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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6.04 이단사냥꾼들

목회자들 중에 하나의 성경구절을 두고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는 것은 각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배운 성경지식과 신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배웠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에 천년동안(왕국)에 대한 구절이 나오는데(계 20:1-6), 이 구절에 대한 해석으로 ‘전천년설’(역사적/세대주의적)과 ‘후천년설’, 그리고 ‘무천년설’로 나누어지면서, 달라스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전천년설’을 믿을 것이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은 ‘무천년설’을 믿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왜 그렇게 믿느냐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이들은 이것만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이들 각자가 자신들의 입장에 확고한 의지를 보이는 이유는 단 한가지인데, 그것은 자신들이 신학을 하면서 발견한 교리가 가장 성경에 근접하고 정확하게 옳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배웠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신학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신학적 확신이 너무 지나쳐 누군가 다른 견해나 해석을 내놓으면 “비성경적이고 왜곡된 해석”이라고 말하거나, 심하면 ‘이단’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이 습득해온 방법이나 교수나 교주(?)로부터 배운 것만이 올바른 해석인 것처럼 다른 형제에게 교조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잘못 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8세기 대각성 운동의 주역인 Jonathan Edwards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청교도 신학자이지만 ‘무천년설’을 믿지 않았고 ‘후천년설’을 믿었던 사람이었는데, 오늘날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며 근본교리를 믿는 개혁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Edwards는 비성경적인 신학을 가진 사람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칼빈주의 신학만을 공부한 사람은 성경을 주해할 때마다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해석을 하면서 자신이 배운 신학만이 가장 성경적이고, 마치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다른 어떤 신학적 입장도 인정하지 않고 바리새인과 같이 독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비판의 칼을 휘둘러 많은 사람을 영적으로 죽이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혔을지도 모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신학의 폭을 너무 좁혀 ‘밴댕이 소갈딱지’ 같이 성경을 해석했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고, 만약 신학을 다방면으로 연구한 사람이라면 성경을 한쪽으로 치우쳐 해석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신학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의 주장에 대해 보다 폭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가질 것입니다.  오래 전 R. A. Torrey는 “미성숙한 신학을 가진 사람은 분쟁을 일으키고 당을 짓는 집단정신을 초래한다.”라고 말했는데, 솔직히 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되어 있는 사람들의 고질적인 병은 다른 견해와 입장을 가진 신학적 이슈들에 대해 듣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고, 누군가 다른 것을 주장하면 이들은 마치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그 사람을 향해 신랄하게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무식한 변론(딤후 2:23)과 이단들처럼 논쟁하는 것을 낙으로 삼거나(딤전 6:3-4), 사람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는 죽은 정통 신학을 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쓸데없는 자부심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신앙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성경적인 것처럼 착각과 과대망상 속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목회를 하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깨닫고 느끼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는 말씀처럼 남을 비판하는 사람 치고 자신이 뿌린 씨를 거두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지 말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말씀하셨는데(마 7:1-5), 이렇듯 남에게 비판적이고 무슨 ‘호구조사’를 나온 사람처럼 형사가 범죄자를 취조하는 것 같이 공갈과 협박을 하던 사람이 자기도 똑같은 상황을 겪는 것을 보고 마태복음 7장1절 말씀이 떠오르면서 하나님은 참으로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솔직히 기독교 안에서의 이런 ‘갑질’의 행동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지만, 이렇게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은(딛 3:9),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이 망령되고 헛된 말을 좋아하는(딤후 2:16-18), 독선과 위선으로 가득찬 정죄하는 신학으로 무장된 사람들이지, 만약 올바른 신앙관을 가졌다면 평생을 배워도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리스도 몸의 지체인 형제를 향해 비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단 사냥꾼들’의 특징은 일단 자신들의 신학노선과 다른 먹이(?)감이 생기면 무조건 심판관의 입장에 서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더 심한 경우는 인격을 모독하기도 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목회자가 영적분별력이 없어서인지 자기 자신이 사탄에게 조종 받는 지도 모르고 입만 열면 이말 저말 만들어내면서 막무가내 식으로 쓰레기 같은 이론들을 늘어놓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철저히 사탄에게 조종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본인 자신은 정의감에 불타거나 아니면 Lloyd Jones의 말처럼 “완벽한 정통이지만 완벽히 쓸모없는 죽은 정통 신학”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나팔을 불지는 모르겠지만(마 6:2), 한 가지 만큼 확실한 것은 나타나는 열매가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약 3:14-16),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만큼은 알 수 있습니다(갈 5:19-21).  즉 예수님의 말씀하신 대로 열매로 그들을 판단하는 것입니다(마 7:16).  James R. Spencer는 『Heresy Hunters』에서 ‘이단사냥꾼’과 ‘변증자’를 구별하면서 변증자는 어떤 사람이 논쟁의 대상이 될 때, 그 교리가 구원에 필수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논란된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가능한 덕스럽게 해결하도록 노력하려는 반면에 이단사냥꾼은 목회자의 신학노선과 교리, 그리고 성경해석에서 다른 것을 발견하면 심판관(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그 문제를 과장하거나 왜곡하고, 심지어 거짓말로 조작해서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고 합니다.

 

 

Jonathan Edwards는 이런 교조주의적인 태도와 편협한 신앙관을 가지고 트집을 잡기 좋아하는 사람(눅 11:54)을 비판의 영을 가진 불신앙의 사람이라고 했고, 스스로 ‘칼빈주의적 감리교도’라는 명칭을 선호했던 Lloyd Jones도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일은 준비도 되기 전에 일찍 성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목회자나 신학교수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귀한 직분을 가지고 잘못된 가르침을 통해 신자들의 영혼을 도적질하고(마 23:15),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행 20:28)를 허무는 행위이기 때문에 무서운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히 10:29).  Lloyd Jones의 후임인 R. T. Kendal은 이런 문제를 일찍 깨달아서인지 자신이 준비되기 전까지는 성공을 허락하지 말아줄 것을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솔직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자기의 소견이 옳은 대로 행했던 사사시대와 같이(삿 21:25), 성경도 자기 주관주의로 해석을 하는 시대가 되었고(벧후 1:20), 무엇보다도 죽은 정통신학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무익한 논쟁으로 다툼이 일어나는데(딤후 2:23), 이것은 자신이 육신에 속한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일 뿐 아니라(고전 3:3), 이미 마귀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약 3:13-15).  만약, 진짜 사냥을 하려면 이단(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구원파)들과 ‘맞짱토론’을 해야 마땅한데, 왜 유독 신학노선과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리스도 몸의 지체인 형제를 비판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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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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