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치유에 관하여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강신술의 기법과 관련되어 있거나 잘못(사탄의 속임수)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염려와 두려움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이나 뉴 에이지(New age) 종교로 알려져 있고 정신수양을 위해 묵상하는 ‘Eckankar’ 와 같은 동양의 종교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집단들도 자신들이 병든 자들을 꾸준히 치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들의 주장을 무시하지 않지만 문제는 그러한 치유들의 근원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애굽의 마술사들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7:8-13).  그리스도인들이 치유에 관하여 말할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단 한분이신 참되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한 치유라는 점이다(15:26).  만약 이점을 놓치게 된다면 성경적 치유가 잘못된 것으로 판단해 버리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사들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경계하라는 말을 주변 친구 목회자들을 통해 들은 적이 많았다.  치유나 방언, 예언 같은 것은 우리를 미혹케 하는 사탄의 속임수야그것들을 멀리 하는 것이 좋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건전한 교리이지, 요상하고 마술적인 기법 같은 은사들이 아니야 솔직히 신적 치유를 부인하지 않는 불신자들 가운데, 특히 무가(巫家)에서 나타난 신내림굿(강신/降神)을 통해서도 신병(身病) 치유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여기서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속적인 회의론자들에게 동조하여 오늘날에는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는 그럴듯한 잡설(雜說)을 늘어 놓는 신학자와 목회자들 때문에 성경적 치유를 인정하는 기독교적인 입장이 거부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프랑스의 천재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Blaise Pascal이 『Pensees』에서 남긴 말을 인용하고 싶다.  우리는 거짓 기적이 많기 때문에 참된 기적이 없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기적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해야할 것이다.  오직 참된 기적이 존재한다는 그 사실 때문에 거짓 기적이 존재하며 또한 참된 종교가 존재한다는 그 사실 때문에 거짓 종교들이 그토록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오늘날 물질적 만족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며, 이 세상에는 물질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물질주의(物質主義)와 이성이나 논리적 타당성에 근거하여 사물을 인식하거나 판단하고 신의 섭리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합리주의(合理主義)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세속화된 서양적 세계관의 막대한 영향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 중에는 성경적 치유를 부정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한 부류는 기적을 체험한 적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성경을 주관적인 자기해석에 목이 메여 있거나 혹은 이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에게 짧지만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물론 초자연적인 치유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는 이런 간증이 무척 거스리거나 비위를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    

먼저 『Holy Fire』에 나오는 R. T. Kendal 목사에 대한 간증이다.  웨스트민스터채플의 교인들은 나의 아내 루이스가 겪은 심각한 기침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거의 3년간 지속되었다.  한번은 루이스가 기침으로 인한 시각장애로 런던에 있는 성토마스 병원 응급실로 갔다.  안과 전문의는 아내가 기침을 멈추지 않으면 망막이 분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아내를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런데 아내의 병은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의 기도로 치유되었다.  어느 토요일 아침 그와 그의 아내가 루이스를 기도해 주기 위해 웨스트민스터채플로 찾아왔다.  당시 루이스는 기침 때문에 거의 잠을 한숨도 못 잤지만 이렇게 말했다.  “저분의 기도를 받고 싶어요.  대대적인 광고나 예배도 없었고,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라는 강조하는 것도 없었다.  그 부부는 아내에게 대략 5분 정도 손을 얹고 방언으로 기도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놀랍게도 아내는 즉시 나았다.  이것은 1994 12월의 일이었다.  우리가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성령의 역사를 어렵지 않게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루이스의 치유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치유가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 끔찍했던 기침은 다시는 재발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나에 대한 간증이다.  성령의 능력을 받지 않고 사역하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힘들었다. 아내와 성도들에게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말을 남기면서 비장한 마음을 가지고 13시간의 비행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금식기도원에 들어온 지 거의 2주가 되어갈 무렵, 아침예배를 드리고 숙소로 돌아와 힘이 없어 드러누운 상태에서 두 손을 가슴에 얹고 눈을 감고 속으로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  주님, 제가 이곳에 있는 동안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 지금 너무 갈급합니다. 저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가 미련해서 깨닫지 못한 것이 있으면 가르쳐 주세요.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저는 돌아갈 수 없어요  조금 지나 갑자기 위와 식도 부분이 아프고 따끔거리며 통증이 오면서 운동할 때 근육통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파스를 바른 것처럼 화한 느낌이 들었다.  금식을 잘못해서 위에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반면 이것이 육체의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방식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몸에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았다.  사실 위궤양과 만성위염으로 인해 거의 25년 이상 위장약을 복용했지만 약을 먹을 때만 효과가 조금 나타나는 것 같았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똑같은 증상이 계속 일어났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그러한 증상이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말라기 22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질병을 말끔하게 고쳐주신 것이다.  생각지 않았던 질병이 깨끗하게 고침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는 표적을 나에게 보여주신 것이라고 믿는다(13:8).  이 사건이 있은 후 여기서 다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교회 성도들에게도 이런 간증들은 너무나 많다.  내가 이것을 이야기 하는 것은 오래 전 성령의 은사에 대해 실랄하게 비판했던 것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다.  치유는 이상한 불인가?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신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발견한 것은 인간사 속에 발생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에는 일관된 pattern이 있다는 것이다.  일일이 다 열거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주의 종들의 생애 가운데 일어난 수많은 기적들 외에 하나님의 대적자들과 싸우는 미가엘 천사를 비롯해서(10:21), 예수님께 수종을 들고(4:11), 기도로 지치신 것을 도와주며(22:43), 성도를 보호하는(12:7-10), 돕는 천사들의 활동(1:14)과 방문(18:1-15, 1:26), 그리고 치유(3:1-10)와 꿈(37:9, 1:18-22)과 환상(11:1-18)등의 많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예레미야 3220절에 주께서 애굽 땅에서 징조와 기사로 행하셨고 오늘까지도 이스라엘과 외인(온 세계/모든 사람) 중에 그와 같이 행하사 주의 이름을 오늘과 같이 되게 하셨나이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논증(論證)의 위험성을 일깨워 준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나오던 출애굽 시대부터 포로기까지 표적과 기사의 예가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런 일들이 아직도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거나 어느 정도의 빈도로는 행하지 않으셨다고 궤변을 늘어놓을 위험성을 가진 신학자와 목사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20:30),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21:25)하다고 분명히 우리에게 말한다.  나의 요지는 단순명료하다.  성경적으로 옹호할 수 없고 논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가설에 가까운 신학적인 추론으로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나팔을 불지 말라는 것이다.        

대학원에서 칼빈주의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개혁주의 목회자들이 사랑하고 강조하는 5대교리(TULIP)와 『기독교강요』에 대해 그리 많은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칼빈주의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다른 개혁주의 목회자들 못지 않게 Calvin 의 『기독교강요』를 사랑하지 않지만 좋아한다.  박해를 받는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의 신앙을 옹호하기 위해 쓴 『기독교강요』는 로마교회가 두려워 했던 책이다.  당시 신앙의 형제들을 위한 교리 문답서의 필요성을 느꼈던 그는 박해의 중단을 위해 왕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서한의 첫 머리에 그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오로지 본인의 목적은 신앙적인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돕기 위해서 그들에게 확실한 기본 원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Calvin 26살의 젊은 나이에 이 책을 썼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책을 읽을 때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는 것은 물건을 선반에 올려 놓듯이 마음에 두고 오랫 동안 기도하는 가운데 생각해 본다.  『기독교강요』도 예외는 아니다.

『기독교강요』Calvin이 종교개혁이 하나님 앞에서 성서적으로 합당하고 적합한 것임을 변증하려는 목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당시 Francis I of France에게 바치는 헌사이다.  그는 이 서문(序文)에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이적(異蹟)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들(가톨릭 성직자들)은 우리에게 이적을 요구하고 있으나 그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슨 새로운 복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이미 행하신 이적을 통하여 진리로 확증하신 바로 그 복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는 다르게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이적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확증할 수 있다는 이상한 특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하는 이적이란, 원래는 잘 안정되었던 마음을 오히려 불안하게 만드는 것으로 그러한 것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경박하며 허망하고 거짓된 것들입니다. 비록 그 이적들이 신기한 것이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진리를 반대하는 대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들입니다.” 

이 진술만을 본다면 Calvin은 초자연적 이적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훗날 이 진술은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은사중지론교리로 널리펴져 나갔고, 19세기 구 프린스턴 학파 신학자들인 Charles Hodge  B. B. Warfield를 통해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성경 66권이 주어진 오늘날에는 어떠한 초자연적 기적이 필요치 않다는 입장을 내세웠고, 그 신학적 근거로 Francis I of France에게 바쳤던 Calvin의 진술을 제시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Calvin의 입장은 축귀를 비롯한 모든 기적(Miracle)과 기사(Wonder)를 거짓 표적(sign) 혹은 데살로니가후서 29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마귀의 역사에 따라 나타나는 속임수 정도로 간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Calvin의 이런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무런 문제도 없다.  남들보다 성경을 아주 상세하게 푸는 놀라운 지혜를 가진 그의 말이 정확히 옳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이들의 주장을 여기까지 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반쪽짜리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진술 의도 가운데 한 쪽만을 바라본 데서 나온 것이고, Calvin 의도(意圖)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진술을 반드시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적의 정당한 목적과 그 효용을 성경이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들의 이 헛된 생각들은 한층 더 과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는, 사도의 설교 다음에 따르는 여러 가지 이적들을 그 설교를 확증하기 위해서 행해진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16:20), 누가도 역시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14:3)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와 똑같은 말씀을 다음과 같은 사도의 주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2:34, 15:1819). 이 말씀에서 우리는 표적과 기사가 복음의 인장임을 알게 되었는데, 복음의 신앙을 파멸하도록 우리가 이것들을 악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서 기자의 말대로, 이적보다 우위인 이 교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검토되며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인 줄로 압니다. 그것이 확증되면 그 다음으로는 마땅히 이적에서 확증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건전한 교리의 표는 인간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려는 것입니다( 7:18, 8:50). 그리스도께서 이 교리의 시험을 확증하셨기 때문에 이적이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 어떤 다른 목적에 적용된다면 그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13:2).

이 진술에서 Calvin은 당시 Catholic 교회가 일부 거짓된 교리들을 악용하기 위해 초자연적 이적을 이용한다는 점을 바르고 정확하게 지목하고 있다.  또한 성경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은 여전히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만 예정되어 있는상황이며(16:20), 따라서 온전히 내용을 분석하고 깊이 있게 연구되어 확실하게 증명된다면 “다음으로는 마땅히 이적에서 확증을 얻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달리 말하면 Catholic 사제들에 의해 잘못 악용되고 있던 은사를 지목해 비판하였던 것이지, 말씀에 입각한 성경적 치유나 초자연적인 이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지는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8:16)라는 성경 말씀처럼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그 말씀이 메마르고 죽은 말씀이 아닌 운동력 있고 생명력 있는 살아 있는 말씀(히 4:12)이라면 반드시 기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15:18).  제자들 역시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했고, 사도 바울도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말한다(살전 1:5).  오늘날 Warfield의 계승자들은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는 것이 있다.  왜 구 프린스턴 학파 신학자들은 Calvin이 모든 은사와 기적을 오직 사도들과 관련이 있으며 교회 창설기 시대에 일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해석한 것일까?  여기에는 Charles Hodge B. B. Warfield 등의 신학자들이 활동하던 19세기 후반 당시 학계의 지배적 조류였던 근대주의(Modernism)와 모든 문제가 과학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과학만능주의 사고가 일부 관여된 것으로 추정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은 개혁주의 신학의 원조(元祖)라 할 수 있는 Calvin이 원래 진술하려 했던 의도를 약간 비뜰어 자신들의 학문적이며 문화적 동향에 맞춰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조금 원색적으로 말하면 밴댕이소갈딱지같은 신학으로 편협하게 해석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완벽한 신학적 범죄(?)를 만들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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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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