 우편에서의 의미는 그분의 위엄과 영광의 자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고(시 110:1, 빌 2:9-11, 히 1:3, 벧전 3:22), 더 나아가 시편 기자가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 되시나니’라고 말한 것처럼(시 121:5), 예수님은 돕는 자의 자리에 앉아 계신 것을 말해줍니다(시 110:5).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성경에 이렇게 많이 기록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의 설교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를 이단으로 낙인을 찍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성경구절 하나를 가지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이단사냥꾼이며, 오늘날 성도에게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죽은 정통신학,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분쟁과 논쟁을 일삼는 Calvin의 살인적인 비판정신을 이어받은 메마른 신학으로 무장된 사람들입니다.
사실 우리가 체험하는 것이 우리를 속일 수도 있기 때문에 체험을 성경말씀보다 위에 두지 말아야 하겠지만(고전 4:6), 그렇다고 해서 모든 체험을 다 귀신의 역사로 매도하지는 말아야 하는데(요일 4:1), ‘오직성경’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만의 성경이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진리의 말씀이 아닐 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생활을 하면서 혹은 어느 신학자의 말이나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 가장 성경적인 것처럼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의 신앙이나 신학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병든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Martin Luther가 중세에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천명하기 위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라고 주장했지만(롬 1:17), 문제는 이것이 너무나 지나쳐 그는 야고보가 강조한 ‘행함을 강조한 믿음’의 말씀을 지푸라기 서신으로 깎아내렸는데(약 2:14),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불에 타서 없어질 잡스럽고 쓸모없는 말씀이었냐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지만(요 20:31, 딤후 3:15-17),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벧후 3:16), 삶에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요 14:21). 따라서 성경말씀을 취사선택하거나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주장하기 위해 바리새인처럼 어떤 특정 성경구절만을 가지고 인용하는 것은 심하게 말하면 이단들이 하는 짓이고(마 15:1-9), 정상적인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안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접촉점을 찾기 위해 늘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던 구세군 창시자인 William Booth는 제l회 졸업식 때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잃어버린 영혼을 얻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여러분을 2년씩이나 이곳에 잡아두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옥에 5분만 갔다 온다면 지난 2년간 배운 것보다 훨씬 더 효과가 클 것입니다.”라고 설교했는데,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허구한 날 신학적인 문제를 가지고 성난 미친개처럼 물고 뜯고 싸우는 사람들이(갈 5:15), 만약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직접 몸으로 체험을 한다면 분명 사울처럼 식음을 전폐하고 회개하며 기도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행 9:9). 사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역사를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에게(행 23:8), ‘너희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는데(마 22:29), 솔직히 오늘날의 문제는 사두개인처럼 두 가지를 모르는 무지에 있다기보다는 한 가지 조잡한 신학만을 너무 강조하는 것에 있습니다. 오래 전 R. T. Kendall 목사는 균형 잡히지 않는 진리 때문에 생긴 불필요한 문제를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외면당한 적이 있었는데, Kendall은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한 적이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심정을 느끼게 되었다. 이 말씀은 진리는 아는 것을 감사하지 않고 진리를 나누려고 애쓰는 이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낭비하지 말라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