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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9.22 속죄의 범위 11
  2. 2024.09.08 하나님의 사랑 2
  3. 2024.09.01 하나님의 통치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실제로 그를 믿는 자들의 죄 값만을 지불하셨는가 아니면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죄 값을 지불하셨는가?”  “오직 선택받은 자만을 위해 죽으셨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인가?”  만약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다면 왜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가?”라고 누군가 질문을 한다면, 그에 대한 답변은 ‘전택설’ 견해를 취하는가 아니면 ‘후택설’ 견해를 취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먼저 전택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할 것을 작정하시기 전에 이미 일부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따라 구원하지 않기로 작정하셨다는 ‘이중예정론’을 주장한다.  반면에 후택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전택설적 예정론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구원 얻을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을 미리 알고 그 사람의 믿음을 조건으로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전택설 입장은 하나님의 절대 예정을 강조하고, 후택설 입장은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선택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의 믿음이나 선행에 대한 예지와 무관하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무조건적으로 선택했는지 아니면 하나님은 유기될 자들의 죄(불신앙)에 대한 예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을 정죄받도록 예정했는지에 대한 Calvin의 ‘이중예정론’은 오늘날 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Calvin이 그리스도가 택한 자들만을 위해 죽었다는 ‘제한속죄’를 믿었는지 혹은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위해 죽었다는 ‘보편속죄’를 믿었는지에 대해서도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Calvin의 속죄 범위에 대한 논쟁은 크게 두 부류로 갈라진다.  하나는 제한속죄론을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W. R. Godfrey, R. A. Muller, J. H. Rainbow)과 다른 하나는 보편속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B. G. Amstrong, R. T. Kendall, J. B. Torrance)이다. 

이러한 Calvin의 속죄론을 가지고 Augustus H. Strong은 『Systematic Theology』에서 “Calvin은 그의 초기저서 『기독교강요』에서 속죄의 범위에 관한 자기의 결정적인 견해를 피력해 왔으나, 그의 후기 저서인 ‘주석’에서 보편적 속죄설에 동의를 표했다. 그런즉 전택설은 단순한 칼빈주의적이라기보다는 초극단적인 칼빈주의적이다”라고 말했다.  보편속죄론을 주장하는 B. G. Amstrong도 Calvin이 보편적 속죄교리를 강조하지만, Theodore Beza와 16-17세기 강성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제한속죄를 말하는 것처럼 잘못 해석되었다고 주장한다.

먼저 보편속죄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해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있다(요 1:29).  하지만 그 효과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의 주로 영접하고(요 1:12),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에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막 16:16).  이들은 많은 성경구절들 중에 중요한 두 구절 디모데전서 4장 10절과 요한일서 2장 2절을 내세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죽음은 온 인류에게 충족하나(고후 5:14), 제한된 수의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택함 받은 자의 구원을 보충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구원을 효과적으로 보증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롬 10:1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롬 10:13). 

이러한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모든’(all)이란 단어와 ‘전체’(whole)라는 말은 언제나 그 의미대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가이사가 다스렸던 당시에 온 천하 사람들에게 호적등록 할 것을 명령했을 때(눅 2:1-5), 여기서 말하는 ‘온 천하’란 로마제국 전역을 말하는 것이지(행 11:28),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모든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두 구절에서 나온 ‘모든 사람’과 ‘온 세상’은 지리적으로 다른 지역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특별히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향하신 것처럼(신 7:8, 암 3:2),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 모든 지역에 있는 택함 받은 자들을 향한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제한속죄론을 지지하는 사람 역시 그리스도는 성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사람을 위해 죽지 않을 것을 강조한다(요 6:37-40).  이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자기 백성(마 1:21)과 자기 양(요 10:15), 그리고 자기 피로 산 교회(행 20:28)만을 구원하셨다고 주장하면서 로마서 9장 11-13절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들고 나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무차별적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의 소망으로 이끌지 않으시고(요 6:44), 오직 창세전에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엡 1:4), 구원을 허락하시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그 구원에서 제외시키셨다고 주장한다.  즉 속죄의 적용은 오직 하나님의 소요된 백성만을 위한 것이지(벧전 2:9), 유기자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요한복음 6장 37-40절에 나오는 말씀은 제한속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에 특정 수효만이 택함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즉, 그리스도의 속죄가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는 않으나 모든 사람에게는 유효한 것은 사실이고(요 12:32),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지만(딛 2:11), 구원은 실제로 정한 수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보충설명을 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과 유일한 관계이기 때문에(히 2:9), 이 관계를 거부하거나 거스리는 자는 그 결과를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러한 양쪽 견해를 살펴보면 서로 간의 동의하는 부분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 것(막 16:15-16)과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것이다(행 1:8).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의 죽으심이 충분한 지불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되었는지,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의 죄 값만을 지불하였는지(마 1:21), 아니면 모든 사람들의 죄 값을 지불하였는지를 놓고 볼 때(딤전 4:10), 이것은 각 개인의 성경해석과 판단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해야 한다(롬 12:3). 

문제는 신학과 신앙에 균형 잡히지 않는 사람과 마귀에게 쉽게 충동질당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신학적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거나 쓸데없는 논쟁을 야기시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편을 갈라 분쟁을 일으키게 만든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Wayne A. Grudem이 말한 것처럼 성경은 이 난해한 교리를 매우 중요하게 따로 취급하거나 명백하게 신학적으로 자세하게 설명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 보편속죄론보다 제한속죄론이 좀 더 강력한 논리적 기반을 가진 듯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다른 교리적 혹은 실제적 문제들을 다루는 구절들에서 추론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질문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 안에 일어나는 일을 파고드는 것이기 때문에 단정해서 결론지을 수 없는 문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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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Wesley는 성경의 중심적인 교훈은 하나님의 능력(power of God) 보다 사랑(love of God)을 강조한 것이라고 믿었다.  하나님의 통치(sovereignty)) 능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능력은 성경에 나타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온전하게 읽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Explanatory Notes upon the New Testament』에 기록된 요한일서 4장 8절에 대한 주석에서 Wesley는 사랑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통치의 특성으로 하나님의 모든 다른 완전함에 따뜻한 영광을 더해 주는 특성이다”

물론 Calvin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말하였다.  『기독교강요』에 나온 그의 말을 들어보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대가 없이 기꺼이 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사랑을 경험하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일에 빠져들게 된다”  Calvin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대속의 사역이 기인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그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엡 1:4-5)’ 세워지고 굳건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당연하고 성경의 교훈에 부합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고 선포하는 말씀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다.  Calvin의 신학에서 사랑은 중요한 요소이지만 가장 우선적인 강조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강요』의 소제목들을 잠시 살펴보면 Calvin이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의 지식, 율법과 복음, 은혜의 유익함과 영향 그리고 교회에 대하여 특별하게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 장의 주제는 성서,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거룩한 역사, 신앙, 영원한 선택 등이다.  그런데 사랑은 『기독교강요』의 소제목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Calvin은 다른 저작들에서도 사랑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적어도 Wesley가 기대한 것처럼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이 문제를 조금 더 다루고자 한다.  복음주의 신약 신학자 Leon Morris는 요한일서 4장 8절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썼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말은 하나님은 사랑하신다는 의미보다 더한 것을 의미한다. 즉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할만한 대상을 찾으셨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본성이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들,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 주의(Augustinianism) 자들은 사랑과 같은 것들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Essential Attributes of God)이라는 생각을 반대한다.  예를 들어 Calvin은 이런 개념을 주의 깊게 고려하면서 신중히 반대했다.  그가 이 개념을 거부한 이유는 명확하다.  만약 하나님이 사랑과 자비의 대상으로서 모두가 아니라 어떤 이들만을 자유롭게 선택하시는 분이라면, 그 말은 곧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과 자비를 오직 제한된 이들에게만 베푸시는 분이라는 의미가 된다.  또한 이 말은 하나님이 어떤 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Calvin의 『기독교강요』는 무려 1500페이지나 된다.  이 책에서 그는 성경의 증거를 따라 기독교 교리를 요약적이지만, 전체적으로 다룬다.  Westminster Press가 편집한 『기독교강요』의 성경 색인은 한 페이지를 3단으로 구성했음에도 39페이지나 된다.  이렇게 방대하고 철저한 책에서도 Calvin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요한의 진술을 충분히 논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Calvin은 이 구절들을 무시하고, 이 주제에 대해 설명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개혁주의 신학자 Louis Berkhof도 자신의 『조직신학』 책에서 이 구절들을 한 번도 인용하지 않았다.  제한적 선택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Knowing God』의 저자 J. I. Packer 역시 이 구절에서는 논리적 모순으로 걸려 넘어졌다.  하나님의 사랑이 제한적으로 선택된 이들에게 한정된다고 주장하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은 요한일서 4장 8, 16절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이것이 제한적 선택교리 안에 있는 모순되고 어색한 점이다.  할 얘기는 많지만 여기까지만 하겠다.   

Wesley가 하나님의 사랑의 역동적인 성격을 강조한 이유 중 하나는 삼위일체(Trinity)를 관계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세 위격(three persons)이 사랑의 관계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Wesley는 성부, 성자, 성령의 본성을 지닌 삼위일체의 신비에 관하여 별로 의문을 갖지 않았다.  대신 성령을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지속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이 ‘새로운 창조’라고 보았다.  The New Creation에서 말한 것처럼 “세 분이 하나가 되는 하나님과 그 안에서 누리는 모든 피조물들의 지속적인 기쁨이다”.

Wesley가 삼위일체 교리에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Calvin이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에 비판적인 관점을 발표한 Spain 출신 의사이자 신학자인 Michael Servetus를 처형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The Works of Wesley, Vol. X』 에서 Wesley는 말하고 있다.  “나는 그 같은 용어가(삼위일체나 위격) 아주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산채로 사람을 불에 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마르지 않은 생나무로 서서히 불을 지퍼 죽이는 것은 더욱 그렇다”    차후에 이 문제도 조금 더 살펴보겠다.

Wesley는 하나님의 통치와 사랑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보완한다고 보았다.  물론 Calvin도 하나님의 통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 설명할 때 비슷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Calvin은 하나님의 사랑보다 하나님의 통치를 훨씬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Wesley는 하나님의 사랑의 동인(動因)이 하나님의 통치라고 말한다.  God’s Love to Fallen Man』에서 기록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저주받은 죽음으로 내어줄 정도였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독생자를 그것도 아버지와 동일한 영광과 위엄과 영원성을 가진 아들을 내어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Calvin이나 Calvinists과 달리 Wesley는 하나님의 사랑과 온유가 하나님의 모든 특성들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Predestination Calmly Considered』에서 그는 다시 말한다.  “성서는 ‘하나님은 정의시라’, 혹은 ‘하나님은 진리시라’고 기록하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기록하였다. 사랑은 관념적이고 한계가 없으며 ‘그의 선하심은 끝이 없으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뿐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도 확대된다. 하나님은 악인과 감사하지 않는 자들에게까지 선을 행하신다”

Wesley는 Calvinists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 대신 하나님의 통치와 능력을 강조하는 모습을 특히 염려하였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타락하거나 선택하지 못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선대 하거나 사랑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두 가지 표현 중에서 고를 수 있다. 무조건적으로 선택된 사람들 외에 구원받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면, 이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 동일하다). Calvin이 분명하게 언명한 대로 ‘살아서 수치를 당하고 영원히 죽는(in vitae contumeliam et mortis exitium)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의 영원한 지위를 생각한다면 그가 하나님의 사랑이나 선하심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Wesley의 관점에서 특별히 구원받을 사람의 선택과 유기에 대한 하나님의 역할에 집중하는 Calvin의 하나님의 교리는 『Free Grace』에서 말한 것처럼 ‘신성모독의 교리’이며, 하나님을 “더욱 잔인하고, 더욱 잘못되고, 악보다 더욱 불의한 존재로 만든다”  독일 개혁주의 전통에서 자라난 Philip Schaff는 20세기 초에 활동한 세계적인 교회사학자다.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8 vols』 에서 Calvin과 Calvinists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칼빈주의는 어거스틴 계열의 신앙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유익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제한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선택된 소수의 사람에게만 적용하고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요 3:16)을 무시하는 근본적인 오류를 갖고 있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하나님의 통치 신학이다”

Calvin과 Wesley  모두 하나님의 통치와 능력, 위엄을 믿었다.  Calvin은 그러한 믿음을 가질 때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며, 사람은 그 모든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Wesley는 그러한 믿음이 자유를 훈련하는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거룩한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고, 결과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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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를 믿었.  『기독교강요』 머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선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살며 기동 하므로’(행 17:28),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곧바로 하나님을 묵상하는 데로 생각이 옮겨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그 굉장한 재능들도 그 근본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며 사실상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생존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Calvin의 관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확언들은 성서(Bible), 혹은 그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대로 성경(Scripture)이 분명하게 가르친 내용이다.  성경의 모든 구절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 지식과 현존(presence)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Calvin은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을 말했는데, 그 능력은 ‘하나님의 전지전능’(God's omnipotence)을 의미한다.  『기독교강요』에 기록된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가 행동하실 수 있지만 때때로 행동을 멈추고 한가하게 앉아 계시거나 아니면 미리 정해 놓으신 자연의 질서를 그저 일반적인 충동을 통해서만 지속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그의 섭리로 다스리시며 자신의 뜻이 아니고서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도록 모든 일을 운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독자들은 섭리라는 말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나님이 하늘에서 한가하게 구경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열쇠를 쥐고 모든 사건을 지배하신다는 뜻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Calvin은 하나님의 섭리(God's providence)를 말하면서 영원한 형벌로 고통받게 되는 타락의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장한다면 어떻게 인간들 가운데 타락하는 이들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는 분명하게 타락을 포함하는 모든 미래의 일이 창조 이전에 이미 정하신 하나님의 의지, 혹은 명령에 의하여 일어난다고 믿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계획으로 오래전에 선택하여 구원을 받게 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있고, 반면에 멸망당하기로 결정한 사람들도 있다”  그는 계속하여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시하는 자를 저주하시는데, 이는 그가 자녀 삼기로 예정한 상속자들의 반열에서 제외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확언에 담긴 논리적인 의미에 주목하면서 실제로 굳게 믿었다.

더 나아가 Calvin은 『기독교강요』 첫 장부터 하나님이 사람에게 모든 것을 제시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사람들에게 지나친 신학적 호기심을 갖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모든 인간의 지각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먼저 예정에 대하여 질문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의 거룩한 경내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그릇된 확신으로 이 영역을 망가뜨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호기심을 만족하기는커녕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궁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Calvin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억제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가르쳤다.  인간은 자신이 갖고 있는 의문과 염려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대답할 능력이 없다.  영생(eternal life)에 관한 질문과 염려는 더욱 그렇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들의 모든 의문과 염려에 대답할 충분한 능력을 갖고 계신다.  물론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압도적인 상황을 생각한다면, 유한하고 죄 많은 인간을 도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진 유일한 하나님께 겸손하게 순종하는 것 외에 어떤 선택도 없는 것 같다.  성경이 분명하게 기술하지 않고 최소한의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문제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이 제기하는 모든 물음과 염려에 답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Wesley 역시 하나님의 통치를 믿었다.  『Thoughts upon God’s Sovereignty』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창조자로서 하나님은 만물 안에서 그의 통치의 뜻대로 행하셨다.  … 하나님은 가장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가 뜻하신 일을 모두 행하실 것이다. 그에 따라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지으시고 만물이 그 안에 있게 하셨으며, 그의 선하신 기쁨에 따라 모든 것이 보기에 좋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었다.   다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고 또한 전지전능하시더. 그의 능력과 현존에 한계가 없다는 말이다. 그는 강한 팔과 능한 손을 가지고 오른손을 높이 드셨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모든 깊은 곳에서 당신이 기뻐하는 모든 일을 행하신다.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모든 일이 가능하다. 하나님이 뜻하는 모든 일은 그와 함께 현실이 된다”

그러나 Wesley는 하나님의 주권(God's sovereignty)과 거룩하심(Holiness)을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성서적으로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은 그분의 거룩하심으로 보았고, 거룩하심이 전능하심보다 앞선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The Unity of the Divine Being』 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거룩하심은 전능하고 전지 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이다. 그분은 악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무한한 거리에 계신다. 그분은 ‘빛이시고, 그래서 그분 안에 어둠이 있을 수 없다’ 그분은 한 점 흠 없는 정의와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출애굽기 33장 17-23절과 34장 5-7절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의지로 행동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면서, 자신의 통치를 축소하지 않으신다.  실제로 Wesley는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랑과 믿음과 소망 안에서 자유롭게 하나님에게 응답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위대한 성취로 해석하였다.  확실히 인간 편에서 볼 때 의지의 능력은 확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God's Reign)를 확인하는 것이 하나님이 스스로 거룩한 능력을 제한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Wesley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보다 인간의 주도권을 주장한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와 반펠라기우스주의(Semi Pelagianism)에 반대하는 Calvin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사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를 둘러싼 기독교의 논쟁은 Wesley와 Calvin 이전부터 오랫동안 지속된 논쟁이었다.  그러나 논쟁에 기름을 부은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특별히 바울이 강하게 부정했던 인간의 선행과 공로로 구원을 말하는 모든 종류의 펠라기우스적 입장에 대한 Augustine의 정죄를 다시 소개하면서부터였다.  불행하게도 Calvin과 Augustine처럼 둘 중의 하나를 택하는 방식으로 논쟁을 전개하였다.  즉 인간의 공로로 구원을 얻듣지(Pelagianism), 공로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듣지(Augustinianism) 둘 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논쟁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교회사에서 일어났던 두 가지 관점 이상의 지평을 가지고 있었다.  Augustine이 펠라기우스주의처럼 선행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던 반펠라기우스주의자를 반박하며 주장한 것 같이, 반대쪽에는 반(半) 어거스틴주의(Anti Augustinianism)라는 부를 수 있는 입장도 있었다.  교회사에서 반어거스틴주의는 어거스틴주의(Augustinianism)를 대체하였고, Luther와 Calvin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반어거스틴주의는 Catholic Church, Orthodox Church, Anglican Church에 주로 수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하나님의 예정론(Predestination)에 대한 정통 어거스틴주의 입장과 대립하면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켰다.  반어거스틴주의 관점을 보여준 대표적 인물들로 Caesarius of Arles, Thomas Aquinas,  Desiderius Erasmus를 들 수 있고, Calvin 이전에 살았던 많은 이들이 그러한 입장을 자기고 있었다.  반어거스틴주의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인간의 구원을 주도하고, 지속하고,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라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수용할 것인지, 거부할 거인지 선택해야 한다.

Wesley는 자신이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의 자유를 함께 강조한 영국교회(Anglican Church)의 신학 전통에 충실하게 서 있다고 인식하였다.  만일 그가 Calvin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점이 있다면, 그가 자라고 교육과 안수를 받아 충실하게 봉사했던 성공회 전통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Wesley가 당대 Calvinist들의 견해에 공감하지 못한 점들이 많았던 것은 분명하다.  Wesley는 Augustine과 Calvin으로 이어지는 개신교회 전통보다 Catholic Church와 성공회 정통(Anglican tradition)이 성경의 가르침을 보다 충실하게 반영한다고 확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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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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