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vin은 신자들의 성화에 대해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중생을 통해서 죄의 결박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그들은 육의 괴롭힘을 전혀 느끼지 않으리만큼 완전한 자유를 소유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들 안에는 싸워야 할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훈련이 계속된다. 어거스틴은 신자들이 죽을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육욕에 매여 있기 때문에 육욕을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 병을 ‘죄’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육망의 충동을 느끼기만 해도 그것을 죄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우리 안에 이런 종류의 욕망이 생기게 하는 패악성 자체를 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죽을 몸을 벗어버리기까지 항상 그들 안에 죄가 있다고 가르친다. 죄는 지배력을 잃을 뿐이지 그것이 신자들 안에서 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죄의 법이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폐지되었지만 다소 흔적은 남아 있다” 이 말을 쉽게 요약하면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거듭난 자녀일지라도(벧전 2:9), 그는 여전히 바울의 고백처럼 죄인이며(롬 7장), 이러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롬 6:6-14), 일생동안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죄와의 기나긴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히 12:4).
Louis Berkhof 역시 “새사람이 부분적으로만 완전하듯이 이생에서는 영적인 발전의 정도가 불안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신자들은 일생동안 죄와 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Sinclair Ferguson도 성화의 기본 원리는 영적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갈등과 긴장이라는 특징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Christian Spirituality : Five Views of Sanctificatio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요 특징은 잠잠함이라고 강조하는 가르침과는 반대로 개혁주의 신학은 순례의 여정과 거룩한 전쟁(갈등)을 강조했다. 개혁주의는 그러한 갈등을 운 나쁘게 일이 잘못되어 유발하거나 믿음 또는 영성이 부족의 결과로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갈등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미 이루어 놓으신 모든 일의 본질적인 영광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다. 갈등은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이 세상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죄 때문에 죽었고 이 세상의 풍조에 따라 살면서 우리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왔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새로운 삶의 방식은 이 세상의 풍조와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들의 말을 간추린다면 갈라디아서 5장17절에서 나오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라는 말씀처럼 성령을 따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육체와 성령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성령의 권고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롭게 살려는 마음이 있지만, 인간의 내면에는 선을 행하려는 이러한 의지를 가로 막고 육신의 욕망 따라 행하도록 역사하는 힘도 작용하기 때문에(약 4:1-3), 비록 성도가 믿음으로 거듭났더라도(엡 2:8), 죄에 물든 옛 사람의 성품을 가지고 있어(엡 4:17-24), 여전히 육신의 욕망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롬 6:12). 다시 말해 성도가 거룩한 생활을 하는데 있어 방해되는 요소가 있다면 내부적으로는 죄에 물들어 있는 사악한 육신의 욕망이 있고(막 4:19), 외부적으로는 성도를 넘어뜨리는 사단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엡 4:27). 사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된 것은 확실하지만(롬 8:1-2), 죄는 최종적으로 파괴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어 필연적으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Calvin은 이러한 갈등은 중생한 그리스도인에게만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는 신자 속에 죄는 지배력을 잃어버렸으나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에 영적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바울의 고백인 로마서 7장12-25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물론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서 신학자들은 바울이 ‘거듭난 후’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거듭나기 전’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만큼 확실한 것은 성도로서 현재 우리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기를 원하지만 육신으로는 여전히 죄의 법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롬 7:25).
지금 우리는 성령 안에 살고 있으며(고전 3:16),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들이고(엡 1:3), 속으로 탄식하며 최종적인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사람들입니다(롬 8:23).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 모든 것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아직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빌 3:12-14)에 여전히 장막 집에 살아가는 우리는(고후 5:1), 육체의 욕망과 영적소망이 서로 충동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롬 7:23). 따라서 성령을 좇는 삶은 육체를 따르는 삶과 공존할 수 없고(롬 8:1-11), 만약 성령을 좇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는 이유가(갈 5:18, 25), 이 둘은 서로를 전적으로 대적하기 때문(갈 5:16-17)에 타락한 세상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필연적으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Gordon Fee가 말한 것처럼 삶 자체가 ‘이미’(엡 1:7), 그러나 ‘아직’ 이라는(엡 4:30), 두 가지 시점에서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는 현재의 제약받는 몸, 즉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실존이라는 의미에서의 육체 안에 거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벧후 1:13). 하지만 무엇보다도 육체를 따르는 삶은 과거에 속했기 때문(벧전 4:3)에 성령의 사람에게 있어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갈등은 일어날 수 있어도 육체를 따라 지속적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갈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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