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부으심'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23.01.21 나의 간증
  2. 2023.01.08 아볼로 신학 1
  3. 2022.12.25 기름부음 사역
  4. 2022.12.11 크리스마(chrisma)
  5. 2022.12.03 엉션(unction)
  6. 2022.11.26 임파테이션(Impartation) 1
  7. 2022.11.13 기름부음 1

나의 간증

기름부으심 2023. 1. 21. 14:03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하겠지만, 나는 평상시 골방 기도(마 6:6)와 묵상 기도(창 24:63)를 즐긴다.  때로는 부르짖는 기도(렘 33:3)와 금식기도(마 6:16-18), 그리고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에는 예외 없이 통곡 기도(스 10:1)나 얍복 나루터 기도(창 32장)를 한다.  거의 죽기 살기로, 때로는 까무러칠 정도로 매달린다.  그런데 내가 사는 곳에는 마음 놓고 부르짖고 기도할 수 있는 수양관이나 기도원이 없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곳이  바다 건너 어느 작은 기도원겸 수양관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13시간을 날아 도착했다.  그리고 버스로 3시간, 택시로 45분을 더 달려서 목적지에 다다랐다.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꼭 기도를 해야 하는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원하시는 것 같았다.              

성령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금식기도원에 들어온 지 일주일째 되던 날 아침에 성경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중 주님께서 사무엘상 30장 24절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셨다.  그 구절을 하루 종일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이 구절을 떠오르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집에 있는 아내가 생각이 나면서 마음에 “너와 똑같은 은혜를 네 아내에게도 부어주겠다”라는 감동이 오는 것이었다.  마음은 편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도응답을 받고 4주간의 모든 일정을 잘 마치고 집에 돌아온 이틀 뒤 새벽기도 시간에 아내에게 기도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기도하고 싶다고 말하자 아내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내가 평상시 하지 않았던 행동으로 보였던 것 같다.  아무튼 손을 얹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하지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분명 주님께서 똑같은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이때는 나에게 있어 성령의 사역에 눈을 처음 뜨는 시기였다. 

예수의 이름으로 의심을 물리치고 매일 새벽기도 시간에 기도했지만, 일주일 다되어가는데도 아내에게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말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귀신의 속삭임을 들은 것인지 의심이 밀려왔다.  무엇보다도 기도를 할 때마다 아내의 표정이 “어디 해봐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이 주신 말씀을 붙잡고 “당신에게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거야”라고 말해주면서 일주일째 되던 날 기도할 때, 성령의 놀라운 은혜가 망부석 같은 아내에게 임하였다.  밀어서 쓰러뜨리지 않았다.  손을 가볍게 얹고 기도하는 순간 맥없이 쓰러졌다.  후에 깨달은 것이지만 나는 이것을 ‘성령 안의 안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후 아내는 지식으로만 알던 하나님을 아주 신비스럽게(?) 며칠 동안 몸과 마음으로 직접 체험을 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보고 들은 것 이상으로 나를 평가할 것 같아 여기까지만 하겠다(고후 12:6).  이 이야기는 오래전 나의 경험담이다.  의심이 밀려오고 ‘구라’ 같다는 느낌이 드는가?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을 이사야서 61장의 약속의 근거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그 약속은 성령의 권능, 즉 기름부음을 받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고’(눅 4:14), 안식일에 회당에서 청중들에게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눅 4:18).  누가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 5:17).  이 구절을 주의 깊게 눈여겨보아야 한다. 

Gerald F. Hawthome는 예수님과 성령에 관한 누가의 기사에 대해 The Presence and The Power: the Significance of the Holy Spirit in the Life and Ministry of Jesu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가에게 있어 성령은 예수와 구별되어야 하는 예수밖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런데 그 능력은 예수에게 임하여 그분 곁에 있으며,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 역사하고 그분에게 영감과 권능 모두를 덧입힌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성령의 권능과 더불어 감당하며, 성령의 권능 가운데 그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계속 나아간다”  Hawthome의 주장은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두 번째 위격으로서(요일 5:20), 자신의 존재에 기초해 초자연적인 사역을 감당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그분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요(골 1:15), 본체의 형상이시며(히 1:3),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실체시다(요 14:9).  하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요 1:1), 인성의 한계를 받아들이셔서(빌 2:6-11), 자신의 신적 능력을 빌어 병자를 고치거나 귀신을 쫓는 사역을 하지 않았다.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적 능력을 빌어 치유와 축귀 사역을 하셨다면, 나는 지금도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그분이 하나님으로서(요 1:14), 누가복음 4장 1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성령으로 충만’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 사함의 권세를 선포하신 적이 있다(막 2:1-12).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선언하는(요 10:30), 신성에 기인한 것이다(마 26:62-64).  하지만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신성을 지녔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손’(눅 11:20) 즉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온전히 계시의 약속(성경)에 의지했고(사 11:1-5), 사역에 있어 언제나 성령을 의존하셨으며(사 61:1-3), 공생애 기간 철저히 성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다(요 5:19).  Hawthome의 말을 다시 빌리면 지상사역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 성령을 의존하셨다는 것은 그분의 인성의 진정함을 보여주는(딤전 2:5), 또 하나의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 성령께서 지상사역을 감당하도록 예수님께 기름부어 세우셨다면(행 10:38), 그 동일한 성령께서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께 성령의 능력을 덧입혀 달라고 간구할 때(눅 11:13), 그분은 분명 우리의 삶에 더 큰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주실 수 있다(눅 24:49).  성경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 ‘나를 믿는 자는 나의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 14:12)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마 28:19),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며’(막 16:15) 더 큰 기적들을 행할 것이다(막 16:17-18).  이 말이 믿어지는가?  골병든 믿음이나 개떡 같은 신앙을 가지고는 절대 믿어지지 않는다(히 11:6).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성령을 필요로 하고 의탁하셨다면, 우리의 목회 사역에 있어서도 성령의 놀라운 기름부으심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 번 로뎅처럼 곰곰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우리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가?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아프면 골골하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능력이 개뿔도 없으면서 메마른 말씀만 증거 하면 ‘장땡’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름부으심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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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볼로 신학

기름부으심 2023. 1. 8. 15:17

성경에 나오는 아볼로는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로 소문나고 수많은 학자들과 철학자들을 배출한 도시, 알렉산드리아 태생으로 당대에 가장 훌륭한 교육 환경 속에서 자라나 훈련을 잘 받고 열정적으로 지역교회 목회에 힘썼던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아볼로를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칭찬한 적이 있었다(고전 4:6).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폭넓게 연구하고 구약성경에 능한 설득력 있는 웅변가였다(행 18:24).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정확하기는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완전했다.  비록 그가 박식함과 열심을 가진 탁월한 목회자이기는 했으나 오직 요한의 세례만 알 뿐이었다.  십중팔구 아볼로의 설교는 요한의 메시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리라’(마 3:2)를 조금 더 세련되게 다듬어 놓은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실 아볼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으며, 성령에 관한 어떤 지식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을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볼로는 자신의 재능과 학문, 그리고 열성적으로 말씀 전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 같다(롬 8:9, 고전 12:3).  그가 회개를 선포한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여러 교훈 및 구약의 가르침과 연계해 가르쳤지만(행 18:25), 성령의 능력 없이 그분에 대해 증거 했고, 에베소의 제자들처럼 성령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행 19:2).  다시 말해서 아볼로는 예수님에 관해 지식적으로 머리로만 알았지 그분이 성령을 보내주시고(요 16:7),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인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요 1:33).

조금 더 살펴보면 아볼로가 가지고 있는 신학에는 두 가지가 빠진 것이 있었다.  하나는 예수의 죽음(요 19:30)과 부활(요 20:19)로 이어지는 대속의 사역(히 9:26)과 그에 입각한 ‘기독론’의 구원관이다.  즉 예수가 대속적 죽음(마 20:28)을 통해 인류의 구원(요 3:15)의 그리스도가 된다는 진리의 차원에 도달하지 못했다.  다른 하나는 성경을 열심히 연구해서 신학적 지식에는 탁월했지만 영적으로 죽어 있는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시고(롬 8:11),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겔 36:26-28)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환언하면 세례 요한이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에 속한 사람이었던 것처럼(눅 16:16), 아볼로의 성경 지식은 오순절 이전 기독교 신학이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어떠한 신학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는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고린도 신자들에게 ‘내가 …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고전 9:1)라는 수사적인 질문을 던진다.  디모데에게는 무엇 때문에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를 권면하면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딤후 1:12)한다고 말한다.  빌립보서 1장에서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절)고 강조하며 죽음까지도 불사한다.  이 구절들은 바울의 확고한 결심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나타낸다.  자신이 증거 하는 복음(고전 15:1-4)에 대해 확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불신자들에게는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다.  따라서 그들이 돈과 권력, 인기, 쾌락, 특권 등, 이 세상의 가치를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삶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였으며, 그분과 살아 있는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볼로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놓쳐버렸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온전히 보여줄 수가 없었다( 18:25).  또한 그가 예수님과 함께 했었다는 증거도 얻지 못했다.  성경에 의하면  아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언어 구사력이 유창하고 열심을 다한 신학적이고 학문적인 설교자였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예수님을 증거 한다고 성경은 말하는데( 15:26), 그 성령이 빠진 상태에서 말씀을 가르쳤다.  여기서 나타난 열매가 무엇인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방문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하여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기 전까지 에베소 지방에는 성령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전무후무했다( 19:1-7).  이런 일이 가능한가?  성령 없이 예수를 믿는 것 말이다(고전 12:3).  얼마든지 가능하다.  당시 에베소에는 장막을 만드는 제조업자로서 바울을 보았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있었다(행 18:1-3).  그들은 아볼로의 설교를 듣자 그의 메시지 속에 무엇인가 불완전한 부분들이 있음을 이내 발견하였다.  결국 그들은 아볼로를 데려다가 복음의 진수인 ‘하나님의 도’,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이루어진 모든 일들을 자세히 풀어 가르쳤다( 19:26).

우리는 아볼로가 이러한 경험을 한 후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하지만 그의 목회가 새로운 기쁨과 능력을 입게 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얼마 후 아가야 지방에 나타난 그의 모습에서 언뜻 볼 수 있듯이, 성경은 아볼로에 대해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행 18:27).  복음의 핵심을 깨닫고 나서 더 완전한 신학 체계를 구비한 아볼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자신이 알고 있던 성경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심을 설득력 있고 확신 있게 증거 했다는 것이다(행 18:28).     

이때로부터 수많은 세월이 흘러 기독교는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내주시고(요 16:7), 교회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오시는 성령을 거스려(행 7:51) 욕되게 하며(히 10:29) 슬프게 만들고 있는 것(엡 4:30)이 현대 교회의 실정이었다.  오늘날 교회 속에서 아볼로와 같이 ‘요한의 물세례’만 아는 시대에 뒤떨어진 목사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들 중에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자기도 이해하기 어려운 원어를 들먹거리며 거의 ‘신들린 상태’에서 열정적으로 예수를 전한다.  오직 예수! 얼마나 듣기 좋은가?  한 술 더 뜨는 사람은 고린도전서 4장 6절 말씀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는 구절을 인용한다.  성경적이지 않는가?  문제는 인간이 조류과에 속한 것도 아닌데, ‘주둥이’만 살아있어 능력이 없는 죽은 예수만 전한다는 것이다(히 4:12).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여기서 Gordon Fee의 말을 빌리고 싶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지만 성령이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솔직히 요한의 물세례만을 아는 목사에게 ‘기름부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신자를 앞에 놓고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예정론’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고전 2:14).  만약 성령의 기름부음 없이 설교를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아마 아볼로처럼 성경지식은 있을지 몰라도 예수님에 대한 확신과 바울처럼 따르는 표적으로 열매 맺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경험자로서 말하고 싶은 것은 설교가 죽을 맛(?)이고, 교회 안에 병든 신자들이 많은데 담임목사로서 그들에게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도너스나 먹고 갈려나?   

그렇다면 바울은 어떠한 열매를 맺었는가?  로마서 15장에 보면 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베푼 표적(semeia)과 사람의 관심을 사로잡기 위해 기사(terata)를 행했다(18절).  이 일로 인하여 그는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전했다(19절).  또한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 일어난 회심의 역사가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고전 2:4).  더 나아가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증거 한다(살전 1:5).  바울의 설교만으로는 아무도 믿도록 설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과 결합되면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믿게 되고, 그들의 마음과 삶을 그리스도께 바치게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이런 능력에는 반드시 기적도 포함되어 있다(행 14:3, 16:17-18, 19:11-12, 롬 15:17-19, 고후 12:12).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볼로처럼 예수를 지겹게 외쳐도 성령이 빠지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이다.  내가 먹어봐서 아는데 도루묵은 맛이 없다.  영혼을 건조하게 만드는 메마른 설교 말이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  “무슨 소리야!  우리는 오직 예수야!”  이런 골빈 소리로 떠드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이단이나 사이비 먹사들도 ‘예수’라는 명사를 사용한다.  이들이 주로 우려먹는 성경 말씀이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는 구절이다.  나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아무리 강조해도 잘못된 것이 없다고 믿는 목사다(고전 2:2).  하지만 이것은 부활을 믿지 않아도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속이는 것과 같다(롬 10:9).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의심 없이 믿는다(갈 3:13).  다 끝난 것인가?  내 죄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죽음의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영생을 얻는 것 말이다.  그래서 부활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요 11:25-26).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 이렇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히 5:11) 여기까지만 하겠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령을 거스리며 예수를 증거 하는 반쪽짜리 신학을 가진 목사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목사를 만나면 가룟 유다처럼 영혼을 마귀에게 받치는 꼴이 된다(요 13:2).  바리새인보다 더 한 지옥의 자식이 된다(마 23:15).  한 마디로 인생을 조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많이 선생 되지 말라’고 경고한다(약 3:1).      

이 기름부음을 이야기하려고 아볼로가 처음 가졌던 절름발이 신학을 예로 들어 지금까지 성경적 ‘썰’((說)을 풀었다.  한 가지만큼은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기름부음’과 마찬가지로 ‘기름부음 전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만 행하시는 일이기에 전적으로 그분의 기름 부으심에 달려 있다.  바울은 성령의 능력이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다(눅 4:18, 행 10:38).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고후 1:21).  즉, 기름부음은 성경적일 뿐 아니라(요일 2:20, 27)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기름부음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그분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이다. 

사족이긴 하지만, 나는 목사가 먼저 은혜를 받아야 평신도들이 은혜를 받는다고 믿는다.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서 겸손히 배운 것처럼 목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쓰레기 같은 자존심, 의심의 씨앗 불신앙, 자기 성취감인 교만, 성령의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쓴 뿌리(악독)를 버리고 기름부음을 사모한다면 혹시 누가 아는가 다른 성령의 사역자나, 혹은 개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역사할지 말이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한 목사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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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부음 사역

기름부으심 2022. 12. 25. 14:48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 있거나 혹은 귀신이 들려 있는 상태에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떠드는 소리를 가지고 ‘기름부음’에 대해 비판적이고 폄하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교인들 중에 귀신이 들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이것을 놓칠 리 만무한 이단 사냥꾼들, 즉 신학적 논쟁에 열을 올리는 목사들은 먹이를 만난 하이에나처럼 ‘기름부음’에 대해 비판적이고 공격적으로 글을 쓰거나 어떤 말 같지 않는 주장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나도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귀신 들려 떠드는 이 사람이 진정한 기름부으심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귀신 들린 자 한 사람이 떠드는 소리를 가지고 기름부음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왜냐하면 세상에는 ‘국민에게 짐 지우는 패륜당’처럼 ‘신구개하’(信口開河) 인간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일부 몰상식한 사람들만이 그러한 행동을 한다.  만약 어떤 목회자가 돈 문제, 혹은 이성 문제, 아니면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다고 해서 그 한 사람을 통해 모든 목사를 똑같이 매도할 수는 없다.  개중에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며(빌 2:12) 맡겨진 사역에 충성하는 목회자들이 있다(고전 4:2).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신비주의적 망상에 걸려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만을 가지고 성령의 역사 전체를 거부하거나 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사실 성령의 기름부음 사역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주어진 목회에는 관심이 없고 눈만 뜨면, 입만 열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해’(행 7:51) 보고 듣는 것마다 늘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신학적으로 비판한다.  대단한 착각은 말이 심판의 근거가 되는 것도 모르고(마 12:36-37), 이들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 9:6-8)라는 말씀을 망각한 채,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나팔을 불어댄다(마 3:7-10).  그러나 열매가 없이(마 7:16) 하는 짓들을 보면(막 3:20-30, 눅 11:14-23) 늘 성령을 대적하는(눅 12:10) 거듭나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마 12:22-37).  아니, 거듭나지 않았다.

사족이긴 하지만 나는 구원받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않는 목사다(눅 13:23-24).  이것은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갈 2:16).  내가 배운 성경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엡 2:8, 딛 3:5).  물론 세상에는 개나 소나 쉽게 대통령 되고 장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좇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면(눅 9:57-62)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마 7:13-14).    

사도 바울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라는 격렬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14절).  이 단어는 하나님의 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광적으로,  때로는 난폭할 정도로 지키는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표현이다.  그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까지 하나님 없이 스스로 만든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던 과대망상증 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갈 1:14).  중생의 체험이 없었던 하이퍼 칼빈주의자(Hyper Calvinism)다.  그가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배설물 같은 더러운 신학이었다(행 9:4).  마찬가지로 목사라도 거듭나지 않는다면 ‘쓰레기’(빌 3:8) 같은 신학으로 하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다(딤전 1:13).  이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오래전 후배 목회자 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런데 신문에서 보도된 바에 의하면 당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심장마비가 아닌 자살로 판명되었다.  이 사람은 바른 진리를 전한다는 신념하에 그렇게 성령의 사역에 대해 늘 부정적이고 대적하는 설교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읽을 가치도 없지만 그의 설교를 글로 쓴 것도 있고,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개혁교단에 소속되었지만 신앙 노선은 완전히 달랐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성경이 완성되면서 더 이상 기적이 필요 없고 우리가 짊어져야 할 질병과 죽음, 그리고 귀신 들림 같은 사망의 증상들은 예수님께서 짊어지셨기 때문에 오늘날 병 고치는 사람들은 귀신 들린 자일뿐 아니라, 마태복음 12장 39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하는 사람 역시 사탄에게 붙들려 있다고 주장한다.  분별력이 없는 교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이런 설교에(딤후 4:3) ‘아멘’으로 화답한다.  영적으로 죽어 있거나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행하는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싫어하는 일인지 잘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나는 그가 설교를 하면서 바리새인처럼(막 3:22-30)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엡 4:30) 거스리는 가운데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히 10:29).  마치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능력을 성령이 아니라 사탄에게 돌림으로써 성령을 훼방하듯 말이다(마 12:24).  이것은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라 오해가 없기 바란다.  물론 성령의 사역을 대적하는 설교를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일찍 데려갔다고는 말할 수 없다(삼상 2:6).  왜냐하면 지금도 성령을 거스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회자들 중에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 개혁교단에 속한 것 하나만을 가지고 개혁주의자인 것처럼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도 큰 병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중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 운동의 모태가 된 성령의 역사를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어떤 규칙들을 만들어 내려하는 인간의 성향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식에 관하여 어떤 것들을 알고 나면 자기 나름대로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원칙을 세운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시는 것처럼 그러한 원칙들을 강요한다.  마치 광화문에서 집회하는 사이비 목사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태극기 부대 늙은이들을 모아 놓고 이태원 참사가 북한의 공작이라고 세뇌시키듯 말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라는 말씀처럼(사 55:8) 하나님께서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하실 때 이들은 그것을 거부하거나 부정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 보면 기독교 초기의 히브라인들 역시 이러한 함정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과 심지어 이방인까지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히브리인이 되어야 하며 히브리인 관습을 따라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15:5).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의 문화를 사용하셨다는 것이 이유였고, 또한 이것이 하나님께 관한 그들의 규칙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규칙들을 깨시고 할례고 나발(?)이고, 히브리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다( 15:1-21).

여기서 John Stott가 『Baptism and Fullness』에서 한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나는 은사주의에 대해 그동안 내가 지나치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 왔던 것과 그 운동의 지도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일을 무척 꺼려왔던 점에서 내가 미성숙했음을 고백하는 것이 옳다고 느꼈다. 성경이 보여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풍성하고 다채로운 다양성을 지니신 분이다. 그분은 모든 인간과 모든 풀잎, 모든 눈송이를 제각각 다르게 만드셨다. 그래서 나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모든 정형화된 것들에 대해 더 거부감을 느끼게 됨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특정한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급급한 것 같다. 참으로 슬픈 현상이 아닌가?”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이유가 그 사람의 죄인지 부모의 죄인지를 묻고 있었다(요 9:2).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것과는 상관없이 오직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신학적인 것만을 문제 삼았다(요 9:16).  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의 잣대로 소경이 치유받은 엄청난 기적(요 9:18)과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믿지 않았다(요 9:22).  오히려 소경을 치유한 주님을 죄인으로 몰아세우기에 급급했다(요 9:24).  반면에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담대히 간증할 수 있었다(요 9:25).

바리새인들이 문제가 무엇인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지식’, 즉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과 안식일에 율법을 어긴다는 표면적인 모습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류금지를 결의한 것이다(요 9:22-23).  이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던 유대적 세계관에서 나왔다(갈 1:14).  오늘날에는 이러한 것들이 교회의 죽은 전통과 제도주의, 그리고 골빈 신학에서 나온다.  만약 이들이 바울처럼 자신이 배운 신학을 ‘오물’로 여겼다면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빌 3:7-9).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배운 신학적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 소경이 체험한 그 증거를 무시하고 스스로 소경으로 남아 있기를 원했다(요 9:39-40).    

꼭 기억하길 바란다.  메시지 전달자에 대한 거부는(심지어 성자 하나님께 대한 것일지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분을 거부하는 것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마 12:32).  성령의 역사에 대한 고의적이고 지속적인 거부는 신성모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마 12:31).  이 죄는 용서받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완전히 도말(塗抹)된다(요일 1:7).

지금 이 시대는 육신의 눈은 떴지만 영적으로 소경 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Francis of Assisi는 말한다.  “지극히 높으시며 영화로우신 하나님이여 내 마음의 어두움을 밝히소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가져야 할 영적인 안목을 설명하신 적이 있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마 6:22-23).  특별히 성령의 기름부음 사역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 말이다.  이들은 아볼로처럼 ‘반쪽짜리’ 성경지식을(행 18:24-26) 끝까지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기 때문에 선지자 요엘이 말한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다(행 2: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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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고’(고전 12:3),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는 말씀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다.  더 나아가 우리는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고전 1:7),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도 받았다(엡 1:3).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고전 14:1),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고’(고전 12:31), 에베소 교인들에게도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고 명령한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절대적인 의미에서 다 받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영적인 축복을 받기는 했지만 항상 충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의해 은사들이 각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믿는다(롬 12:6, 약 1:17, 엡 4:7, 11, 고전 12:11).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민수기 11장 17, 25-26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사람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것인가 아니면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하고(신 34:9),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간청한 것 같이(왕하 2:9) 사람을 통해 주어지는 것인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반드시 사람을 통해 성령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나누어 주신다(히 2:4).  즉 성경의 말씀대로 사도를 통해(롬 1:11) 기도하는 대로(고후 1:11) 후회함이 없이(롬 11:29) 각 사람에게 은혜로 주어진다(롬 12:6).    

한 가지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에베소서 2장 8-10절 말씀을 들먹거리며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라고 판에 박힌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나 역시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 깨끗이 씻어 거듭나게 하시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딛 3:5)는 성경 말씀을 조금도 의심 없이 믿는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셨느냐는 것이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처럼 직접 불러주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는가?(행 9장) 아니면  목사, 전도자, 집사, 이웃집 사람, 가족, 친구들을 통해 은혜로 불러주신 것인가?(요 6:44).  목사를 세우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 일을 행하고 계시다는 것이다(마 28:19-20, 행 13:1-3).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받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냄을 받지 아니하면 어찌 전파하리요’(롬 10:14-15)라고 말한 것처럼 나다나엘이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다(요 1:43-48).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손을 얹는 종교적 행위인 안수는 어떠한가?(막 10:16, 눅 4:40, 행 8:17, 13:2-3).  바울이 디모데에게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듯하게’(딤후 1:6) 즉 꺼져가는 “불을 다시 타오르게” 한다는 것은 그가 성직을 위임받을 때 받았던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다시 불 붙여 살게 한다는 뜻이다.  어떠한 방식으로 불 타오르게 하는가?  안수를 통한 임파테이션이다.  사실 우리가 집회에 참석했을 때 그 누군가가 임파테이션을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쓰임 받게 되면 누구도 예외로 두시지 않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누구에게든지 부으실 수 있다.  보통은 골방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기름부음(chrisma)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집회 군중 속에서 만지신다.       

구세군 창설자인 William Booth는 말한다.  “불은 꺼지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꺼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의 능력을 한번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달리 말하면 누구든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 중에 주일날 말씀 한 번 듣고 1년간 ‘열중쉬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열중쉬어’ 한 마디를 못해 완벽한 3 무(무능, 무지, 무식)를 가진 인간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기름부음을 인정하는 것의 기본이다.  우리는 은사가 식어지고 사명 의식이 희미해질 때, 다시 은혜를 받아 은사를 불타게 하여야 한다.  기름부음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어렵지 않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는 말씀처럼 주어진 기름부음 안에 살 때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다.  만약 기름부음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목회를 열심히 하지만 피로와 탈진, 그리고 영적 무기력에 쉽게 빠진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적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깨닫지 못하지만(고전 2:14) 영적인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고 있다.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삶 속에서는 바리새인 같이 위선자(마 23:27)의 모습으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통해 은사가 나타나거나, 혹은 남들보다 설교를 잘하고, 신학적으로 잘 무장되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무섭고 두려운 일은 없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큼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다고 속단하는 경우다(마 26:31-35).  성령과 무관하게 병 고침의 역사가 나타나고, 설교를 할 때마다 신자들로 하여금 ‘아멘’ 혹은 “은혜를 받았다”라는 말을 들으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착각이다.  이것은 단지 거짓된 망상에 불과한 것이고,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 후회하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롬 11:29).       

나는 오래전 성령의 사역에 눈을 뜨고 집회에 참석할 때마다 말씀을 증거하고 안수를 받는 시간에 한 번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받기 원했다.  여러 집회를 참석해 보았지만, 특별히 Randy Clark과 Reinhard Bonnke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했을 때, 안수하는 그들을 통해 내게로 흘러 들어오길를 간절히 바랐다.  이 기름 부으심을 받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준비하고 사모했는지 모른다.  자동차가 기름을 한 번 넣고 일평생 탈 수 없는 것처럼 기름 부으심을 한 번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엡 5:18).  

그러나 사람들 중에 은사를 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고(고전 12:7, 11), 사역자가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개인적으로 은사 내리기를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팔을 불어댄다.  어떻게 성령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이단 사냥꾼들이 먹이 사냥을 위해 상투적으로 꺼내 쓰는 골빈 소리다.  만약 이들이 성경에서 특정 구절을 들어 자기해석(eisegesis)을 하는 데 사용한다면 바리새인(마 23:33)이 성경을 곡해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마 15:9).  참으로 두려운 것은 이들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해(행 7:51) 항상 성령을 대적하고 궤변 같은  가설(假說)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정말, 피조물인 인간이 인격을 갖고 계신 성령 하나님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가?  간혹 신비주의적 중증 환자에 가까운 미친놈(?)이 있기는 하다.  브라질에도 있고, 광화문에도 있다.  하지만 성령을 마음대로 부린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말씀을 잘못 이해한 결과이고 반쪽짜리 성경 지식이다. 

꼭 기억하길 바란다.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변의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성령을 독점하거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점유할 수 없다.   바람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요 3:8) 그분은 우리와 타협하실 위치에 계신 분이 아니며, 우리에게 매수될 분도 아니고, 프랜차이즈 체인 시스템처럼 라이선스(license) 를 함부로 남발하시는 분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분을 공경하고 존중해야 하며, 그분이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돌 같이 굳은 완악한 마음을 제거하고 겸손하게 은혜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따라가야지 그분께서 우리에게 맞추시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고, 농사꾼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간청하고, 영적 아버지인 바울이 디모데에게 안수하는 것이 정신 나간 짓이 아닌 것처럼 기름 부으심이 사역자의 손을 통해 흘러 나가는 것은 하나님이 즐겨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오늘날 성령의 강한 기름부음을 받은 사역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은사를 내리시기도 하고 또한 가지고 있는 은사를 더욱 강하게 다지는데 도움이 되게도 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은 자신이 뜻하시는 대로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고(엡 1:11),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신다’(시 103:19).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과 그분의 뜻이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다는 것들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얼마든지 슬프게 할 수 있고(엡 4:30), 또한 기쁘게 할 수 있듯이(시 147:11),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히스기야(왕하 20:2)나 베드로처럼(행 12:5), 그분의 뜻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어도 그분은 어지럽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과부처럼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지(눅 18:7) 그것도 정신 나간 일이 아닌가?(마 6:6, 9).  그냥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내버려 두시고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통반장 다 하시면 되는데 말이다. 

성경은 두 가지, 즉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기도가 그분의 뜻에 미치는 영향 모두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신비로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자유의지를 가진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듯이(창 216-17), 우리는 마음에 사모하고(고전 14:39) 있는 성령의 은사를 위해 구하거나(고전 14:13), 상대방을 놓고 기도해 줄 때 기름부음이 흘러나갈 수 있고(약 5:14-16),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얼마든지 돌릴 수 있다(마 21:22).  결론이 무엇인가?  안수를 통한 기름 부으심은 다양한 것을 좋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고전 12:11), 신비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것은 받아본 자만 안다(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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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션(unction)

기름부으심 2022. 12. 3. 13:54

우리들이 사용하는 단어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뜻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중 하나가 ‘기름부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unction’이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Princess Diana 장례식 때 불러진 ‘The King of Love My Shepherd Is’라는 찬양에 나타나는데, 아마 요한일서 2장 20절에서 이 단어(KJV)를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unction과 유사한 anointing이란 단어 역시 헬라어 chrisma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단순히 ‘기름을 바르다’이다.    

‘기름부음’(chrisma)은 보통 사람의 머리에 특별한 올리브기름을 붓는 것을 가리킨다.  ‘chrisma’는 헬라어 ‘chrio’에서 파생된 것으로 ‘메시아’ 혹은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의 ‘Christ’의 어근이다.  이 기름은 왕들과 특별한 사역자들을 성별 하는 데 사용되었고(삼상 16:1, 13), 또 병든 자가 있을 때에 교회의 장로들이 기름을 사용하기도 했다(약 5:14).  요한일서 2장 20절과 27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chrisma’라는 단어는 개인의 강한 개성을 말하는 ‘charisma’, 혹은 성령의 은사들을 지칭하는 ‘charismata’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단어는 모두 기름 부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구약에서 기름 부음은 단순히 성별(聖別)이나 특별한 목적을 위해 따로 떼어 두는 것을 의미하는데, 최소한 다음과 같은 맥락으로 나타난다.  첫째로, 올리브에 몰약(myrrh)과 육계(sweet cinnamon)와 창포(sweet calamus), 그리고 계피(cassia) 등의 향을 섞어 만든 기름과 관련(출 30:22-25)이 있는데, 이 기름 부음은 거룩한 물건들에 대한 것이었다(출 30:26-29).  둘째로, 제사장(레 8:10-13)과 왕을 세울 때(삼상 10:1) 사용되었다. 

셋째로,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 부은 후에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했으며(삼상 10:6) 새 마음을 주셔서(삼상 10:9) 그가 예언하기를 시작한 것처럼(삼상 10:10-11) 성령의 임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당시 사울은 왕이었지만 여호와의 신은 이미 그를 떠났다(삼상 16:14).  하지만 다윗에게는 왕관은 없었지만 기름 부음 즉, 성령의 임재하심이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된 것’(삼 16:13)처럼 실제로 성령께서 친히 임하셨다는 것이다.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하나의 단순한 상징 이상이었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사탄을 제압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시며 보내실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막 6:13).  그러므로 기름은 상징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믿음의 기도가 병든 자를 낫게 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기름을 바르는 행동과 무관하지 않았다(약 5:14-15).

마지막으로, 이 단어는 시편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실제로 기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사용되었다.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시 105:15).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보호하시면서 ‘기름 부은 받은 자’, ‘나의 선지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셨고, 아비멜렉에게는 그를 해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창 20:7).  선지자가 실제로 기름부음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왕상 19:16), 이 말씀 속에서 아브라함이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증거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불렀다.  구약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러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신약은 어떠한가?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하게 사도적 교회에 있어 ‘안수’가 교훈의 터, 즉 ‘그리스도 도의 초보’라고 언급함으로써 기독교 공동체의 의식과 관련된 신앙생활의 기본임을 나타내고 있다(히 6:1-3).  신약 성경에서는 개인을 향한 은혜의 수단인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을 예수님(마 8:3, 막 5:23, 6:5, 8:23-25, 눅 4:40, 13:13)과 초대 교회의 사역에서(행 4:29-30) 사용되었다(행 14:3).  또 다른 목적으로는 특정한 사역과 섬김의 큰 능력으로 무장될 수 있기를 하나님께 구한 경우가 있다.  처음 집사들이 임명되었을 때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했고(행 6:6),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 ‘이에 금식하고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냈다(행 13:3).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성령의 임재에 대해 정해진 패턴이 나와 있지 않고, 신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성령을 받았다.  어떤 경우에는 안수와 상관없이 세례 받을 때 성령을 받기도 했고(행 2:38), 어떤 경우에는 세례를 받은 이후에 사도들이 안수할 때 성령을 받았으며(행 8:14-17), 때로는 세례를 받기 이전에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령을 받기도 했다(행 10:44-48). 

사울의 회심을 묘사하고 있는 사도행전 9장에서의 가장 중심 된 인물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울과 아나니아에게 초점을 맞추어 간략히 논하고 싶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의 불가항력적 만남은 신적 기원이며 신적 계시에 의한 것이었다(고후 1:1).  그가 이단자들을 뒤쫓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빛과 소리를 통한 신적 현현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부활하신 예수’라는 사실이다(행 9:3-5).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던 것이 아니라 핍박하고 있던 것이었다.  사울은 삼일 동안 시력을 잃은 상태에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금한 채 기도하고 있었다(행 9:8-11).    

다메섹 유다의 집에 있던 사울을 방문한 아나니아는 예수께서 사울에게 보여 주신 환상대로(행 9:12) 안수하며 기도하였다(행 9:17).   사울은 영적으로 고침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신체적 치유를 경험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성령으로 충만하였다.  이 치유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행 22:12) 아나니아의 안수에서 왔다(행 9:12).  예수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동반될 표적 중의 하나로서 ‘저들이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막 16:18)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안수가 치유의 필수 조건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치유의 어루만짐을 통해 그의 능력을 베풀기 위해 안수를 선택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안수를 통하지 않고 말씀만을 가지고(마 8:16) 얼마든지 시공간을 초월해 치유하시거나(요 4:46-54) 우리들 보기에 전혀 성경적이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실 수도 있다.  예를 든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베드로를 통로로 사용해서 그림자를 치유의 도구로 사용하신 적도 있었고(행 5:15), 바울의 몸에 있는 손수권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치유를 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귀신이 떠나갔다(행 19:12).  이런 일들은 골빈 신학으로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지금도 이러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가?  나는 히브리서 13장 8절 말씀을 믿는다.  만약 바리새인처럼 성령을 대적하고(마 12:22-37) 교회의 죽은 전통과 제도를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마 15:1-9)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그분의 역사가 나타난다(롬 12:3).  ‘바람이 임의로 불듯이’(요 3:8), 성령의 역사하심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위의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목도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위협과 살기를 띠고(행 9:1),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 하며(갈 1:13),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행 22:4), 핍박자였던(딤전 1:13), 사울이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한 능력 사역을 받아들일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사흘 동안 회개하면서 생각할 것이 많았을 것이다.  사울은 자신이 배운 가말리엘 신학(행 22:3)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이단 사냥질(행 24:5)에 열을 올렸던 사람이다(행 9:1-2).  그는 3일간 금식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비뚤어진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소행(행 7:58-8:3)이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인 대항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행 9:4-5).  아나니아가 도착했을 때, 평상시에 하지 않았던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다(행 9:11).  금식도 안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데 필수 조건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요한 영적 연습이다.  이렇게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울은 후에 에베소 교인들에게 안수했을 때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행 19:6). 

기름 부음의 전이를 통해 은사를 준 경우를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 예언의 말씀으로 인해 받은 것’(딤전 4:14)을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일어나게’ 한다고 말했다(딤후 1:6).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는 신령한 은사, 즉 ‘성령의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도의 자격으로(엡 1:1), 그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줄 수 있다고 말한다(롬 1:11). 

“은사를 나누어 준다”  바울에게 이단의 냄새가 나지 않는가?  이 구절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정통’과 ‘이단’으로 갈라진다.  그러면 바울이 나눠 주고자 했던 신령한 은사가 무엇인가?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가르침’(롬 12:7)이나 ‘권고’라고 말한다.  또 다른 해석은 Alfred Plummer가 말한 것처럼 사역자가 되게 하는 ‘권위’(롬 12:8)와 ‘통찰력’, 즉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직임’이라고 말한다.  St. Bernard는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이것은 평범한 은사가 아니라 목회 직무에 조화시키기 위해 받은 특별한 은혜다”  그 외 복음 전도를 위한 은사, 혹은 교회를 다스리는 은사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령의 사역에 열려 있는 목회자와 신학자들 빼놓고 한결 같이 ‘신령한 은사’를 고린도전서 12장 8-10, 28-30절, 또는 로마서 12장 6-8절과 에베소서 4장에 나열된 성령의 은사들 중 하나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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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가 한 번은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간 적이 있었다. 그때에 런던의 Clapham이라는 동네에서 한 집을 쳐다보았는데 문패에 George Jeffeys라고 적혀 있었다. 그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John Wesley 이후로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부흥 전도자라고 여기는 자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가 물었다. 그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거기서 그는 나와 함께 기도했는데 성경적 표현을 쓴다면, 그것은 마치 그의 겉옷이 내 위에 임하는 것 같았다. 나는 거의 기름부음을 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한다. Jeffeys를 만나고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해 준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바로 그날은 내가 하나님의 전임 사역자로 일하기 위해 Swansea에 위치한 바이블 칼리지를 떠났던 날이었다. 하나님은 나를 그분의 사역으로 부르시면서 이처럼 나를 덮으시는 특별한 경험을 주신 것 같다.”

이 이야기는 아프리카 복음 전도자 Reinhard Bonnke의 『Mighty Manifestations』에서 나오는 간증이다.  누군가 “개 풀 뜯어먹는 소리”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부끄러운 과거이지만, 나 역시 이 말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심한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낸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 영적 상태는 ‘영적 소경’을 넘어 ‘영적 귀머거리’로 중증환자에 가까웠다.  사실 기름부음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수 있고, 때로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성령께서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을 열어 주시기까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마 13:14). 

Bonnke의 글을 접하면서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은 ‘기름부음’ 즉,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고후 1:21) 것이 과연 성경적이냐는 것이다.  진정한 부흥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열매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기름부음의 전이가 성경적인가?”  혹은 “귀신들의 장난이 아닌가?”  같은 질문들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광범위한 주장들과 함께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성경을 보존하는 일보다 더 높은 우선수위는 없다고 말하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분명 성경적이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사도 운동과 연관시키거나 아니면 이단으로 몰아세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Bonnke는 기름부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철저히 성경적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자들은 기름부음을 받아야만 했다. 신약성경에서 이것은 모든 신자들에게 성령으로 대치되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안수함으로 기름부음을 주겠다고 제안할 때에 우리는 그렇게 심하게 반대할 필요가 없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일회성의 기름부음(An Anointing)과 같은 것은 없고, 오직 그 기름부음(The Anointing)만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신학적 개념, 즉 성령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움이나 능력을 구하는 기도의 의미로 사용된다면 우리는 용어의 사용에 관해 너무 엄격할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한다. 

Bonnke가 말한 모든 것이 다 맞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견해는 비판이나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Hyena 기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될지도 모르겠다.  주어진 목회에 충성하기보다는 먹잇감(신학적 논쟁)을 찾아다니는 목사들은 누군가 기름부음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면 거침없이 이단이라고 떠들어 댄다.  내가 목회자로서 지금까지 들은 것들 중 가장 끔찍했던 것은 이단 사냥꾼들이 떠들어 대는 골빈 소리들이 아니다.   정말 소름이 끼치고 두려운 것은 “성령께서 기독교 공동체인 교회를 떠나신다 해도 오늘날 교회 안에서 하는 일들의 90퍼센트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성령 하나님의 개입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적 활동만을 해대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계 3:1)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런 교회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케 하는 능력을 가진 성령의 ‘기름부음’이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개인이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는 것에 관한 원칙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기름부으심은 어떤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들 또는 성령의 충만한 능력이었을 수 있다.  Reinhard Bonnke와 R. T. Kendall은 기름부음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하면서 요한일서 2장 27절 말씀을 인용하여 ‘기름부음’은 성령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 즉, “처음 분과 같은 다른 보혜사’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요 14:16).  이것은 예수님이 첫 번째 ‘보혜사’이시고(요일 2:1) 성령께서 그와 같은 ‘보혜사이실 것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신비이긴 하지만 기름부음은 신자 각자의 삶 속에 계신 성령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요일 2:20). 

‘은사’와 ‘기름부음’은 때로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구약에 나오는 사울 왕이 버림을 받았으나(삼상 16:1) 그는 여전히 기름부음 받은 자(삼상 24:6)로 불렸던 것처럼 기름부음이라는 말은 한 가지 의미 이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경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듯이, 이러한 기름부음이 안수를 통하여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의 전이를 받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다리는 방법도 있기 때문이다. 

중남미에서 ‘임파테이션’(Impartation)이라는 영어 단어의 가장 좋은 번역을 찾는다면 ‘기름 부음의 전이’이다.  이 개념에 관련된 첫 번째 근거를 민수기 11장 16-17절에서 볼 수 있다.  이 구절에서 모세가 장로들에게 안수를 했다는 말은 없다.  그러나 기름부음의 전이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Philip J. Budd는 이 구절을 가지고 열왕기하 2장 9-10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모세가 받은 유산(endowment)은 양적인 것으로 생각되며 장로 칠십 인에게 나누어지도록 되어 있었다”라고 해석한다.  여기서 임파테이션이 외적인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표적에 의해 일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성령의 본성에 일치하는 방법으로써 내면적으로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이 구절에서 증명되는 원칙은 기름부음의 전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다.    

모세의 후계자에 대한 신명기의 마지막 증거인 34장 9절 말씀은 성경의 다음 책으로 넘어가는 데 필요한 과도적 단계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도 임파테이션을 찾아볼 수 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게 임하였다고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안수는 기도에 수반되는 행동으로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으로 선발하여 그를 위해 공개적으로 특별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이미 모세는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민 27:18).  그것은 마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는 모세의 기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인해 성령 충만했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듯하다. 

또 다른 사례는 열왕기하 2장 9-15절에서 찾을 수 있다.  엘리야의 기름부음이 엘리사에게 전이된 것을 기록한 구절이다.  이 말씀은 기름부음이 다른 사람에게도 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당신이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라고 간청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왜 하나님께 직접 구하지 않고 엘리야에게 구했는가 하는 것이다.  엘리야는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약 5:17).  그러나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엘리야의 인간적 영력(靈力)을 구한 것이 아니라 스승을 통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신(神)을 구하였던 것이다.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라고 말할 때(왕하 2:15), 그것은 문자 그대로 엘리사가 엘리야라는 인간의 영적 능력을 전수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에게서 보았던 능력이 매우 비슷한 역사를 하나님의 성령께서 엘리사를 통하여서도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기름부음의 전이는 분명히 성경에 기록된 것이며,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사건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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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부음

기름부으심 2022. 11. 13. 16:21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행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직무를 행할 사람, 즉 제사장(출 29:7, 30:30, 40:15)과 선지자(왕상 19:16), 그리고 왕(삼상 10:1, 16:13-14, 단 9:4)을 세울 때, 그들을 불러 거룩하게 구별시키고 기름을 부었다.  다른 하나는 성막에서 사용될 평범한 물건들을 거룩하게 구별할 때 기름을 발랐다(출 40:9-11).  여기서 기름을 부는 것과 바르는 것은 이 물건은 하나님의 것이며, 이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것으로 온전히 받쳐지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사용하는 기름은 아무 기름이나 붓거나 바르지 않았고, 아주 특별한 기름을 만들어 사용하게 하셨는데 그것을 ‘관유’라고 부르며, 그 의미는 “붓는 기름”이라는 뜻이다(출 30:31).  물론 물건이나 사람 몸에 붓는 기름 자체에 어떠한 특별한 신비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하셨다는 사실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단지 이것이 기름일 뿐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은 기름을 만드는 방법을 비밀에 부치지 않고 누구든지 다 알도록 공개하셨다(출 30:22-25).  만약 하나님께서 그 방법을 알리지 않으셨다면 사람들은 마치 그 기름 자체에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신비스러운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기름부음을 통해 나타내는 의미는 아주 특별했다.  그것은 “이제부터 이 물건이나 사람은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인을 치시는 것이기에( 1:13)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8:10-12).  이렇게 하나님께서 몇몇 물건과 사람들에게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신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지만( 4:11) 그들을 특별하게 불러서 은혜의 방편으로 사용하기 위한 표시로 기름을 부으신 것이다.  쉽게 말하면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과 물건들은 구별되었기에 다른 용도로 사용할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맥락이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구별하셨다.  물론 여리고 성에 기름 부으신 것은 아니지만 죄의 상징이었던 이 성을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게 사용하기를 원하셨기에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고 모든 물건에 손대는 자는 똑같이 받쳐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말씀대로 성은 완전히 멸망을 당했고 물건에 손댄 아간과 그의 식구들도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6-7).   사건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절대로 손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구별시킨 것은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고 오직 그분만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8:10-12).

그렇다면 기름부음이 없는 장막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만약 기름부음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의 천막에 불과할 것이고 증거궤를 비롯해서 상, 등대, 분향단, 번제단, 물두멍과 받침대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람에 대해서도 만약 기름부으심이 없다면 그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28:41, 29:7-9).  달리 말하면 기름부음이 교회 안에 없으면 분명히 교회는 교회인데 살아 있는 교회가 아니라 사데 교회처럼 죽은 교회라는 것이다( 3:1).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바르게 하신 후에야( 30:26-29), 그것을 사용하셨고, 제사장이 직무와 사명을 다할 수 있었던 것도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부터였다(출출 30:30).

여기서 궁금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기름 부음을 중요시하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구원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물세례와 성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성령께서 그것을 사용하셔서 우리 안에 용서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16:8).  설교도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이기에 종교개혁자들은 강대상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불렀고, 거기서 선포되는 말씀이 성경과 일치하는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였다(살전 2:13).  이렇게 기름부음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기름부음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받으실 때( 3:17, 1:11, 눅 3:22)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다 (마 17:5, 9:7, 눅 9:35).  훗날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있었던 사건을 생각하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지극히 큰 영광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한다(벧후 1:17). 분명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1:35), 궁금한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적인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2:10), 지상 사역을 감당하셨느냐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셔서 사역을 감당하셨다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으심을 받으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신데( 1:1), 누가 감히 하나님에게 기름 부을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9:5).  그러나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4:27).  하나님께서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부어주셨다(행 10:48).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을 인간으로서 사역을 행하시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이다( 4:18-19). 성경은 인간의 형체를 취하신 예수님께서 신적 속성들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셨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2:6-11).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놀라운 능력과 영광을 다 내려놓으시고 인간으로서 성령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12:28).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능력을 가지고 병자를 고치신 적이 없었다.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인성의 한계를 받아들이셔서 자신의 신적 능력을 빌어 치유하거나 사역하시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이사야서의 말을 인용하면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성령으로부터 왔으며 성령은 메시아의 인성에 은혜와 지혜와 기적적인 능력들을 넣어주셨다고 말한다( 11:1-5).  즉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은 신적 능력의 완전성을 가능케 하는 거룩하신 성령의 영향을 필요로 하셨고, 또한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히 받으셨다(마 3:16, 눅 2:40, 4:1, 14, 18, 요 3:34).  Calvin은 이 구절의 교훈은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관련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에서 철저하게 성령을 힘입어 일을 행하셨지( 61:1-3), 성령이 없이 아무것도 스스로 행하신 적이 없었다( 5:30).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고( 3:34), 예수님은 언제나 병자를 고치실 성령의 능력으로 고치셨으며( 5:17), 귀신을 쫓아내실 때도 성령을 힘입어 쫓아내셨다( 12:28, 눅 11:20).  예수님에게 있어 성령의 기름부음은 지상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충분히 감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12:49-50).  또한 예수님은 번도 스스로의 선택으로 일을 행하신 적이 없고( 5:19), 언제나 아버지가 가르쳐 주시고 원하시는 대로만 일을 하셨다( 8:28).  만약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다면 예수님은 보통 인간에 불과했을 것이고 다만 인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분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이다( 4:15).

오늘날 사람들은 사역에 있어서 예수님을 특별한 위치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특별한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역에 있어서는 특별하게 사역하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일도 하리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14:12).  만일 주님의 사역이 특별한 위치로서 한 것이라면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성령으로 거듭났으면 그 사람 안에 기름부음이 있고(요일 2:20, 27), 그것을 통해 예수님의 권세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막 16:17-18). Calvin의 말을 다시 인용하고자 한다.  “그가 우리에게 오심으로써 그는 영의 은사를 받아 우리에게 그것을 베풀어 주셨다. 이것이 바로 기름부음이요.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유래했으며 그 이름을 그가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다”         

이렇듯 기름부음은 믿는 자 안에 있는데(고후 1:21-22),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 하나는 진리의 말씀을 아볼로처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다(행 18:24-26).  본인들은 잘 배웠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말씀을 배워도 한쪽으로 치우쳐 배웠기 때문에 기름부음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이다.  믿는 자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이 곧 기름부음(요일 2:27)이라고 ‘주야장천’ 나팔을 불면서 오늘날 기름부음의 사상은 신기를 부르거나 접신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성도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이 기름부음인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요일 2:20).  반쪽짜리 답이긴 하지만 말이다.       

다른 하나는 종교적으로 세뇌를 당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분만이 기적과 치유를 행할 수 있지 우리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라는 고정관념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것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이렇게 가르쳐 온 목사와 신학자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마치 돌나라 한농복구회 교주 박명호 밑에 있는 사람들이나 사이비 전광훈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보면 종교적 세뇌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들은 정신질환의 일종인 복합적 망상장애를 가진 ‘광신도’에 가깝다.  내 경험상 이 고정관념이 깨지려면 성령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육신적인 소경보다 영적 소경이 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요 9:40-41).  보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 말이다(마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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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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