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초자연적인 역사와 은사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기도생활 속에서 성경적인 방언의 은사(고전 12:10)를 사용하고 있는 다른 형제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방을 한다.  이들은 방언하는 자들을 향해 기만을 당했거나 최악의 경우 다른 잘못된 영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반대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는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어떻게 성도의 교제를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엡 4:16).  또 다른 문제는 교회의 많은 지체들에게 있어(고전 12:12), 고린도교회처럼 신자들 사이에 인위적으로 서로 다른 영적 수준을 설정하거나 다른 사람의 영성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고전 12:4-31).

사실 교회 안에서 어떤 표적과 기사(행 14:3)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여부는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에 있거나(롬 12:3), 아니면 각자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하지만 소위 계몽주의가 오랫동안 득세하던 기간이 있었고, 또한 현대 과학의 발전이 가져온 현상적인 진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성적인 성향으로 변화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 중에 대다수가 현대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에 때때로 현실적이지 못한 이유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사도시대에 국한된 것으로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고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과 인류 가운데(모든 사람에게) 그와 같이 행하사…’라고 말씀하고 있다(렘 32:20).  이 구절은 출애굽 시대부터 포로기까지 표적과 기사의 예가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례미야가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 애굽에 징조와 기사를 베푸셨고(신 4:34), 지금도 이스라엘 땅과 세계 모든 나라에서 그와 같이 행하심으로(히 13:8),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한 분만이 역사의 참 주권자이심을 나타내신다(신 4:34-39).  사도 요한도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을 뿐 아니라(요 20:30), 낱낱이 기록하기에는 불가능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요 21:25).

이러한 것을 볼 때 표적과 기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오늘날 성령의 역사에 대한 지나친 폐쇄성을 초래한다.  전 세계적으로 보고 되는 기적들에 대해 부당한 회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올바른 신앙관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  물론 기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 영혼을 온전히 구원할 수 없고, 구원에 이르는 능력은 오직 복음을 통해(롬 1:16), 역사하시는 성령 안에 있다(고전 12:3).  하지만 누군가 초자연적인 능력이 복음을 희석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롬 15:19), 성령의 은사에 대해 적대적이고 바리새인처럼 생명력이 없는 죽은 말씀만을 강조한다면(마 23:15), 그 역시 올바른 믿음이 아닌 반쪽짜리 병든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살전 1:5).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개인적인 가치를 스스로 가진 은사로 평가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전 1:6-13).  예를 들어 누군가 더 크고 눈에 띄게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난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그런 은사를 가진 사역자를 높이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끊임없이 책망했고(고전 4:7), 이러한 책망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일차적인 초점이 은사가 아니라 그 은사를 허락해 주시는 분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전 12:11).  모든 신자들이 우선적으로 은사를 사모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먼저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마 24:37-40).  그 다음 은사를 사모해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전 14:39). 

우리가 성경을 통해 주목해야 할 부분은 어떤 경험과 놀라운 체험을 하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사역을 확증하는데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사람을 안다고 고백했는데(고후 12:2), 그것은 자신의 사역에 있어 중요한 원천이 되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어떻게 덮어두어야 할지도 알고 있었다.  즉, 부활의 능력을 통해(요 6:40), 그러한 황홀하고 신비한 체험보다는(행 10:10),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아(롬 6:5),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현재의 삶에 있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빌 1:27).

모세의 개인적인 체험은 어떠했는가?  그는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  이러한 자신의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3:1-5).  모세가 유일하게 있었던 것은 오직 그분과의 만남에 대해 백성들에게 간증하는 것이다( 3:13-15).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의 백성들에게 모세에게 말씀을 주신 이가 그들 조상의 하나님 자신이셨음을 증명할 있다.  모세가 경험한 것은 다른 사람이 경험할 없는 모세 개인만의 독특한 영적 체험이다.  따라서 개인이 받은 성령체험을 너무 자주 자신의 사역과 영성의 권위를 확증하기 위해 내세우는 것은 아주 잘못된 행동이다.  설사 그러한 체험을더라도 그것은 사적인 것이라서 장려하거나 과시할 만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체험한 것을 가지고 상대방의 신앙을 판단하거나( 14:4), 자신만이 체험한 어떤 경험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키려 한다면 이런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8:14), 마귀에게 충동질을 받고 있는 것이다(눅 22:31).  Jonathan Edwards 개인적인 체험을 유난히 강조하는 사람들에 대해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사람이 비상한 은사들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가증스러울 있다. 영적이고 영원한 영혼의 생명은 성령의 특별은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 안에 있다”  그러면서 성령의 두 종류의 영향력, 즉 ‘일반적이고 은혜로운 영향력’과 ‘영감을 주시고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주시는 특별한 영향력’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오직 사랑하시는 자녀들과 그분의 은총을 입은 자들에게만 베푸시는 성령의 은사는 후자가 아니라 전자라고 말한다.  

Edwards는 발람과 사울과 가룟 유다, 그리고 히브리서 6장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와 마태복음 7장 22절에서 나오는 거짓선지자의 예를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가장 위대한 특권은 그들이 영감을 받고 이적을 행한 것에 있지 않고 그들의 뛰어난 거룩성에 있었다. 그들 마음에 있었던 그 은혜야말로 이적을 행하는 그들의 은사들보다 천 배나 더 큰 그들의 존귀요 명예였다. 사도 바울은 다른 모든 사도보다 환상과 계시와 이적적인 은사가 풍부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귀신들이 그들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보다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하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사도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그들이 받은 은사들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은혜였다”  

요약하여 말하면 개인의 독특한 체험을 강조하기보다는 주님께 받은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은사를 사모하되(고전 14:1), 은사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고전 12:11, 12:28, 엡 4:7-11)을 더욱더 사랑해야 한다.

'생각해 볼만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학 논쟁  (0) 2023.07.02
죽은 말씀  (0) 2023.06.24
한번 구원은 영원한가?  (0) 2018.10.20
균형 잡힌 신학과 신앙  (0) 2018.05.26
성령의 충만함  (0) 2018.03.3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요한계시록 20장 6절에 보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의 뜻은 사탄과 그의 졸개들이 복음 아래 완전히 패배하여 결박당하고 그리스도와 구원받은 성도들이 승리하여 천년동안 다스리는 것을 가리킨다(계 20:4).  문제는 이 구절에 대한 해석들이 다양하다.  먼저 천년 왕국이 도래할 시점이 언제인지에 대하여 상반된 견해가 있고, 또한 천년이란 기간을 실제 역사적 기간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 기간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견해들이 있다.  이러한 쟁점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에 천년왕국에 대해 ‘무천년설’, ‘후천년설’, ‘전천년설’(세대주의적/역사적)로 나누어진다.

그렇다면 천년왕국에 대한 여러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성경적인가?  이 질문에 대해 어느 하나를 단정하여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모든 입장들은 다 나름대로 성경에서 출발한 견해들이기 때문에 어떤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천년왕국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상징적인 것인 동시에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기에,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얼마만큼 상징적으로 혹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는지에 따라 그 견해들이 다양해질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어느 한 입장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다른 입장을 취한다 해도 그에 대해 폭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들 중에 Dallas Theological Seminary 교수에게 천년왕국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물어본다면 자신은 ‘전천년주의자’라고 말할 것이다.  왜 그것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그것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라고 분명하게 주장하면서 다른 어떤 견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교수에게 동일한 질문을 한다면 아마도 그는 자신을 ‘무천년주의자’라고 말할 것이다.  왜 그것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 역시 그것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어떤 신학적 견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렇듯 양측 신학교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것은 그들 각자가 발견한 교리가 성경적으로 가장 정확하게 옳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를 전혀 갖지 않은 한 사람을 선택해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보낸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그는 분명 그곳에서 공부를 하면서 무천년주의적 견해를 가지게 된다.  만약 동일한 사람이 댈러스 신학교에서 공부를 한다면 거의 예외 없이 전천년주의자로 변한다.  이것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배웠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학과 신앙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법칙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  무엇보다도 신학적 전통과 교수들이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깨닫는 것과 믿는 것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조금 더 심각한 경우에는 그들의 가르침이 성경 그 자체보다도 우리에게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줄 수도 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구약의 시편 2장 7절과 이사야 42장 1절 두 본문들을 반영하고 있는 마태복음 3장 16-17절에 나오는 구절을 가지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왕의 대관식’(슥 9:9), 혹은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의 즉위식’,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임직 하신다는 뜻으로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승인식으로 해석한다.  즉 하늘 보좌에서 들려온 두 구절의 소리는 예수님의 신분을 고난당하고 죽을 종이자 영원히 다스리실 왕으로 묘사한 것이었다.  물론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이러한 해석은 신학교 교수로부터 배운 ‘신학’ 아니면 ‘주석’에 근거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왕의 대관식’, 혹은 ‘메시아 즉위식’이라는 구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고 싶다.  나는 용어 자체가 없다고 해서 그 개념이나 요소가 없는 것처럼 막무가내로 우겨대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얼마든지 신학적 용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많은 용어와 표현들이 신학적 개념들을 분석하고 평가하는데 유용하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성육신, 동정녀 탄생, 삼위일체,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 등의 용어들이 성경에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교회사를 통하여 발전된 확증들이다.  이런 신학적 용어들은 성경에 분명하게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가치, 실천을 바르게 규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유다지파(창 49:10),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눅 1:32), 베들레헴에서 출생한(미 5:2),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사 9:6), 영원한 왕(계 11:15), 구원의 왕인 것을 성경은 증거 한다(슥 9:9).  하지만 요단강에서 물세례 받는 것을 가지고(막 1:9-11) 주야장천 ‘왕의 대관식’이라고만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조금 더 성경에 근접한 해석을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눅 1:35), 인간의 형체를 취하신 예수님은 신적속성들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셨다(빌 2:6-8).  더 나아가 지상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요 3:34)과 능력의 기름부음을 받았다(행 10:38).  다시 말해 성경에 ‘왕의 대관식’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과 직접 관련해서 ‘기름부으심’이라는 단어는 신구약 성경에서 나온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해석하는 것이(사 61:1, 단 9:24-26, 눅 4:18, 행 4:27, 10:38, 히 1:9), 더 성경적이고 올바른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마태복음 3장 16-17절은 각 사람이 가진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본문에 충실하게 임할 수 있다.  문제는 이 구절에 대해 신학 교수로부터 왕의 대관식으로 배웠던 사람은 장로의 유전이(마 15:3)나 안식일의 규정을 준수하는 바리새인처럼(막 2:24), 이 ‘전통적인 틀’을 깨기가 쉽지는 않다는 것이다.  한 가지 견해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문제는 다른 누군가 또 다른 견해를 내놓으면 “비성경적이고 왜곡된 성경해석이다”라고 비판해 버리는 좋지 못한 삐딱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신학교에서 배운 전통적인 해석 방법과 다르기 때문에 살벌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성경에 자기 생각을 과도하게 부과하여 본문에도 없는 주관주의적인 ‘자기 해석’을 하는지 아니면 성경대로 해석하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실제로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이 자기가 습득한 관점에 대해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경향이 많다.  보통 이런 사람의 특징은 실재에 대한 다른 관점을 비논리적이고 잘못된 것으로 보거나 판단할 때가 많고, 오직 자기 것만이 논리적이고 올바른 것으로 확신을 가진다.  그래서 어떠한 신학적 입장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이 배운 신학만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나팔을 분다.  자기가 해석한 성경, 즉 교수로부터 배웠던 방법만이 가장 올바른 해석으로 굳세게 믿기 때문에, 이런 교조적 태도를 가지고 분쟁을 일으킨다.  여기서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다른 견해를 가질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것 말이다.  이것은 절대로 범죄가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자 R. C. Sprul은 말을 들어 보자.  “만일 우리가 성경을 왜곡시키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주관주의를 피해야 한다. 주관주의는 오류와 왜곡을 낳을 뿐 아니라 교만을 불러일으킨다”.  단지 내가 그것을 믿고 있다고 해서 내가 믿는 것을 믿거나, 또는 그것이 나의 견해라고 해서 나의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야 말로 대표적인 교만의 형태다.  나의 견해가 객관적인 분석과 증명의 시험을 견디지 못할 경우에는 겸손하게 그 견해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주관주의적인 사람은 객관적인 근거나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교만을 부린다. 

D. A. Carson 역시 이런 문제에 대해 『Exegetical Fallacies』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전통적인 해석을 성경 본문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읽기 쉽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전통적인 해석에다 성경의 권위를 이전시키고 그 전통적인 해석에 그릇되고 맹목적일 정도로 확실성을 부여할 수도 있다. 전통은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재형성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난 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떠나 어딘가에 표류하게 될 수도 있다. 만약 이런 상태에서 비평적인 자세가 없이 성경을 연구한다면 분명 더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Robert K. Johnston의 글을 인용한다.  “복음주의자들이 한결 같이 성경을 규범으로 주장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말하고 있는 많은 주요 이슈에 대해 서로 모순된 신학적인 공식들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현재 이해하고 있는 신학적인 해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이 권위 있는 책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성경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같은 복음주의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도 전혀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은 자멸적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성경을 진리의 말씀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성경이 실제로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관해 많은 이견들과 서로 일치할 수 없는 다른 신학적인 견해들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신학과 신앙 혹은 새로운 체험이나 정보를 접하게 될 때, 우리는 거의 언제나 자기가 배운 바와 일치하는 것들만 받아들이고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배워온 관점만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강하게 주장하고 싶거나 아니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는 분야들, 즉 성경의 여러 난해한 구절에 대해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욥 11:7-9). 왜냐하면 성경에 대한 해석이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말씀을(딤후 3:16-17, 벧후 1:20-21), 죄로 인해 어두움과 무지함 속(마 22:29)에 허덕이는 불안전한 인간의 해석(행 9-16)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눅 24:16, 25).

결국 우리가 의존할 수밖에 없는 말씀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께서 이해하시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사 55:8-9).  즉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의 말씀처럼 누구든지 성경에 관해 희미하고 부분적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같은 그리스도인들 간에 신학적 논쟁을 줄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학 논쟁을 일삼는 자들은 개혁신학의 원조(元祖) Calvin이 『기독교강요』에서 한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논쟁과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생각해 볼만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적 체험  (0) 2023.11.05
죽은 말씀  (0) 2023.06.24
한번 구원은 영원한가?  (0) 2018.10.20
균형 잡힌 신학과 신앙  (0) 2018.05.26
성령의 충만함  (0) 2018.03.3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가 태어나는 과정을 의사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었다.  가끔 아내가 “남자는 여자가 아이 낳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모를 거야”라고 말할 때가 있다.  그 당시 아내가 겪었던 고통, 분만 과정에서 얼굴에 실핏줄이 터진 것은 나에게 있어 조금 충격적 있었다.  하와가 지은 죄로 인해 모든 여성들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구나 생각했다.  나는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격렬한 유산소 운동을 좋아했지만 아내처럼 얼굴 전체의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운동을 한 적은 없다.  사실 이러한 예화까지 든다는 것에 대해 자괴감이 밀려온다.  

가령 아기를 낳아 본 적이 없는 처녀가 마치 아기를 낳아본 경험 있는 여성 같이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장황스럽게 늘어놓는다면 어떨까?  이는 신빙성이 없는 거짓말과 과장이 심한 사람으로 정신질환의 일종인 ‘공상허언증’(Pseudologia Fantastica)에 걸린 중증환자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자신이 주장하는 전체적인 상황이 논리적이지 않다.  둘째는 누군가가 자신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면 극도로 싫어한다.  마지막으로 거짓말을 하고 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사이코패스’와 같다.  한 마디로 이 병은 조현병 시초다.  

그렇다면 방언하지 않는 사람이 방언에 대해 신학적 혹은 성경적으로 이러쿵저러쿵 어떠한 주장을 내세우면 어떠할까?  하지도 않는 방언에 대해 무엇인가 다 아는 것처럼 나팔을 불어대는 것 말이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양심이 화인을 맞은 것이다(딤전 4:2).  아기를 낳는 고통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처녀가 아기를 낳아본 것처럼 죄책감 없이 거짓으로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마구 지껄이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D. A. Carson 박사는 이런 사람들이 신학적 용어를 사용하며 떠들어 대는 것을 ‘소름 끼치는 허튼소리’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개똥 같은 소리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 중에는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쓰레기 같은 자료들을 수집해서 무엇인가 다 아는 것 같이 말하면서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을 마치 경험해 본 것처럼 주장하기도 한다.  때론 그들의 말이 더 신빙성 있게 들리기도 한다.  가짜를 진짜인 것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며 나불거린다.  하지만 서울 가 본 놈하고 안 가 본 놈하고 싸우면 서울 안 가 본 놈이 이긴다.  서울 가보지 않는 놈이 오히려 더 그럴듯한 이론이나 과장된 이야기를 통해 서울 갔다 온 것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하고 고집 센 사람이 우기면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령의 은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누가 은사에 대해 말만 하면 히스테리를 일으킬 정도로 병적인 증세를 보인다.  이들에게 있어 유일하게 강조하는 것은 Martin Luther가 외쳤던 ‘오직 성경’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성경을 증거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단이 아닌 이상 성경이 진리의 말씀인 것을 부정하는 이단적 사상을 가진 정신 나간 목회자는 없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말씀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하나님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성령의 은사를 허락해 주셨는데(엡 4:7-12), 왜 그 은사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 다물고 있느냐는 것이다.      

은사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는 교회 창설을 위해 주어진 것이고 사도직과 연결된 모든 은사들은 사도시대 이후 교회에서 철수되었다는 것을 지겨울 정도로 강조한다.  나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각 사람은 믿음의 분량대로 믿기 때문이다(롬 12:3).  이들은 성경 말씀을 엄청 강조하고 줄기차게 증거 한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성경은 진리의 말씀(골 1:5), 즉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벧전 1:23), 분명 그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기 때문에 기적이 나타나야 정상적이다(롬 15:18).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4:12).  사도 바울의 말에 의하면 ‘복음이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해졌다는 것이다(살전 1:5).  죽어 있는 말씀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표적과 기사가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으로 믿는다(히 13:8).  그런데 말씀만을 지독하게 강조하는 교회는 이상하리만큼 사람들은 많이 모인다.  공짜 밥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인가?  예수님 당시에도 빵만 찾은 사람들이 있었다(요 6:26-27).  문제는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병든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의사에게 종합 진찰을 받기 전까지는 자기 자신은 육체적으로 건강하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이다.  검진을 받기 전까지 말이다.  하물며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사를 통해 영적 종합 검진을 받으면 교회 안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사람들의 실체가 드러난다.  

심각한 문제는 교회 안에 귀신 들린 자, 병든 자가 있어도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다(눅 4:31-37).  그저 죽어 있는 메마른 메시지만을 전한다.  나는 목회자가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쫓아내기 전까지는 그 더러운 귀신은 교회 안에 잠복해 있다고 믿는다(눅 4:31-37).  마치 가버나움 회당에 귀신 들린 자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막 1:21-28).  성령의 은사에 적대적인 자들이 이런 사역을 행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 Lloyd Jones는 성령을 빼놓고 말씀만을 강조하는 것은 교리적으로는 지극히 정통이라고 말하면서 현대 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사데 교회처럼 그 속에 생명력이 없어(계 3:1), 죽은 정통주의 신앙생활을 할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교회가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목회자 입으로 선포되는 그 모든 말씀은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볼로처럼 말씀을 폭넓게 연구하고(행 18:24), 본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히브리어, 헬라어, 심지어 아람어 성경을 들먹거리며 신학적으로 탁월한 학문을 소유할지라도 그가 가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성경지식이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진리의 말씀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한다(고전 4:20).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진리라면 그 살아 있는 말씀 속에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요일 5:7), 지금도 믿는 자들 속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살전 2:13).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의 사역’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마 5:1-2), ‘성령의 사역’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 12:28).  주님은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진리의 말을 가르치셨다(마 4:23).  다 끝난 것인가?  귀신들을 쫓아내시고(눅 11:20), 병든 자들을 고치시며(막 1:29-34), 주의 능력으로 행하셨다(눅 5:17).  여기서 주목할 구절은 ‘진리의 말씀’으로 이 모든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마 8:16).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병 고치는 권세를 주신 적이 있었고(마 10:1-15), 칠십 인의 제자들을 파송할 때도 똑같은 명령을 내리셨다(눅 10:1-20).  또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막 16:17-18).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복음을 전할 때 ‘주께서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증거’ 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막 16:20). 

사도 바울 역시 바나바와 함께 이고니온에서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할 뿐만 아니라 표적과 기사를 행했다고 한다(행 14:3).  사실 고린도에 오기 전부터, 그리고 온 후에 이미 바울은 수많은 절망적인 사건들을 경험했다(행 18:1-17).  빌립보에서는 힘 있게 사역을 시작했지만 유대인들의 반대로 거의 황폐화되고 말았다(행 16:16-40).  이와 비슷한 일들이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도 겪었다(행 17:1-15).  아덴에서는 어떠했는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해 심한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행 17:16-34).  요지가 무엇인가?  복음의 능력은 날카로운 지성이나 논쟁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 전파에 있어서 학식과 준비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핵심은 그들의 회심의 역사가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이다(고전 2:3-5).        

오늘날 교회는 성경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전파하는 것에는 열심이 특심이다(행 15:35).  그러나  성령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허락하신 다양한 은사들에 대해서는(고전 12:7), 바리새인처럼 적대적이다(마 9:34).  다른 것들은 다 주님을 위해 따른다고 나팔을 불어대면서 유독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만약 그 당시 그런 일들을 예수님과 제자들이 행했다면(요 14:12), 현대 교회가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행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벧전 2:21).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 목회자들이 ‘오직 말씀’이라고 말할 때는 살아 있는 능력의 말씀을 말하는 것인지(눅 1:37) 메마른 성경지식이나 죽은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렘 23:29).  ‘믿음’ 역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살아 있는 믿음(히 11:6)을 말하는 것이지 죽은 믿음이 아니다(약 2:26).  다시 말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진리의 말씀을 강조해도 그 말씀에 따르는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지 않으면(막 16:20), 그 가르침과 설교는 죽은 말씀이다.    

육에 속한 사람에게 성령의 일을 말해주는 것은 썩은 고기를 먹는 들개나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다(마 7:6).  구약 율법에 따르면 돼지(레 11:7, 신 14:8)는 불결한 동물로 일편단심 먹는 것만 알지 값비싼 진주를 모른다.  돼지가 진주의 가치를 아는가?  만일 성령께서 깨닫는 마음과 들을 귀와 보는 눈을 열어주지 않는다면(마 13:14),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을 때(요 1:1-18), 바리새인들이 불신의 눈을 가지고 평생 그분을 핍박한 것처럼 대적할 것이다(요 8장).  예수의 이름으로(행 3:6),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고(행 10:38), 기적이 일어나더라도(요 11:1-44),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지 않는다(눅 12:10).  이런 자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난 복음의 가치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경멸하고 돼지처럼 발로 밟고 내던져 버린다.

오늘날 목회자들 중에 자신만이 가장 성경적인 사람으로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고’(고전 4:6),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이런저런 신학적 용어나 같은 문제를 가지고 다른 교회 목회자들을 비판하고 정죄한다.  나는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왜냐하면 율법의 핵심은 사랑인데(약 2:8),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심판자가 된다는 것이다(약 4:11).  하나님의 위상을 찬탈하는 이런 자들에게 야고보는 말한다.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2).  이런 부류의 사람은 신뢰와 진실보다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특별한 존재로 보이기를 위해 신앙생활에 아무런 영적 유익이 없는 논쟁(딛 3:9)을 통해 이목을 집중시키려고 한다.  한 마디로 욕망이 높은 ‘관심종자’다.     

우리는 Jonathan Edwards가 『부흥론』에서 한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목사들은 하나님이 부흥을 일으키시는 데 있어서 자신보다 더 많이 사용하시는 다른 목사들에 대해 시기심을 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시기심 때문에 참 성령을 소유한 설교자들을 마치 거짓 영의 영향을 받았거나 이성을 잃고 미쳐버린 가식적인 위장꾼 들이며…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부흥의 흠집을 계속 열거하고 지적함으로써 부흥 속에 있는 선하고 영광스러운 것들보다 결함을 지적하기에 급급하다면 우리는 주의 일을 돕기 위해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그분을 대적해 싸우는 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성령을 대적하는 죄만큼 인간 영혼에 해롭고 위험한 죄는 없다”       

'생각해 볼만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적 체험  (0) 2023.11.05
신학 논쟁  (0) 2023.07.02
한번 구원은 영원한가?  (0) 2018.10.20
균형 잡힌 신학과 신앙  (0) 2018.05.26
성령의 충만함  (0) 2018.03.3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이에 대해 웨슬리 신학과 칼빈신학을 공부하면서 오랫 동안 기도하는 가운데 생각한 것이 있는데 

결론은………..






'생각해 볼만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학 논쟁  (0) 2023.07.02
죽은 말씀  (0) 2023.06.24
균형 잡힌 신학과 신앙  (0) 2018.05.26
성령의 충만함  (0) 2018.03.31
자비량 사역은 성경적인가?  (3) 2017.03.1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성령이 오늘날에도 모세에게 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시고( 3), 초자연적인 기적을 초대교회 때와 같이 일으키시며( 3:1-10), 예언을 하거나( 11:28), 방언기도로 말한다면(고전 14:39), 교회 전통과 질서를 강조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당혹스럽고 교리적으로 혼란을 야기할 수 있으므로 성령이 머무를 가장 안전한 장소는 오직 성경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사실 개신교 주류 그리스도인들은 오랫동안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 신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러한 은사들이 오늘날 교회에서 나타날까 봐 무척 두려워하거나 이미 사도시대에 이런 은사들은 다 소멸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처럼 조상의 전통에 묶혀 공통적으로 한결 같이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를 받는다는 말을 누가 하면 심기가 불편하고 극도로 의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John Wesley 18세기에 같은 말을 했을 때 런던 주교가 겁을 먹고 공포에 질린 것처럼 질서에 집착하여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죽은 전통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의 질서가 아닌 인간이 만들어 낸 질서와 제도 때문에 성령께 자유를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는 자유로우시며 동시에 질서가 있으시므로 모든 사람이 무질서하게 동시에 이야기하도록 하시는 분이 아니며, 방언을 할때 통역을 할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도록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고전 14:26-33).

 

기독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Charles H. Spurgeon은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진리를 옹호하는 일에는 두려움을 몰랐던 탁월한 설교자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강단에서 말씀을 전할 때 잠시 설교를 멈추고 어떤 사람을 가리키며젊은 청년, 자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장갑은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서 훔친 것이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예배가 끝나고 난 뒤에 얼굴이 창백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한 청년이 Spurgeon에게 다가와 개인적인 상담을 요청했고, 그 청년은 장갑 한 쌍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 물건을 손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목사님만 아시는 비밀로 해주신다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도둑질 했다는 말을 들으면 충격으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C. H. Spurgeon, Autobiography, Volume 2: The Full Harvest 1860-1892』에서 나오는 것으로 Spurgeon은 이러한 사실을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거나 조직신학을 잘 배워서 알아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이러한 은사를 가진 사람이 나오는데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라는 말을 했고(왕하 5:26), 아람군대 왕의 신복 중 하나가 왕에게 한 말(왕하 6:12)중에도 선지자 엘리야에게 초자연적인 지식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엘리사가 구약성경을 히브리어로 통달했기 때문에 이런 정보를 얻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은사 중지론자들은 성령이 모든 육체에게 전례 없이 부어질 것이라는 요엘서 2장의 약속이 성취 결과( 2:17)( 12:6)예언( 21:9) 그리고 환상( 9:10-12) 등의 계시적 활동과 더불어 은사는 오로지 기초적이고 일시적인 방식으로만 기능했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20세기에 정경이 완성된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정경 이외의 예언적 계시나 은사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자 Richard Gaffin그리스도의 단회적 창설사역은 그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교회 창설기 시대에 일시적으로 주어진 은사들은 사도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영구적으로 철수되었다.  계시가 종결되었기 때문에 계시에 수반하는 모든 은사들도 종결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러한 예언적 계시에 대해 D. A. Carson은 조직 신학자가 사용하는 좁은 의미의 계시와 성경이 말하는 넓은 의미의 계시의 정의를 혼돈하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Carson의 주장에 대해 Gaffin은 매우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사실 그가 은사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는 것은 만약 예언이 지금도 계속된다면 정경이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계시가 올 때마다 정경의 또 단위가 보완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기에,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모든 계시의 언약성(covenantal nature)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이런 기능들이 오늘날에도 계속된다는 것은 지나친 견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계시라는 말을 기록된 성경과 동일시하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사들의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일 뿐, 은사주의자들은 성경 66권이 기록된 이후에 신약의 예언이 성경과 동일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고 있기 때문에 은사중지론자들이 말하는 계시에 대한 해석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나온 신학적 편견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계시를 받았거나 예언을 하면 자라보고 놀란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라는 속담처럼 성경말씀에 무엇인가 더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심각한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말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모든 결정을 내리는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확실하고 완벽하게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주 안에서 결혼할 것을 말하지만(고전 7:39), 어느 지역에 사는  누구와 어떻게 결혼을 하라고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는 것처럼 누구를 인도하기 위해서( 16:13), 또는 권면하거나 위로하기 위해(고전 14:3), 때로는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16:9), 하나님이 성경을 초월하여 말씀하실 가능성은 성경이 그 자체에 대해 주장하는 충분성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Wayne Grudem이 말한 것처럼 순간적 계시에 근거한 예언을 통해 드러내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점을 인정하거나, Spurgeon이 설교 시간에 성령의 은사인지식의 말씀을 사용한다고 해서(고전 12:8), 이것이 성경의 충분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유익을 주는(고전 12:7), 다양한 은사들( 12:6-8, 고전 12:8-10, 12:29-30, 4:11)이 초대교회가 사라진 뒤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거나 혹은 하나님이 입을 닫으셨다고 믿게 만드는 내용은  성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1세기 교회에서 성령께서 불신자의 죄를 드러내어 회개시키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초월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중요했다면(고전 14:24), 21세기에는 왜 그것이 덜 중요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은사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신비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기에 반드시 건강한 영성을 유지하려면 지적인 것과 체험적인 것이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J. I Paker“The Holy Spirit and His Work” in Applying the Scriptures: Paper from ICBI Summit III』에서 한 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믿는 기독교의 일부 가지들은 은혜 언약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의 구원적 사랑은 분명하고 건전하게 취급하는 것 같은데도, 활력을 주시는 성령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경건면에서 메마른 것 같다. 반면에 은사주의적 기독교의 일부는 그 모든 넘쳐흐르는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성자보다는 성령에 관심을 집중하고 사실상 성부를 무시한 탓으로 김이 빠져 버리고 스스로의 진흙 속에 빠져서 위축되고 미숙한 것처럼 보인다.”  간추려 요약하면 말씀만 강조한다면 방자한 지성주의자가 될 우려가 있고, 은사만 강조한다면 천박한 감성주의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에 이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균형 잡힌 신학과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볼만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은 말씀  (0) 2023.06.24
한번 구원은 영원한가?  (0) 2018.10.20
성령의 충만함  (0) 2018.03.31
자비량 사역은 성경적인가?  (3) 2017.03.11
비방을 일삼는 자  (0) 2016.03.1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성령충만또는성령세례그리고기름부으심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난해한 구절이기 때문에 극단적 칼빈주의(Hyper Calvinism) 신앙을 가진 자들 중에는것이 오용될 우려가 있다고 느낀 나머지 그냥 회피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방언이나 성령이 임할 나타나는 격렬한 감정의 표출, 특히지식의 말씀예언같은 새로운 형태의 계시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사실 어떤 교리가 오용될 우려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무시하거나 부인할 없는 이유는 모든 교리가 지금까지 그런 과정을 통해 바로 잡아지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여전히 오용되고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러한 교리는 방언과 예언, 나아가 눈에 거스리는 성령 안의 안식거룩한 웃음’,  그리고 흐느낌몸의 진동등등 하나님께 대한 비이성적인 접근 방법에 관련되어 왔기 때문에, 오랫동안 제도주의와 교회질서를 강조하는 종교적 전통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무시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교리와 관련하여 도에 지나친 행동들, 예를 들어 성령충만함을 받았다는 사람이 다른 형제에게 오만하거나 편협한 태도를 보이면서 자신만이 가장 성경에 근접한 순복음적이라고 주장할 , 바로 이러한 행동에 근거하여 교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어떤 좋지 않은 고정관념이 생겨났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것이 우리의 상상력을 왜곡시킨 나머지 교리에 대한 건전하고도 균형 잡힌 이해와 실천이 어떤 것인지를 마음속으로 그려볼 없을 정도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모두는 성경 전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성령충만에 관한 교리뿐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가 에베소서 518절의 말씀처럼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충만한 삶을 살기를 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비성경적이고 균형 잡히지 않은 신앙, 비록 그것이성령충만이라는 미명하에 행하여지는 어떤 것도 가령 그것으로 인해 오만하고 사랑이 결여된 행동을 한다면 그 성령의 충만함은 본인 자신에게는 신비스러운 충만(?)이 될지 모르겠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순수한 복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고전 13:1-3).  다시 말해 성령충만했다고 해서 우리가 전보다 더 완벽해지는 것도 아니고, 지식의 말씀이나 주어지는 모든 예언들이 항상 옳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처럼(고전 14:29), 만일 누군가가 성령충만함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원래부터 감정적이었던 사람은 더욱 감정적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굳이 전보다 더 신령한 인간이 된 것 같이 외식적이고 과장된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의 충만함 혹은 누군가를 통해 기름부으심을 받은 것을 가지고 거만하게 행동하거나 떠벌이고 다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며, 오직 겸손과 사랑 가운데서 모든 면에 더욱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2:5).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베푸시고 사역자로 써주시는 것이 우리가 선하거나 잘나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고전 1:26-29).

 

먼저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가 단지 구하기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11:13), 사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8:2), 구원의 주로 영접할 (10:9), 성령은 우리의 입술을 통해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16:16-17), 예수님을 진정 로 시인하도록 도와주십니다(고전 12:3).  그러나 우리의 연약한 인성으로 인해 성령충만이 방해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오순절날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베드로와 같이 일단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16:17), 어느 때인가 성령께서 우리를 충만하게 채워주시기를 간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2:1-4).  더 나아가 성령충만은 예수님을 닮아가고(5:18-21), 그 분처럼 사역을 행할 있는 능력을 가져다주는 것이지만(14:12, 1:8), 여기서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 외부로부터 부어지는 것인지( 3:16, 2:2-3, 4:31), 아니면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기름 부음(딤후 1:6, 요일 2:20, 27)분출되는 현상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든지 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 성령께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특별한 방식으로 임해 주시기를 기대할 있습니다( 5:17).  그리고 이 성령충만은 회심의 체험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에게는 사도 바울처럼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다주는 경험을 하기도 하지만( 9), 또 다른 사람에게는 디모데 같이 매우 부드럽고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딤후 1:5-6).

 

그리고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방언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되지만( 2:4, 19:6),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은사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고전 12:30)에 그리스도인들 중에 성령충만함을 받을 때 방언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10:46).  또한 어떤 사람은 사역자로부터 안수를 받음으로 성령충만을 받기도 하는데( 9:17), 사실 이러한 방식이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 아닌 이유는 고넬료 가정처럼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성령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0:44-48).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영적인 삶을 추구한다고 해서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 주변에 영적인 삶을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도 성령충만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 구함으로써 성령충만을 받게 되는 것이고( 11:13), 결코 영적인 삶을 추구한다고 해서 받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이란 그리스도와의 올바른 관계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지( 15:5), 이러한 삶이 성령충만의 전제조건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 빚진 자에게 빚을 요구한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고전 12:11), 결코 사역자의 의로움이나 공로에 의해 주어지는 일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4:4-5).  그렇지만 이 성령충만은 도덕적인 자질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엡 5:18-21).


'생각해 볼만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번 구원은 영원한가?  (0) 2018.10.20
균형 잡힌 신학과 신앙  (0) 2018.05.26
자비량 사역은 성경적인가?  (3) 2017.03.11
비방을 일삼는 자  (0) 2016.03.12
신약교회의 예배스타일  (0) 2015.12.19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유급 목회인가, 자비량 목회인가?”라는 이슈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치열한 논쟁을 일으키는 문제 중에 하나인데, 이때 유급 목회보다는 자비량 사역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제시하는 성경구절은 사도행전 18장2-3절로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는 말씀과 고린도전서 9장12절에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지 아니하려는 것이라’는 구절을 인용합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살펴보면, 당시 랍비들은 손일을 배우도록 요구되었고 실제로 젊은이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직업 훈련을 받도록 촉구하였는데, 장막을 만드는 기술자인 바울에게 있어 이 기술은 확실한 생계 수단이었기 때문에 그가 고린도에 체류하는 동안 자력으로 생활을 영위해 나갔습니다.  무엇보다도 고린도에는 여러 종교를 전파하는 선동가(煽動家)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바울도 가르치는 선생은 자신의 학생들로부터 후원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지만(갈 6:6, 고전 9:4), 자신이 이 권리를 포기했던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교회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고(고전 9:12), 값없이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가 어떤 저의를 지니고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고전 9:18).  쉽게 말하면 돈을 벌기 위해 가르침을 주는 그런 선생과는 다르다는 것과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이런 일로 장애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사실 어려운 생활을 하는 가운데 신학을 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교회를 개척해서 사역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은 주로 바울의 예를 들어가며, 자비량 사역은 사례를 받지 않고 사역을 하기 때문에 교회 부패에 천적이라고 말하면서 교회에 심각한 ‘돈’ 문제를 없으려면 오늘날에도 바울처럼 자비량 사역자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바울이 이사야 52장5절을 인용하여 로마서 2장24절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불신자에게 모독을 받고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은 현대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일(성적인 문제와 명예욕)들 중에 하나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을 수 있는(딤전 6:5), 교회재정에 대한 문제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유급 담임목사는 로마에 의해 공인된 가톨릭 사제제도에서 나온 것으로 비성경적인 제도일 뿐 아니라 초대교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직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철폐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거나, 오직 자비량 사역만이 오늘날 현대교회에 필요한 것이고 유일한 대안으로 내세우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울 혼자만의 개인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역자가 따라야 할 ‘집단적인 강령’이 될 수 없는 것이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비량 사역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조금 특별하거나 성도들에게 짐 지우지 않는 스스로 돈에 깨끗한 영적인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바울의 자비량 사역이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목회의 모델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답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먼저 베드로전서 2장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는 구절을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은 모든 사역자들이 따라야 할 원형이기도 합니다. 조금 더 성경적으로 살펴보면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지 요셉에게(마 13:55), 목수 일을 배워 평범한 노동자로서 충실했던 분이셨고(막 6:3), 죄를 인정할 필요가 없었지만(요 8:46, 고후 5:21, 히 4:15, 요일 3:5), 세례요한으로부터 회개를 위한 물세례를 요단강에서 받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막 1:9), 하나님께서 필수적으로 요구하신 일인 메시야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마 4:1).  그리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족과 직업을 버리고(마 4:13), 고향 나사렛을 떠나(막 1:9, 요 1:46),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에 온 마음을 쏟으셨습니다(마 4:17, 막 1:15).  한 마디로 목회이외에 다른 활동(목수 일)을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솔직히 자비량 사역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러한 목회사역을 말하면 어떠한 반론을 제시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고, 그러기 때문에 당나귀처럼 쓰임을 받았던 바울보다는 예수님의 목회사역이 오늘날 모든 사역자에게 있어 유일한 모델이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은 제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예를 들어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이들의 파트너인(눅 5:10),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직업은 ‘어부’였지만(막 1:16-20),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분이 하셨던 것처럼 가족과 직업과 재산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전파를 위해 다른 직업을 일절 갖지 않는 가운데 순교할 때까지 목회에만 전념했습니다(마 4:18-22).  물론 요한복음에 보면 베드로가 주도해서 다른 여섯 제자들과 함께 디베랴 바다로 물고기를 잡으러 간적이 있었지만(요 21:3), 이것은 일곱 명의 제자들이 자신의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 목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이 말한 것처럼(마 28:7),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막 16:7), 그분을 기다리는 동안 익숙한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은 것입니다.  사실 돈을 끔찍하게 사랑했던 가룟유다 한 사람만 빼놓고(마 26:14-16, 요 12:6), 제자들 모두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직업을 가지는 가운데 사역을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 속에서 목회에만 전념을 했습니다(막 10:28).  따라서 바울이 아덴에서의 선교사역 실패로 인해(행 17:34), 고린도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어 시작하게 된 자비량 사역을 오늘날 모든 지역교회 목회자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룟유다처럼 돈 때문에 사역하는 사람들이 오늘날도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르심과 소명 속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자비량 사역은 순회사역자에게 있어서는 가능한 일이지만, 반면에 예수님이 몸소 실천하셨던 사역은 지역교회 목회자에게 있어 성경적이기 때문에 유급목회만을 두고 삯군목사로 몰아붙이는 것은 한쪽으로만 치우쳐진 판단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에서는 바울처럼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낼 수 있는 자비량(선교) 사역자도 필요하지만, 베드로나 안드레처럼 지역교회에서 경제적 지원을 받아가면서 사역에 전념하는 유급목회자도 필요하기 때문에 자비량 사역만이 성경적이라고 못 박지 말아야 하고 교회에서 정해진 사례를 받는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사역자나 평신도는 자신이 갖지 않은 다른 은사를 갖고 있는 사역자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에 충성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상급과 칭찬이 있겠지만(고전 4:2), 만약 자신이 하는 사역만이 가장 성경적인 것처럼 주장하거나, 로마서 14장4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다른 사역자를 판단한다면 주님으로부터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약 4:11-12).  그러기 때문에 바울처럼 부르심을 받았으면 바울같이, 베드로처럼 부르심을 받았으면 베드로같이,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자신의 부르심과 은사를 따르는 것이 성경적이지(롬 12:3-6), 자비량 사역만이 성경적인 것처럼 말도 되지 않는 궤변을 장황스럽게 늘어놓으면서 어느 특정 구절 하나만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마지막 대변인이 되는 것처럼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해 볼만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균형 잡힌 신학과 신앙  (0) 2018.05.26
성령의 충만함  (0) 2018.03.31
비방을 일삼는 자  (0) 2016.03.12
신약교회의 예배스타일  (0) 2015.12.19
성령의 바람  (0) 2015.08.0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인간의 혀는 말(horse)의 고삐나 재갈보다도 작고 배의 키보다는 훨씬 더 작아서 논리적으로 본다면 이것을 조절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성경은 말의 파괴성에 대해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라고 표현합니다(약 3:1-6).  여기서 혀는 말(word)을 의미하고 혀를 움직여 소리를 내며 이 소리를 언어로 사용하는 것처럼 말을 조절하거나 통제하지 않으면 작은 불씨가 온 산을 태우고 큰 건물을 집어 삼켜 태우는 것 같이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말하는 자신에게도 심각한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전 10:13).  야고보는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고 말하는데(약 4:11), 여기서 ‘비방하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나쁘게 말하다” 혹은 “다른 사람을 대적하여 말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진실이든 거짓이든 상대방에게 불리하게 말을 하는 행위로 William Barclay에 의하면, 이 단어는 대화의 현장에 없는 어떤 사람에 대하여 “나쁘게 헐뜯는 행동”이나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말해 어떤 사람들은 당사자가 없는 은밀한 곳에 모여서 혹은 인터넷 댓글을 통해 한 사람을 파괴시킬 수 있는 어떤 정보들을 주고받거나(잠 18:8), 그 사람에 대하여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아니면 도덕적으로 옳다든지 그르다든지 판단을 하는 것인데, 이 판단은 대체로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좋지 못한 인간적인 감정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도덕적인 비난이나 비판으로 이어질 때가 많습니다(시 52:4).

 

사실 이러한 비방을 일삼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스스로 높은 자리에 서서 다른 사람을 낫게 평가할 때 나타나는 좋지 못한 ‘갑질’의 행위로 상대방을 적수로 놓고 깎아내려 자신을 상대방보다 더 높은 자리를 점유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한 마디로 이런 행위는 “교만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죄 짓는 것은 사실을 말하느냐 거짓을 말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더라도 상대방에 대해 인격적인 모독을 가하거나 깎아내리는 말을 할 때, 그것이 비방이 된다는 것입니다(딤전 5:13).  이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비방을 일삼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경고하신 것처럼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에(롬 3:8), 성경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말하면서 그 말을 통해 그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도 있고 정죄함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마 12:36-37).  다시 말해 형제에 대해서 무심코 내뱉은 “터무니없는 말”이나 “함부로 지껄인 말”, 심지어 “무가치한 말”들까지도 심판 날에 문제가 될 만큼 유죄 판결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마 5:22).  로마서에서도 이 비방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롬 1:29-32)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겠지만(잠 21:23), 만약 혀를 잘못 놀리면 무서운 심판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잠 18:21).

 

우리는 성경에서 이 비방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찾아볼 수 있는데, 모세와 아론의 누이이며 여선지자(출 15:20)인 미리암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인 모세가 이방 사람인 구스 여자와 결혼을 했을 때(민 12:1), 시기심과 질투심을 가지고 모세를 향해 비방을 하자(민 12:2), 하나님은 이 문제를 판결하기 위해 회막 문에 나타나 아론과 미리암을 향해 진노하셨고 그녀는 문둥병자가 되었습니다(민 12:9-10).  이것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은 엘리사를 보고 조롱하던 사십 이명의 어린아이들이 졸지에 곰에 물려 죽은 사건으로(왕하 2:23-24), 분명 주님은 ‘아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마 12:14),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대머리’라고 조롱하는 말 한마디 때문에 동네 아이들이 때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윤리적인 기준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을 근심케 하고(엡 4:30), 영혼을 황폐하게 만드는 지름길은(잠 18:8), 상대방을 향해 신랄하게 비방/비판을 하는 것입니다(히 13:7).  그래서 우리가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은 상대방이 하는 말이나 신앙이 자신과 맞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의 좋은 점마저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비방하지는 말아야 하고, 또한 그의 언행이나 행동에서 이해할 수 없는 점을 발견하더라도 마치 자신만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속단하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4:5).  그 이유는 주님께서 죄인인 우리들에게(롬 3:9), 다른 죄인을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롬 14:4).

 

사실 죄인이 죄인을 판단하거나 비방 혹은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이고(마 7:1-5), 우리들 중에 누구를 비방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의인은 단 한사람도 없고(롬 14:10),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푸른 하늘도 더러워 보일 수 있는데(욥 15:15-16), 하물며 죄를 밥 먹듯이 짓고 사는 죄인들이(전 9:3), 남을 판단한다면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이 아니냐는 것입니다(렘 17:9).  사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과 상관없이 단 한시도 죄를 짓지 아니하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로(요일 1:8), 그 누구도 털어서 먼지가 안 나는 깨끗하고 완벽한(왕상 8:46), 범죄치 않는 인간은 아마도 이 세상에는 없을 것입니다(전 7:20).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생각하실 때 단지 부정적인 면을 꼬집어 내기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더 많이 생각하시는 것은 (민 23:21), 그분이 우리의 죄를 간과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 자비하시고(시 78:38), 인애하시며(호 12:6), 온유하시기 때문입니다(삼하 22:36).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보신다면 우리 또한 죄를 지은 사람이나 무슨 문제가 있는 사람을 볼 때 불쌍히 여겨야 하고(엡 4:22), 무엇보다도 주님의 성품인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마 11:29), 그를 도와 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단 12:3).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 형제에게 어떠한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때 소문이나 선입견 혹은 인간적인 감정을 앞세워 비방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갈 6:1).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놓고 말을 할 때 가능한 그 사람에 대해 긍정적인 면만을 이야기해야 하고, 만약 그 사람의 고쳐야 할 부분이 있어 부득이하게 언급해야만 할 경우가 있을 때에는 바리새인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나팔을 불지 말고(마 6:2),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조용히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 사람에 대해 보여주시는 만큼만 말해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마 18:15).  만약 그렇지 않고 계속 같은 문제를 가지고 끊임없이 비방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처럼 똑같은 죄를 짓지 않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와는 다른 종류의 죄를 짓고 있을 가능성이 많기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방한 죄에 대해 긍휼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롬 2:1-3).  사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인데(마 22:37-40), 같은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최고의 법인 사랑을 저버리고(약 2:8), 율법을 비판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율법을 주시고 율법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무서운 죄악을 저지르는 행위입니다(약 4:11-12).  쉽게 말하면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재판장이 되어 하나님의 위상을 찬탈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 자기 죄를 끝까지 회개하지 않거나 돌이키지 않는다면 분명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그 사람에게 응하게 하실 것이고(딤전 5:24), 하나님께로 받은 놀라운 은혜와 상관없이 그는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눅 6:46-49).

'생각해 볼만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의 충만함  (0) 2018.03.31
자비량 사역은 성경적인가?  (3) 2017.03.11
신약교회의 예배스타일  (0) 2015.12.19
성령의 바람  (0) 2015.08.01
가증스러운 신앙  (0) 2015.05.30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오늘날 교회는 이러한 말들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야, 모든 것은 질서대로 해야지, 질서대로!”  그래서 교회는 마치 질서의 노이로제에 걸린 것처럼 예배드릴 때마다 질서를 강조하고 있는데, 사실 질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적이지만(고전 14:26), 성경에서 말하는 질서란 인간들이 생각하거나 만들어낸 질서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생각하는 질서란 모든 것이 안정되고 혼잡하지 않는 정리정돈이 잘된 것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사 55:8-9).  예를 들어 하나님의 성령(엡 4:30)이 사울에게 임했을 때 그가 황홀경의 상태에서 하루 종일 알몸으로 춤추고 소리치며 예언을 했다고 성경은 증거 하는데(삼상 19:23-24), 솔직히 우리가 보기에는 이것이 전혀 질서적이지 않고 귀신들린 사람(막 5:1-20), 혹은 노출증 환자나(사 20:1-6), 어떤 정신병자의 행동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사울에게 이런 일을 행하셨던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의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는 말씀은 그 당시 고린도 교회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감에 있어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질서대로 하라는 말씀이지 성령 하나님께 자리를 내어주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모든 일을 차서를 따라 순서 있게(고전 14:27), 그리고 질서가 있어야 하고(고전 14:31), 동시에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살전 5:19).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너무 질서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인데, Lloyd Jones는 이 문제를 이렇게 지적합니다.  “모든 일을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명확하게 하려다가 그만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범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는 모든 것이 다 짜여져 있고 모든 항목이 미리 정해져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 시작하여 언제 마쳐야 하는 것이 다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1시에 시작합니다. 성경을 봉독하고 순서지에 적힌 모든 것을 다 진행하여 12시가 됩니다. 그런 다음에 축도가 이어집니다. 제가 볼 때 이건 아주 심각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께 기회를 드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무 프로그램에 매여 있어 성령께서 역사하실 틈이 없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처럼 형식적이 되었습니까?”  사실 Lloyd Jones가 쓴 『부흥』은 50여년 전에 쓰여진 책인데 꼭 한국/한인교회를 수십 차례 방문하고 나서 쓴 것처럼 보이는데, 그는 영적인 사람이라 앞으로 미래의 교회가 그렇게 되어 질 것을 알고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 전통적인 교회 현실과 너무 같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오전 11시 시작해서 12시가 되면 예배를 마칩니다.  만약 설교가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얼굴부터 굳어지고 찬양을 반복적으로 하면 몸을 비틀기 시작하는데, 사실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물고문”“전기고문”만 있는 줄 알았는데, 예배를 드리는 것이 견디기 어려운 고문(?)인 것처럼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중에 정확하게 11시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안절부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이미 율법주의에 얽매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고, 사실 그 시간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마음이 불안한 것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매여 있다는 증거이고(갈 5:1), 이러한 율법주의에 매여 있는 사람의 특징은 예배를 드려도 마음에 진정한 기쁨과 감격이 없고, 혹시 주일예배 하루라도 빠지면 하나님이 진노하지는 않을까 마음이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죽은 정통주의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마음에 기쁨이 없고, 마치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의 하나인 에베소 교회처럼 뜨거움도 없고 오직 형식과 제도에만 얽매여 있어 윤리적인 행위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계 2:1-7).  이 같은 신앙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여섯 번째의 남자와 살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여자, 거기에다 율법적인 사고방식까지 매여 있으니 얼마나 예수님 보시기에 가련하고 불쌍해 보여겠습니까?  그 여자가 자기 조상들은 이 산에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말하자(요 4:20), 주님이 그 여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1-24).  이 말씀은 앞으로 있을 신약교회의 예배스타일을 말해줍니다(롬 12:1-2, 빌 3:3).

 

여기서 ‘신령’은 성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인간의 영으로 그분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마음의 자세를 의미하고, 그리고 ‘진정’이란 예수 안에서 계시된 참된 진리를 말합니다.  쉽게 말한다면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인지(고전 15:1-4), 예수님이 왜 나를 위해 돌아가셨는지를(고전 11:24), 알고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그런데 수가성 여자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예배를(요 4:22),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형식에 얽매여서 오랜 세월 동안 드렸던 것입니다(요 4:20).  쉽게 말하면 교회에 가서 본인 나름대로 열심히 예배를 드렸다고 말하지만 마당 뜰만 밟고 종교생활을 한 것입니다(사 1:10-17).  여기서 신령과 진정한 예배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죄사함을 받은 감격 속에서 드려지는 진실 되고 온전한 예배, 즉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눅 6:46), 성령 안에서 온 마음과 온 몸으로 드려지는 영적인 참된 예배를 말합니다(롬 12:1-2).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의 본질은 건물이나 물질, 장소나 의식, 옷차림이나 형식에 있지 않고 예배자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호 6:6).  예를 들어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아마 예배가 지겨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죄 용서함을 받은 감격이 없기 때문에 예배가 지겨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제도에 얽매여 정해진 장소, 산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오늘날로 쉽게 말한다면 주일오전 11시에 예배를 드려야 주님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받지 않는다는 말일까요?(행 16:24-26, 20:7, 28:23, 느 8:1-3).  물론 좋은 전통이라면 받아들여야 하겠지만(살후 2:15), 성경에는 오전11시에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이 없을뿐더러, 문제는 인간이 만든 교회전통은 거의 사람을 형식과 제도에 묶어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만들 수 있고(막 7:1-23), 잘못된 전통은 영혼을 도적질하고(막 7:1-23), 심령을 메마르게 만들어 의식이나 형식에 얽매이게 한다는 것입니다(골 2:8).  그러나 우리는 신약교회의 예배를 통해 성령이 어떻게 역사했는지를 알 수가 있는데 고린도전서 14장26절에 보면 당시 예배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모일 때'는 예배를 말하고, ‘계시'는 문맥적으로 볼 때 예언을 뜻하는데, 이 구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신약교회의 예배는 성령 하나님이 주관하셨습니다(빌 3:3).  요약하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는 찬송과 가르치는 말씀과 예언, 그리고 방언과 통역함도 있는데 바울은 이 토대 위에서 질서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델은 어디에다 맞추는 것이 성경적일까요?  잘 인쇄된 주보에 나온 순서대로 행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신약교회의 예배스타일일까요?

'생각해 볼만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비량 사역은 성경적인가?  (3) 2017.03.11
비방을 일삼는 자  (0) 2016.03.12
성령의 바람  (0) 2015.08.01
가증스러운 신앙  (0) 2015.05.30
비판의 영을 가진 사람  (0) 2015.03.07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지방에 와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아니라 우리는 성령의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을 한 적이 있었고(행 19:1-2),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셨는데(요 14:9), 만약 오늘날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 속에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고 네가 죄로 인해 슬퍼할 때 위로하며 기도할 때 네 연약함을 도와주고 진리의 말씀에서 나오는 비밀스러운 것을 깨닫게 해주었는데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러한 성령의 증언(요일 5:7)을 분간하는 데에 있어 오늘날 교회가 그토록 많은 어려움과 의심, 그리고 두려움과 망설임이 있는 것은 교회에서 모든 신자에게 내주하시는 교사로서(롬 8:16), 성령이 임재 하신다는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거나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Adolph Saphir 박사는 『Christ Crucified』에서 대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지만 자신의 믿음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생명의 능력이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는데, 한 마디로 제삼위의 위격이신 성령의 사역(마 12:28)과 내주하심(요 3:3-5)에 대한 자각이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막 16:17-20).

 

그러나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종교개혁가들이 특정 상황 속에서 주장한 진리의 법정적 패러다임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성령께서 행하시는 역사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성훈련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은혜스럽지 않는 비신앙적이거나 잘못된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왜냐하면 전통교회 목회자들은 정식 신학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사역과 영성훈련의 광범위한 분야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평신도들은 담임목사로부터 주로 듣는 것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전도하라는 것 이외에 어떠한 영적인 지도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할례 받지 못한 책(?), 주로 성령의 은사들과 영성훈련에 관한 서적들을 접하게 되면 거의 부정적인 반응이나 심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는데 실은 이러한 반응들은 그 책에 관계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읽는 사람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반증이라는 것을 먼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 모두가 경험하였듯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여러 번 성경말씀을 읽으며(딤전 4:13), 기도하라고(살전 5:17), 권고를 받거나 아니면 하늘나라 상급을 많이 쌓기 위해 전도해야 한다는 소리를 목사나 주변사람들로 하여금 수도 없이 많이 듣기만 했지(마 28:19-20), 다양한 영성훈련이나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현대교회의 실정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 보면 이스라엘 선생인 니고데모가 나오는데(요 3:10), 그에게 있어 한 가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로(요 3:4), 당시 예수님께서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요 3:5-8), 그는 교리적으로 잘 무장되어 있었지만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유대의 한 종파인(행 15:5), 바리새파 사람으로(요 3:1), 전통을 중시하고(마 15:1-3), 외부적 시행세칙들에 주의를 기울이며(마 23:23),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엄수하면서(마 23:2), 예수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는데(요 9:22),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전통과 제도 때문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거부하고 ‘교단/교파/교리’라는 틀 안에 철저하게 얽매여 있는 신학자/목사였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행 26:5), 남들이 알아주는 탁월한(?) 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반복적으로 계속 말씀하셨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요 3:5).  그리고 주님께서 ‘바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 때는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 3:9)라고 반문하기까지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니고데모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었기에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초자연적인 일들이 그에게 얼토당토한 말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고전 2:14).

 

사실 바람은 그 누구도 통제하거나 그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바람을 길들이거나 그 바람의 활동영역의 한계를 정할 수 없는 것 같이(행 2;2),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람’은 성령의 예상할 수 없는 행로를 말해주는 것으로 그분의 불가해한 기원을 의미하고 또한 바람이 불어오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는 교회와 개인에게 나타날 때 그 현상을 보거나 느끼거나 감지할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행 2:1-4).  이러한 성령의 바람은 신학자/목사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학적으로 요구되는 곳이나 제도적인 종교 안에는 불어오지 않고 인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찾아오는데, 예를 든다면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마 1:18), ‘진리의 영’(요 16:13), ‘예수의 영’(행 16:7), ‘그리스도의 영’(롬 8:9), 아버지의 성령(마 10:20)의 작품으로 인간의 편견과 상식을 무안하게 만들어 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이렇게 다루기 힘든 ‘바람’을 니고데모처럼 중생하지 못한 신학자와 목사들이(고전 2:14), ‘교리’라는 박스 안에 가두어 길들이려고 하거나 혹은 교회전통과 제도로 철저히 제한하고, 무엇보다도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치유, 예언, 방언, 방언 통역, 영들 분별, 지식의 말씀)를 합리화하며 신학적으로 설명하면서 비신화화하려고 애쓰려 하지만, 성령의 바람은 완고한 교리/교조주의를 뒤집어엎고 지금도 여전히 어떤 제도나 전통에 얽매이는 것 없이 임의로 불어온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볼만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방을 일삼는 자  (0) 2016.03.12
신약교회의 예배스타일  (0) 2015.12.19
가증스러운 신앙  (0) 2015.05.30
비판의 영을 가진 사람  (0) 2015.03.07
거짓목사인가 타락한 목사인가?  (0) 2015.01.17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진리가 되어 하나님 품에…”라는 장례문구를 자살한 어느 목회자의 장례식에서 본 적이 있는데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엡 2:8),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고는 있지만(고후 5:2), 우리는 여전히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고(시 51:5), 본성이 부패했기 때문에(렘 17:9),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주님을 믿더라도 어떤 자극만 받으면 분노와 감정을 통제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기에(전 9:3), 그러한 인간에게 ‘진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회의론’(Scepticism)을 반박하기 위해 진리개념의 ‘조직적 설명’(組織的說明)을 시도한 최초의 신학자는 Augustine이었는데 그는 ‘진리’라는 단어를 네 가지 의미로 구별하면서 그 중 하나를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나타내신 까닭에 유일한 ‘진리’(眞理)”라고 설파했습니다.  비록 종교 다원주의와 혼합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오늘날에 이런 주장은 결코 인기를 얻지 못하겠지만 이 대담한 주장에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는 중대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근원이시고(골 2:3), 그분의 삶에서는 죄와 오류나 거짓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으며(히 4:15), 그분의 가르침은 언제나 올바르셨을 뿐 아니라(마 7:29),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의 실체라는 것입니다(빌 2:6).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배타성은(행 4:12), 바로 그분만이 가지고 계시는 신격의 독특함이기 때문에(요 10:30), ‘진리’라는 단어를 예수님 외에 다른 것에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신학자/목회자들 중에 개혁주의자 Calvin을 높이는 사람들은 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도모한다는 명목아래 그 일환으로 Calvin 탄생 기념사업회 같은 것을 통해 그의 생애와 업적을 높이는데 이것도 좋지 못한 현상 중에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교회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제네바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인 Calvin이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고(계 21:8, 22:15), 성경은 예수님을 ‘기념’하라고 했지(고전 11:24), 한 시대에 당나귀처럼 사용(민 22:28)된 죄 많은 인간(롬 3:9)을 칭송하라는 구절이 없기에 사람을 높이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장래를 예고하고 그를 메시야로 믿는 신앙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한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부은 사건을 기념하라는 주님의 명령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을 위해 행한 아름답고 받을 만한 사랑과 희생적인 행위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지(마 26:6-13), Calvin처럼 종교개혁을 빌미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창 1:27), 잔인하게 죽인 사람을 기념하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가령 자신이 대단한 목회자가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과 그러한 부류들을 높이면서 그의 신학배경이나 학력/경력을 높이 평가하는 교회 직분자들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가증스러운 일이고(요 5:44), 우리는 결코 어느 누구라도 사람을 높이거나(눅 16:15),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3:21).

 

그리고 목사/신학교 교수가 되는 과정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에 대한 강한 열정을 나타내는 사람들 중에 성경의 진정한 저자를 사랑하기보다는 성경 자체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들은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이 ‘성경연구’ 혹은 ‘성경지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신학자/목사)들은 성경을 알았고 성경을 읽었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사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분의 음성도 듣지 못했는데(요 5:37-40), 매일 성경을 연구하면서 여러 시간을 성경과 같이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결코 어느 때에도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일생 동안 매일 성경을 읽더라도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고, 물론 그리스도인이 성경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져야 하겠지만 성경 자체를 우상시하거나 교회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격과 예수님의 역사하심보다 더 높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자체를 예수님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몇 가지 좋지 못한 열매들이 있는데,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성경이나 신학, 혹은 교리나 교회전통, 또는 목사의 학력과 경력, 심지어 설교의 실력이나 영성과 능력, 교회 프로그램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이야기를 하고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러한 것들을 예수님보다 더 우위에 두고 사는 사람들은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부수적인 것들에 비해 예수님을 너무나 덜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도덕적 행동이나 의무를 신자의 삶의 본질로 삼는 함정에 빠질 수 있고 결국 바리새인을 특징 지우는 것과 같은 자기 의에 빠지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이런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13-28).  이 말씀의 의미는 만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율법과 일치하게 살려고 할 때 항상 자기 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도 바리새인과 세리에 관한 비유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율법적인 행위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만일 바리새인에게 있어 이것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항상 자기 의로 이끌 것이고 그런 자기 의로 인하여 자기와 다른 사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정죄하게 될 것입니다(눅 18:9).  그리고 이미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성령의 은사들을 예수님보다 우위에 두는 함정에 빠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고(고전 12-14장), 또한 감정주의에 미혹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추구하기보다는 더 특별한 수준의 감정을 얻으려고 하다가 결국 귀신의 가르침을 좇거나 신비주의 신앙에 빠지기도 합니다(딤전 4:1).

 

그리고 교회의 예배형식으로 예배시작 무렵에 준비 단계에서 장시간 걸친 음악 시간을 갖는 것인데 물론 찬양 중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시 22:3), 여기에서조차 일부의 사람들이 미혹되는 것을 볼 수 있고 이들은 실제로 그 시간에 예수님을 예배하기보다는 ‘예배’를 예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신자의 삶 자체, 교제, 치유, 전도, 구제, 봉사, 기도, 훈련, 선교 등을 예수님보다 우위에 두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모든 일을 하여도 바리새인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기에(마 6:1-18),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 채 어떤 선한 일들을 예수님보다 우위에 두거나 이런 모든 것들에 의해 미혹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일들과 주님을 동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교리, 추상적인 원칙, 신학, 사역, 교회, 활동, 교단, 생활방식이 아니며, 그분은 한 위(位), 한 진정한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추구하는 것보다 이러한 것들 중의 하나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때면 언제나 그것은 우리를 그분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그것들이 우리 삶속의 우상이 되거나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마 6:1).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탕으로(고전 13:1-3), 말에나 일에나 무슨 일을 하든지 오직 예수님만을 사랑하고(골 3:17), 그분만을 자랑하며 높이지 않는다면(벧전 4:11), 그 신앙은 가증스럽고 별 볼일 없는 ‘허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생각해 볼만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약교회의 예배스타일  (0) 2015.12.19
성령의 바람  (0) 2015.08.01
비판의 영을 가진 사람  (0) 2015.03.07
거짓목사인가 타락한 목사인가?  (0) 2015.01.17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  (2) 2014.12.0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나보다 위치가 높거나 입장이 유리한 사람에게 ‘갑질’을 당해본 적이 있는가?”라는 설문조사에서 직장인 10명 중에 9명이 “그렇다”라고 대답을 했는데, 지식사전에 의하면 ‘갑질’이란 갑(甲)과 을(乙)의 관계에서 ‘갑’에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접미사인 ‘질’을 붙여 만든 단어로 권력이나 권리관계, 다시 말해 상대적 우위에 있는 ‘갑’이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영어로 표현하면 “boss (someone) around”, 즉 우두머리처럼 누구한데 이래라저래라 명령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비행기를 타면서 메뉴에 왜 죽이 없냐는 불평부터 밥이 설익고 라면도 설익었다고 짜증부리며 가지고 있던 책으로 승무원을 때린 ‘라면상무’나 얼마 전 큰 이슈가 되었던 항공기불법 회항사건은 많은 여론과 국민들의 질타를 받고 일단락되었지만, 이러한 갑질의 행동은 비단 불신자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나 그리스도인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갑질을 해본 사람들이 절반 이상이 넘는다는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갑의 행포란 어느 곳에서도 있습니다.  문제는 기독교 안에서의 갑질의 행동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한 가지만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으로서 평생을 배워도 다 알 수 없는 성경말씀을 조금 안다고 ‘갑질’(?)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좋지 못한 공통점은 신학/교단/교파 정신에 매여 있어(세뇌당한 표현이 더 좋을지 모르겠지만) 목적을 읽어버린 채 ‘종교재판’(宗敎裁判)/‘이단 심문’(Inquisition)을 하듯이 자신의 신학과 신앙에 맞지 않으면 신랄하게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얼마 전 어떤 인터넷 신문에서 자칭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어떤 목사가 무슨 계기가 생겨 상대방 목사에게 전화와 이메일로 신원조회를 하듯 무례하게 물어보면서 거의 공갈과 협박을 하는 글을 읽어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제는 전과는 달리 전화나 이메일 그리고 SNS에서 주고받는 모든 것들이 기록으로 남는 세상이고 심지어 IP주소를 통해 어디서 접속을 했는지 훤히 아는데 목회자라는 사람이 다른 목사에게 으름장을 놓으면서 말하는 것을 볼 때 그 사람의 인격에 대해 의심이 들지만 사실 이런 사람 때문에 목사라는 직분이 믿음이 약한 사람 특히 불신자들로 하여금 경멸의 대상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가 왜 불신자보다 못한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교단신학에 철저하게 얽매여 좁은 시각으로 자신만이 가진 신앙이 성경에 가장 근접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향해 돈키호테처럼 비판의 칼을 가지고 휘둘러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이단들과 싸우면 되는데 문제는 영성이 있는 목회자들까지도 이단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렇게 교조주의적인 태도나 편협한 신앙관을 가진 사람도 문제이지만 어떤 사람 중에는 신학을 정식으로 하지 않는 사람이 이단을 연구하거나 세미나 강사 노릇을 하면서 어떤 교회나 목회자를 놓고 재판장의 입장에서 서서 비판하고 정죄하고 있는데 마치 종교시대 때 마녀사냥을 하듯 이들이 덕스럽지 못한 행동, 조금 원색적으로 표현한다면 정신병 수준의 ‘사이코패스’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학을 한 사람은 자신이 배운 신학과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고 신학을 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배워온 관점만이 가장 성경적이고 올바른 해석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성경해석 능력이나 성경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지식과 신학적 체계를 믿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는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 허접하고 균형 잡히지 않은 반쪽짜리 성경지식을 가지고 상대방을 향해 서슴없이 비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오만하고 편협한 생각 그리고 신학적 편견 때문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누구에게나 부어지는 성령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고(행 2:16-18), 이들의 독선적인 주장으로 인해 가는 곳마다 교리로 인한 싸움과 논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약 3:13-16),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데(마 7:20), Jonathan Edwards의 말을 인용한다면 바리새인처럼 트집 잡기를 좋아하고(눅 11:54), 비판의 영을 가진 완악한 불신앙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갑질 횡포’는 교회 역사에서도 나오는데 제네바 시의회에서 Calvin에게 직위(성경학 교수)를 부여했을 때 그는 이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영적기준에 미흡한 자들에게 보다 엄한 치리를 시행할 것과 심지어 교회에서의 출교와 성만찬 참여금지 조치까지 불사하였는데, 아마 Calvin이 개혁운동을 전개하면서 겪었던 대표적인 논쟁은 아가서가 외설스럽기 때문에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던 Sebastian. Castellio와 예정설을 놓고 논쟁을 벌인 Jerome H. Bolsec, 그리고 가장 곤욕스러웠던 것은 의사출신이며 『기독교강요』에 대한 답변으로 『기독교 원상회복』을 쓴 Michael Servetus를 들 수 있는데 칼빈은 Servetus가 교리적으로 불순한 사상을 가졌다고 해서 화형을 해서 죽였습니다.  여기서 Calvin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가톨릭교회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였던 종교재판에 의한 사형 제도를 용인한 것인데 물론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지키려는 열심이 이를 용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혁을 빌미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는 것입니다(마 5:21-22).  사실 Calvin에게 있어 좋은 것은 배워야 하겠지만 자신의 신앙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가혹한 권징이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분명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이며(롬 13:9-10), 무엇보다도 자신만이 습득한 관점에 대하여 독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고수하고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해 비판하거나 적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영혼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죽이는 일에 앞장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볼만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의 바람  (0) 2015.08.01
가증스러운 신앙  (0) 2015.05.30
거짓목사인가 타락한 목사인가?  (0) 2015.01.17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  (2) 2014.12.06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0) 2014.05.0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달라스 신학대학 구약학 교수였던 Jack Deere 목사는 처음에는 예언사역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예언사역자 Paul Cain를 만났을 때 그의 생각이 바뀐 것을『놀라운 예언의 은사』에서 이렇게 회상을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자 외에 오늘날에도 실제로 그 시대의 예언자와 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말은 나에게 사기처럼 들렸다. 우리에게 예언자 대신 우리를 인도하는 성경책이 엄연히 있지 않은가? 예언자의 필연성이나 필요성이 없는 이 시대에 왜 예언자가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이런 나의 관점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가지고 있는 마음의 문제들, 특히 아버지에게 상처받은 일들을 하나하나씩 정확하게 집어내는 Cain의 예언의 능력을 보면서 하나님은 더 이상 예언자를 사용하시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오늘날에도 예언자가 존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사실 Paul Cain의 예언의 능력은 거의 전설적이었고 그가 집회하는 곳마다 참석한 사람들의 문제를 정확히 맞추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Cain이 알코올 중독과 동성애에 빠졌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고 본인 스스로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해 줄 것과 상담치료 받을 것을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한 때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역자들 중에 돈, 이성, 술, 마약, 동성애, 등등의 문제로 사역 중간이나 말기에 가서 범죄 할 때, 목사들 중 어떤 이들은 자신은 그런 부류의 사람과 다르고 스스로 올바른 주의 종이라고 생각하며 그러한 죄를 저지른 사역자에 대해 ‘거짓목사’, 혹은 ‘거짓예언자’라고 낙인을 찍어버리고 마녀사냥을 하듯 온갖 정죄와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사실 Paul Cain은 처음부터 거짓선지자로 사역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역자들이 하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주님의 사역을 시작했는데 그에게 많은 열매가 나타나고 명성이 높아지다 보니까 초기사역과 다르게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벗어나 기도와 말씀이 소홀해지면서 자만심이 그를 죄에 빠지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 대형교회를 목회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가지 문제로 사회에서 지탄을 받고 교회 내에서도 손가락질을 받는 목회자들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들 모두가 ‘거짓목사’라고 말할 수 없듯이 Cain 역시 거짓예언자가 아니라 죄 속에 허덕이는 한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린도전서 10장12절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사역에 있어 자유로운 사람은 없고 그가 한 시대에 쓰임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 순간 어떤 결정적인 계기를 통해 타락한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을 가지고 모든 성령의 사역에 대해 비방하는 것인데 Jonathan Edwards의 말을 인용한다면 인간에게 있어 가장 커다란 약점은 새롭고 흔치 않은 어떤 일을 구분하는데 있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을 도매금으로 인정하거나 정죄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떤 계기가 되어 그곳에서 나오게 되면, 본인 말로는 그곳을 이단으로 정죄하며 거기서 일어나는 어떤 체험들, 즉 눈에 거슬리거나 질서적이지 않고 경건해 보이지 않는 현상들에 대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미혹의 영이라고 비판을 가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도회나 선교를 위한 모임 혹은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는 중보기도운동, 방언, 예언, 기름 부으심, 등을 무조건 신사도 운동과 연관시켜 신랄하게 비판을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비판의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언제나 같은 문제를 들추어내어 논쟁을 좋아하는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논쟁과 비판적인 정신을 소유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본인 스스로가 하나님의 일군이며 남들보다 의롭고(눅 18:9-14), 자신만이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갈 5:22-23)이지 ‘성령의 은사’(고전 12:4-11)가 아니라고 주장을 합니다.  사실 은사가 필요치 않다는 가르침은 성령을 거스리는 교만한 생각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니라 반쪽짜리 신앙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Jonathan Edwards의 말을 빌리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것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자들은 그 전체를 거부해 버리기 때문에 그가 목사이든 평신도이건 당장 그들을 거짓목사나 위선자로 낙인찍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본인 눈에 들보가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인데(마 7:1-5), 예를 들어 사십 년 동안 사사직을 지낸(삼상 4:18), 여호와의 제사장 엘리(삼상 1:3)가 영적 분별력을 상실해서 한나에게 빗나간 말을 하거나(삼 1:12-14), 혹은 아들 문제로 인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에게 책망과 저주를 받고(삼상 2:27-36), 나중에 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삼상 4:15-18), 아브라함처럼 평안히 장사되어 죽은 것이 아니라(창 15:15), 목이 부러져 죽었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자식 농사를 잘못한 ‘거짓목사’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형교회를 목회한 모세 역시(출 12:37), 세상에 그 어느 누구보다도 겸손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평가하지만(민 12:3), 그에게는 참지 못하는 분노(민 20:10-12)와 망령된 입술이 있었고(시 106:33), 그로 인해 광야에서 떠돌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데(신 34:1-7), 그렇다고 해서 그를 ‘거짓목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다만 그가 사람을 죽인 살인자이며(출 2:11-14), 생각 없는 경솔한 말과 분노 때문에(약 1:20), 실수를 했을 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확실하게 드러난 이단이 아닌 이상 말의 실수나(약 3:2), 경솔한 행동 때문에(눅 9:54), 거짓목사라고 주장하거나 혹은 교회 안에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고 해서(행 2:6),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단정 짓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놓고 Edwards는 『부흥론』에서 “많은 사람이 신중하지 못하게 행동하고 비상식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역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판단상의 많은 실수가 있고 사탄이 그 역사에 망상적인 것들을 섞어놓았다고 해서 그 역사 전체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증거도 될 수 없다. 구원의 은혜를 체험했다고 생각되던 어떤 사람들이 심각한 실수나 추문을 일으키는 행실에 빠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역전체에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증거는 못된다. 약간의 모조품이 있다고 해서 전부가 가짜라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그러면서 어떤 역사가 나타날 때 종교개혁 시대의 Calvin처럼 자신과 신학적인 견해가 다른 사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무서운 정죄의 자리에 앉지 말라고 경고합니다(마 7:2).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자녀라고 고백하지만 우리들 중에 거룩해서 죄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롬 3:9), 모든 목회자들 마음속에도 무지와 부패가 남아있기 때문에 사역을 행할 때 높은데 마음을 품는다면(롬 11:20-21), Cain처럼 얼마든지 타락한 목사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0:12).

'생각해 볼만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의 바람  (0) 2015.08.01
가증스러운 신앙  (0) 2015.05.30
비판의 영을 가진 사람  (0) 2015.03.07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  (2) 2014.12.06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0) 2014.05.0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어떤 한 여성이 2014년 12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난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다른 서너 가지 계시 받은 것을 인터넷을 통해 퍼트릴 때 불신자들은 관심을 갖지 않지만 그리스도인들 중 어느 한 부류는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녀의 말을 믿고 다른 나라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고, 또 다른 부류는 “무당이 점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면서 정신이 나간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여자라며 서로 간에 갑론을박이 있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당나귀도 사용하시고(민 22:28),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만드실 수 있으시며(마 3:9), 전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무명의 한 사람을 들어 사용하실 수는 있겠지만(왕상 13:11-32), 이번 일을 통해 느끼는 것은 모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진리의 말씀에 바탕 된(고전 3:11), 견고한 믿음이 아니라 너무 쉽게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믿음을 가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사 26:3).  이미 지나간 사건(?)들을 통해 이제는 말씀을 붙들고 정결한 삶(약 1:27)과 회개가 동반된 생활을 해야 하는데(계 3:19), 누군가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듣고 말하면 그것을 분별하지 않고(고전 14:29),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요일 4:1).  그러나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직도 한국에는 세상 신에게 무릎 끓지 않은 소수의 기도/믿음의 용사들이 있기 때문에(롬 11:4), 이 여자의 말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무오하고 확실한 그분의 계시라고 믿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딤후 3:16-17, 벧후 1:20-21),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성경이 말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견해나 해석, 그리고 적용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 계시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확신한다면(고전 14:30), 그것은 반드시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는 진리이여야만 합니다(고전 4:6).  다시 말해 항상 진리를 말하지만(시 119:16), 하나님의 ‘꿈’이나 ‘환상’(민 12:6, 행 2:17), 그리고 느낌의 형태로 주시는 ‘계시’나 어떤 확실한 음성은 우리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오류가 섞여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행 10-9-23).  그러기 때문에 누군가 하나님의 음성 들은 것이 그분께로 왔다고 확신한다면 그것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법을 알 필요가 있고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바른 음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음성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적용한다면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개인적인 계시는 항상 성경과 일치하는지 성경 말씀에 비추어 시험해 보아야 하고(요일 4:1), 하나님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을 범하도록 유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약 1:13).

 

가령 어떤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들 중에 성령께서 이 시간 어떤 계시를 주신다고 말하면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시길’이라고(출 9:1, 삼상 10:18), 말하며 목소리를 바꾸거나 설교적인 어투로 기교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마치 자신을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인양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역자는 자신을 주님이 쓰시는 당나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벧후 2:16),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역을 위한 능력이나 은혜로 베풀어주신 초자연적인 은사에 대해(약 1:17),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에게 밝혀진 진리나 성령의 촉구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행 5:32),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사역과 은사를 알도록 하실 것이지만(고전 14:23-25), 만일 어느 때이든지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애쓰거나 자신만이 특별한 존재이기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생각한다면 Joy Dawson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사람은 아직 사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기 때문에(고전 13:9), 하나님으로부터 정확한 환상(행 10:9-16)이나 계시를 받더라도(행 21:10-14), 베드로(행 10:17)나 아가보처럼 자잘한 부분에서 혼동을 일으켜 그릇되게 해석되고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행 21:33, 22:29, 23:12-14).

 

또 하나 오늘날 사람들은 누군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이 그분으로부터 온 예언적 계시인지를 시험해 보는 중요한 방법은 그 받은 예언이 실현되는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말하지만(렘 28:1-17), 다른 한편에서는 성경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닌 예언이나 기사나 표적도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마 24:24), 그것은 그 배후에 있는 귀신의 힘이나 발언자의 교묘한 조작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신 13:1-5).  사실 많은 예언들은 우연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에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식별하는 근접한 방법으로는 성취를 강조하지 않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아는 것”입니다(마 7:16-17).  쉽게 말하면 진리나 성취는 좋은 열매의 일부분 일수는 있지만 예수님께서 ‘열매’라는 단어를 사용하심으로써 예언하는 사람을 통해 전해지는 음성의 결과를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즉, 그 음성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교회 공동체 안에서 좋은 결과인 사랑과 기쁨과 평안, 그리고 인내 등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갈 5:22-23).  요약하면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과는 상관없이 정말로 거듭난 주의 백성이라면 어디에 가든지 우리의 삶에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겠지만(눅 6:43), 만일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하면서 가는 곳마다 싸움과 분쟁과 분열이 일어난다면(약 3:14-16), 그 받은 음성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생각해 볼만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의 바람  (0) 2015.08.01
가증스러운 신앙  (0) 2015.05.30
비판의 영을 가진 사람  (0) 2015.03.07
거짓목사인가 타락한 목사인가?  (0) 2015.01.17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0) 2014.05.0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한국 대형교회 목회자이며 영향력이 있다는 한 사람이 부활주일 설교 도중에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인지 혹은 성령의 인도하심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부활절 본문설교와는 조금 벗어난 누가복음13장에 나오는 ‘실로암 망대 사건’에 대해 짧은 메시지를 전할 때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적지 않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전 국민을 슬픔과 분노의 도가니로 빠뜨리는 대형사건이 진도 앞바다에서 터진 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인터넷 신문을 통해 그의 짧은 메시지를 접할 때 비록 적절한 시기는 아니지만 한국교회가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남아 있다고 희미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가 바른 말을 하거나 성경말씀을 희석하지 않고 그대로 전하면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탄과 비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목회자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설교가 SNS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기독교 언론에서 관심을 갖고 문제를 삼자 5일이 지난 후 교회 홈페이지를 통해 직접 부연설명을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문득 사무엘상 15장24절의 말씀이 생각이 났는데, 같은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으로서 쓸쓸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얼마나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에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라는 확신이 없었으면 목사가 설교를 전하고 나서 그것에 대한 부연설명과 해명설교를 일일이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비위를 맞추면서 전하는 설교를 좋아하는 이 타락한 시대에(딤후 4:3-4),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오늘날 현대 교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이 말을 우리가 듣기 쉽게 해석하면 “나는 여러분들에게 잘 보이거나 환심을 사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분께만 인정받기를 원하는 주의 종이지 사람들의 눈치와 여론을 두려워하며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더 확실하게 원색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 세상 사람들의 지탄과 비판의 목소리, 그리고 기독교 언론들에 어떠한 보도에 상관하지 않고 설사 교회에서 쫓겨나는 일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전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강심자의 목회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인데 만약 이런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 즉 과감 없이 성경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바울처럼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도 할 것이고(행 26:24), 본인 자신도 예수님께 미친 사람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고후 5:13).

 

아무튼 오늘날은 목회자가 교회에서 주는 어떤 혜택 때문인지는 몰라도 교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믿음이 없는 패역한 시대인 것만은 사실이지만(눅 18:8),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께서 목회자의 입을 당나귀처럼 사용하여 말씀을 전할 때(민 22:28), 그 메시지를 전하는 목회자가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그 설교에 대해 일일이 해명 설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민 22:38).  왜냐하면 신구약 성경 전체를 찾아보아도 선지자나 사도, 그리고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 중에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말씀을 증거하고 나서 사람들과 여론 때문에 부연설명을 하거나 해명설교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상 가치관과 전통에 매여 살 수 밖에 없는 죄악된 본성을 지닌 연약한 피조물이지만(롬 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한 것처럼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뜻을 하나도 빠짐없이 증거 해야 합니다(행 20:26-27).  비록 사람과 언론을 통해 무수한 비판의 돌을 맞거나(행 7:58, 14:19), 아니면 세례요한처럼 생명을 잃는다 할지라도(마 14:8-12), 성령이 그 시간에 주시는 말씀이라면(막 13:11), 그것이 사람들의 죄악을 지적하거나 회개를 외치는 메시지라도 반드시 선포되어야 합니다(마 3:7-10). 

'생각해 볼만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의 바람  (0) 2015.08.01
가증스러운 신앙  (0) 2015.05.30
비판의 영을 가진 사람  (0) 2015.03.07
거짓목사인가 타락한 목사인가?  (0) 2015.01.17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  (2) 2014.12.0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