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사냥꾼'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8.02.03 사이비 이단제조자
  2. 2017.10.21 이단사냥꾼의 말로
  3. 2016.06.04 이단사냥꾼들

친구들 중에 서울에서 중형교회 담임목사로 사역을 하고 있는 예장합동 목사와 지방 대도시에서 대형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는 예장통합 목사가 있습니다.  이들을 만나면 주로 가족과 목회에 대한 이야기, 혹은 감명깊게 읽은 책과 오늘날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와 은사에 대한 주제로 대화가 이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민감한 주제(은사)를 놓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들 목사로부터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모두가 은사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심한 거부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해 충성스럽게 사역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이구동성 말을 합니다.  사실 이들을 통해서 하나 깨달은 것은 중대형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사람들은 다른 목회자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자제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목회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목사들 중에 목회는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허구헌날 형제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가운데 이단 사냥질만을 업()으로 일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목사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비판적인 목사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치고 영혼이 메마르거나 병들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에 비위가 상하는 목회자들이 있겠지만, 전도사 때부터 개척을 시작해서 목사가 되어 두 번의 교회개척을 통해 20년 넘게 사역을 해 보았기 때문에 누구못지 않게 구멍(?)가계 수준의 목회가 어떠한지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사실 오랜 기간 동안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다른 목회자에 대해 판단하거나 비판적인 일에 몰두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목회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부정적이고 비판의 영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추하고 더러운 모습은 보지 못하고 입만 열면 남의 허물을 찾아내려고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동원하는 가운데 사악한 궤변을 통해 상대방을 매장시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이런 목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구멍가계 수준의 목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확신컨대 오늘날 이단사냥질 하는 사람 중에 자신의 목회에 충실한 목회자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거의 밑바닥을 기고 있거나 몇 명, 혹은 몇 십명 놓고 자신이 무슨 대단한 목사인 것처럼 설교 같지 않는 설교,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설교 원고를 가지고 앵무새같이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마담 수준의 이야기로 양들을 호도하는 수준입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 목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성경적 목사로 생각하는 순진한 양들이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목자에게 양을 맡길 때는 형제를 비판하는 부정적인 목사에게 맡기기 보다는 모세처럼 입이 뻣뻣해 말에 능하지 못하더라도 맡겨진 양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복음에 열정적으로 생명을 거는 목자에게 맡길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사울 왕은 늘 살기가 등등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들과 자신의 주변에 있는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들에게 많은 해를 끼쳤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사울에게 있던 사람들을 빼내어 다윗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사울 왕은 하라는 목회는 안하고 허구헌 날 사단의 충동질 받아 다윗을 비롯해서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죽이려고 날뛰다가 비참하게 자살로 생을 마감한 반면 다윗은 하나님을 늘 두려워 하는 가운데 적은 수의 백성들을 끝까지 충성스럽게 돌보았기 때문에 나중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 마디로 주의 종이 서고 넘어지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형제를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14:4).  그런데 오늘날 이단사냥질을 하는 사람들은 먹이를 만난 더러운 Hyena처럼 교회를 하나로 화합하기 보다는 논쟁과 분열, 인신공격과 덕스럽지 못한 비방을 통해 난타전을 벌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궁금한 것은 광견병에 걸린 미친 개처럼 날뛰는 이 사람들에게 누가 이단사냥질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느냐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이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을 사이비 이단제조자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이비 기질을 가진 사람의 전형적 사고방식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획일화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반영하는 구성원적(3:11), 인종적(5:9), 은사적(고전 12:12-27), 다양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 기질을 가진 사람은 의견의 다양성시각의 다양성’, 그리고 경험의 다양성을 말살하기 때문에 공장에서 규격화된 제품을 생산하듯 앞뒤가 꽉 막힌 숨통이 조여오는 듯한 자신이 배운 신학만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무식하게 우겨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둘째, 흑백 논리가 강합니다.  이런 사람은 옳고 그름의 논리적 배타성을 자신이 배운 신학 안에서 유리한 방향으로 자의적 해석합니다.  그래서 개인이나 집단 그리고 옳고 그른 측면이나 요소가 혼재(混在)해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을 뿐더러 항상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억지주장을 내세웁니다.  셋째, 개인적 나르시즘을 강화합니다.  이것은 자신만이 의롭고 올바르며 정당하다는 것을 스스로 세뇌시키는 가운데 이를 통해 자기 생각속에 그릇된 자부심을 고취시킵니다.  마지막으로 피해의식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만이 성경을 가장 바르게 해석하고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외부에서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과대망상증과 피해망상증을 가진 환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단 사냥질을 일삼는 무경험자들(성경에도 없는 권사 직분을 가진 사람과 조폭처럼 겁박하는 목사)의 글을 읽어보면 참으로 한심할 때 한 두번이 아닌데, 이들은 흑백 논리가 강해서 자신은 정통이고 상대방은 이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특히 John Wesley를 이단으로 매도한 바른믿음의 정이철이라는 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피조물인데, African wild dog의 습성을 가진 것처럼 닥치는대로 물고 늘어지는 좋지 못한 동물의 기질을 가졌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물론 본인 스스로가 다른 목회자를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타나는 열매를 보면 그 배후가 귀신에게 순간순간 충동질 받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분의 신학과 신앙이 많이 왜곡되고 비정상적인 이유는 이미 고인된 목회자들(옥함흠, 하영조, Peter Wagner등등)의 신앙을 뒷담화 치기 때문입니다.  왜 살아있을 때 맛짱 토론을 벌이지 못하고 이들이 죽고 난 뒤에 무슨 큰 죄를 지은 죄인인 것처럼 부관참시(剖棺斬屍) 하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해 영이 비틀어져 있고 중증 환자와 같은 병든 신학을 가지고 천방지축 날뛰는 이 분이 이단 사냥질을 하든 이단 제조자이든 상관하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뒤에서만 물고 늘어지지 말고 정식적으로 박영돈 교수와 김세윤 교수에게 정중하게 공개토론을 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사족이긴 하지만 개() 훈련사의 말에 의하면 겁이 많은 똥개일수록 집에서는 잘 짖어대는데 막상 싸움에 있어 꼬리를 내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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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관심을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최순실 게이트 국정농단 2차 청문회를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되었는데, 그때 인상 깊었던 것은 검사출신 김경진 의원이 김기춘을 향해 “당신은 죽어서 천국가기는 힘들 것이다”라는 말을 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김기춘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찾아 보았는데, 이 분은 유신헌법의 초안자로서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 세워 그의 가족들에게 평생 고통을 안겨다 준 인물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거쳐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올랐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조작의 달인이었고 무고한 시민을 하루 아침에 간첩으로 만들어 내는 탁월한 기술을 소유한 사람이었는데,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한 가지만 예를 든다면 40년 만에 재심 신청자 모두가 무죄판결을 받은 재일교포(학생들) 간첩단 사건을 들수 있습니다.  이 조작된 사건을 통해 피해자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40년 동안을 창살 없는 감옥에서 생활해야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계 내에서도 허위 사실을 진실인양 주장하기 위해 교묘하게 왜곡하고 거짓으로 조작하여 교회와 개인을 공격하는 이단 제조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데, 문제는 누가 진짜 이단 연구가이고 가짜 이단 연구가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전문성과 자질이 검증되지 않은 사이비 이단 연구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이 현실입니다.  이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아보면 한결 같이 돈에 관련되어 있고 양심이 화인 맞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종교의 발행인이며 이단 감별사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故 탁명환 소장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한국 교회에 만연한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들에 대한 문제점들을 과감하게 파헤쳐 피해를 막은 공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반면 일련의 부도덕한 행동들이나 불의와 타협한 전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인 평가로 남아 있습니다.  사실 이 분은 고소/고발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한국 개신교 역사상 목사와 장로 100 여명 이상을 명예훼손 혐의로 집단 고소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연구 초기와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어떤 교회로부터 경제적 지원이나 협조가 없으면 그 교회를 이단/사이비로 몰아가기 위해 기사와 사진들을 조작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걸려든 사람이 지금 윤리와 도덕적 문제로 심하게 몸살을 앓고 있는 성락교회의 김기동 목사와 통일교 사과문 게재로 인해 후원을 중단한 대성교회(현 평강제일교회)의 박윤식 목사라고 합니다.  여기서 탁 소장이 이단/사이비 종교 연구가로서의 자질을 의심스럽게 만드는 결정적인 증거는 이미 세간에 알려진 대로 박윤식 목사를 불륜으로 몰아가기 위해 사진을 합성하여 사용한 사건입니다.  그는 심상용 목사의 책 제목처럼 마피아적 목사이며 삼위일체 삼신론을 내세워 자신이 속한 총회에서까지 외면당한 최삼경 목사와 함께 박윤식 목사가 L.A부흥회를 가서 세 명의 여신도들과 찍은 사진을 두 명의 여신도와 찍은 것처럼 사진을 합성해서 불륜으로 몰아갔던 것입니다.

 

보도된 자료에 의하면 이 두 사람이 이단 제조술이 빛을 발한 대표적인 사건은 1991년 「목회와 신학」 2월호에서 ‘대성교회 이단 시비의 초점’ 이란 제하의 글을 통해 통일교 출신인 변찬린이 주장했던 “하와가 뱀과 성관계를 맺어 가인을 낳았다”라고 말한 내용을 박윤식 목사가 말했다고 백퍼센트 허위 거짓으로 조작하여 기사로 실은 것입니다.  사실 삼신론월경잉태설을 주장하다가 한기총으로부터 가장 악한 이단 사상을 가진 자로 판결 받은 최 목사는 2008 7 3일 서울고등법원 406호 법정 증인 심문 과정에서 "원고 박윤식이 직접적으로 하와가 뱀과 성관계를 맺어 가인을 낳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분명하게 아니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재판 과정을 통해 '하와가 뱀과 성관계를 맺어 가인을 낳았다'라는 말은 박 목사를 모략하는 자들의 날조된 거짓말이었음이 만 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사실 탁 소장에 대한 이단 연구가로서의 자질 시비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1991 3 30일자 크리스챤 신문에 보도 되어 있듯이 당시 새문안 교회(김동익 목사)의 모든 신자들에게 배포된 사진을 통해 아는 것처럼 여자 문제에 대한 시비로 이어졌고 두 달 후 녹취록(탁 소장과 김모 여인의 전화통화 내용)이 교계에 유포되었지만 당사자인 그는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의 허위 조작극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 그는 새문안 교회를 떠났지만 여자 문제에 대한 소문은 계속 교계에 맴돌았고 그것의 진실성 여부에 대한 확인이 잘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탁 소장 사후 검찰 측이 작성한 살해범 임홍천 씨에 대한 공소장에는 다음과 같은 증언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즉시 자신의 차로 되돌아가 뒤따라 출발하여 위 승용차를 미행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그곳에서 약 2Km 떨어진 같은 구() 중화3 307-1 소재 태릉시장 입구의 제일플라자빌딩 앞에 잠시 정차하여 ○○○은 내리고 탁명환 혼자 차를 운전하다가 하차하여 부근의 공중전화 박스에서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는 다시 차를 운전하여 같은 구 묵2 249-2 소재 중랑경찰서 앞 노상에 이르러 성명 미상의 30대 여자를 조수석에 태워 같은 구 중화 2 326-33 소재 4층 건물의 2층에 있는 중국음식점 대왕각으로 들어가 약 1시간 30분 동안 머물다가 다시 나와 차를 운전하여 1Km 가량 떨어진 같은 구 중화3 332-28 앞 고수부지의 외진 곳으로 가서는 차를 세우고 위 여자와 함께 뚝 밑으로 내려가서 서로 포옹을 하고 애무하는 것을 보게 되자 소위 이단 사이비 종교를 척결한다는 의로운 사명감은 동인(탁 소장)이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에 불과할 뿐 사실은 비윤리적인 행동도 서슴치 않는 파렴치한이라는 생각에 동인을 살해할 뜻을 더욱 굳히고.... "  사실 임홍천의 살해 동기는 박윤식 목사의 비판하는 글을 보고 증오감이 깊어져 살해했다고 밝혀졌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분이 단 한 번의 휘들린 칼로 인해 급소를 맞아 과다출혈로 죽었는지 아니면 다발성 자창에 의한 죽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파트 근처에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을 놓고 탁 소장을 좋게 평가한 사람들은 그를 순교자로 볼 것이고 반면에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은 그를 질 나쁜 인간으로 생각하면서 그의 죽음을 기뻐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비단 지나간 과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얼마 전 웨슬리에 대한 책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다고 스스로 말한 정이철 목사(바른믿음)가 거의 교주(?)에 가까운 서철원 교수의 말을 무슨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듣고 웨슬리를 이단이라고 사악한 궤변을 늘어 놓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의 무지와 무식함이 드러났지만, 더 파렴치한 것은 자신이 써놓은 글의 출처 조차도 적어 놓지 않고 그것이 마치 웨슬리가 주장한 것처럼 왜곡시키는 것을 볼 때 양심이 화인을 맞지 않고서는 목사로서 할 수 없는 짓을 한 것입니다.  솔직하게 장기영 교수와 일면식은 없지만 이 분이 Facebook과 불로그를 통해 정중하게 사과를 요구하였으면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책임 있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목회자의 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그런데 장 교수에게 이제 더 이상 날을 세우고 싶지 않아 자제하고 조심하는 중입니다.”라고 답글을 써놓은 것을 볼 때 참으로 목사로서 자질를 의심할 따름입니다.  물론 정이철 이 분이 구요한 목사(글로리아타임스)에게 한 것처럼 공갈과 협박에 가까운 형사가 범인을 취조하듯 할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오늘날 자칭 이단 감별사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이단을 바르게 연구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단 사냥질 하는 사람은 가룟유다처럼 태어나지 말아야 할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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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들 중에 하나의 성경구절을 두고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는 것은 각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배운 성경지식과 신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배웠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에 천년동안(왕국)에 대한 구절이 나오는데(계 20:1-6), 이 구절에 대한 해석으로 ‘전천년설’(역사적/세대주의적)과 ‘후천년설’, 그리고 ‘무천년설’로 나누어지면서, 달라스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전천년설’을 믿을 것이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은 ‘무천년설’을 믿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왜 그렇게 믿느냐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이들은 이것만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이들 각자가 자신들의 입장에 확고한 의지를 보이는 이유는 단 한가지인데, 그것은 자신들이 신학을 하면서 발견한 교리가 가장 성경에 근접하고 정확하게 옳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배웠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신학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신학적 확신이 너무 지나쳐 누군가 다른 견해나 해석을 내놓으면 “비성경적이고 왜곡된 해석”이라고 말하거나, 심하면 ‘이단’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이 습득해온 방법이나 교수나 교주(?)로부터 배운 것만이 올바른 해석인 것처럼 다른 형제에게 교조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잘못 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8세기 대각성 운동의 주역인 Jonathan Edwards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청교도 신학자이지만 ‘무천년설’을 믿지 않았고 ‘후천년설’을 믿었던 사람이었는데, 오늘날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며 근본교리를 믿는 개혁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Edwards는 비성경적인 신학을 가진 사람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칼빈주의 신학만을 공부한 사람은 성경을 주해할 때마다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해석을 하면서 자신이 배운 신학만이 가장 성경적이고, 마치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다른 어떤 신학적 입장도 인정하지 않고 바리새인과 같이 독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비판의 칼을 휘둘러 많은 사람을 영적으로 죽이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혔을지도 모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신학의 폭을 너무 좁혀 ‘밴댕이 소갈딱지’ 같이 성경을 해석했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고, 만약 신학을 다방면으로 연구한 사람이라면 성경을 한쪽으로 치우쳐 해석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신학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의 주장에 대해 보다 폭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가질 것입니다.  오래 전 R. A. Torrey는 “미성숙한 신학을 가진 사람은 분쟁을 일으키고 당을 짓는 집단정신을 초래한다.”라고 말했는데, 솔직히 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되어 있는 사람들의 고질적인 병은 다른 견해와 입장을 가진 신학적 이슈들에 대해 듣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고, 누군가 다른 것을 주장하면 이들은 마치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그 사람을 향해 신랄하게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무식한 변론(딤후 2:23)과 이단들처럼 논쟁하는 것을 낙으로 삼거나(딤전 6:3-4), 사람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는 죽은 정통 신학을 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쓸데없는 자부심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신앙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성경적인 것처럼 착각과 과대망상 속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목회를 하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깨닫고 느끼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는 말씀처럼 남을 비판하는 사람 치고 자신이 뿌린 씨를 거두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지 말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말씀하셨는데(마 7:1-5), 이렇듯 남에게 비판적이고 무슨 ‘호구조사’를 나온 사람처럼 형사가 범죄자를 취조하는 것 같이 공갈과 협박을 하던 사람이 자기도 똑같은 상황을 겪는 것을 보고 마태복음 7장1절 말씀이 떠오르면서 하나님은 참으로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솔직히 기독교 안에서의 이런 ‘갑질’의 행동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지만, 이렇게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은(딛 3:9),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이 망령되고 헛된 말을 좋아하는(딤후 2:16-18), 독선과 위선으로 가득찬 정죄하는 신학으로 무장된 사람들이지, 만약 올바른 신앙관을 가졌다면 평생을 배워도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리스도 몸의 지체인 형제를 향해 비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단 사냥꾼들’의 특징은 일단 자신들의 신학노선과 다른 먹이(?)감이 생기면 무조건 심판관의 입장에 서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더 심한 경우는 인격을 모독하기도 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목회자가 영적분별력이 없어서인지 자기 자신이 사탄에게 조종 받는 지도 모르고 입만 열면 이말 저말 만들어내면서 막무가내 식으로 쓰레기 같은 이론들을 늘어놓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철저히 사탄에게 조종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본인 자신은 정의감에 불타거나 아니면 Lloyd Jones의 말처럼 “완벽한 정통이지만 완벽히 쓸모없는 죽은 정통 신학”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나팔을 불지는 모르겠지만(마 6:2), 한 가지 만큼 확실한 것은 나타나는 열매가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약 3:14-16),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만큼은 알 수 있습니다(갈 5:19-21).  즉 예수님의 말씀하신 대로 열매로 그들을 판단하는 것입니다(마 7:16).  James R. Spencer는 『Heresy Hunters』에서 ‘이단사냥꾼’과 ‘변증자’를 구별하면서 변증자는 어떤 사람이 논쟁의 대상이 될 때, 그 교리가 구원에 필수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논란된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가능한 덕스럽게 해결하도록 노력하려는 반면에 이단사냥꾼은 목회자의 신학노선과 교리, 그리고 성경해석에서 다른 것을 발견하면 심판관(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그 문제를 과장하거나 왜곡하고, 심지어 거짓말로 조작해서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고 합니다.

 

 

Jonathan Edwards는 이런 교조주의적인 태도와 편협한 신앙관을 가지고 트집을 잡기 좋아하는 사람(눅 11:54)을 비판의 영을 가진 불신앙의 사람이라고 했고, 스스로 ‘칼빈주의적 감리교도’라는 명칭을 선호했던 Lloyd Jones도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일은 준비도 되기 전에 일찍 성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목회자나 신학교수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귀한 직분을 가지고 잘못된 가르침을 통해 신자들의 영혼을 도적질하고(마 23:15),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행 20:28)를 허무는 행위이기 때문에 무서운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히 10:29).  Lloyd Jones의 후임인 R. T. Kendal은 이런 문제를 일찍 깨달아서인지 자신이 준비되기 전까지는 성공을 허락하지 말아줄 것을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솔직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자기의 소견이 옳은 대로 행했던 사사시대와 같이(삿 21:25), 성경도 자기 주관주의로 해석을 하는 시대가 되었고(벧후 1:20), 무엇보다도 죽은 정통신학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무익한 논쟁으로 다툼이 일어나는데(딤후 2:23), 이것은 자신이 육신에 속한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일 뿐 아니라(고전 3:3), 이미 마귀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약 3:13-15).  만약, 진짜 사냥을 하려면 이단(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구원파)들과 ‘맞짱토론’을 해야 마땅한데, 왜 유독 신학노선과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리스도 몸의 지체인 형제를 비판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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