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은 영적인 선물들이나 사역에 대한 가르침이 주어질 때마다 다양성과 사랑과 겸손을 포함하는 통합이라는 주제를 강조하면서(롬 12:5-10, 고전 12-14장, 엡 4:1-16, 벧전 4:7-11),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고 말하고 있는데(고전 12:13), 여기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는(롬 12:5), 구절에 대해 Gordon D. Fee는 말하기를 “바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재적 관심은 한 개인이 어떻게 신자가 되느냐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될 수 있는가?”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다양한 은사와 사역들은(엡 4:7, 11-12),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성령의 선물을(약 1:17), 아낌없이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기뻐하지 않을 때 고린도 교회처럼 한 몸을 이루기보다는 시기와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10-13, 3:3).  사실 원칙적으로 보면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이고(딤후 3:16-17),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기준은(벧후 1:20-21), 마땅히 받아들여할 확실한 것이지만(계 22:18-19), 그렇다고 해서 ‘성령세례’와 같은 기술적인 용어를 동일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대화중에서 거듭나는 것에 대해 설명하실 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3:8), 여기서 쓰인 ‘프뉴마’라는 단어는 문맥상 ‘바람’ 또는 ‘영’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즉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성령의 일하시는 방식은 인간의 머리로는 알 길이 없고 신비로우며 예측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남’이나(요 1:12-13), ‘성령충만’(행 2:4, 4:8),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사건들에(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행 11:16, 고전 12:13),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리거나 주장할 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깊게 새겨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묘한 일들은 하나님에게 속하였을 뿐 아니라(신 29:29), 하나님 나라의 일들은 신앙 형식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인 행위를 통해(고전 12:11), 임하기 때문에 매우 신비스럽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Craig S. Keener는 『Gift and Giver: The Holy Spirit for Today』에서 “성령 사역의 모든 차원은 회심할 때 경험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회심 이후에 성령의 여러 가지 또 다른 면모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성령에 대한 확실한 안내를 이렇게 제공합니다.  “그 능력을 덧입는 경험을 회심할 때 경험하는 것으로 생각하든 아니면 물세례를 받을 때 경험이라고 생각하든 아니면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특별한 역사를 통해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든 간에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좀 더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가지고 서로 자신들의 말이 옳다고 주장하지 말고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실제로 체험하고 누리며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 되겠지만 주님은 분명 ‘성령세례’라는 문제를 놓고 그리스도인들끼리 분열되기를 원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요 17:22).  J. I. Packer는 이러한 논쟁을 두고 “성령세례와 계속되는 은사들, 성령의 현재적 현현들의 범주를 더 넓혀야 한다.”라고 강조했는데, 사실 신학적 사고 안에서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 안에 계속해서 도전되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성경’과 ‘성령’의 관계를 적절하게 세우는 것이고, 이 문제를 풀기가 쉽지는 않지만 우리의 신학을 예외적인 몇몇 경우들을 기반으로 세울 것인지 아니면 좀 더 폭넓게 신학적으로 잘 설명된 문맥에서 실마리를 찾아낼 것인지는 각자가 스스로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결론적으로 Sam Storms가 말한 것처럼 개혁/복음주의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회심 때 성령세례를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옳지만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종종 극적인 성령체험의 실재를 부정하는 점에서는 그르다고 볼 수 있고, 오순절/은사주의자들은 회심 이후에 우리를 놀랍게 변화시키는 성령과의 만남의 실재와 중요성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옳지만 이런 경험을 ‘성령세례’라고 단정 지어 말하는 점에 있어서는 옳다고 볼 수 없고 더 적당한 용어를 찾아내라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눅 1:41, 67, 행 4:31, 7:55, 13:9).  따라서 우리에게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모든 신자의 회심에 적용할 것을 제안하지만 이는 결코 성령의 활동을 회심으로만 제한해서는 안 되고, 신약성경은 성령의 능력과 임재에 대한 다양한 이후의 경험을 인정하며 권장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신학적 문제를 놓고 서로 간의 견해를 나누는 우리 모두는 서로가 좋든 싫든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영적 형제들입니다(고전 12:13). Richard B. Gaffin은 신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주 안에서의 공통된 연합에 대한 관점을 놓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 점에 대해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한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신자들은 결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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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악해져 가는 불신 세상에 둘러싸여 다음 천 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때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성령의 능력을 받는 일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교리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대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일에 있어 필요한 것이지만 ‘교리’ 그 자체는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아니며 우리를 변화시키거나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 성령의 강력한 체험을 하지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을 받았으니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식으로 자기도취에 빠져 냉랭한 성령론을 간직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몸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고든 Fee는 『God’s Empowering Presenc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능력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실 때(약 4:8), 보기 드문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그분의 분명한 임재라고 부를만한 현상은 종종 전율(합 3:16), 위엄에 사로잡힌 경외심(사 6:1-5), 서 있지 못함(왕상 8:10-11, 대하 7:1-3, 계 1:17), 압도적인 기쁨(시 16:11) 및 이와 관계된 다른 징조 등과 같은 반응을 촉발하는데 이 점은 성령의 비상한 부으심의 시대에는 특별히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의 성회 신자인 고든 Fee가 말한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대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오늘날 나타나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은사들, 가령 "예언적 은사"처럼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초기시대의 교회에 “정경적” 원리의 일부로 기능했지만 그런 은사들은 정경의 완성과 더불어 중단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사도적 교회 수립과 관련된 표적 은사들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연구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은 특정한 용어와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를 구분하는 것으로 특정한 용어의 사용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더 큰 진리를 놓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특정한 언어적 언급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진리냐 아니냐가 결정될 때는 더욱 그러한데 영국 철학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고 논리학 이론과 언어 철학에 관한 독창적이며 중요한 철학적 사유체계를 제시했던 Ludwig Wittgenstein이 지적한 것처럼 “언어는 우리를 미혹시킬 수 있다”라고 주장했는데, 특히 신학적 용어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D. A. 카슨이 말한 것처럼 성경에서 나오는 어떤 특정 단어 하나를 놓고 신학자들끼리 언어학적인 말장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논쟁거리 중에 하나인 성령세례는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같은 사건인가?” 아니면 “중생 이후에 일어나는 또 다른 사건인가?”에 대해 매우 난해하고 다양한 해석들, 즉 각 교단과 교리 노선에 입각한 각기 다른 의견의 차이 때문에 많은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든다면 오순절 날 일백이십 명에게 일어났던 초자연적인 사건이 성령을 체험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서 똑같이 일어나는 것인가?  만약 오순절이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의 모형이라면 그리스도인들도 모든 경험에서 그와 같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들이(행 2:3), 드러나는 같은 경험 또는 유사한 체험을 매번 기대해야만 하는가?  만일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답한다면 성령이 처음 임했을 때 나타났던 현상들 중 한 가지를 선택할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바람소리나 불의 혀 같은 모든 현상들이(행 2:1-4), 다 나타나야 한다고 계속 주장해야만 하는가?  이렇듯 수많은 질문에 사로잡혀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각자의 주장이 옳다고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신학을 하거나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가장 근절되어야 할 것은 모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는 선입관이 포함된 교조주의적 태도와 생각입니다.

 

이러한 전통에 대해 Robert W. Lyon는 『Wesleyan Theological Journal』(volume 14, 1-Spring 1979). “Baptism and Spirit Baptism in the New Testament”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오순절을 기점으로 모든 믿는 자들은 회심할 때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된다.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 또는 성령충만을 받는 것을 구별하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오히려 사도행전은 이 모든 표현이 서로 호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세례’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구절들도 이러한 결론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이 표현들 모두 믿는 자들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포괄적인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존 브라이트는 『The Authority of the Old Testament』에서 “성경은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고 많은 것은 의미하도록 만들어질 수 있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 해도 성경이 해석되는 원칙들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고전 4:6), 성경에 최종 권위를 두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어지지 않으면 특정한 교리 문제로 신학적 논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쟁을 두고 은사주의 신학분야의 초기 선구자인 루터교 목사이며 신학자로 회중의 연합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균형 잡힌 사역을 하고 있는 Larry Christenson는 『Speaking in Tongues』에서 오순절주의자와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을 합니다.  “성령께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서 역사하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결정할 문제다. 사실 기독교인들을 서로 비교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사역의 다양성을 간과하는 행동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각자가 독특하다. 성령은 각 사람을 독특한 방식으로 다루신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의 역사는 매우 신비스럽고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 어떤 확실한 정의를 내리거나 주장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적 논쟁들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신앙감정론』에서 말한 것을 통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은 사람들의 생각하듯이 틀에 짜여진 방법으로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편견으로 시야가 어둡게 가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은 너무나도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대부분 성령을 추적하거나 그의 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성령세례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이나 정의를 내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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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성경이 믿음과 실천을 위한 최종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이런 성경을 어떻게 하면 정확하고 바르게 해석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해석하는 데에는 중요한 단계를 따라야 합니다먼저 테스트를 '문법적'으로 즉, 단어의 어원, 특히 동사나 명사 등의 각종 변화형과 문장 구문론 등의 문법적 요소와 문학양식, 문맥구분, 저자의 문체 등을 분석하여 문자기록의 해석에 필수적인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이 있고, 그리고 '역사적'으로 주해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은 텍스트가 처한 역사적 배경과 상황 속에서 거기에 쓰인 단어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으로, 이것은 주관적 요소들이 가미되어 텍스트의 의미를 흐트러뜨리는 것을 막아줍니다여기서 더 나아가 텍스트를 '신학적'으로 주석하는 작업인데 이 단계는 텍스트를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주석하고 텍스트 의미를 밝혀주는 신학을 세우는 작업으로 해석 대상이 구속사적으로 볼 때 성경 전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해석을 시도하는 방법입니다이러한 해석론을 기초로 해서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는(고전 4:6), 사도 바울의 말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연구할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놓고 각 사람들이 해석하는데 있어 일치된 신학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 그리고 웨슬리주의자들과 가톨릭주의자들은 성경을 기초로 해서 교단 신학에 입각해 성령세례에 대한 어떤 정의들을 내릴 때 다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옳은 부분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의 사역의 성격이나 강도, 즉 성령으로 채워지는 결과는 받는 자가 믿음을 얼마나 이해하고 믿음에 얼마나 합당한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Walter C. Kaiser는 “성경에서 비슷한 표현들을 발견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 경험을 처음 기록된 경험과 같은 것이라고 추정할 수 없다”라고 말했는데, 사실 성령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신약성경의 다른 저자들보다 풍부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을 W.T. Conner는 『The Work of the Holy Spirit』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다른 신약의 저자들도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기독교인의 삶에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 그렇게 분명하게 도전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보다 분명하게 성령의 사역을 받는 자의 입장에서 경험되는 무엇가를 논하고 있다”

 

사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과 결정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고전 12:3), 성경은 신자들에게 성령과의 새로운 관계를 추구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고 이것에 대해 존 스토트는 “그들(사도들)은 결코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하거나 가르친 적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새롭고 다른 방식으로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성령과의 관계에 있어 언급된 유일한 두 가지 적극적인 명령, ‘성령을 따라 행하라’( 5:16, 25)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5:18),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헬라어 현재 시제로 신자가 이미 맺은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의 지속적인 성장을 암시하는 것이지 어떤 결정적인 새로운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신약성경의 어떤 본문에서도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호소나 명령은 없고 반면에 에베소서 518절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통해 “성령세례는 하나이지만 성령충만은 다양하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칼빈이 사도행전 15절과 217(주석)에서, 그리고 로이드 존스가 『성령세례』에서 말한 것처럼 성령의 영구적인 내주를 경험하면서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입장을 종합해 보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라는 용어를 성경에서 언급한 여러 경험들 중 어느 하나에 국한하여 배타적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세례에 대한 개념적 오류들은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을 경험하는 것은 때로 우리의 개념을 초월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헨리 블랙커비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직 그분이 당신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대로 경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개념이 부족하다고 해서 경험의 진실성을 무시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순절주의자들은 개혁주의가 말하는 성령론을, 개혁주의자들은 오순절주의가 말하는 성령론에 대해 서로 강하게 거부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살전 4:8), 주어진다고(전치사 ‘엔’ 대신 ‘에이스’ 현재 시제의 사용은 우리의 삶속에 나타나는 성령이 진행 중이고 지속적인 역할을 강조) 말한 것처럼 성령론은 완성되지 않는 과정 중에 있음을 기억하고 그분께 귀를 기울이며 서로 겸손하게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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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날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세례에 대한 논쟁은 거의 없는 편이지만 개혁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 사이에는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먼저 로이드 존스는 성령세례에 대해 『The Sovereign Spirit』과『성령세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서도 거듭난 신자가 될 수 있다(고전 12:3). 그리스도인을 정의하면 그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성령세례를 받은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세례를 받을 때 발생하는 것은 즉각적이며 이것은 이론이나 신앙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행동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현,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며 실제로 우리의 체험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우선적이고 필수적으로 "능력세례"이며 그 목적은 진리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자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능력과 확신을 채워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령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된 것은 동시적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쉽게 말하면 로이드 존스는 이미 중생한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역을 증언할 수 있도록 능력으로 무장시키는 것이(눅 24:49), "성령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존 스토트는 성령세례에 대해 『성령세례와 충만』에서 다른 견해를 제시합니다.  “사도행정 2장에 있는 베드로의 설교와 고린도전서 12장13절에 나오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찾고자 했던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선물"과 같은 것으로서 그것은 새 언약의 독특한 축복 중 하나이며 또한 시초적인 축복이기 때문에 그 언약에 참여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축복이다. 그것은 새 시대에 소속된다는 것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새 언약의 중보이시며 그 복의 수여자이신 주 예수님은 그분의 언약에 들어오는 모든 자에게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둘 다 주신다.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말할 때 그것은 단회적인 선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을 말할 때 우리는 이 선물이 지속적이며 갈수록 더 많이 충당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성령의 세례는 중생 이후에 받게 되는 뒤따라오는 축복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간략하게 말하면 스토트는 로이드 존스의 견해와 상반되게 성령세례는 회심 이후에 뒤따르는 후속적 경험이 아니라 중생과 일치되는 "제1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세례와 중생을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본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중생과 성령세례를 동시에 강조하는 대표적인 사람들, 벤자민 B. 위필드, 리차드 개핀, 제임스 던, 월터 C. 카이저, 프레드릭 D. 부루너, 존 스토트는 성령세례가 회심 때 일어난다고 공통적으로 주장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견해를 달리하는데, 예를 들어 제임스 던은 성령세례의 경험은 받는 자가 알 수 있다고 말하는 반면에 개핀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성령세례에 대한 바울과 누가의 신학이 같다는 점에 있어 공통된 의견을 갖습니다.  반면에 중생과 성령세례를 다르게 보는 사람들 중에 D.L. 무디, 찰스 피니, R.A. 토리, A.J. 고든, F.B. 마이어, 앤드루 머레이, 로이드 존스는 구원받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때 죄로부터 구원 얻는 것은 아니라는데 동의하면서 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성령세례를 통해 죄를 이길 힘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세례를 받고 난 후에야 죄를 이기며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놓고 서로간의 의견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공통된 한 가지 견해는 성령의 주된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일임에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사실 19세기 이전에는 성령세례에 대한 이러한 신학적 연구가 없었기 때문에 각각 나름대로 성령을 받는 방식과 성령을 받는 시기에 대해 해석을 했지만 일치된 성령론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의 일치된 교리가 없다고 해서 성령의 역사나 체험마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Eduard Schweizer는 “성령은 교리의 주체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고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중생을 성령세례로 보고 그 후에 받는 것을 성령의 충만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성령세례가 중생 이후에 체험하는 성령충만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성령으로 세례 받는 사건에 관한 일곱 구절들을(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11:16, 고전 12:13),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에 얽매인 교회가 아닌 이상 성찬식 때 가운을 입을 것인가 정장을 할 것인가, 찬양할 때 드럼을 사용할 것인지 오르간을 사용할 것인가 라는 사사로운 것들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성령세례'에 대한 용어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깊이 성령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분의 놀라운 역사와 임재를 충만하게 누리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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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오순절주의자들이나 은사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성령세례는 회심과 구분되기에 그것은 회심 후에 따라오는 경험이며, 그 첫 번째 육체적 증거는방언’이라고 주장하는 선조들의 사상을 옹호하면서 이미 거듭난 신자들에게성령세례’ 받을 것을 권장합니다그리고 오순절 사건인 사도행전 2장과 사마리아에 임한 성령의 역사( 8), 그리고 가이사랴의 고넬료 가정의 성령의 역사와( 10), 에베소의 제자들이 성령 받은 일을 내세우며( 19), 이러한 사건을 근거로 해서 교리적으로 발전시켜 왔습니다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제자들도 먼저 거듭나고 이후에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삶속에서 오순절과 같은 ‘이차적 체험’ 즉 ‘제2의 축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쉽게 말하면 성령세례는 중생과 구분되어야 하고 생명을 주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능력을 주는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을 보통으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히 체험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그리고 이들은 성령세례의 전제 조건이 ‘회심’이라고 말하면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을 수 없지만 일단 회심한 사람들 중에 어떤 조건들, 신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예를 들어 ‘죄와의 결별과 회개’, ‘순종과 기도’, 그리고 ‘인내와 믿음’ 등이 따른다고 합니다.

 

반면에 개혁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성령세례는 회심 때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고 있는데, 이들은 바울 서신에서 유일하게 성령세례에 대해 언급한 성경구절인 고린도전서 1213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성령세례’란 새 시대를 여는 단회적인 오순절 사건 이후 신자 개개인의 삶속에 회심을 통해 발생하는 사건이지 그 이후에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고린도전서 123절 말씀을 인용하여 성령으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한 몸속으로 유입되는 순간이고 이것이 바로 ‘성령세례’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오순절주의자들과 다르게 중생과 성령세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중생이 곧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며 구원 이후에 오는 성령의 또 다른 사역을 ‘성령충만’이라고 강조합니다.  요약하면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세례에 대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건 묘사적 본문, 즉 서술적 본문들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는 반면에 개혁주의자들은 이러한 서술적 본문들을 교리로 근거 삼는 것을 기피하고 오히려 교훈적 본문들, 즉 일반적인 바울의 글을 더 선호하고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였던 벤자민 B. 위필드는 칼빈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물론 이 말에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탁월한 신학자로 정평이 나있는 칼빈은 오늘날 논쟁이 심한 ‘성령세례’에 대해 사도행전 1장 주석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중생의 은총에 대하여 이야기 되는 일들을 성령이 가시적으로 보내신 것에 한정시킨다면 그것은 그릇된 일로 보인다. 그리스도께서 불의 혀 모양으로 성령을 보냈을 때에만 성령으로 베푸신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대답해 둔다. 그는 이미 사도들에게 이 성령을 주신 일이 있으며 또 마찬가지로 날마다 택함 받은 자에게 성령의 세례를 주신다.  그러나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해서는 “요약해 말한다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에게 주신 양자되는 영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특출한 은사가 최고의 상태로 첨가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 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를 ‘중생의 영’이라고 말하지만 사마리아에 임한 성령사건은 이미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부여해 주셨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칼빈은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가이사랴 고넬료 가정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에서도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고넬료가 그리스도 영에 동참하고 있었다면 우리로서는 그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완전히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가 유대인들이 경외하는 참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동시에 약속된 중보자에 대해서 아무런 얘기도 듣지 않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넬료를 아직 계시되지 않은 구속자가 가져올 구원을 소망한 옛 조상들의 범주에 집어넣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면서  “이것이 사실 이방인들의 부름에 대한 특별한 상징인 것은 바로 이 사람들 또한 언약의 무리로 선택받지 않았다면 여호와께서는 결코 이들에게 그의 영의 은사를 허용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누가가 기록하는 이 은사는 중생의 은혜와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가르침 뿐 아니라 거기에 같이 앉아 듣고 있던 자들의 신앙과 경건을 확증하셨음에 틀림없다.   쉽게 말하면 고넬료 가정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은 ‘중생의 영’이기보다는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 내려주시는 부가적인 ‘성령의 은사적’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에베소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에서는 “바울이 성령을 믿음과 결합시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을 바울이 보았을 때 그들이 가진 신앙에 관하여 더욱 정확한 것을 알아내기 위하여 그들이 성령을 받았는지 묻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교리에 대한 신뢰의 여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3:2), 묻고 있으므로 그러한 질문의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방법임을 분명히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은사들을 내려 주시는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칼빈의 이러한 해석은 처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도 베드로가 말한 ‘성령의 선물’을( 2:38/주석), 구원의 은혜보다는 ‘은사’로 해석하고 이러한 사건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요약하면 칼빈은 사도행전 1장을 제외한 네 번의 성령 강림 사건들은 이미 ‘양자의 영’을 받은 구원받은 사람들로서 구원 이후에 받는 ‘제2의 축복’, 즉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로 본 것입니다.

 

사실 칼빈의 이러한 해석은 이중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중생의 영’으로서 성령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하고(고전 12:3), 다른 하나는 Anthony D. Palma가 『The Holy Spirit』에서 “성령세례는 그리스도를 위한 능력 있는 증인의 삶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증인들에게 능력을 더하시는 것 이외도 사도행전과 똑같이 영적인 은사와 기사와 이적을 베풀게 하셔서 사역을 감당하고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다.”라고 말한 것처럼 성령세례는 ‘능력과 은사의 영’을 받는 것으로 사도행전 2, 8, 10, 19장을 이런 맥락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해석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오순절주의자들과 칼빈이 같은 점이 있다면 ‘성령세례’를 구원 이후에 받는 은사들을 동반하는 성령의 부가적인 역사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칼빈은 사도행전에 일어난 성령사건들은 사도시대 이후에는 반복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2:38/주석), 오순절주의자들은 로이드 존스가 『The Sovereign Spirit』에서 “성령세례의 결과로 성령의 은사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대로 오늘날에도 계속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반복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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