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loyd Jones의 『성령세례』역자 서문에 보면 “초대교회가 기독론 논쟁시대라면 교부시대는 삼위일체 등의 신론 논쟁시대라고 볼 수 있고, 종교개혁 시대에는 구원론 논쟁시대이고, 현대는 성령론 논쟁시대라고 할 만큼 성령론에 관한 논의가 국내외를 물론하고 분분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 대표적 논쟁은 개혁파 계통의 성령론과 오순절파 계통의 성령론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개혁파의 중요한 가르침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오순절에 오신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고 사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오순절파의 가르침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계속성과 오순절은 하나의 교회부흥의 모델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역사는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런 문제를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은 말씀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성령 편에 설 것이냐의 선택이 강요되고 있는데, 사실 R. T. Kendall이 말한 것처럼 말씀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건전한 신학과 이신칭의와 강해설교,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같은 개혁주의 교리들과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우면서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갈 때까지 하나님의 이름의 존귀함이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성령 편에 선 사람들은 기도로 처소가 진동하고 표적과 이적과 기사와 성령의 은사들이 역사하는 사도행전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면서 성령의 권능이 회복될 때까지 주님의 존귀하신 이름이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예를 하나들면 San Fernando Valley 지역에 Grace Community Church이 있는데, 이 교회는 『무질서한 은사주의』의 저자 John MacArthur가 시무하는 교회로 그는 오늘날 교회 내에 어지럽게 퍼지고 있는 잘못된 은사운동에 대해 도가 지나칠 정도로 비판하며 이런 부류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반면에 바로 옆 동네 Church On the Way에서 사역하는 지금은 은퇴한 Jack Hayford는『영적 언어의 아름다움』의 저자로 매주일 오순절 초대교회처럼 축제가 가까운 예배를 드리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있는데, 사실 양쪽교회 신자들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만 성령의 은사에 있어서는 서로 간의 견해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두 사람의 사역자에게 나타나는데, John Stott는 『성령세례와 충만』에서 “나는 오늘날 기적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적에 의해 그 진정성이 증명되어야 할 특별계시는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며 또한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기적을 행하기를 기뻐하시는 특수한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반면에 Lloyd Jones는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서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기적적인 은사들이 사도시대와 함께 끝났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그 이후에 교회사의 기록도 결단코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단지 성령을 소멸할 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두 부류의 견해 중 어느 견해가 옳은지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배경과 어느 교단/교파에서 신앙생활을 했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달라지겠지만, 만약 성령의 은사에 대해 폐쇄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John Stott의 말에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에 어떤 모임에서 나는 은사주의 운동에 대해 그 동안 내가 지나치게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 왔던 것과 그 운동의 지도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일을 무척 꺼려왔던 점에서 내가 미성숙했음을 고백하는 것이 옳다고 느꼈다. 나는 대화의 진전을 위해 우리가 동의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세 가지 영역을 제안했다. 첫째, 진리의 객관성, 둘째, 그리스도의 중심성, 마지막으로 삶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과 성경이 보여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풍성하고 다채로운 다양성을 지니신 분이다. 그분은 모든 인간과 모든 풀잎, 모든 눈송이를 제각각 다르게 만드셨다. 그래서 나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모든 정형화된 것들에 대해 더 거부감을 느끼게 됨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특정한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급급한 것 같다. 참으로 슬픈 현상이 아닌가? 나 자신의 영적경험은 매우 다양하며 영적은사에도 상당히 여러 종류가 있다고 믿는다. 만일 우리가 서로 속박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기만 한다면 풍성한 다양성을 지니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자유와 새로운 교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John Stott가 왜 이런 의미심장한 진솔한 고백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는 오늘날 은사운동을 두고 자칭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에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은사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John MacArthur를 role model로 삼아서인지 은사운동으로부터 배울 점들이 없는 것처럼 독설을 퍼부어가면서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은사를 많이 체험한 고린도교회를 두고 문제투성이 교회라고 운운하면서 마치 고린도교회가 주님이 세우신 교회가 아니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령의 은사로 몹시 시끄러웠던 고린도교회가 이단이었냐는 것입니다(고전 6:20). 분명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은사 문제로 시끄럽기 때문에 ‘너희가 아직도 육신의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말하면서 다시는 은사를 사용하지 말고 “오직 말씀만을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은사 문제로 질서가 없어 보이고 조금 시끄럽기는 하지만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유익(고전 12:7)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간절히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그릇되고 허접한 신학을 가지고 영혼을 죽이는 현대판 바리새인들이(마 23:15), 어떤 한 가지 해석을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집단적인 강령’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인데(막 7:1-8), 한 마디로 성령의 은사를 거론하면서 칼빈주의 신학에서 벗어나는 것을 다 이단이거나 가짜인 것처럼 비판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고린도전서 13장12절을 인정한다면 오늘날 이들이 내놓는 해석이 하나님의 견해와 일치한다는 절대적 확신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계시록에 나오는 사데 교회가 인간 눈으로 보기에는 분명 살아있는 교회로 보였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죽은 시체들이 모여 있는 교회로 보인 것은(계 3:1),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고 그분을 거역하고 대적해서 소멸되지 않았나 생각되는데(살전 5:19-20), 솔직히 우리는 고린도교회나 은사운동으로부터 배울 것은 겸손히 배워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서 질서와 자유가 조화롭게 추구해야 하듯이 성령의 은사의 바른 이해와 체험을 통해 효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려면 양쪽 진영의 사람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주로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물고 늘어지는 쪽이 은사중지론자들이기는 하지만 만약 이 두 진영이 상대방에게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교회에는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고, 더 나아가서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서로 물고 뜯고 싸운다면 주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갈 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