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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10.27 은혜의 수단 3
  2. 2024.10.06 하나님의 은혜

Calvin과 Wesley는 신자의 은혜의 수단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술하였다.  Calvin은 하나님이 신자들의 삶에 유효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한다고 보았고, Wesley는 하나님이 신자들과 함께 선행적으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한다고 보았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초대하고, 함께 하도록 하는 외부적 수단 혹은 지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때로는 이 ‘수단이나 지원’(means or aids)을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으로 불렀는데, 이는 하나님이 사람들의 삶, 특별히 성도들의 삶에서 은혜롭게 역사하시는 방법이나 통로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에서 믿음과 구원으로 역사하지만, 또한 그들의 삶에서 외적으로도 역사한다.

Calvin은 하나님이 교회, 설교 및 ‘성례전’(Sacrament)을 통해 어떻게 역사하는지 우선적으로 이야기하였다.  『기독교강요』에서 그는 Latin Fathers Cyprian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교회는 어머니가 된다”  조금 더 참조하면 『기독교강요』 각주 2에 인용된 구절에서 Cyprian의 가르침이 전문으로 인용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교회를 당신의 어머니로 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로 섬길 수 없다”

성례전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삶에서 은혜롭게 역사하는 ‘가시적 말씀’(visible word)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은혜의 수단들보다 중요하다.  Calvin은 “Augustine은 성례전이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각각의 형상들을 시각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가시적 말씀’으로 부른다”라고 말했다.  Calvin은 계속하여 “또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생각할 수 있는 거울이라 부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성례전은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성령이 영의 양식으로 은혜를 더해주므로, 성례전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효력을 발휘한다.

Calvin은 일곱 개의 성례전에 대한 Roman Catholic의 전통을 거부하고 오직 두 가지, ‘세례’(baptism)와 ‘성만찬’(Lord’s Supper)성경적이라고 믿었다.  세례는 심지어 ‘유아 세례’(Infant Baptism)까지, 신앙을 확인하고 강화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말했듯이 세례가 구원을 위한 조건은 아니지만 유아들이 구원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Calvin은 성만찬이 성도들이 신앙을 키워주고 확신을 강화하며 구원을 유지시킨다고 믿었다.  성만찬은 구원을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수단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우리를 유지시켜 주는 은혜의 수단으로 남아 있다.

Wesley 또한 은혜의 수단을 믿었고,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구원의 모든 단계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하였다.  그는 자신의 설교 『The Means of Grace』에서 “나는 은혜의 수단을 통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외형적인 표지나 말 또는 행동을 이해하고, 그 목적을 위하여 사람들을 파송하여, 그들이 선행하거나, 의롭게 되거나, 혹은 거룩하게 하는 은혜를 전하는 보편적인 통로가 되게 하였다”라고 말했다.   Wesley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원으로 부르고 그들을 통해 일하실 뿐 아니라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여 구원으로 부른다고 생각하였다.  그에게 은혜의 수단은 Calvin이 제안한 교회와 설교 및 성례전에 국한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은혜롭게 사람과 교회 안에서 일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은혜의 수단은 사람들의 성화와 마찬가지로 칭의에서도 중요하다.

Wesley는 여러 가지 경우로 은혜의 수단을 배열하였다.  그는 ‘제도화된’(instituted) 것과 ‘재량권이 있는’(prudential) 은혜의 수단을 구분하였다.  그는 『Minutes of Several Conversation』에서 하나님이 성경에서 제정한 은혜의 수단은 ‘기도’(prayer), ‘성경 읽기’(searching the Scriptures), ‘성만찬’(Lord’s Supper), ‘금식’(fasting) 그리고 ‘그리스도인 모임’(Christian Conference)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 모임을 통하여 Wesley는 소그룹 모임에서 가장 잘 발휘되는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성경에서 제정한 은혜의 수단들에 더하여, Wesley는 사람들이 정할 수 있는 은혜의 수단에 대하여 말했다.  이러한 은혜의 수단은 성경에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았지만, 신자들의 경험과 함께 교회의 역사에서 형성된 영적 구조에서 시도되고 증명된 방식들을 보여준다.  Wesley는 그러한 실천들이 “보이는 것과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현존의 훈련’(exercise of the presence of God)”을 포함한다고 말했다.      

Calvin처럼 Wesley도 신앙적 실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즉 은혜의 수단은 구원을 보장하지 않으며, 실제로는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그러한 은혜의 수단들에 대하여 길든 짧든 전하기 때문에, Wesley는 은혜의 수단들이 구원의 모든 단계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도움을 준다고 확신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미리 주시는 은혜의 성격을 강조하며 사람들의 회심과 인내 그리고 영적 성장을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들이 신비하게 함께 일한다고 확신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은혜의 수단이 인간의 책임 있는 행동과 함께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뜻과 은혜에서 나오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은혜의 수단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포함하여 모든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은혜의 수단을 배우고 실행할 수 있도록 그 수단들에 관하여 말한다.   사람들이 은혜의 수단을 실행하는 이유는 구원을 위한 인간의 노력과 공로에 의존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을 당신과 사람들의 관계에서 협력하는 방법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Calvin과 Wesley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중심에 하나님의 은혜가 자리한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인간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엡 2:8-9).  그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다(딛 3:5).  두 사람 모두 인간의 구원을 시작하고 유지하고 완성하는 분(욘 2:9)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완전히 동의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하는 방식에 대하여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두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롬 12:3). 

Calvin은 하나님의 은혜가 실제로 역사한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뜻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무엇을 하거나 도울 수 없다고 믿었다.  반대로 Wesley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하는 것은 선택하거나 하지 않는 자유를 준다고 믿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삶에 선행하는 은혜를 역사하게 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셨다.  그러한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지도 않고,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사역에서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지도 않는다.

만약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저항할 수 없이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생겨날까?  아마 사람은 굉장히 단순할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사람들이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렇게 해야 함을 항상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성경과 체험이 분명히 증거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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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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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는 Calvin과 Wesley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한 주제였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의 신앙과 가치, 그리고 실천에서 본질적인 요소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Calvin과 Wesley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리고 삶을 통하여 은혜로운 역사를 이루는 방식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두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은혜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축복을 위한 거룩한 ‘사랑’, ‘호의’, ‘감사’, 등이고, 또한 거룩한 ‘능력주심’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어원상 이 말은 그리스어 charis와 라틴어 gratia에서 왔다.   확실히 은혜는 Protestant 종교개혁의 중심적인 신앙이 되었는데, 구원과 죄의 용서에 있어서 ‘오직 은혜’(sola gratia)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행위와 노력과 공로로 스스로를 영적으로 구원할 수 없다(요 1:12).  사도 바울은 구원을 인간의 성취가 아닌 선물이라고 에베소서 2장 8-9절에서 밝혔다.

Calvin도 인간의 구원에 역사하는 힘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인식하였다.  인간의 죄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받을 사람을 택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인간은 믿음으로 응답해야 한다.  그것이 Protestant 교회가 또 다른 명제 ‘오직 믿음’(sola fide)를 확증한 이유다.  그러나 인간의 그 믿음조차 구원에 필요한 구성요건은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협력이나 공동의 행위를 의미하는 능동적인 사고는 없었다.

Wesley 역시 에베소서 2장 8-9절을 언급하면서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믿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신다.  사람은 구원과 죄 용서를 받을만한 공로가 없다(롬 3:9).  그러나 Wesley는 은혜가 아직 효과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은혜는 인간 편에서 행하는 응답의 결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언제나 효과적이게 하고 성취하는 것으로 보았다.  Wesley는 하나님에게 나와서 사람들에게 미리 주어지는, 후에 ‘선행은총’(Prevenient grace)으로 알려지는 ‘먼저 주어지는’(comes before) 은혜를 생각하였다.  그 은혜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을 이끌어내고, 유지하고, 완성시킨다.  그러므로 인간 편에서 구원을 위하여 행동하거나 보상으로 받을 만한 자격 등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vicarious)을 통해 제안한 구원의 초대에 대하여 인간은 수락이나 거부라는 두 가지 응답 중에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어야 한다.  Wesley의 선행은총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Anglo Catholic tradition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수백 년 동안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 더 나아가 두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믿고 행했는지 살펴보겠다.  먼저 Calvin은 ‘하나님의 통치 법칙’(God’s sovereign rule)으로 사람들의 삶 속에 유효하게 효과적으로 일하신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영적인 조건에서 은혜를 더하거나 덜어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 인간을 구원하고, 일시적이든 영원하든 사람을 존귀하게 하신다.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에 사람의 믿음은 ‘오직 수동적’(merely passive) 일뿐이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도들은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소망의 유일한 근거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에 연결되어 자유롭고 의로운 존재가 될 때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칭의와 관련하여 믿음은 단순히 수동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의 부족을 채우시는 그리스도에게 의지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

비록 ‘회심’(Conversion)의 결과로 사람들이 선행(good works)을 베푼다 해도, 그것은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이 점에서 Calvin은 성서와 함께 Augustine의 입장에 서는 일관된 모습을 유지하면서 “오직 은혜만이 모든 선한 행실을 가져온다”(Grace alone brings about every good work)고 말했다.

더 나아가 Calvin은 Roman Catholic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Catholic Church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돕는 협조자로, 먼저 베풀어 주신 은혜가 작용하지 않게 하거나 아니면 순종함으로 작동하게 하는 것이 사람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은혜를 ‘협력하는 은혜’(assisting grace)로 부르건 ‘수용하는 은혜’(accepting grace)로 부르건 상관없다.  Calvin은 인간에게 영적이고 영원한 삶을 향하여 갈 수 있는 진정한 능력이 없다고 믿었다.  그러한 일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고 보았다.  후에 Calvinists 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라고 설명하였다.   사실 Calvin은 ‘저항할 수 없는’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유효성을 이야기하였고, 하나님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유효하게 ‘실행하거나 성취하는’(carry out or accomplish) 방식에 대하여 말했다. 

Calvin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자연적이거나 영적인 능력이 있다는 말은 형식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강요』에서 나오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을 바라보거나 시험하는 데 대해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은 없다”

Wesley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였다.  그는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선행적인 역할을 강조하였다.  선행은총은 Wesley가 자란 Church of England 안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개념이었다.  선행은총은 ‘먼저 주어지는’(comes before), 혹은 ‘선행하는 은혜’(preventing grace)로 알려졌는데, 사람들을 하나님의 인도하기 위하여 그들의 삶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행위’(universal work)를 의미했다.  Wesley 당시에는 이 말이 ‘준비하다’(preparing) 혹은 ‘가능하게 하다’(making possible)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여러 차원과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이 거룩한 인도에 응답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성경과 관련해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는 방식과 과정은 ‘신비’(mystery)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성경에도 분명하게 남아 있다.  만일 사람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고 여겨진다면, 마찬가지로 구원에 대해서도 응답할 필요가 있다(막 16:16).  선행은총은 사람이 구원의 선물과 하나님이 주시는 다른 복들에 대하여 응답하거나 응답하지 않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구체적으로 구원의 문제와 관련하여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에서  Wesley는 선행은총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가장 큰 소망으로 삼고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것이 가장 높은 깨달음이 되며,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범하는 것을 일시적이지만 가장 먼저 느끼게 된다”라고 말했다.

반대로 Calvin은 오직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면서, 구원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즉각적인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행위를 통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인간의 입장에서 은혜를 보장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은 인간을 위한 구원의 수단이나 조건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없다.  구원을 얻겠다고 인간 편에서 할 수 있는 조건이나 사전 준비는 아무것도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선택이 무조건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Wesley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협력을 강조하는 관계성이 마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책임지는 것처럼, 어떻게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의 자연적인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Wesley가 거저 주시는 은혜를 기술한 이유이다.  물론 Calvin 은 당연히 Wesley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구원에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비록 은혜를 통할지라도, 인간에게 ‘조건부’(conditionality)를 허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능력과 위엄을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Wesley는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할 때 그들에게 진정한, 즉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아닌 역할 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 ‘준비된 영생의 선물’(gift of eternal life)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사랑하길 하나님이 바라신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이미 결정된 대로 움직이는 로봇, 즉 Humanoid Robot 같은 인간을 창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비록 하나님과 구원의 축복을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일정한 자유를 가진 인간을 창조하기 원하셨다(창 2:16-17).  이 같은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limitation of ability)가 아니라 ‘사랑의 표현’(Expression of love)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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