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5.02.22 심판 받을 자
  2. 2025.02.13 하나님의 심판 1
  3. 2025.02.09 시작과 완성

심판 받을 자

최후의 심판 2025. 2. 22. 19:25

예수님은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한 자를 심판하실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 12:48).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생명을 거부하는 것임을 아셨다.  이들은 누구인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고전 5:13), 곧 ‘불의한 자’(벧전 2:9), ‘경건하지 아니한 자’(벧후 3:7, 유 14-15), 예수를 경배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이 세상에서 속한 사람들’(NLT/계 6:10)이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이 기다릴 수 있는 유일한 미래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 즉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히 10:27) 뿐이다.  아무리 선하고 도덕적이라 할지라도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불신자들, NLT)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계 21:8).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은 같다그렇다면 신자들은 어떠한가과연 그들도 심판을 받는가나는 문제를 차근차근 말하고 싶다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하나님의 은혜( 2:8) 그리스도가 십자가 상에서 완성하신 사역으로( 19:30) 말미암아 믿음으로 이루어진 관계에 규정된다( 5:2).  따라서 마귀는 행위를 막으려고 애쓰지 않고 믿음을 막으려고 발악에 가까운 궤계를 쓴다(눅 8:12). 

그런데 믿는 자들은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1:12), 주님과의 영원한 삶을 보장하는 영생을 현재 소유함으로써심판을 받지않는다( 3:18).  그들은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이는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때문이다( 5:24).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듯이’(요일 5:12), 신자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삶을 보장하는 영생을 현재 소유함으로써 얻었다.

NLT 영역본은 요한복음 5 24절을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결코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번역한다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1:13).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8:1).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들의 몸의 구성원이 된다는 뜻이다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다(고전 15:55). 

그런데 주목할만한 사실은 신약성경에카리스’(은혜)라는 그리스어 단어가 155 등장하는데, 100회가 바울 서신에서 언급된다는 것이다신성모독자이며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바울 사람,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6)에게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게부어졌다(딤전 1:14).  위협과 살기가 충만( 9:1)하고, 악질 중의 악질(딤전 1:9) 바울에게 어떻게 그런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실 있을까?’  질문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바로예수(딤전 1:15).  은혜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통해 주어진다(딤후 2:1).  어디에서도 얻을 없는 것이 은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말이여라는 구절은 문자 그대로신실하도다 말씀이여 번역된다목회 서신 외의 다른 곳에서는 구절을 사용한 적이 없는데(딤전 3:1, 딤후 2:11, 딛 3:8), 말을 다시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도 좋은 믿을 만한 말이 있다’(현대인의 성경).  말은참되니 너희는 말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NCV).  너희가 마음에 새기고 의지할 있는 것이다’(메시지 성경).  그러므로 진술은 전적으로 신뢰할 있고, 보편적으로 받아 들어져야 한다’(J. B. Phillip’s).  마디로 너희는 말을 믿어도 된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신뢰할만한 진술은 우리와 상관이 있는 것인가바울은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죄인 중에 괴수’인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 말한다바울은 과거를 회고하며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놀라운 인내하심을 깨닫는다바울 자신이 모든 편지를은혜라는 말로 시작하고 끝맺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그의 마지막 어구도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딤후 4:22)였다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은혜다( 5:2).  따라서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것은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것을 의미한다( 2:21).  

'최후의 심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위에 따른 심판  (0) 2025.03.15
행위에 의한 칭의  (0) 2025.03.08
신자들이 받을 심판  (1) 2025.03.01
하나님의 심판  (1) 2025.02.13
시작과 완성  (0) 2025.02.09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하나님이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라는 사실(창 18:25)은 처음부터 성경 이야기의 근간이었다(창 16:5, 31:53).  하나님의 심판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고(딤후 4:1), 그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다(고후 5:10).  하나님께서 각사람의 행위를 따라(욥 34:10-11, 시 62:11-12, 잠 24:12, 사 59:18, 렘 17:10, 겔 24:14, 호 12:2).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실 것’(삼상 2:10)이며,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이다(전 12:14).  이 모든 사람에 대한 심판은 가장 은밀한 것까지 숨길 수 없는 심판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하신다.  그분은 공의와 공평으로 심판하실 것이다(창 18:25, 시 9:8, 벧전 2:23, 계 16:7).  이는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고’(시 1:5), 의인들은 ‘여호와 앞에서 노래하게’(시 98:8) 될 것임을 의미한다.  

언제 이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이 ‘정한 기약’(시 75:2) 곧 ‘여호와에게 속한 날’(렘 46:10), 다시 말해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벧후 3:7) 이미 정해 놓으셨다.  만물의 시작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것들을 끝낼 능력도 가지고 계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친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다(딛 2:14).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사 33:22). 

여기에는 이스라엘 자손만을 위한 구원뿐만(사 45:17)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구원도 포함된다(행 28:28).  따라서 새로운 창조물인 교회 안에는 국적이나 인종, 교육 정도, 사회적 지위, 부, 성, 종교, 권력의 장벽이 없어야 한다.  어떻게 이 장벽을 제거할 수 있는가?  바울은 그리스도만이 만유시요 그 모든 것 안에 계시기(표준 새번역) 때문이라고 대답한다(골 3:1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분열이나 편견이 있을 수 없다(고후 5:17).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처럼 신약 성경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하나님이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다’고 선언한다.  그날은 매우 다양하게 불렸다(롬 3:6).  ‘공의로 심판하는 날’(행 17:31.  ‘여호와의 날’(사 13:6-9), ‘주의 날’(벧후 3:10), ‘마지막 날’(요 12:48), ‘심판의 날’(마 10:15, 11:22, 12:36, 요일 4:17), ‘멸망의 날’(벧후 3:7), ‘그날’(딤후 4:8)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의 심판 개념을 발전시킨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롬 13:11)라는 말씀처럼 그날이 더 가까워졌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고’(마 3:10),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벧전 4:7), 따라서 주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이시다(벧전 4:5).  이렇게 다가올 심판은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를 포함할 것이기 때문에 우주적일 것이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설명해야 할 것이나(롬 14:12), 하나님의 세세한 조사를 견디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시 1:5).

그런데 추가적인 발전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을 수행할 사람, 즉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을 선택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마 28:18), 그분을 ‘하나님이 정하셨다’(행 10:42).  모든 인간들이(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궁극적으로 주님 앞에 설 것이다.  물론 그분은 ‘입법자와 재판관’이신(약 4:12) 예수 그리스도시다(요 5:22-23, 27).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그를)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다’(행 17:3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는 비록 아버지의 뜻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는 아니지만(요 5:30),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딤후 4:1).     

심판은 복음의 한 부분이고(롬 2:16), 복음은 진리이기 때문에(갈 2:5, 14, 엡 1:13), 하나님의 심판 역시 진리에 기초하여 이루어질 것이다(롬 2:2).   여기서 인간의 약점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육체를 따라’ 즉 사람이 정한 기준에 의해(요 8:15), 외모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요 7:24, 벧전 4:6).  따라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만한 참된 능력이 없는 우리의 판단은 언제나 공정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 주재’(Sovereign Lord)시다(계 6:10).  이 사실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수 있고(롬 2:16), 또 그렇게 하실 것이며(롬 14:12),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고전 4:5) 분임을 의미한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요 8:16), ‘의롭고’(요 5:30, 계 19:11), ‘정의롭다’(롬 2:5).  왜냐하면 그분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 때문이다(딤후 4:8).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이다(벧전 1:17, 행 17: 31, 롬 2:11, 벧전 2:23).  

그렇다면 심판받을 자는 누구인가?  그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고전 5:13),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히 10:27), ‘불의한 자’(벧전 2:9), ‘경건하지 아니한 자’(벧후 3:7, 유 14-15), 이 세상에 속한 ‘땅에 거하는 자’(계 6:10)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을 반드시 심판하신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한 자를 심판하실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 12:48). 

예수님의 첫째 지상 사명의 목적은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영생을 발견할 길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요 3:17, 8:15-16).  그런데 그분이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의 주된 목적 중 하나는 심판이 될 것이다.  거부당한 예수님의 말씀이 마지막 심판날에 모든 불신자들을 반드시 정죄하게 만든다(요 3:31-36, 5:22-23, 26-30, 9:39).

'최후의 심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위에 따른 심판  (0) 2025.03.15
행위에 의한 칭의  (0) 2025.03.08
신자들이 받을 심판  (1) 2025.03.01
심판 받을 자  (0) 2025.02.22
시작과 완성  (0) 2025.02.09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사람들의 감정을 깊이 자극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입에 게거품을 물고 열정적으로 논쟁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터넷은 죄성을 가진 인간들이 컴퓨터 뒤에 숨어서 심지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인신공격적인 언쟁을 일삼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사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보이는’(잠 17:28)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침묵하는 것이 더 유익을 얻을 때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동일하게 받은 은혜를 가지고 어떤 주제를 놓고 어떻게 토론해야 하는지를 배울 필요가 있다(롬 15:7, 엡 4:1-3). 

건설적인 신학적 대화의 한 가지 특징이 무엇인가?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결국 각자의 의견 차이가 무엇이며, 그런 차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대해 합의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만약 우리가 성경의 전적인 진실성을 긍정하는 데 동의하고 그러한 긍정이 모든 교리와 실천의 문제에 있어 절대적인 역할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다시 말해 신학적으로 ‘서로 물고 뜯고 싸우지 않는다면’(갈 5:15),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이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는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결국 더 강한 호소력을 행사할지도 모른다(요 13:35).  이 말의 의미를 알았으면 한다.    

사도 바울은 성경 두 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과 완성에 관해 언급한다.  먼저 빌립보서 1장 6절은 확신을 주는 말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 구절의 의미는 우리 안에서 구속이라는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통해 그 일을 이루실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때 그 일을 완수하실 것이다.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 시작되었다(엡 1:13-1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완성을 보장하신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3절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거기에는 살벌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바울은 선물을 받은 후 그것을 다시 얻으려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철저히 모순인지 설명하려고 성령을 통한 이러한 체험들에 호소하고 있다.  그는 갈라디아의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짓을 시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전통에 대한 종속과 맞바꾸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성령을 할례와 유대인의 음식 규례와 어떻게 맞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시작했던 자들이 다시 육체로 돌아가는 것, 즉 ‘완성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이 보증이 실패하는  이유는 이 보증 자체 때문인가, 아니면 이 보증을 받은 자의 실패 때문인가?  여기엔 분명히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과정이 들어 있다. 

우리는 바울에게 있어 ‘구원’은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는 것 같다.  사실 바울은 ‘구원’이라는 단어 자체를 그 과정의 최종 결과를 가리키는 데 사용하고(롬 13:11, 살전 5:8-9), ‘구원하다’라는 동사의 미래시제는 아직 소망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롬 5:9-10, 10:9, 13, 11:26, 고전 3:15, 5:5).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전형적인 의미에서 ‘구원받은 과정에 있는 자’다(고전 1:18, 15:2, 고후 2:15).  그런데 문제는 ‘이미’(Already) 시작된 것과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이 두 시제가 바울의 사고에서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시작이 완성을 보장한다는 말인가?  빌립보서 1장 6절을 읽어보면 그렇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자기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동사 시제는 바울이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역을 통해 빌립보 신자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그날까지 여전히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3절을 읽어보면 훨씬 더 조심스럽게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계속 믿음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질문은 구원의 과정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의 또 다른 측면을 검토하게 만든다.  

'최후의 심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위에 따른 심판  (0) 2025.03.15
행위에 의한 칭의  (0) 2025.03.08
신자들이 받을 심판  (1) 2025.03.01
심판 받을 자  (0) 2025.02.22
하나님의 심판  (1) 2025.02.1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