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율법은 그 요구의 범위에 있어서 포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율법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모두 관계를 가질 뿐만 아니라(시 119:96), 생각될 수 있는 모든 죄를 금지하고(롬 7:12-13), 생각될 수 있는 모든 선(善)을 명령합니다(롬 7:7).  또한 소극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나태(약 4:17)와 적극적인 모든 범죄를 아울러 정죄합니다(롬 3:23).  그리고 율법은 그 정신에 있어서 포괄성을 지니고 있는데, 율법은 의로운 말과 행동을 명령할 뿐만 아니라(마 5:22, 막 12:31), 의로운 성향과 마음의 상태를 요구합니다(마 5:28, 고후 10:5, 엡 5:1, 벧전 1:16).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은 그 요구의 범위에 있어서 외적인 행위와 내적인 마음, 그리고 적극적 범죄와 선을 행치 않는 소극적 행위 등 인간 전체 전부분에 걸쳐 총망라하여 언급할 뿐만 아니라, 그 정신에 있어 하나님의 거룩에 완전히 일치할 것을 요구합니다(레 11:44).  또한 율법은 포괄성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완전한 사랑(마 22:37), 즉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숭고성을 지니고 있습니다(막 12:30-31).  사실 죄성에 오염됨으로써 연약하게 된 인간으로서는(롬 5:12), 이러한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롬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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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메소포타미아 왕국들 중의 하나인 앗수르는 시리아 사막과 아르메니아, 페르시아 산을 접경으로 하는 고원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앗수르의 역사는 B. C. 5000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하나의 왕국으로서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 때는 B. C. 900-600년의 약 300년간이다.  이 당시에 활약했던 왕으로서 구약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자들로는 디글랏 빌레셋 3세(왕하 16:7), 살만에셀 5세(왕하 17:3) 등이 있다.  한편 앗수르는 문화적, 종교적인 면에서 바벨론의 여러 신들과 함께 그들 고유의 신인 Assyria를 숭배하였었다.  그리고 유프라데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지역을 영토로 삼았던 바벨론 제국의 역사는 선사 시대의 역사를 제외하고는 크게 고(古) 바벨론 시대(B. C. 1830-1530), 중기 바벨론 시대(B. C. 1530-630), 신 바벨론 시대(B. C. 630-539)로 나눌 수 있다.  바벨론 왕국의 창시자는 수무아붐(Sumuabum)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오늘날의 ‘델 엘 우케이미르’(Tell-el-Ukheimir)인 기스(Kish)에 최초로 바벨론 도시를 세웠다.  바벨론은 함무라비(B. C. 1866-1728) 시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다가 중기 바벨론 시대에 이르러 앗수르에 의해 거의 멸국(滅國)되었으며, 그 후 나보폴라샬(Nabopolassar, B. C. 625-605)에 의해 다시 재건되어 페르샤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기까지 일시적 영화를 누리었다.  한편 이때와 관련된 성경역사로는 바벨론의 예루살렘 침공 및 이스라엘 멸망, 바벨론의 유수(왕하 24-25장) 등을 들 수 있는데, 당시 바벨론 왕은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 B. C. 605-562)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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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의미에 있어서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율법이라 하나, 넓은 의미로는 창조 시부터 피조물 내부에 존재하는 법칙을 율법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전자는 ‘성문적 율법’이라 하고 후자는 ‘기본적 율법’이라 합니다.  먼저 기본적인 율법은 그 대상이 비이성적 존재인가, 혹은 이성적 존재인가에 따라 다시 자연율(natural law)과 도덕률(moral law)로 구분이 되는데, 여기서 자연율(自然律)이란 비이성적 피조세계에 내재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고, 도덕률(道德律)이란 자유의지를 지닌 이성적 존재로 지음 받은 피조물의 본성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성문적 율법은 기본적 율법보다는 시기적으로 늦게 주어졌으나 보다 구체적이며 멸망 받을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탁월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은 도덕법과 의식법, 그리고 시민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도덕법’은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되어 있는 도덕률 가운데 중요한 것들을 요약하여 놓은 폐지할 수 없는 율법으로 그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이고(출 20:1-17),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며(마 22:37-40), ‘의식법’은 모세를 통해 주어진 제사법, 성결법과 같은 종교적/의식적 규정으로 할례, 제사, 식물의 정결과 부정의 구별, 절기 등의 외면적 의식들을 관한 법들이 이에 해당하고, ‘시민법’은 선택받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성결한 사회생활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모세를 통해 주신 법입니다.  이 시민법은 의식적 율법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수한 상황에 맞추어 주어진 것으로 매우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법으로 오늘날 그대로 자구적으로 적용할 수 없지만, 그 율법에 내재된 정신과 원리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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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이 잘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은 과식을 피한다.

그는 신경 안정제나 수면제 등 의사나 약사의 처방에 따르지 않은

일체의 약의 복용을 주의 깊게 피한다.

 

그리고 그는 수면시간을 스스로 다스린다.

만일 정욕의 문제로 마음이 혼잡해지면

그는 불순한 생각을 몰아내고

깨끗한 생각으로 마음을 채우며,

건설적인 활동을 하기 위한 방법들을 생각해 낸다.

그에게 있어 모든 자기 탐닉과 끊임없는 유혹들을

마땅히 정복되어야 할 골리앗이 된다.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습관을 고칠 수 없다고 불평하는 것을 듣는다.

그들은 자신의 패배주의가

그러한 실패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들의 말은 성령께서 필요한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성령을 소유하지 못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종종 흡연, 음주, 도박, 욕설 등을 끊을 수 없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내주하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그런 습관들을 끊을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악한 습관들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으로 우리의 심령을 충만케 하는 일이 필요하다.

 

-윌리엄 맥도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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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자신들의 소나 나귀가 구덩이에 빠져 죽게 생겼으면 안식일이라도 그 짐승을 꺼내 살렸습니다(눅 14:5).  그것은 그 짐승이 불쌍해서라기보다 재산의 손실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으로 고통 받고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고쳐준 것을 가지고 안식일을 범한다고 비난했습니다(눅 13:14).  사실 그들은 고통 받는 사람을 자신의 소나 나귀만큼도 중하게 여기지 않았고 고통 받는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참 뜻을 알지 못했지만(요 7:23),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함으로 안식일의 참 뜻을 아셨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었고(눅 6:5), 안식일의 규례를 초월하는 분이시며(롬 14:5-6),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그리스도를 위해 있는 것이었습니다(막 2:27-28).  따라서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봐도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범했다는 주장은 타당치 않고, 무엇보다도 죽음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을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뿐더러(눅 10:29-37), 그것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사랑의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인 것입니다(마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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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물세례’를 받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물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불세례’이다.

우리가 불세례를 받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으로 여기고

불세례를 받기 위해 힘쓴다면,

오늘날 교회는 성령의 불로 타오를 것이며,

제2의 오순절이 도래할 것이다.

물세례를 받은 사람이

옛 본성대로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불세례를 받은 사람은

결코 그렇게 살 수 없다.

왜냐하면 불세례는 옛 본성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기적도 행하고

예수님의 부활까지 목격한 제자들도

불로 깨끗하게 된 후에야

비로소 십자가를 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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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피조물이지만(창 1:27), 인류의 시조 아담 이래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함으로서 마귀의 종이 되었고(히 2:14), 그 죄의 결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롬 5:12).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의롭게 살 능력조차 없을뿐더러(렘 2:22), 남은 생을 완전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이미 지은 죄 값으로 죽음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롬 6:23).  그러나 인간이 죄인임으로 인하여 당하는 죽음의 형벌을 면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죄 없는 다른 사람이 그 죄인을 대신하여 죄 값을 받는 것입니다(갈 3:13).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담당하도록 죄 없으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나게 하시고(갈 4:4), 율법을 완수하심으로써(마 5:17), 완전한 의인이 되어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시기에 흠이 없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벧전 1:19).  즉 그리스도는 죄 없이 태어나(히 4:15), 평생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써 율법을 완수하셨고 율법에 대하여 의인으로 인정되었습니다(롬 5:18).  이렇게 그리스도는 완전한 의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죄를 담당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고(히 9:28),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해결하신 것입니다(벧전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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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성령 2016. 5. 5. 14:24

왜 성령은 저와 여러분 안에 살기를 원하실까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아갈 능력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구원받는 순간에 성령의 내주하심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첫째로, 성령의 내주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도록 기도할 필요가 없으며 성령의 내주 임재를 추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기도나 금식으로 매달릴 필요가 없이 구원의 한 부분으로 자동적으로 받게 되는 축복입니다(고전 12:3, 6:19).  성령의 내주사역이 구원의 순간에 시작이 된다면 내주는 경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내 안에 거처를 삼는 것으로서 보통 느낌으로 감지하는 것과 관계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해서 우리의 모습이나 목소리, 그리고 느낌이 꼭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처럼 처음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셨을 때 말씀 안에서 그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이것은 성령의 능력사역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확실히 경험하는 것은 우리 삶에 드러난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의 열매입니다.  몇 날 몇 주가 지나면 성령의 임재 결과로 삶에 변화가 일어난 것을 자신이 알아보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변화들은 말씀의 조명, 성령의 열매, 동기부여의 은사, 이렇게 세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성령께서 새 신자 안에서 하시는 첫 번째 일은 성경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조명하십니다.  ‘조명’한다는 말은 밝은 빛을 비추어 있는 것을 잘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자매님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늘 성경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성경을 늘 읽지만 성경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 뜻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독려해 가면서 읽지만 말 그대로 글자를 읽고 있을 뿐 도저히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수양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삶의 구주로 영접을 했습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시게 되자 성경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성경책을 읽을 때마다 말씀이 책에서 튀어나오는 것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 냈습니까?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말씀의 진리를 그의 마음속에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성령의 사역을 말씀하셨습니다(요 14:26, 15:26, 16:13-14).  이것이 내주하시는 성령사역의 첫 번째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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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은 내용상 하나님(1-4계명)과 이웃(5-9계명), 그리고 자신(10계명)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의무를 제시합니다.  이 십계명에 따라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려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1계명), 순결한 예배를 드리며(2계명), 망령된 말을 삼가하고(3계명), 안식일을 지켜야 했습니다(4계명).  성경의 증거로 볼 때 예수님께서 이 네 가지 중 하나라도 어기셨다고 볼만한 것이 없었고 그는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했을 뿐입니다(빌 2:8).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무를 다하려면 부모를 공경하고(5계명), 인간(6계명)과 결혼을 존중히 여기며(7계명), 남의 재산권을 보호하고(8계명), 그리고 진실한 증언을 해야 합니다(9계명).  어느 누구도 이점에 대하여 예수님의 잘못을 지적하지 못했고 심지어 가까이 접할 기회가 있었던 사람들조차도 그에게 아무 잘못을 찾지 못했습니다(눅 23:14-15).  또한 예수님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10계명), 가책을 느끼거나 위축되지 않으셨고 자신을 비난하는 유대인들에게 당당하게 반박하였으며(요 10:32),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께 기도하여 온전히 응답을 받았습니다(요 11:41-44).  이와 같이 예수님은 십계명을 다 준수한 사람이셨습니다.  더 나아가 실제적인 행위의 판단의 근거로 삼는 모세 율법의 수준을 뛰어 넘어 동기와 마음의 상태까지 강조하셨는데, 예수님은 살인이나 간음은 물론 형제에게 화를 내고 욕하는 것과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21-48).  따라서 예수님은 모세 율법이 요구하는 정의(正義)를 만족하고도 남는 분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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