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글을 읽다 보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려 있는 사람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자칭 개혁주의 신학자/목사들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이들은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마 7:1-5)을 무시하고 개인의 감정이나 자신만의 신학의 잣대를 가지고 이런 궤변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은사를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방언을 할 수 있는가?”라고 비판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고, 보태어 Calvin의 『제네바교회 교리문답』과 『기독교강요』에 나오는 ‘방언기도론’을 제시합니다. 솔직히 말해 성경에서 ‘개혁주의’나 ‘복음주의’, 혹은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라는 교단과 교파를 암시하는 구절들을 일절 찾아볼 수 없고, 고린도교회의 분쟁이 일어난 것도 바로 이런 독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고 말하면서 다음 구절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제시합니다.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불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고전 1:12). 이 말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이 ‘교단’과 ‘교파’, 그리고 ‘신학’과 ‘교리’들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활짝 열려있으면 귀신에게 미혹을 당한 사람으로 취급하거나 더 심하면 이단/사이비에 빠진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신랄하게 공격을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보다는(딤후 3:15-17),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신학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고, 이러한 잘못되고 편협한 신학들, 즉 자신만의 신학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수많은 영혼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마 23:2-3)들 그리고 율법사들은 당대의 최고의 석학(눅 11:46, 52)들이며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이스라엘 선생들이었습니다(요 3:10). 오늘날로 쉽게 말하면 탁월한 신학자들이며 목사들이지만 문제는 병든 신학과 하나님의 말씀 같지 않은 메마르고 병든 설교로 수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마 23:13). 이들의 이런 잘못된 가르침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통이지만 완벽히 쓸모없는 죽은 정통신학’으로 인해 참된 진리의 말씀(딤후 4:3)을 가르치지 않은 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섭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다시 말해 후메내오와 빌레도(딤전 1:19-20)처럼 잘못 가르쳐서 많은 영혼들을 그릇된 길로 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딤후 2:16-18).
우리는 죽은 정통신학이 필요 없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눅 4:22)로 삼십 년이란 세월(눅 3:23)을 목수의 직업을 가지고 일한 경험이 전부였고(막 6:3), 그분에게 있어 어떤 신학적 체계는 발견할 수 없었고 다만 예수님은 몸소 자신의 삶을 통해 진정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가르쳐 주셨습니다(요 10:4).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화려한 경력을 가진 사람(고전 1:26)이나 많이 배운 사람들을 택하지 않으시고 주로 학문이 없고 별 볼일이 없는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행 4:13). 그렇다고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처럼 무교회주의를 부르짖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교단에 소속되어 있지 않거나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교회를 치리할 때 자신이 소속된 교단 총회나 노회가 없으면 잘못된 것을 가르쳐도 누구의 간섭이 없기 때문에 교주 아니면 이단이나 사이비로 빠질 가능성 많은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단에 소속되거나 신학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 보더라도 유대교 전통을 고수하려는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데 있어 할례를 필수적 조건으로 전제하면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할 때(행 15:5), 사도들과 장로들이 일촉즉발의 위기를 몰고 온 이 문제를 놓고 심사숙고한 끝에 이 일을 예루살렘 종교회의를 통해 해결했기 때문입니다(행 15:6-21).
그리고 오늘날 현실에 비추어 여러 종류의 이단(막 13:6)들이 날뛰고 있는 상황에서 신학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딤전 6:3),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만이 가장 성경적이고 유일한 신학인 것처럼 주장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든다면 사도들을 통해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날 때(행 5:12), 공회에서 특출한 인물이었던 율법 교사였고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인 히브리 학자 가마리엘(행 5:34)은 오늘날로 말하면 ‘바리새파 교단’에서 ‘바리새주의 신학’을 한 사람이고, 반면에 사도들은 어느 특정 교단이나 교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신학교에 가본적이 없는(행 4:13), 한 마디로 신학을 제대로 해 본적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이 사도들과 맞지 않자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행 5:17), 제자들을 공회에 세워 종교재판을 하고(행 4:1-3, 5-6), 채찍질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했습니다(행 5:40). 이것을 쉽게 말하면 자신들이 배운 신학만이 정통적이고 성경에 가장 근접하는 신앙이기 때문에 그 신학을 바탕으로 해서 무지막지하게 상대방을 향해 비판을 가하고 이단으로 낙인을 찍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교법사 가마리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 5:38-39). 한 마디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학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신학공부를 많이 해서, 혹은 교리를 잘 알았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스데반처럼 죽은 것은 아닐 것이고(행 7:54-60), 그냥 단순하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고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담대하게 순교한 것입니다(히 11:35-38). 그런데 문제는 신학자/목사들이 가마리엘처럼 지혜롭게 행동해야 하는데(마 10:16), 분쟁을 일으키는 귀신들에게 충동질 당해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고, 무조건 자신의 신학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바리새인처럼 책잡으려고 하거나(막 12:13), 트집을 잡으려 한다면(눅 11:53-54),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갈 5:19-21). 솔직히 말해 이런 일들을 일삼는 사람들, Lloyd Jones의 말을 인용한다면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언제나 똑같은 신학적인 문제를 들추어내는 사람은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거룩하고 하나님께 쓰일 준비를 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하찮은 일, 즉 구원에 절대적이지 않은 교리를 가지고 논쟁을 일삼는 것은(딤전 6:3-4), 성령을 거스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본인은 바울처럼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스스로 망상이나 착각에 빠질 수 있겠지만(갈 1:13-14), 성경은 시기와 다툼과 논쟁은 마귀에게 속한 것이지 하나님께로 온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약 3:13-18).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신학에 대해 각각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과 어떻게 올바른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해 계속해서 자신이 배운 신학만을 주장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형제의 신학도 존중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