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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6.23 웨슬리와 구원
  2. 2024.06.16 칼빈과 구원
  3. 2024.06.09 구원의 순서
  4. 2024.06.02 구속 1

‘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은 Princeton 철학과 명예교수 Harry G. Frankfurt가 쓴 책이다.  혹시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를까 해서 짤게 설명하고 싶다.  제목이 유별나지만 개소리는 세상을 더럽히고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욕(汚辱) 시킨다.  개가 짖는 소리야 당연히 개소리이니 문제가 될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개가 아닌 사람이 ‘개소리’로 나팔을 불어대면 그 사람은 인간 되기를 포기한 개가 된다.  다시 말해 개소리 같은 신학을 늘어놓으면 그는 이미 개 같은 사람 되기를 자청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놈’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  신학자나 목사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런데 ‘개소리’ 떠드는 신학자, 혹은 ‘개소리’ 짖어대는 목사라는 말을 들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잘 알았으면 한다. 

독립적인 신학은 우물 안에 갇힌 한정된 신학이다.  이런 신학은 정말 답답하기에 짝이 없는 신학이다.  반면 초교파적인 신학은 언제나 풍성하게 만드는 신학이다.  그 이유는 다른 신학적 입장들과 상호작용을 통해 넓은 시야를 갖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실상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불일치하는 영역보다는 공통된 영역을 더 많이 소유하고 있다.  여기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는 몇 가지 중요한 영역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동의한다(삼상 2:6-7).  Wesley의 신학적 접근법이 다른 이들의 접근법과 다를지라도, 그는 결코 하나님의 주권을 축소해서 믿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감소시키는 일체의 신학적 관점을 주장하는 데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Wesley의 비판자들은 에게 그런 혐의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막상 그의 작품들을 검토해 보면 이런 주장들이 하나같이 ‘개소리’인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우리는 인간의 자유에 동의한다(신 30:19-20).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자유의 성격과 범위 및 작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불일치할지라도 어떤 그리스도인도 ‘로봇’(Robot) 혹은 ‘꼭두각시’ 같은 인간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느 그리스도인도 인간의 자유가 그 구성과 표현에 있어서 ‘태생적’(胎生的)이라고 믿지 않는다.  사실 Wesley가 자유의지를 믿고 가르쳤다는 혐의 아닌 혐의를 ‘카더라 통신’ 골빈 신학자와 목사들로부터 받았다.  하지만 그의 책 『Predestination Calmly Considered』에 의하면, 그는 ‘태생적 자유의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용어라고 말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우리가 소유한 어떤 자유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그는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속죄의 효력에 동의한다(벧전 3:18).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 한 번으로 충분하다(히 9:12).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그 밖에 다른 것이 필요하거나 요구되지 않는다(행 4:12).  즉 속죄 사역의 단회성은 속죄의 완전성을 나타낸다(히 10:18).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열심을 다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고전 1:23)와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행 4:10).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속죄론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것이 인간에게 작용하는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서로 의견이 불일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속죄는 우리가 구원받은 객관적인 원인이며 주관적 영향을 우리에게 미치는 무엇이다.    

서론이 길어졌지만 이 말이 꼭 필요한 것 같다.  『The Letter of Rev. John Wesley, ed. John Telford, 8 vols』에 나온 Wesley의 말이다.  “나는 항상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스스로 영적인 선을 행할 능력이 일절 없음을 분명하게 주장해 왔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의 선한 생각 혹은 소원조차 이를 일으키시는 성령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구원과 관련된 어떤 일과 용납됨 조차 … 회심시키는 주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로움이 우리가 구원받는 유일한 공로적 원인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Wesley 신학의 뿌리는 결코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나 태생적 자유의지 개념에 기반을 둔 그 무엇이 아니다.  그의 신학은 언제나 은혜의 신학이다.  Wesley에 대해 쓸데없이 이단적 사상을 가진 신학자라고 ‘개소리’로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한다.

Calvin과 Wesley 두 사람이 이견을 보인 주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면 믿음은 인간 구원의 조건(condition)인가, 결과(result)인가 하는 것이다.  Calvin의 입장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실질적인 은혜의 증거였다.  반면에 Wesley의 입장에서 보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prevenient grace)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즉 Wesley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미리 알고 계신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그는 Calvin과 그의 추종자들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을 너무 강조하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성경의 교리를 혼란스럽게 했다고 주장하였다.  만일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과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를 주장한다면 인간의 믿음은 의미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받을 사람을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Wesley는 『Thoughts on Salvation by Faith』에서 말한다.  “절대적 예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혀 상황에 맞지 않는 규정을 갖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공로를 통한 구원을 거부하지 않는 한 그들의 주장은 일관성을 잃게 된다”  

선행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부르고, 회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며 의롭다고 인정받는 존재가 되게 한다.  그러나 Wesley는 칭의(justification)가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칭의는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성장하는 역동적인 기회의 출발점이었다.  실제로 Wesley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을 축복하고 구원의 확신과 성화를 향하여 인내하며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Calvin과 Wesley 두 사람은 성화(sanctification)를 강조했으나, 성화에 대한 Wesley의 관점은 Calvin과 자주 구별되었다.  Wesley는 『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이라는 설교에서 구원의 본질적인 성격에 대하여 말하면서 구원은 두 가지 기본적인 요소, 즉 칭의와 성화로 이루어진다고 선포하였다.  그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칭의의 문제에서 종교개혁자들과 대체적으로 동일한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구원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이견을 보인 부분은 하나님이 신자들의 삶에 얼마나 역동적으로 은혜를 베풀고 그 은혜를 미리 베풀기 원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이 성령과 협력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루기를 바라고 있다(롬 8:4).  그것이 Wesley가 전적 성화를 이야기하는 이유다.  

Calvin과 Wesley는 구원론에서 많은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원의 순서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Calvin의 관점에서 은혜는 실질적, 혹은 저항할 수 없게 역사한다.  그 은혜는 선택된 사람들, 즉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에게 제한된다.  실제로 멸망할 대상으로 저주가 예정된 사람들은 영생을 믿을 의지와 능력이 없는데, 그 또한 하나님의 뜻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의 영원한 지위를 선포하거나 결정한다. 

그러나 Wesley는 보편적이거나 무제한적으로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하였다.  즉 하나님은 은혜로 모든 사람에게 먼저 구원을 제시하고(롬 10:11) 다음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 선물을 받을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셨다는 것이다(막 16:16).  사람들에게 은혜가 미리 보편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한다는 것을 확인한다(벧후 3:9).  또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에 미리 정한 계획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미래를 미리 알고 생명의 조건들을 대략적으로 정할 수 있지만 특정한 사람들의 구원이나 멸망을 구제척으로 미리 결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입장은 구원의 순서와 관련하여 Wesley와 Calvin이 가지고 있는 차이의 예가 될 것이다.

Wesley는 설교 가운데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한 Calvin의 입장에 동의한 설교를 들어보자.  Wesley는 이 설교의 제목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Salvation by Faith』라는 제목을 붙였다.  “만일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한다면 이것은 ‘은혜 위에 은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가장 큰 은혜, 곧 구원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말로 다할 수 없는 이 선물에 대하여 감사하는 말 외에 다른 말을 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심’으로 된 것이다. 여러분은 은혜 가운데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 은혜는 구원의 원천이며,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다”   

Wesley와 Calvin은 개신교회가 강조하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교리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삶(빌 2:5-8)과 죽음(마 27:50)과 부활(고전 15:20)을 통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주신 놀라운 선물이다(엡 2:8).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죄인인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를 대신 치르고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마 20:28).  그런데 Calvin이 쓴 책들을 읽어보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그 자체로 제한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이들에게 유효하지 않다고 믿었다.   구원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영생을 주기로 무조건 선택하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  또한 하나님은 영원히 저주받는 사람들도 징계하신다. 

Wesley Calvin의 이러한 입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이 말에 오해 없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얼마든지 다른 의견과 생각을 가질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Wesley는 그리스도가 분명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었다고 주장하였다(딤전 2:6).  즉 대속(vicarious)은 제한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눅 14:15-24)은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는다(막 16:16, 요 3:18).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의 긍휼 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딛 3:5) 구원을 얻는다.  믿음이 영생의 조건이기 때문이다(엡 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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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은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에 속한 성도들의 견인(Perseverance) 구원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라는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예정에 의해 선택(election) 받고 성령에 의해서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그의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구원이 보장된다는 Calvinism의 독특한 교리다.  사실 Calvin의 견인구원은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환영할만한 구원관이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Once saved, always saved)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단 한 번이라도 맛본 장로교 신자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Calvin의 견인구원을 Wesley는 ‘궁극적 구원’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Wesley는 한번 믿은 사람이 끝까지 타락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성경에 지적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Calvin의 견인구원에 제동을 가하기 위해 성경을 제시한다.  많은 성경 구절들이 있지만 몇 가지만 적고자 한다.  먼저 에스겔 18장 24절과 히브리서 10장 26-29절, 그리고 특별히 구원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도 그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언제라도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 것을 로마서 11장 20-22절과 연관 지어 설명하였다.  지면 관계상 에스겔서와 히브리서는 생략하겠지만, 로마서 말씀에 대한 Calvinist들의 해석은 주로 이런 식이다.  “문맥상 바울이 믿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나 진정한 믿음을 가지지 않는 자들을 언급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것은 개별신자들이 구원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찍혀 나갈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일반화된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떠나는 한 집단으로서 이방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확증편향적 해석이다.   

먼저 구절들을 눈여겨보길 바란다.  20절에 ‘저희는 믿지 않으므로 꺾여졌다’, 21절에는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다’, 22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걸려 넘어진 자들에게 심판으로 행하셨다(롬 9:32-33). 즉, ‘넘어지는(거역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준엄하심이 있었다’.  다시 말해 선택이고 나발(삼상 25:25)이고,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2)는 말씀처럼 구원은 언제나 조건적이다.  죄악에서 돌이켜 회개하면 살고(겔 18:30-31),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죽는다는 것이다(창 2:17). 

짧지만 정곡을 찌르는 『Predestination Calmly Considered』에 나오는 Wesley의 말을 들어보자.  “참된 포도나무의 가지인 신자들이라도 떨어져 나갈 수 있으며 마침내 영원히 멸망할 수도 있다”  이것은 거룩함을 입은 자도 죄를 지어 타락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영원히 죽을 수 있다는 뜻이다.  달리 말해서 Wesley는 인간의 구원 문제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이와 같이 Wesley는 Calvin의 ‘성도의 견인’ 교리를 성경을 통해 부정했다.

Calvin이 강조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그는 영생을 받기로 선택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유효한 본성과 영원한 형벌을 받을 사람들에 대한 배척을 지겹도록 강조하였다.  사실 Calvin에게 있어 예정론이 사람들에게 큰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오직 죄 가운데 있으며, 그들 가운데 구원받을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으로 구원받도록 예정된 사람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Wesley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Calvin의 구원론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은 대단히 중요한 주제였다.  하지만 ‘구원의 순서’(order of salvation)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위치는 Calvinist들 사이에서 논쟁이 심한 '타락 전 예정론'(supralapsarianism)과 '타락 후 예정론'(infralapsarianism)처럼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의 연합을 “우리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그리스도, 즉 신비한 연합”(mystical union)으로 보았다.  대부분 성례전(sacraments)의 맥락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야기했지만, Calvin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에 앞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사람들은 예수의 대속(vicarious)의 공로로 의롭다고 칭해질 수 있다.   그리스도의 연합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실질적인 부르심을 확신하고 또한 그들이 거듭나고 믿으며 회개할 수 있게 한다.      

Calvin의 칭의론은 그의 구원론에서 가장 뚜렷한 강조점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며, 이는 종교개혁이 강조한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sola fide)을 반영하고 있다.  Calvin은 법적인 방식으로 신학을 세워가면서 바울의 칭의 교리(doctrine of justification)가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인정하였다.  『기독교강요』에서 나오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그러므로 칭의를 단순하게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하여 의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칭의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입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의(Righteousness)가 우리 안에 주어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로운 존재들인 것처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를 대신하여 예수의 의를 받으셨고, 택함 받은 사람들은 죄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예수의 대속의 사역을 통하여 용서를 받았다.  Calvin은 계속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칭의는 징벌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을 마치 죄가 없는 것처럼 확인하여 풀어준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우리를 의롭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결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안에 주어진 의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서하셨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 안에 의로움이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 것이다”  믿음이 가지고 있는 칭의의 능력은 인간의 공로에 있지 않고, 우리의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공로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Calvin과 Luther 모두는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칭의와 성화가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Calvin은 Luther보다 성화를 더욱 강조하였다.  Calvin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으로 더욱더 성숙해지고 그리스도를 닮은 신자들이 되기를 얼마나 소망하는지 강조하였다.  그는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또한 성화의 과정을 서술하면서 고통(mortification)과 활력(vivific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율법의 세 번째 용도(The Third Use of the Law)인 도덕적 기준에 따라 살아야 할 필요를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성화에 대한 Calvin의 관점은 당연히 Wesley와 달랐다.  이 문제는 추후에 다시 논하겠다.  

Calvin은 하나님이 택함 받은 사람들은 마지막 날 영화롭게 될 때까지 인내할 것이라고 믿었다.  칭의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어떤 이들은 여정을 시작하자마자 넘어지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참아낸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인내는 실질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그러면서 “오직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만이 살아 있는 믿음의 뿌리를 받을 자격이 있는 있는 사람들로 여겨지고 그로 인하여 마지막 때까지 견딜 수 있게 된다” 

여기서 Wesley는 Calvin의 주장에 다시 한번 성경적 제동을 건다.  Wesley는 하나님의 선택(election)을 두 가지의 뜻으로 설명하였다.  하나는 특별한 사명을 맡겨주기 위해 거기에 적합한 인물을 선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택정 하는 것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복음의 선포를 위해 특별하게 선택되었다(눅 6:12-16).  그러나 이 선택이 영원한 구원과는 관계가 없었다.  왜냐하면 선택된 열 두 제자 중 구원을 잃어버린 자도 있었기 때문이다(요 6:70).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아는 것처럼 가룟 유다는 선택을 받았지만 구원을 받지 못했다(행 1:18, 25).  나머지는 생략하겠다.        

Calvinism 안에서 구원의 확실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한 문구들 가운데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 표현들이 있다.  ‘영원한 보장’(Eternal Security) 혹은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는다’(Once saved, always saved)라는 문구들이다.  사실 Calvin은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가 사용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용어들은 하나님이 사람들 속에 믿음을 심어주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저항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을 갖게 되면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을 기뻐한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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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주관적 차원에 관련하여, 교회사에는 ‘구원의 순서’(order of salvation)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 구원의 순서를 특별하게 설명하려는 신학적 노력은 많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는 성례전적 관점에 따라 구원을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일곱 가지 성례전(seven sacraments)을 행하는데, 그 가운데 다섯 성례전이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었다. 

성례전 차원에서, 구원은 ‘세례’(baptism)로 시작된다.  그다음에는 ‘견진’(confirmation)의 성례전으로 이어진다.  이때 사람들은 세례 받을 사람들의 그리스도교 신앙(Christian faith)을 확인한다.  적절한 나이가 되어 그리스도교 신앙을 확인한 신자들은 ‘성만찬’(Eucharist)에 참여하여 영적인 성장을 도모하고 ‘고해성사’(Penance and Reconciliation)에 참여한다.  병자와 임종을 앞둔 이들은 긴급하게 기름부음을 베푸는 ‘병자성사’(Sacrament of the Sick)를 받는다.  이 다섯 가지 성례 전은 모두 실제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지며, 일반적으로 구원의 순서로 가능하였다.

종교개혁 이후에 Protestant Church의 신앙과 실천은 Roman Catholic church과 구별되는 졍체성(Identify)과 차별성(distinguish)과 함께 개신교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신앙 전통들과 차별성을 찾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구원의 순서를 명시적으로 작성하려는 노력은 18세기까지 공식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구원의 순서에 대한 관심은 Calvin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Wesley와 지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동떨어진 독일 루터란 교회(German Lutheran Church)에서 시작되었다. 

Calvin과 Wesley 모두 구원의 순서를 공식적으로 정하는데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저술에서 구원의 순서에 대한 내용들이 암시적으로 담겨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Wesley는 ‘성서적 구원의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이라는 설교에서 구원 사건을 단계적으로 연결하는 것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과적으로 Calvin과 Wesley의 추종자(Followers)들이 열심히 노력했지만 두 사람에게서 구원의 순서를 찾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 않다.

그런데 구원의 순서를 규정적으로 정하는 것보다 설득력 있게 표현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구원의 순서를 불변하는 교리적 차원에서 기술하기보다 사람들의 구원 경험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과정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설명은 사람들이 구원과 영적 성장 그리고 사람들이 구원받는 방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구원의 순서를 규정적으로 정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구원의 순서를 규정적으로 정하면 사람들에게 순서를 구체적으로 분명하고 열정적으로 알릴 수 있기 때문에 동의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일반적인 삶을 살거나 구원의 순서가 적용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리적인 설명은 너무 협소한 이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면 된다(롬 12:3).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는 구원과 함께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구원의 차원들이 있다.  은혜(grace), 믿음(faith), 회개(repentance), 칭의(justification), 성화(sanctification), 영화(glorification)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것은 아닌 신학적 개념들이 있다.  예지(foreknowledge), 예정(preordination), 택함(election), 사명(calling), 계시(illumination), 회심(conversion), 중생(regeneration), 용납(adoption), 확신(assurance),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 인내(perseverance), 절망(mortification), 완전 성화(entire sanctification) 등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인지해야 할 것은 그러한 용어(term) 들을 정의하고 신학적으로 내포된 분위기를 파악하는데 반드시 의견의 일치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예정이라는 말은 특별한(particular) 의미나 일반적(general) 의미에서 사용될 수 있고, 은혜라는 말도 역사(effectual) 하거나 선행(prevenient)하는 의미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한 순서를 정하는 것은 결국 이론(theory) 혹은 신학(theology)이기 때문에 구원의 순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구원의 순서를 규정하는 것이 인간의 삶에 대한 신학적 논의에서 유용할 것이라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데 두 사람의 저작에서 관찰할 수 있는 구원의 일반적인 순서나 경로에 대한 논의가 신학적으로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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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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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논쟁거리/속죄 2024. 6. 2. 15:56

마가복음에 보면 고질적인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 여자가 나온다(막 5:26).  이 여자는 자신이 가진 고질적인 병으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고통을 당하면서 가지고 있던 재산을 다 탕진할 정도로 많은 의사들을 만났다.  하지만 병이 더 호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그런데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고통을 당하다가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다(막 5:34).  또 다른 여성이 요한복음에 나온다(요 4:7).  이 여자 역시 오랫동안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왔다.  문제는 조상들을 잘못 만나 평생을 전통과 제도에 얽매여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우물가에서 만났을 때, 자신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죽은 전통에서 놓여남을 받았다(요 4:20-24). 

내가 누구를 만나느냐가 참으로 중요하다.  가령 신학생이 교수를 잘못 만나면 평생 그 교수로부터 배운 것이 최고의 학문인양 나팔을 불어댄다.  더 큰 문제는 잘못 배운 신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심지어 영적으로 죽이기까지도 한다(사 9:16).  신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만약 가르치는 선생을 잘못 만나면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가르치는 선생보다 갑절이나 더 지옥자식이 될 가능성이 많다(마 23:15).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면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당시 율법학자들, 오늘날로 말하면 가르치는 목사와 신학자를 잘못 만나면 영혼이 파멸될 수 있다(눅 11:52).  어감이 최악이긴 하지만 표준어이기에 사용한다.  한 마디로 가룟 유다처럼 인생을 ‘조지는’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고(요 17:5),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요 1:3)에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실 하나님으로 예언되었다(사 11: 1-5, 40:3).  그분은 사망의 권세를 극복하신 ‘하나님’으로 호칭되었고(요 20:28)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시나(마 28:19), 특별히 제2위 성자(聖子)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명칭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었다(눅 3:22).  이 명칭이 예수님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성자의 신분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모든 구원받은 자의 구주 되심을 보여준다(행 5:31). 

또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 ‘여호와’란 명칭은 오직 절대자이시며 영원 전부터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에게만 사용되는 고유명사이다(출 3:14).  그러나 이 명칭이 예수님에게도 직접 사용된 것(사 26:4)은 그리스도께서 영원 자존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계 22:13).  특별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 언약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처음과 마지막’이시며(계 1:17), ‘알파와 오메가’이신 구속사역을 완성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히 9:12).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히 1:2) 제2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히 1:3) 만물의 창조자이시고(골 1:16), 우주를 통치하시는(요 17:2), 율법의 제정자이시다(마 5:22-32).  이러한 성자 하나님께서 대속물(속전)이 되기 위하여(마 20:28), 자신의 신적위엄을 보류하시고 인간의 몸을 입어(빌 2:6-8), 율법의 저주 아래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요 10:18).

이렇게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스스로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였다.  그것은 인간의 범죄로 인해 생긴 원수 된 것을 제거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였다(엡 2:16).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저주를 받으신 것이 아니다.  그는 모든 인류를 위하여 자원해서(요 10:17), 자신이 저주의 대상이 되시고 그 십자가에서 처형의 형벌을 견디신 것이다(히 12:3).  이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놓으신 것이고(엡 1:7), 베드로전서 3장 18절 말씀처럼 단 한 번의 죽으심을 통해 인간을 향한 구속사역이 완성이 된 것이다(히 10:14).  이러한 예수님의 죽으심이 죄와 율법의 노예 된 상태에 있는 우리를 속량함으로써 대속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갈 3:13).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부활을 빼놓고 십자가를 믿는 믿음 외에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 의하면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내세우는 주장이 마치 성경에 가장 근접한 것처럼 다른 형제를 향해 신랄하게 비판한다(약 4:11-12).  그런데 이들은 ‘구속’과 ‘구원’에 대해 혼동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죽으심(행 5:30)은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는 구속을 위한 속죄사역이다(롬 3:23-26).  타락한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고후 5:18-19).  그러나 이  십자가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다(막 16:16).

이스라엘 백성들이 뱀에게 물렸을 때,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자 물린 자들마다 살아났다(민 21:6-9).  그렇다면 오늘날도 그저 십자가만 바라보면(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요 3:14-16).  먼저 영혼이 사늘한 시체처럼 죽어 있는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엡 2:8)와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요 6:37).  더 나아가 개인 스스로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복음(롬 1:16)을 믿고 받아들여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막 16:16).  여기에 ‘불가향력적 은혜’라는 신학적 용어를 끌어다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얼마든지 복음을 거부할 수 있다(행 26:24-29).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조화를 이룬다.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는 이 놀라운 복음(약 1:21)이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증거 한다(롬 1:2).  복음의 핵심 주제를 가장 잘 표현하는 구절이 성경에 나온다.  이 구절은 기독교 변증을 위한 핵심 본문이기도 하다.  고린도전서 15장 3-4절 말씀이다.  그런데 부활을 빼놓고 오직 십자가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온전한 복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어떻게 설교하였는가?  오직 십자가만 믿으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목소리 높여 메시지를 증거 했는가?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행 2:22-36).  그가 고넬료 가정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같이 증거 했다(행 10:39-41).  그리고 10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 총의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으면서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자 자신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이야기했다(행 15:7).  또한 로마서 10장 9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복음은 바울이 아그립바와 베스도 앞에서(행 26:23), 그리고 총독 벨릭스에게 증거 한 것처럼(행 24:21), 십자가의 사건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사건까지 포함시켜야 온전한 복음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갈 1:4)과 부활(롬 5:10)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신다(벧전 1:3).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동시에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고(마 16:21, 막 8:31, 눅 9:22),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롬 1:16).  만약 부활을 빼놓고 십자가만을 증거 한다면 그것은 복음도 다르고, 영도 다른 짝퉁 예수를 전하는 것이다(고후 11:4).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은 십자가보다 부활을 더 강조했다.  그가 십자가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나팔을 불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고전 15:17).  따라서 누군가 십자가만 믿고 부활을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성경에도 없는 사악한 궤변이기 때문에 참 복음이 될 수 없다.  이런 반쪽짜리 복음을 전하면서 그것이 마치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증거 하는 목사들이 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가 거짓을 일삼는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것이다(딤전 4:1). 

심각하는 것은 이런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복음을 증거 하지 않고 신학적 논쟁이나 정치, 혹은 ‘개콘’을 보는 것처럼 떠드는 것 말이다.  Calvin은 설교하는 강단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불렀다.  이게 무슨 말인가?  강단 위에서 복음을 증거 하지 않는 모든 말은 ‘개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듯이’(마 7:16) 이들은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다(딤전 4:2).  그런데 정작 자신은 정상적인 목사라고 착각을 한다.  누구든지 영혼이 살아나려면 개 짖는 소리가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한다(요 5:25).

예를 들어 초대교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그릇된 견해를 가진 수많은 이단들, 즉 예수님의 신성은 믿지만 인성을 부인하고(Docetists), 인성은 믿지만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Ebionites), 또는 위격의 통일(Nestorians)과 양성의 구별을 부인하는 자들(Eutychians), 심지어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도 무조건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계 22:18-19).  누구든지 성경을 편리한 대로 골라서 믿는 사람은 이단이나 사이비가 될 가능성이 많다(딤후 2:16-18).  성령의 역사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만(갈 5:22-23), 귀신들이 역사하는 곳에는 신학적 비방과 이간질이 난무하고 시기와 다툼과 요란함 밖에 없다(약 3:14-16).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논쟁이 아니라 논쟁의 영이다.        

성경에서 증거 하는 구원받는 믿음이란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일어난 일련의 모든 과정과 사건들, 출생, 고난,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 등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믿는 믿음이다(계 22:18-19).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한 영원한 제사’(히 10:12)를 드리신 것은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시기 위한 구속이다(벧전 1:18-19).  만약 누군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부인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빼놓고 오직 십자가를 믿는 믿음 외에 구원이 없다고 강조하는 것은 한 마디로 ‘잡소리’다.  개혁주의신학자 R. C. Sproul 박사의 말이다.   “가르치는 자가 ‘지식’을 나누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데 덕이 된다.  하지만 ‘무지’와 ‘무식’을 나누는 것은 교회를 허물고 분쟁과 분열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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