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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의 사역론에서 가장 강점을 지닌 부분이 설교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평생 동안 수천 번 설교했는데, 특히 Geneva에서 사역하는 기간에 집중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가 궁금한 것은 Calvin은 선생인가 아니면 안수를 받은 목사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그가 언제 정식으로 목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기록도 없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방식에서 Calvin의 안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Calvin의 전기,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를 쓴 John T. McNeill은 Calvin의  안수 여부를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안수를 받았다고 믿고 있었다. 

Calvin의 사역의 우선순위는 설교와 교육, 그리고 기독교 신학을 정리한다고 믿었다.  그는 성경적 설교에서 탁월한 전통을 남겼으며, 복음적 설교를 통하여 Protestant 교회에 물려준 위대한 유산(legacy)은 엄청난 유익을 끼쳤다.  더 나아가 Calvin은 성례(sacrament) 전을 강조하면서 두 가지 성례전, 즉 세례(baptism)와 성만찬(Eucharist)을 강조했는데, 이는 Luther를 포함한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과 유사한 입장이었다.  그는 성례전의 가시적인 요소들(visible elements)인 물(water)과 떡(bread)과 포도주(wine)가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을 보여주는 증거하고 강조하면서 성례전이 하나님의 ‘말씀’(word)인 성경에서 말씀하고 보증하고 성취한 죄 사함의 표지(sign)라고 믿었다. 

그러면 유아세례(infant baptism)에 대한 입장은 어떠한가?  Calvin은 유아 세례의 유효성을 확인하였는데, 『기독교강요』에서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를 검토하기로 한다면, …. 그리스도가 제정하였고, 이 예식의 본질에 가장 부합한다”라고 보았다.  또한 Calvin은 주의 만찬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특별한 열매가 된다고 확인하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경건한 영혼들은 이 성례에서 큰 확신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거기서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의 것은 모두 우리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증거를 얻는다. 그 결과 우리는 그가 상속하신 영생이 우리의 것이라는 확신을 감히 가질 수 있다”   이 외에도 Calvin은 교회의 다양한 실천에 관심을 가졌다.  예를 들면 시편(psalter)과 교리 문답(catechism), 세례와 성만찬을 포함하여 교회 안에서 행하는 예전(禮典)과 성례전을 발전시키는 일에 주력하였다.

Calvin은  Geneva와 Switzerland를 넘어 특별히 조국 France에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모든 시간과 권한을 사용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목회자들을 임명하여 France로 보내면서 프랑스어권(French speaking land) 전체에서 『기독교강요』를 가르치 하였고, 실제로 유럽 전체로 확장된 신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종교개혁이 지속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Roman Catholic Church와 비교되는 Protestant Church의 변증(apologetics)과 논쟁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특별히 『기독교강요』에 분명하게 나타난 것처럼, Catholic Church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개신교회의 가르침들을 넘어서는 정통주의(orthodoxy)와 신학적 해석을 보여주었는데, 그의 지도력과 신학자로서의 탁월성에 기초한 것이다. 

Calvin은 사역의 지도력 형성하는 과정에서 에베소서 4장 11절 말씀을 앞세웠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gifts)을 말하지만 Calvin은 은사들을 ‘직분’(offices)으로 해석했다.  다섯 가지 직분을 소개했는데, 사도(apostles), 선지자(prophets), 복음 전하는 자(evangelists), 목사(pastor), 교사(teschers)이다.  그는 앞의 세 직분은 이미 1세기에 거의 끝났다.  오직 목사와 교사, 두 직분만이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교회 안에서 지속되는 사역이라고 보았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말한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커질 수 있도록 주님은 교회 안에 이 보물을 맡기셨다. 주님은 목사와 교사를 세우셨고(엡 4:11), 그들의 입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가르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권능을 주셨다. 그리고 신앙의 거룩한 일치와 올바른 질서를 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으셨다”    

Calvin은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의 직분은 1세기의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일시적인 직분(temporary offices)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기독교강요』 에서 말한 것처럼 그 기능들은 목회적으로 ‘순위가 낮다’(lower in rank)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사역은 특별하고 반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별히 성경의 최종적인 정경화 작업(final compilation of the Bible)이 완결되었기 때문이다.   

Calvin은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의 직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 가지 기능은 교회 안에 영구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교회가 없는 곳에 새로 세우거나 아니면 구약 시대에서 그리스도의 시대로 옮겨지는 기간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주님께서 그 후에 간혹 사도들을 세우시고 필요한 곳에 복음 전하는 이들을 세우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바로 우리 시대에 일어난 일처럼 받아들인다. 적그리스도의 공격에서 교회를 구해내기 위하여 그러한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직분들을 특별하다고 부르는 까닭은 올바로 세워진 공교회 안에 이러한 직분을 위한 자리가 없기 때문에 ‘임시직’이라고 부른다”

 『기독교강요』를 편집한 John T. McNeill은 Calvin이 적그리스도인 Roman Catholic Church의 엄청난 압제와 맞섰던 Luther를 ‘마지막 때’(end times)의 사도로 인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초기 광풍이 지나간 후에 그러한 종말론적인 직분들은 사라졌다.  따라서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들이 가졌던 목회적 기능은 Calvin이 『기독교강요』에서 말한 대로 “현대의 교사들은 고대의 선지자에, 그리고 목사는 사도에 해당된다. 그러나 목사는 각각 그에게 맡겨진 교회를 다스린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사도들과 똑같은 책임을 맡았다” 즉, 세 가지 직분은 ‘정확하게 동일한 목적’을 가진 목사에 의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교회의 후기 시대에 성취되었다.  

그렇다면 Calvin에게 있어 성령의  은사는 무엇인가?  그는 우리가 사는 지금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종결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입장이 성경에 영감을 넣어주는 성령의 역사를 더 높이는 일이라고 믿었다.  먼저 야고보서 5장 14절에 나타난 치유를 위해 기름을 바르는 것을 직접 언급한 Calvin은 이 말씀이 ‘주께서 잠시 동안 나눠주기를 기뻐하신 기적의 능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것이 오직 사도들과 관련이 있으며 ‘우리와 관련이 없고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셨다’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면서 『기독교강요』에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주님께서 행하셨던 다른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치유의 은사는 복음을 더욱 경이롭게 영원히 전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위하여 사라졌다”  이러한 주장은 Calvin 개인의 생각이라고 믿는다.

Calvin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1세기 신자들의 사도적 역사 이후에 적어도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가장 근본적인 매개는 사람이나 교회가 아닌 오직 성경(sola Scripture)이라고 믿었다.  그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며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기적이나 치유 그리고 대부분의 영적 은사들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보았다.  성경을 통하여 인생의 모든 사건들을 해석하고, 그것이 진리로 인도하기 때문에 신자들이 원하는 초자연적인 필요에 응답하는 데에는 오직 성경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또한 Calvin에게 있어 목회 사역은 오직 남성에게만 주어졌던 것 같다.  그는 여성들에게 ‘교회 지도자로 공식적으로 섬기도록’ 허용하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필요에 따른 결정’이라며 거부하였다.   『기독교강요』에서 나오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Augustine이 태어나기 이전의 관습은 우선 Tertullian의 글에서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으며 가르치거나 세례를 주거나 성찬을 집례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의 직책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더욱이 Priests의 직책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궁금한 것은 고린도전서 14장 34절과 디모데전서 2장 11-12절 말씀처럼 여자는 늘 교회에서 조용히 있거나 잠잠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Calvin은 안수로 세워지는 집사 직임을 여성들에게 맡겼다.  다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여자들이 맡을 수 있는 공적 직분은 구제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뿐이었다. 이 해석을 인정한다면 또 인정해야 한다. 집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성경에서 집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교회가 구제 물자를 분배하며 빈민을 돌보고 빈민 구제금을 관리하는 일을 맡긴 사람들이다. 그들의 기원과 임명과 직분에 대해서는 누가가 사도행전에 기록했다(행 6:3). 그러므로 사도들의 교회에는 이런 종류의 집사들이 있었고 우리도 그것을 본받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서 여성 목사 안수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싶지만 지면 관계상 여기까지만 하겠다.

교회 사역을 더 많이 지원하기 위해 Calvin은 두 개의 영구적인 직분을 논의하였는데, 장로(elders)와 집사(deacons) 직이다.  먼저 장로들은 평신도 중에서 선택하여 교회 신자들의 징계를 포함하여 지도력을 함께 하도록 하였다.  가르치는 장로들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장로들도 있었다.  그들이 맡은 가장 우선적인 역할은 교회와 사역을 안정적으로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사들은 신자들의 형편을 살피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역을 중심으로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담당하기 위하여 임명하였다.  

중복되는 문제도 있지만, Calvin은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는 영구적인 네 개의 직분, 즉 목사, 교사, 장로, 집사가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구성은 교회의 다양한 사역들(various ministries)을 완수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었다.  사실 Luther가 만인제사장설(priesthood of all believers)을 주장했지만 Calvin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교 사역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하여 교회와 사역에서 목사와 교사, 그리고 장로와 집사의 권위를 더욱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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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전

논쟁거리/속죄 2024. 7. 14. 17:17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대화는 참으로 중요하다.  인간은 대화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고, 마음의 문을 열고 진지하게 나눈 대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감정이나 의견의 대립을 해소시켜 준다.  무엇보다도 서로 간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 보다 바람직한 관계를 형성해 준다.  이런 유익을 주는 대화와 달리 성도로서 해서는 안 되는 대화가 있다(딤전 6:4-5).  그것은 신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무식한 논쟁적 대화이다(딤후 2:23). 

예를 들어 중세에는 세례를 줄 때, 사용하는 물에 파리가 빠졌을 때 물이 오염되었다고 생각하는 부류와 파리가 거룩해졌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었다.  이들은 만날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일삼았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신앙의 유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문제만을 발생케 하는 내용을 가지고 백해무익한 헛된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영혼구원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것 같다.  이들은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상실하고 신앙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로 신학적 논쟁이 그칠 날이 없다’(딤전 6:5).

어느 신학자가 ‘유보적 칭의론’을 강론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판의 신학적 칼날을 세워가지고 공격하는 진영이 있었다.  이들이 누군가 보았더니 다름 아닌 Calvin의 살인적인 비판정신을 이어받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유보적 칭의론은 구원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 개혁자들이 주창한 전통적 구원론 하고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교리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무익한 변론들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교리를 잘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Lloyd Jones는 정통적인 신학을 가진 사람이 걸려 넘어지는 매우 흔한 함정 가운데 하나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완벽한 정통적이면서도 죽어있는, 즉 영혼구원에 아무 쓸모없는 메마른 교리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예를 다시 한번 들어보자.  로마서 14장에 보면 고기 먹는 문제 외에 다른 것은 전혀 문제가 삼을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만날 때마다 그 문제를 대화의 핵심 주제로 삼고 시도 때도 없이 밤낮 고기 먹는 문제만을 가지고 교회를 나누고 서로 정죄하며 비판을 했다.  이렇게 만날 때마다 먹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자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7)고 일깨워 준다.  

지금은 불신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롬 2:24) 악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이 메마르고 패역한 세대에 잃어버린 영혼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막 16:15).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길 바란다.  관종(關種)이 너무나 많다.  로마 교인들이 먹는 문제로 서로 실랑이를 벌인 것처럼 신학적 무식한 논쟁을 통해 자기 좀 알아달라는 목사들 말이다.  이들은 어떤 교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서로 헐뜯고 비난할 시간은 있어도 영혼 전도나 기도에는 관심 없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논쟁은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성령을 근심시키고(엡 4:30) 소멸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살전 5:19).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짓을 일삼는 목사치고 죽은 정통 신앙에 묶여있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주님이 맡겨주신 목회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기름부으심이 없는 메마른 설교를 가지고 앵무새처럼 나불거린다.  이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목회에 모범을 보이며 맡겨진 양들에게 헌신하는 올바른 목회자를 만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무식한 변론이나(딤후 2:23), 논쟁을 일삼는(딤전 6:3-5), 바리새인 목사의 가르침을 받거나 추종하는 것은 가룟유다와 같이 귀중한 영혼을 마귀에게 팔아먹는 것과 같다(요 13:2).

서론이 너무 길었던 것 같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고 증거 한다(롬 5:8).  문제는 속죄의 범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의 양적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라는 것을 놓고, 한 부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다른 한 부류는 예수님의 죽으심은 오직 한정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어느 주장이 성경적이고 맞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보편속죄론’과 택한 사람만을 위해 죽으셨다는 ‘제한속죄론’이 있다.  먼저 보편속죄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지옥에 떨어질 불신자들을 위해서도 속전(贖錢)을 지불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1장 29절, 3장 16절, 6장 51절, 12장 32절, 로마서 8장 32절, 고린도전서 15장 22절, 고린도후서 5장 14절, 디모데전서 2장 6절, 디도서 2장 11절, 히브리서 2장 9절, 베드로후서 2장 1절, 3장 9절, 요한일서 2장 2절, 4장 14절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이들 스스로가 의도적으로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딴 길로 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들도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제한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만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반면에 제한속죄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영원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1장 21절, 20장 28절, 눅 19장 10절, 요한복음 6장 37-39절, 10장 15절, 26-28절, 17장 9절, 15-17절, 20절, 사도행전 20장 28절, 로마서 3장 26절, 8장 32-33절, 에베소서 1장 4절, 11절, 5장 25절, 디모데전서 4장 10절, 디모데후서 1장 9절, 히브리서 9장 15절을 제시한다. 

여기서 ‘제한’은 구원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는 대상의 양적제한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택하신 자기 백성들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선택받은 자들에게 구원을 가능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실제로 구원해 주신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교리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작정 순서에 대한 신학적 견해와 결부된다.  먼저 개혁파의 유명한 신학자들인 Martin Luther, John Calvin, John Owen, Theodore Beza와 같이 전택설(Supralapsarianism)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반대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직 선택한 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반면에 같은 개혁파 안에서 이름난 신학자들인 Augustine, Charles Hodge, Louis Berkhof은 후택설(Infralapsarianism) 견해를 취한다.  이들도 상대방 입장을 무시하고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주장한다.  두 부류 중 한 부류는 잘못된 것인가?

여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신약 성경의 어느 누구도 “누구에게 속전이 지불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질문이 불합리한 것은 신약성경의 기자들의 모든 관심이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얻은 값진 것이라는 사실에 집중되어 있었다(마 20:28, 롬 3:23-26, 벧전 1;18-21).  다시 말해 그 값을 누가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는 문제에 쏠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속죄의 범위에 대한 양대 견해는 성경에 나와 있는 구절을 가지고, Lloyd Jones의 말대로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 변론과 논쟁하기를 좋아하는(딤전 6:4), 사람들이 언어적 유의를 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다(고전 1:12-13).  이것은 각 사람이 어떤 신학적 혹은 신앙 배경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행 23:8).  따라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된다(롬 12:3).  무식하게 내 신학이나 신앙만이 맞은 것처럼 우겨대지 말아야 한다.  사실 의견 차이가 어느 정도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서로 비방과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면 둘 다 멸망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다(갈 5:15).

그러나 한 가지만큼 확실한 것이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셨다(엡 2:16).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롬 5:8)의 초청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만(요 3:15)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롬 5:1).  하지만 누구든지 원수 관계를 청산하고 구원으로 초청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거절한다면(눅 14:15-24), 그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로 남아 있게 된다(요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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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과 Wesley는 교회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과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물론 두 사람이 사역하는 모습은 유사점이 많았지만 차이도 분명했다.  Calvin은 공식적인 사역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이른바  ‘하향식’(top-down) 방식으로 권위를 앞세웠다.  그는 성경의 가르침을 기초하여,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는 말씀을 강조하면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수행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사역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을 선포하고 성례전(sacrament)을 올바르게 집례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God's Sovereignty)과 은혜(grace)의 승리를 축하하는 의미다.

그러나 Wesley는 성경에 분명하게 언급된 내용만을 사역의 범주로 제한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과 교회를 인도하고 능력을 주는 성령의 지속적인 임재와 역사를 통하여 사람들과 사회의 요청에 창조적이고 책임적으로 응답하는 것이 사역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Wesley는 Calvin보다 훨씬 더 혁신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켰다.  특별히 평신도 지도력을 강화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사역이란 이 세계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응답이다.  즉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마 28:20).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근거하여 사역을 정립하려 했지만, 교회사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역이 발전해 온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몇 가지 분명한 영역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말씀(고전 4:6)과 성례전(고전 11:23-34)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역, 혹은 묵상(막 1:35)이나 열심 있는 경건 생활(요일 2:6)을 강조하는 사역,  전도(마 28:18-20)를 목적으로 하는 실천적인 사역, 그리고 성령의 은사(롬 12:6-8) 중심의 사역, 혹은 에큐메니칼(ecumenical) 사역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설명하는 방식을 한두 가지로 단순화할 수 없다.  두 가지, 혹은 세 가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회나 교파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또한 다른 영역에 비해 한 가지 영역이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경우 다른 영역들을 2차적이나 3차적이 되기도 한다.  반면에 앞에서 언급한 모든 영역들을 최소한 조금씩이라도 수행해야 한다고 이상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을 통해 말한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고전 12:12).  한 몸은 많은 지체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서로 다른 은사들을 소요한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 몸 안에 있는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바울의 관심사였다.  이 유비는 종종 개체 교회들을 지칭하지만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렇게 이해하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교회들과 교파들은 서로 보완적인 사역을 수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Calvin과 Wesley를 비교하면서 한쪽이 옳고 다른 쪽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앞서 언급한 사역의 모든 영역을 대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  그러나 그들의 사역 방식과 사역에 대한 가르침은 두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다시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었노라’(고전 12:22-23).  여기서 말하는 ‘약하게 보이는’ 지체는 그 몸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지체들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눈에 잘 띄지도 않을뿐더러 전면에 나서서 자신들의 은사를 발휘하지도 않은 채 늘 뒤에 머물러 있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들을 사용하고 있다면 사실상 그 몸에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존재들인 셈이다.  교회에는 눈에 잘 띄는 지체들도 필요하지만 그렇지 못한 지체들도 모두 필요하다.  어느 누구도 자기 외에 다른 지체를 그리스도의 몸에서 하찮다고 괄시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한두 사람(목사와 장로)에게만 지나치게 영광이 집중되어서도 안 된다.  그 이유는 고린도전서 12장 25-27절에서 설명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다양한 사역의 영역이 있는 것처럼 지도력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다.  이러한 다양성은 교회사뿐 아니라 성경에서도 볼 수 있다.  때문에 사역이나 목회자의 지도력에 있어서 특정한 방식이 올바르고 다른 방식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한 관점은 성경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오직 개혁주의 교회에서 늘 나팔을 부는 것처럼 말씀 사역만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균형 잡힌 성령의 사역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Calvin은 교회사에 나타난 신학적 거인이다.  무엇보다도 사역에 있어서 그의 지도력과 신학적 공로를 결코 폄훼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alvin의 탁월함이 모든 개신교인들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모범은 될 수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Calvin을 목회자의 모범으로 인정하는 사람들도 실제 생활에서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Wesley의 모습이 오히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하지 못하면서 실제로 따르는 실제적인 모범이라고 확신한다.  이 말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것은 양쪽 진영에서 수 십 년을 몸 담아 신앙생활해 왔고, 양쪽 진영에 속한 모든 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진심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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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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