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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5.26 단독설
  2. 2024.05.12 신인 협동설
  3. 2024.05.05 속죄

단독설

칼빈과 웨슬리 2024. 5. 26. 11:35

우리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사 55:8).  그분은 우리의 지각을 넘어서기 때문에 두 입장에는 각각의 신비가 담겨 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단독설(monergism)과 신인협동설(synergism), 두 입장은 각각 신학적인 유효성과 적절성이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어느 쪽의 신비에 따라 살 것인지, 어느 쪽을 따르지 않을 것인지 결정하는 것 이상의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은 ‘조삼모사’(朝三暮四) 하기 때문이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은 상황과 환경을 따라 얼마든지 이쪽저쪽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신약의 다양성을 인정하기 위해 Pentecostal Theology과 Wesley Theology, 그리고 Calvin Theology을 공부했다.  엄청난 학비를 들여 가면서 12년이 넘는 세월을 공부한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불통(不通)과 골통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이다.  하나의 신학만을 공부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무엇인가?  불통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골통’ 소리를 듣는다.  한 마디로 건설적인 신학적 대화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의견 차이가 무엇이며, 그런 차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합의할 수 있는 능력이 이들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배운 신학하고 다르면 다 이단인가?  나는 정말 이런 개소리하는 목사를 만나 일대일로 살벌한 토론을 하고 싶다.  상대의 신학이 나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감(語感)이 조금 그렇지만 ‘골통 목사’ 그리 좋은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목사를 만나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이 불쌍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원과 상황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진술이라는 차원에서 일관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Calvin 신학의 강점은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강력한 확증이다.  Calvin은 인과관계의 관점에서 구원을 이해했기 때문에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음을 확증하고자 했다.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함 없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모든 선하심이 근본이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다른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고 확신하지 않는 한, 모든 사람이 경외하고 흠모할 대상이 한 분 있다고 단순하게 주장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지혜와 빛, 혹은 의로움이나 능력, 혹은 정직이나 참된 진리 그리고 그분이 원인이 되지 않는 모든 것의 단 한 조각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Wesley 신학의 강점은 하나님의 통치를 믿으면서 인간의 자유를 확증하는 것이다.  그는 구원을 보다 관계적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죄악의 조건에서 법적으로 구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그들을 의롭다고 할 수 있는 충분한 원인을 준비하셨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자유는 회심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롭게 행하고(갈 5:1),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과의 사랑과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엡 4:13) 자라도록 부름 받았다.  그들은 처음 창조될 때 가졌던 하나님의 본래 형상(창 1:27)을 새롭게 함으로써 더욱 많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거룩하게 하는 성령과 관계 속에서 협력하며 행한다(롬 8:4).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요일 4:16)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사랑으로 사람을 지으셨고, 사람은 사랑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다.  Wesley는 이 사랑에 대한 강조를 『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사랑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실제로 아무것도 없다. 만일 여러분이 사랑보다 귀한 무엇을 찾으려 한다면 과녁에서 빗나간 것이며 왕도를 벗어난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복을 받은 적 있습니까? 질문할 때 그것이 사랑보다 귀한 것을 의미한다면 여러분은 틀렸다. 여러분은 사람들을 옳은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죄에서 여러분을 구원한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다른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된 사랑 이상의 것을 바라야 한다”

Calvin과 Wesley 두 사람 모두 인간의 죄성과 타락,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영생을 얻는 것이 불가능해진 인간의 상황을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구원의 소망을 잃도록 내버려주지 않으셨다.  두 사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마 27:50) 그리고 부활(요 20:19)을 통해 구원을 예비한 것을 찬양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통하여 구원을 얻었다(엡 2:8-9).  이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딛 3:5) 십자가에서 구원을 받은 죄수처럼 값없이 선물로 주어졌다(눅 23:43).  하지만 Calvin은 하나님이 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행동하신다고 믿었다.  반면에 Wesley는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시작하시고 은혜로 가능하게 하며,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신다고 믿었다. 

Wesley에 의하면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는다(요 3:36).  하나님은 사람이 스스로 원하여 진정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는 선택을 하기를 바라며 구원의 과정에서 사람과 협력하는 것을 기대한다(요 3:16-21).  그 선택은 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구원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선택을 하도록 허락하는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이다.  그러한 자유는 성령 안에서 개인이나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닮아간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며 살아가도록(마 22:36-40) 그리스도인의 생애 전체에 걸쳐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빌 3:13)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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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은 인간에 관한 운명론이나 결정론을 거부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어보면 Calvin은 인간의 자유가 아닌 하나님의 자유를 전적으로 확증하는 결정론(determinism) 중심의 신학을 전개한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강요』에 나온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들을 분별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손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을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정한 것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분명한 이유,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고 피조물의 특별한 본질에 의한 것도 아니지만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러면서 그는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  “어떤 상인이 일단의 정직한 사람들과 함께 삼림 속에 들어갔다가 잘못하여 일행을 잃고 헤매다 마침내는 도적을 만나 살해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죽음을 선견(先見) 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작정하셨던 것이다”  더 나아가  Calvin은 신명기 19장 5절 말씀을 가지고 벌목하다가 우연히 자루에서 빠진 도끼에 맞아 죽은 사람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주장한다. 

Calvin에게 있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 일어난다.  이것은 『기독교강요』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에서는 Calvin과 조금 다른 주장을 한다.  “하나님은 모든 가능한 조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아신다. 그러나 그분이 어떤 일을 ‘선견’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미래로, 또는 어떤 조건에서 일어날 것으로 작정하신 것은 아니다”  이단이 아닌 이상 나는 이들의 주장을 존중한다.

Calvin은 하나님의 의지의 결정론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 ‘단독설’(monergism)이라는 말로 설명하였다.  그리스어 ‘하나’와 ‘일하다’의 합성어인 이 말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로 모든 것을 충분히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고 일어나는 모든 일, 즉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는 분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은혜의 교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하나님만이 인간 구원에 영향을 미치신다는 견해다. 

Calvin의 추종자들 역시 단독설 개념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관리 밖에서는 생명이나 구원이 일어날 수 없다는 신학적 학증을 설명하였다.  그들은 그 밖에 방식으로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은혜를 통하여 얻는 구원보다 의로운 공로를 우선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솔직하게 말해 Calvin의 추종자들은 Calvin의 5대 강령 TULIP에서 벗어나 말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다른 신학은 거의 이단이나 다를 바 없다.  이것은 내가 대학원에서 Calvin Theology을 공부하고 오랫동안 개혁주의 장로교단에 소속되어 있을 때 몸소 경험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Calvinist들이 가진 단독설에 대한 Wesley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는 하나도 동의하지 않았다.  Wesley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확인하면서 성경과 함께 교회전통과 비판적 사고 그리고 결정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올바른 경험을 통하여 보다 역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Wesley는 ‘신인협동설’(synergism)로 표현할 수 있는, 즉 사람이 하나님과 맺는 역동적인 관계성을 강조하였다.  ‘함께’와 ‘일하다’의 합성어인 이 말은 하나님이 은혜로 부여한 사람의 능력과 함께 협력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작용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견해다.  인간이 열심히 노력하면 구원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갈 2:16).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이라는 실질적인 설명이 Wesley에게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협동설은 그가 사용한 용어는 아니었다.  진실을 말하고 싶은 것은 초대교회 대부분의 기독교 문헌들과 오늘의 문서들은 단독설보다 신인협동설에 더 가까운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신인협동설에 대해 조금 더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Wesley는 원죄론에서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하셨다는 점에 대해서는 Calvin과 견해를 같이 한다.  하지만 선행적 은총(prevenient grace)에서는 견해를 달리한다.  여기서 선행적 은총이란 인간이 의롭다 함을 얻기 이전에 타락한 인간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말한다.  Wesley의 설교 『On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에 의하면 아담 타락 이후에 자연적인 그대로서의 상태로 머물러 있는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미 칭의 이전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는 것이다. 

Wesley가 말하는 선행적 은총은 구원의 시작이며, 이렇게 시작된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인간이 구원을 이루려면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이 반응, 즉 협동함으로 완성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도 선행적 은총 때문이라고 Wesley는 말한다.  더 나아가 인간에게 어떤 선한 동기가 생기다든가 하나님을 향한 일을 할 수 있다면 이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서 원인으로 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은혜를 못 받아서 구원받지 못하거나 타락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역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구원문제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면서도 그 안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는 말씀처럼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는 폼(?)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호응하며 함께 일하여야 한다.  이것을 ‘신인 협동설’ 또는 ‘복음적 신인 협동설’(evangelical synergism) 이라고 한다.  이 신인협동설은 인간의 공로를 기초로 하는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과 구별되며, 인간의 원죄론을 부정하는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와 구별되고, 인간이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을 근거로 하는 즉, 하나님이 절반, 인간이 절반이라는 신인협력으로 구원을 이룬다는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와도 구별된다.    

Wesley의 설교를 다시 들어보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도울 수 없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우리는 죄에 죄를 더하여 범죄 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만약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아니하면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이룩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모든 인간이 본래 병들었을 뿐만 아니라, 죄와 허물로 죽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살리시기 전에는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없다. 죽은 나사로가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전까지 걸어 나올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어느 인간이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께서 그 죽은 영혼을 살리시기까지는 죄악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다. 우리로 하여금 선한 것을 뜻하게 하거나 행하게 하는 자는 곧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뿐이다” 

오래전 서철원이가 바지목사 정이철을 내세워 Wesley의 신학은 이단이라고 단정해도 아무 무리가 없다고 떠들어 댄 적이 있었다.  솔직히 Wesley의 책을 단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목사가 그에 대해 신학적으로 논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다.  더 웃긴 것은 Wesley의 교리와 신학을 펠라기우스주의와 완전히 동일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나는 이 분이 치매 환자가 아니길 진심으로 바라지만, 작금의 시대는 개나 소나 신학자가 되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만약 Wesley가 펠라기우스주의자인가 아닌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면 이 설교만으로도 그 의혹을 풀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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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논쟁거리/속죄 2024. 5. 5. 14:49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속죄가 반드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역사적으로 세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첫째, Anselmus는 범죄 한 인간의 구원여부와 구원방법의 결정은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사역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둘째, Augustine은 택한 자의 구원에는 속죄나 공의의 만족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상대적 필요성만을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속죄의 필연성을 부인하는 견해로서 속죄는 본래 필요치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그렇게 결정하신 것뿐이라고 Schleiermacher는 주장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속죄’(atonement) 사역이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죄가 속해지도록 인간의 죄책에 해당하는 형벌을 대신 담당하시는 행위를 가리킨다(히 9:11-14).  이는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법적으로 연합하기 위해(롬 6:5), 인간의 몸을 취하심으로 단순히 낮추신 정도가 아니라(빌 2:6-8), 아예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요 1:29),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시며(요 19:34), 아버지께 버림을 받은 사건을 말한다(마 27:46). 

이 속죄와 관련된 용어로 ‘구속’이라는 단어가 있다(롬 3:24).  이것은 속죄가 죄를 속하는 행위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면(엡 1:7), 구속은 속죄행위는 물론 이를 중심으로 하여 인간의 구원을 이루게 하는 일련의 모든 과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성경에서 속죄라고 할 때는 죄인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사역을 말하는(벧전 1:18-21), 반면에 구속은 속죄에 비해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구속’이란 넓게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는 사역 전 과정을 가리키고(롬 3:24-26), 좁게는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여 구금된 자리에서 해방시키는 것으로 ‘속량’을 가리킨다(갈 3:13).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구속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때 구속은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구속의 성격을 갖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값을 지불하시고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하여 내셨기 때문이다(마 20:28).  이것은 구약 희생 제사에서 대속교리를 잘 증명해 주고 있는데, 하나님은 죄를 지은 사람을 대신하는 동물의 희생 제사를 받으시고 그의 형벌을 면해주셨다(레 9:7).  즉 예물을 드리는 자가 희생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어 자신의 죄를 그 제물에 전가한 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그 제물을 받으시고 그 사람의 죄를 사해 주셨던 것이다(레 1:4). 

이러한 구약의 동물 제사는 장차 있을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에 대한 예표이기에(히 10장), 하나님은 생명이 피 속에 있으므로 동물의 피로 죄를 사하셨다(레 17:11).  하지만 동물의 피가 죄를 영원히 깨끗하게 할 수 없기에(히 10:11), 그리스도로 하여금 죄인을 대신하여 죽게 하심으로 인간의 죄를 속하게 하셨다(히 10:4-18).  실제로 요한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시었고(요 1:29),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 제물로 삼으셨던 것이다(고후 5:21).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드리신 제사는 제사장들에 의해 드려 지는 것들과는 구별된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영 단번의 성격을 띠는 완전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히 10:10-14).  아론의 뒤를 이은 대제사장은 매년 지상의 지성소에서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다(히 9:1-7).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 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히 9:12).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고통의 순간에 ‘다 이루었다’(요 19:30)는 외침과 동시에 자신의 사역이 완성되었다.  이는 온전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손으로 만든 성소가 아닌 참 하늘에 들어가 하나님의 존전에 서신 것이다(히 9:24). 

따라서 그 자신의 피로 지성소에 들어가신 그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영원한 속죄를 이룰 수 있었다.  그가 문자 그대로 피를 가지고 들어가신 것이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구속에 필요한 모든 결과를 성취할 수 있었다(벧전 3:18).  그런데 Gore Charles는 『The Body of Christ』에서 그리스도의 속죄는 십자가 위에서가 아니라 하늘에 들어가실 때 완성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마다 대속죄일에 희생 제사를 드렸던 모든 제사장과 달리 그리스도는 단번(once for all)에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대제사장의 희생 제사가 완료되었다(히 10:12).  이제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히 1:3).  실제적인 제사가 십자가에서 드려졌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완전하고 반복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영원하다’(히 10:18).

비록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하신 어떤 일에 근거를 두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를 가지고 하늘로 들어가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헬라어 원문 하고는 거리가 멀고 성경적이지 않다.  심지어 RSV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자기의 피를 가지고’라고 번역하므로(히 9:12), 마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여전히 그분은 지상의 대제사장들이 속죄일이면 지성소에 피를 가지고 들어가듯 하늘에서도 그런 대속적 행위를 하셔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성경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단 번에 제사를 드림으로(히 7:27), 대제사장의 희생 제사가 완료된 것이고(히 10:12),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것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한 것이지(히 9:12, 24), 그 뒤에 일어난 일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의 제사를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제물, 다시 말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기의 피(골 1:20)를 가지고 옛 지성소의 원형인 ‘참 하늘’(히 9:24)에 들어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존전에 서셨고, 지금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계신다(히 9:24).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사역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이고(요 19:30), 참 하늘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완성된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속죄사역의 단회성은 속죄의 완전성과 종결성, 즉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히 10:14).  따라서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며(히 10:18),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들은 온전히 구원받을 수 있다(히 7:27).  무엇보다도 이 속죄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그 일에 관여하신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안전한 인간의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닌 완전하신 하나님의 계획(갈 4:4-5) 속에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히 9:14),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들은 율법을 어김으로 받게 될 형벌로부터 벗어났을 뿐 아니라(갈 3:13), 의식적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어졌다(갈 4:4-5).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력을 받지 못한 자들 위에 왕 노릇 하던(요 12:31), 이 세상 임금, 즉 사탄으로부터 구속을 받았으며(요일 3:8),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한 근본책임이 그리스도에게 다 전가된 것이다(롬 3:2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죽으심으로 인간의 구속사역이 성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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