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에서 역사하시는 일의 기록입니다.

성경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과 목적과 계획과 방법을 제시합니다.

성경은 단순히 하나님과 어떤 특정 인물의 관계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그분이 각 개인과 가지셨던 관계를 기록한 책입니다.

성경의 초점은 하나님과 그분의 일하시는 일에 맞춰져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항상 세상과 연관되어 계심을 계시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떠나시거나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로부터 멀어지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 세상에서의 구속의 역사를 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도하시고

선택하신 사람들을 역사에 참여시키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그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 전체를 통틀어 볼 때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해서 잃어버린 세상을 구속하실 때가 되었을 때,

아들에게 열두 명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의 목적을 이루도록 준비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려고 할 때,

자신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한 사람, 혹은 여러 명의 종들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그들에게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인생을 하나님께로 조정하라고 초정하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십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경험하려면,

하나님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태초부터 활동하고 계셨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를 통해 이것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행하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오셨다고 밝히셨습니다(요 5:30, 6:38, 8:29).

예수님은 아버지가 하고 계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고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있어 아버지가 어디서 일하고 계시는지를 보여주는 계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라는 아버지의 초청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주위에서 활동하시는 것은

하나님께로 당신의 인생을 조정하고

그분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라는 초청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주위에서 일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엘리사와 그의 사환이 도단이란 도시에서

아람사람들의 군대에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사환은 겁에 질려 있었지만 엘리사는 여유만만 했습니다.

엘리사가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문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주님이 사환의 눈을 열었을 때,

비로소 그는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활동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어디서 일하고 계신지를

당신에게 알려주시지 않는 한,

당신은 그것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어디서 일하고 계신지 계시하시면,

그것이 바로 당신으로 하여금

그분의 일에 참여하라는 초청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활동을 아는 것은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성과 그분이 주도권을 잡고

당신의 영적인 눈을 열어 그것을 보도록 하시는데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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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성도에게 뿐만 아니라(롬 3:28), 거듭나지 못한 불신자에게도 효용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딤전 1:9-11).  특별히 불신자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효용성을 나타내는데, 먼저 율법은 불신자의 양심을 깨우쳐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니다(갈 3:24).  그러나 불신자들이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달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상태와 길에 머물러 있을 경우에는 그들로 하여금 장차 임할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는 근거가 됩니다(신 28장).  이처럼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때로는 지극히 유익한 것으로 때로는 매우 두려운 것으로 작용하게 됩니다(신 11:27-28).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달은 우리는 죄를 멀리하여 율법의 요구에 부합하는 선한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롬 1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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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잃어버린 세상을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자신과 화목케 하는 사명에 동참자로의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당신이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순종을 요구하는 종의 자세를

가장 잘 보여준 본보기이십니다.

당신이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을 주님의 빚으시기 좋게 되는 것과

주님께 쓰임받기 위해 그분의 손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하나님을 당신을 준비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통해 자신의 일을 하심으로써

바라보고 있는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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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율법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거룩한 삶을 유지하도록 그 기준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효용성을 지니고 있고(출 20:1-17), 이 율법은 성도들에게 유일무오(惟一無誤)한 규칙이 되지만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자에게 있어서 더 이상 그를 구속(拘束)하는 법이 아니라 자유하게 하는 법이 됩니다(롬 7:22, 약 1:25).  또한 율법은 성도들의 죄를 깨닫게 해주고(롬 7:7), 죄로 인한 그들의 ‘전적부패’와 ‘전적무능’을 인식시켜 줌으로써 온전한 구원의 길을 보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몽학선생’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효용성을 지니고 있습니다(갈 3:24).  뿐만 아니라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거룩하신 가를 보여줌(롬 5:17-19)과 동시에 예수님이 율법의 엄격한 요구를 온전히 이행하심으로써(마 5:17),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사실을 성도들로 하여금 깨닫고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점에서 효용성을 지닙니다.  한편 율법은 이처럼 많은 효용성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구원으로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제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갈 2:16).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생각에서 벗어나 완전한 순종의 모범을 통해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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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자들 중에 배우자의 지속적인 간음과 유기 때문에 이혼한 배우자가 다시 재혼을 할 경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며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도 이혼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이혼은 가능하지만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서 이혼 후 재혼에 대해 제한적 허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구약성경은 이혼과 재혼을 묵인하고 있을 뿐 아니라(신 24:1-4), 비록 간음으로 인한 이혼(마 5:32)과 유기로 인한 이혼(고전 7:12-13)을 묵인해 주기는 했지만 역사가들은 초대교회가 이혼 후의 재혼을 인정하지 않았고, 마태복음을 뺀 신약성경 또한 이혼 후의 재혼을 묵인해 주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전적인 불가론을 강조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현대 신학자들 중에 헬라 교부들의 모국어 능력과 그 말의 뉘앙스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이혼이나 재혼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려고 한다면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설득력 있게 논지를 펼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신학자들이 Craig S. Keener가 말한 것처럼 초대교부들의 권위에 호소해서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운다면 거기에는 많은 취약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견해만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지적인 한계를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떤 성경적인 문제들을 접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허풍을 떨거나 독단적인 주장을 내세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복음서에서 이혼과 관련된 성경구절들은 마태복음 5장31-32절, 19장3-9절, 마가복음 10장11-12절, 누가복음 16장18절에 나오는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이혼을 금하고 있는 반면 마태복음의 두 구절에서는 예외적인 말씀(음행한 경우)이 주어지고 있고, 더 나아가 마가복음은 남편과 이혼한 여자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간음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외에 다른 복음서들은 이혼한 남편이 재혼하는 것에 관해 동일한 진술을 포함하고 있고, 마태복음 19장6절과 마가복음 10장9절속에서는 창조 이야기를 포함시켜 이 교훈을 지지하면서, 마태복음의 경우 모세가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에 이혼증서를 허락하였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신 24:1).  이러한 증거를 볼 때에 예수님은 결혼을 남편과 아내 사이의 영원한 언약으로 생각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고(창 2: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에 있는 예외적인 말씀(마 5:32, 19:9)이 예수님 쪽에서 양보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이 말씀이 결혼 파괴에 있어 무고하게 이혼당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취하신 조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의 이혼관이 다양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엄격한 Shammai 학파와 조금 느슨했던 Hillel 학파의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본다면 간음이 결혼을 파괴 시킨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고, 예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뜻이 없었다면 구태여 그런 예외적인 양보의 조항을 말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먼저 오늘날 사람들이 이혼하는 결정적인 이유들을 살펴보면 한쪽 배우자의 잘못이거나 아니면 서로간의 잘못, 혹은 상대 배우자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동, 또는 부도덕한 행위가 드러날 때 부부간의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게 될 경우 이혼을 하게 되는데, 사실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인을 찾는다면 한마디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는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마 19:8)고 말씀하셨기 때문인데, 쉽게 말하면 인간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하나님이 이혼을 허락하셨다는 것이지 본래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이렇게 “이혼한 사람, 혹은 이혼을 당한 사람은 다시 재혼할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약성경 신명기 24장1-4절의 말씀을 포함해서 룻이 보아스를 만나는 과정을 다루는 룻기에서는 재혼에 대해 호의적일 뿐 아니라(룻 1-4장), 그리스도의 계보에 재혼한 사람들이 들어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인데(마 1장), 신약에 와서는 상대 배우자가 죽은 뒤 재혼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며(롬 7:3), 젊은 과부들이 재혼하지 않을 경우 유혹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재혼을 격려하고 있고(딤전 5:14), 더 나아가 성적인 욕망을 제어하기 어려운 과부들에게 ‘만일 절제 할 수 없거든 결혼’(고전 7:8-9)할 것과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안에서만 할 것’(고전 7:39)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은 재혼을 죄악시 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혼을 미워하시는 이유(말 2:16)는 그 이혼이 하나님의 언약에 위배되는 것일 뿐 아니라(창 2:24), 상대 배우자와 자녀들, 그리고 사회와 교회에 적지 않는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반대를 하신 것이지(마 19:3-6), 그렇다고 해서 이혼의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불리하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비록 마가복음 10장1-12절에서는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생생한 수사학적 형태를 사용하고 계시기는 하지만 그분의 핵심적인 말씀의 요지는 결혼생활을 깨트리는 것을 금하신 것이지(막 10:9), 이미 이혼한 사람에게 있어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말고 혼자 살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재혼을 명백히 금하고 있지 않는 이상 이혼한 사람이 재혼하는 것에 반대할 필요는 없고(겔 44:22), 한 가지만큼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창 2:24), 즉 사랑의 언약이 가져다 준 보호 아래서 둘이 하나의 육체가 되는 것(엡 5:31)을 깨뜨린 당사자가 재혼을 생각할 때는 먼저 자신의 일(이혼)을 깊이 반성하며 회개하는 시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성경의 가르침은 이혼한 사람이 할 수만 있으면 혼자 살거나 아니면 본 남편/아내와 다시 화합할 것을 권하지만(고전 7:11), 인간의 마음이 정욕적이고(골 3:5), 죄인이기 때문에(롬 3:9), 하나님의 말씀대로 완벽하게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이고, 경제적, 혹은 정서적으로 평생을 혼자서 사는 것이 어렵고 힘들 경우 얼마든지 주 안에서 재혼을 고려해 볼 수는 있습니다(고전 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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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2권3과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에서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신성과 인성이 구원자 되심의 필수적인 조건임에 대해 배우며,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시고 다른 구원의 방법이 없음에 대해서 깨닫게 된다.  나아가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 되심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설득할 것인가에 대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논증하고 있는 브리안 메이든의 『오직 한 길』은 2권3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소책자라 적은 분량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임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만든 다른 종교들과 끊임없이 비교해 가며, 왜 예수님만이 오직 한 길인지에 대해 보여주는 이 책은 기독교가 오직 한 길을 주장하는 것은 편협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랑의 표현임을 보여주고 있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에는 여러 갈래가 있음을 종종 얘기한다.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노력을 기울이면 모두들 정상에 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어느 종교를 택할 것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모두 정상에서 만나게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같은 신에게 이를 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곳에 이른다는 보편구원설을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고 종종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을 전혀 가르치시지 않았다.  그는 모든 종교가 진리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종교적인 일에 성실하면 충분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신을 숭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며 우리는 참 하나님을 섬겨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여러 ‘길’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시기는커녕, ‘내가 곧 길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주장하셨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역시 이러한 그리스도의 궁극성과 유일성을 믿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의 유일성에 대한 이러한 신약의 믿음을 어떻게 설명하고 변호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기독교가 하나님께 이르는 많은 길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오해는 기독교가 단지 하나님과 도덕에 대해 가르칠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있다.  이러한 오해로 본다면 만약 다른 종교에서도 기독교와 유사한 이상들을 갖고 가르치고 있다면 기독교는 분명히 유일무이한 종교가 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는 단순한 윤리나 도적, 아름다운 이상들이 아니다.  단순히 종교적이거나 윤리적 이상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주창하는 있는 것이다.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만들어 주는 것은 역사적 사실들이지 우리의 이상이나 윤리, 경험들이 아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같이 종교 지도자들의 통찰력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서 행하신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며 또 이런 사건들로 인해 우리의 구원이 성취되었다.  만일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메시지는 소멸될 것이다.

 

기독교가 다른 모든 종교들과 구별되는 신조 중 하나는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교리로 그가 참 하나님이며 참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의 가르침 때문에 중요한 인물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절대적으로 독특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사건은 모호하고 신화적인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며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단연 독특한 것이 된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 자신이 자신의 창조주를 거역했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종교로 만드는 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이지만 성육신이 그 자체로 신약의 중심 메시지는 아니다.  하나님은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즉 인간을 죄로부터 구하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  전 인류는 죄에 빠졌고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그의 법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실제로 인간으로 오셔서 그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셨다.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하지만 그렇게 살 능력이 없는 완벽한 삶을 그분께서 사셨고, 우리가 당해야 마땅할 죽음을 그분께서 당하셨고, 받아야 마땅할 벌을 그분께서 받으셨다.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모두 우리가 지켜낼 수 없는 행동과 이상들의 집합체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선적으로 교훈이나 가르침과 모범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이다.  우리에게는 구원이 필요하며 예수님께서 홀로 우리의 구속을 위해 돌아가셨다.  이제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  더 이상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나사렛 예수가 주장한 신성이 사실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갈보리에 바쳐진 예수의 희생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입증되었다.  예수님의 부활과 들리심은 유일한 것으로 예수님만이 사망을 정복했다.  다른 종교지도자들 중 아무도 육체적으로 죽음에서 살아난 자가 없으며 죽었다가 살아나는 신에 대한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여도 개념뿐이지 역사적 사실로서 제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 빈 무덤은 신화나 아름다운 환상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들이 다소 차이는 있지만 공로와 행위의 종교이며 우리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로 구원을 우리가 힘써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행과 무관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선한 일에 열심을 품어야’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지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아니라 전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럼 왜 다른 많은 종교들이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가장 적절한 설명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그래서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끊임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혼자 힘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는 불완전하며, 부분적으로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진리 자체에 도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그들이 구원을 받게 될지 아닐지는 여전히 불확실한 채로 남겨둘 수밖에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느 누구도 기독교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복음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들도 부르셔서 회개와 새 생활에 이르게 하실 수 있지만, 그래도 그들은 구원의 확신의 근거를 갖기 위해서는 복음을 듣는 것이 여전히 꼭 필요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이 편협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선함과 지혜로 하나님을 찾았고, 그래서 그들만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자만심과 편협함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관용을 혼동하고 있다.  잘못되어 가고 있는 자에게 겸손하고 온유하게 얘기해 주는 것은 당연하며 가능한 한 솔직하고도 설득력 있게 잘못을 일깨워주는 것이 가장 자비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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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에 기인한 하나님 의지의 표현으로(롬 7:7-9), 거룩하고 완전하며(시 19:7), 절대적으로 선한 것입니다(딤전 1:8).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10절에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율법 자체(사 33:34)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율법이 정죄하고 있는 죄의 결과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이것은 오늘날의 형법이 형사 범죄의 원인이 아닌 것처럼 율법은 죄를 죄 되게 할 뿐이지(롬 7:13), 그 자체가 죄이거나 죄의 원인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라는 말씀처럼(롬 7:12), 우리는 율법을 반대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귀하고 선한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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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성이 있다.

혹시 당신의 현재 모습이 회개하지 않은 사람과 닮아 있지는 않은가?

당신의 진정한 속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라.

 

첫째: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한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 안에서

영원히 사는 천국의 완벽한 성결의 삶이나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국의 축복을 소망하는 것보다

땅에서 안락함이나 돈이나 명예를 축적하는 것에 관심이 온통 쏠려 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공언하지만,

그 마음이 하나님보다는 세상과 육신의 즐거움에 고정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결코 느끼지도 맛보지도 못한다.

 

즉, 하늘보다 땅을 더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보다 육신의 즐거움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요,

아직 회개하지 못한 죄인이다.

 

반면 회개한 사람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을 분별한다.

장차 하나님과 누리게 될 영광을 확실히 믿고

세상 어떤 것보다 그 소망에 마음을 기울인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나 인간의 모든 쾌락을 준다고 유혹해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영원토록 그분을 사랑하고 찬양하며 사는 삶을 택한다.

 

또한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고,

하나님 외에는 자기 영혼을 채워줄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하늘을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겠다고 단호히 각오한다.

회개한 사람은 한마디로 세상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 높이며

땅에서 잘되는 것보다 하늘에서 잘되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긴다.

 

둘째: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육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여긴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도 물론 말씀을 듣고 읽으며,

외적으로 신앙적인 의무를 수행하고 추잡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영원한 영광을 얻는 것을

인생의 으뜸가는 일로 삼지 않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부수적인 것으로 끝나버린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세상의 쓰레기 옆에 갖다놓는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세상과 절교하면서까지 

하늘을 얻을 마음이 추호도 없기 때문에

육신의 즐거움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하나님을 버린다.

 

반면, 회개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구원받는 것을 인생의 주된 목표와 관심으로 삼는다.

이생에서 받은 모든 은혜와 축복을

또 다른 삶으로 향하는 여정의 도구로 여기며

하나님 안에서만 피조물을 사용한다.

 

회개한 사람은 죄를 멀리하고,

자기 삶에서 죄를 제거하기를 갈망하며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간절히 기도한다.

혹 죄를 범했다면 

그것이 그의 마음과 삶의 방향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즉시 일어나 뉘우치고 회개하며

죄로 아는 것을 감히 고의로 저지르지 않는다.

회개한 사람은 하나님과 영광의 소망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서

세상 그 무엇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셋째: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영혼의 의사이신 그리스도께 치료 받기를 거부한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겉으로 신앙생활을 할지라도

자기 영혼을 그리스도께 절대 내맡기지 않으며,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명령에도 

결코 고분고분하게 순종하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죄인들을 죄책감과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하고 온전히 치유하여,

하나님께 인도하는 영혼의 의사이신 주님께 다스림 받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회개한 사람은 자기가 전에 죄로 사망했던 자임을 알고 있다.

하나님과 불화하여 천국의 소망을 상실하고,

영원한 형벌에 처할 위험에 처했던 자임을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구속의 선물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인생의 구세주로 믿고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을 얻기 위해

자신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내맡긴다.

 

회개한 사람의 심령에는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

회개한 사람의 삶은 그를 위해 친히 목숨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그렇다! 회개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리처드 백스터 『회개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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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이 인간 전존재를 총망라하는 포괄적이고도 완전한 수행을 요구하나(왕상 2:3), 죄에 오염되어 부패함으로써 연약하게 된 인간은 그 요구를 만족시킬 수가 없습니다(히 10:1).  물론 범죄 하여 타락하기 이전의 최초의 인간에게는 율법이 구원의 방법으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리고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은 율법을 온전히 수행함으로써 능히 구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인간은 변질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온전한 상태의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함으로(창 1:27), 하나님의 거룩한 성질에 온전히 부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초 인간의 타락은 그가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변질 왜곡시켰고(롬 5:12), 그 결과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질에 온전히 부응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전 7:29).  따라서 율법은 더 이상 구원의 방편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갈 5:4), 본래 생명에 이르게 할 그것이 오히려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롬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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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들 중에 하나의 성경구절을 두고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는 것은 각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배운 성경지식과 신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배웠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에 천년동안(왕국)에 대한 구절이 나오는데(계 20:1-6), 이 구절에 대한 해석으로 ‘전천년설’(역사적/세대주의적)과 ‘후천년설’, 그리고 ‘무천년설’로 나누어지면서, 달라스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전천년설’을 믿을 것이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은 ‘무천년설’을 믿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왜 그렇게 믿느냐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이들은 이것만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이들 각자가 자신들의 입장에 확고한 의지를 보이는 이유는 단 한가지인데, 그것은 자신들이 신학을 하면서 발견한 교리가 가장 성경에 근접하고 정확하게 옳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배웠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신학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신학적 확신이 너무 지나쳐 누군가 다른 견해나 해석을 내놓으면 “비성경적이고 왜곡된 해석”이라고 말하거나, 심하면 ‘이단’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이 습득해온 방법이나 교수나 교주(?)로부터 배운 것만이 올바른 해석인 것처럼 다른 형제에게 교조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잘못 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8세기 대각성 운동의 주역인 Jonathan Edwards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청교도 신학자이지만 ‘무천년설’을 믿지 않았고 ‘후천년설’을 믿었던 사람이었는데, 오늘날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며 근본교리를 믿는 개혁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Edwards는 비성경적인 신학을 가진 사람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칼빈주의 신학만을 공부한 사람은 성경을 주해할 때마다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해석을 하면서 자신이 배운 신학만이 가장 성경적이고, 마치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다른 어떤 신학적 입장도 인정하지 않고 바리새인과 같이 독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비판의 칼을 휘둘러 많은 사람을 영적으로 죽이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혔을지도 모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신학의 폭을 너무 좁혀 ‘밴댕이 소갈딱지’ 같이 성경을 해석했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고, 만약 신학을 다방면으로 연구한 사람이라면 성경을 한쪽으로 치우쳐 해석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신학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의 주장에 대해 보다 폭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가질 것입니다.  오래 전 R. A. Torrey는 “미성숙한 신학을 가진 사람은 분쟁을 일으키고 당을 짓는 집단정신을 초래한다.”라고 말했는데, 솔직히 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되어 있는 사람들의 고질적인 병은 다른 견해와 입장을 가진 신학적 이슈들에 대해 듣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고, 누군가 다른 것을 주장하면 이들은 마치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그 사람을 향해 신랄하게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무식한 변론(딤후 2:23)과 이단들처럼 논쟁하는 것을 낙으로 삼거나(딤전 6:3-4), 사람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는 죽은 정통 신학을 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쓸데없는 자부심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신앙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성경적인 것처럼 착각과 과대망상 속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목회를 하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깨닫고 느끼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는 말씀처럼 남을 비판하는 사람 치고 자신이 뿌린 씨를 거두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지 말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말씀하셨는데(마 7:1-5), 이렇듯 남에게 비판적이고 무슨 ‘호구조사’를 나온 사람처럼 형사가 범죄자를 취조하는 것 같이 공갈과 협박을 하던 사람이 자기도 똑같은 상황을 겪는 것을 보고 마태복음 7장1절 말씀이 떠오르면서 하나님은 참으로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솔직히 기독교 안에서의 이런 ‘갑질’의 행동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지만, 이렇게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은(딛 3:9),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이 망령되고 헛된 말을 좋아하는(딤후 2:16-18), 독선과 위선으로 가득찬 정죄하는 신학으로 무장된 사람들이지, 만약 올바른 신앙관을 가졌다면 평생을 배워도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리스도 몸의 지체인 형제를 향해 비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단 사냥꾼들’의 특징은 일단 자신들의 신학노선과 다른 먹이(?)감이 생기면 무조건 심판관의 입장에 서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더 심한 경우는 인격을 모독하기도 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목회자가 영적분별력이 없어서인지 자기 자신이 사탄에게 조종 받는 지도 모르고 입만 열면 이말 저말 만들어내면서 막무가내 식으로 쓰레기 같은 이론들을 늘어놓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철저히 사탄에게 조종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본인 자신은 정의감에 불타거나 아니면 Lloyd Jones의 말처럼 “완벽한 정통이지만 완벽히 쓸모없는 죽은 정통 신학”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나팔을 불지는 모르겠지만(마 6:2), 한 가지 만큼 확실한 것은 나타나는 열매가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약 3:14-16),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만큼은 알 수 있습니다(갈 5:19-21).  즉 예수님의 말씀하신 대로 열매로 그들을 판단하는 것입니다(마 7:16).  James R. Spencer는 『Heresy Hunters』에서 ‘이단사냥꾼’과 ‘변증자’를 구별하면서 변증자는 어떤 사람이 논쟁의 대상이 될 때, 그 교리가 구원에 필수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논란된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가능한 덕스럽게 해결하도록 노력하려는 반면에 이단사냥꾼은 목회자의 신학노선과 교리, 그리고 성경해석에서 다른 것을 발견하면 심판관(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그 문제를 과장하거나 왜곡하고, 심지어 거짓말로 조작해서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고 합니다.

 

 

Jonathan Edwards는 이런 교조주의적인 태도와 편협한 신앙관을 가지고 트집을 잡기 좋아하는 사람(눅 11:54)을 비판의 영을 가진 불신앙의 사람이라고 했고, 스스로 ‘칼빈주의적 감리교도’라는 명칭을 선호했던 Lloyd Jones도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일은 준비도 되기 전에 일찍 성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목회자나 신학교수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귀한 직분을 가지고 잘못된 가르침을 통해 신자들의 영혼을 도적질하고(마 23:15),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행 20:28)를 허무는 행위이기 때문에 무서운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히 10:29).  Lloyd Jones의 후임인 R. T. Kendal은 이런 문제를 일찍 깨달아서인지 자신이 준비되기 전까지는 성공을 허락하지 말아줄 것을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솔직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자기의 소견이 옳은 대로 행했던 사사시대와 같이(삿 21:25), 성경도 자기 주관주의로 해석을 하는 시대가 되었고(벧후 1:20), 무엇보다도 죽은 정통신학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무익한 논쟁으로 다툼이 일어나는데(딤후 2:23), 이것은 자신이 육신에 속한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일 뿐 아니라(고전 3:3), 이미 마귀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약 3:13-15).  만약, 진짜 사냥을 하려면 이단(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구원파)들과 ‘맞짱토론’을 해야 마땅한데, 왜 유독 신학노선과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리스도 몸의 지체인 형제를 비판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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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 건물을 지을 때 ‘함께 지어져’ 갈려면

재료들로 쓰이는 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밑에 있는 돌은 위에 있는 돌을 떠 받쳐 주고 있어야 하고,

중앙에 있는 돌은 양쪽 옆의 들들과 꽉 맞게 끼워져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고,

서로 연결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 돌들이 먼저 깎아짐과 깨어짐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집 짓는데 디딤목 쪽에 돌이 하나가 필요하다고 합시다.

마치 비슷하게 맞는 돌이 있어서 가져다 놓았는데 딱 맞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 처음부터 딱 맞는 돌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정으로 모난 것을 깎아내고 깨트리고 깨끗하게 다듬어서 맞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갔을 때 마침 전도사역부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고 해서

몇 시 몇 분까지 교회당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나갔는데,

시간이 되었는데도 사람들은 안 보이고 교회 사무실에다 물어봐도 잘 모르고 해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돌아가려고 하는데, 

그때서야 임원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왜 아무도 안 나왔냐고 되레 큰 소리를 칩니다.

임원이라는 사람은 왜 그렇게 꼬장꼬장한지,

도대체 마음에 안 들고 세상에서는 뭣도 안 될 것 같은 사람이

교회에서만 저렇게 ‘방안퉁수’ 같이 큰 소리하나 싶어 아니꼬운 일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래도 임원이니 말을 들어야 하고,

일은 왜 그렇게 짜임새가 없는지 요령도 없고,

그래서 한번 나갔다가는 다시는 나가지 않으리라 결심하지만 또 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깎이고 깨트려지면서

자신의 아집과 고집들이 어쩔 수 없이

다듬어지고 닦여지는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직접 인도하시는 곳입니다.

죄에 빠져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을 부르셔서 모이게 해놓으시고,

동시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된 수준까지 함께 지어져 가도록 훈련을 시키시고,

서로 연결되어 가도록 연단을 시키는 곳입니다.

교회는 항상 함께 가야 하기 때문에 독불장군이 필요 없습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복된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와 양육과 훈련,

기도모임은 가능한 참석해야 믿음이 자라납니다.

빠지면 빠질수록 손해이고,

거기에는 비록 깎여짐과 불만족스러움과 무시당함,

그리고 아니꼬움과 묵사발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더 영광스럽게 다듬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얼마 되지 않아 보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으니…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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