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예수'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22.10.02 예수님과 성령의 권능 1
  2. 2022.09.11 예수님과 교리 논쟁 2
  3. 2022.08.28 예수님과 교육
  4. 2022.08.06 예수님과 목회
  5. 2022.07.22 예수님과 영성훈련 1
  6. 2019.02.02 예수님과 영적전쟁

우리 목회 사역의 정체성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요 1:12), 예수님께서 부끄러움 없이 사랑하시는 그분의 형제(히 2:12)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목회적 소명은 주님의 목회 사역을 권능 있게 하는 성령의 동일한 능력을 덧입는다.  성경은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 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요 14:12)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예수님보다 더 큰 역사까지도 수행할 것을 그들에게 기대하신다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기대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능력 밖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일생 동안 팔레스타인 경계선 밖으로 나가 여행해 보신 적이 없으셨지만 제자들은 팔레스타인을 벗어나 전 세계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할 것이다.  더 나아가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더욱 큰 기적들을 행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나타나는 모든 능력의 원인(막 6:53-56)을 단지 성육신하신 삼위일체 중 두 번째 위격으로서의 그분의 실재에만 돌린다면 우리는 신학적이며 목회적인 중대한 실수를 범하게 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요일 5:20)과 인성(마 1:25)을 신뢰한다는 점에서 확실히 복음주의적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존재한다는 신비가 인간의 이성으로 이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어렵지만 진리의 말씀인 성경이 증언하기에 나는 조금도 의심 없이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의 목회적 삶을 관찰하고 그분의 말씀과 능력이 단지 ‘처음과 나중’(계 1:17)이며, ‘알파와 오메가’(계 22:13)되신 전능하신(사 9:6) 그분의 신성에만 기인한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참된 귀감이라는 희망을 전혀 가질 수 없고, 그분을 목자장으로서 따르며(요 10:1-5), 선생님으로서 그분과 같이 되기 위해 훈련하는 것은 헛된 수고가 되고 만다.  다시 말해 그분의 목회 사역이 전적으로 ‘모든 사람의 주’(롬 10:12) 되신 그분의 신성에만 기초했다면, 우리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에게 하신 말씀처럼 ‘나를 따르라’(마 4:19)는 그분의 부름대로 살고자 하는 희망을 결코 품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요한복음 14장 12절 말씀은 예수님의 ‘실언’(失言)으로 볼 수밖에 없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서 모든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이 지상 사역을 하시기 위해 성령의 능력이 필요했는가?(사 11:2, 42:1).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드시 필요했다.  먼저 누가복음 4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을 이사야서 61장의 약속에 근거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그 약속은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가?  그것은 사도행전 10장 38절에 기록된 말씀처럼 성령의 권능을 덧입음을 포함한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눅 4:14),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청중들에게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눅 4:18).  더 나아가 사랑받는 의사 누가(골 4:14)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병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 5:17).  지금 누가가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그분이 하나님이신데(요 1:1) 굳이 병 고치는 능력이 함께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뒤에서 또 말하겠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셨음(롬 9:5)에도 불구하고 인성의 한계를 받아들이셔서 자신의 신적 능력을 빌어 병자를 치유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자신에게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는 권능을 주실(행 10:38) 때 민감하게 반응하셨다.  Gerald Hawthorne은 『The Presence and The Power: the Significance of the Holy Spirit in the Life and Ministry of Jesus』에서 이같이 말했다.  “명백히 누가에게 있어 성령은 예수님과 구별되어야 하는 예수님 바깥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런데 그 능력은 예수님에게 임하여 그분 곁에 있으며,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 역사하고, 그분에게 영감과 권능 모두를 덧입힌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서는 자신의 사명을 성령의 권능과 더불어 감당하며 성령의 권능 가운데 그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계속 나가신다.”   

Hawthorne의 말을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중 두 번째 위격으로서 자신의 존재에 기초해 초자연적인 사역을 감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분의 사역은 성령의 권능 안에서 이루어진다(눅 11:20).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동일한 하나님으로 영접할 때 권능을  받는다(막 16:17-18).  바로 그 성령의 위격과 사역이 성품과 능력으로써 그리스도인들, 즉 권능을 덧입은 교회가 예수님을 닮는 일을 실제적으로 가능하게 만든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가르쳐준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한 바람으로 불같이 오셨을 때(행 2:1-4),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요약하면서 그분을 이렇게 증거 했다.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셨느니라’(행 2:22).  삼 년 동안 예수님을 매우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베드로의 눈에 주님은 하나님의 권능을 덧입은 분으로 비쳤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말씀(요 1:14), 즉 삼위일체 중 두 번째 위격이라는 사실을 평가절하하거나 그분의 신성을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위격으로 영원히 결합된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요 10:30), 또한 완전한 인간이다(빌 2:8).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구원 사역에 대한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서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눅 11:20), 즉 하나님의 권능을 덧입었다고 단언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손은 출애굽기 8장 19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애굽이 마술사들이 애굽에 재앙이 내리도록 한 모세의 행위를 ‘하나님의 손’이 역사한 것으로 설명하는 구절이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신성을 지녔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성령의 권능을 덧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신다성경은 인간의 형체를 취하신 예수님께서 신적 속성들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셨다고 가르쳐준다(빌 2:6-11).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을 때 한 인간으로서 사역을 행하시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이다(눅 4:18-19).

우리의 목자장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을 끼쳐 모두가 따라야 할 방식으로 목회적 사명을 기꺼이 감당하셨다(벧전 2:21).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을 때(빌 2:7), 목회’라는 운동장을 고르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영역으로 들어오셨으며(히 2:14),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고 목회하도록 공급하는 동일한 자원들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사셨다(갈 2:20).  그분은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침에 의지했으며(요 5:19, 12:49, 14:10), 언제나 초자연적인 권능, 즉 성령에 의존하셨다(마 12:28, 눅 4:18, 롬 1:4).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요 5:30).  Hawthorne이 말했듯이 “예수님께서는 성령께 의존하셨는데 이것은 그분의 인성의 진정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예수님께서는 지상 사역 기간 내내 성부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복종하셨다(요 8:28).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목회 비전을 품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분이 소유하셨던 동일한 성령의 권능을 덧입으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가?

성령의 권능을 덧입는 일은 치유의 은사들을 포함한다(행 3:1-12).  나는 특별한 경우 성령께서 나에게 ‘병 고치는 은사’(고전 12:9)를 부여하신다고 믿는다.  치유자는 아니지만 병자를 놓고 손을 없고 간절히 기도할 때 질병으로 고통받는 그들이 치유를 받으면서 예수님과 협력하는 특권과 은혜와 기쁨을 누린 적이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성도 한 분이 청력 상실에서 고침 받을 때였다.  이것을 개혁주의 신학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성령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때에 치유의 은사들을 의도적이며 주권적으로 베푸신다(고전 12:11).  이것은 나와 같은 목회자나 장로들이 기도하기만 하면(약 5:14-16), 언제나 치유의 역사가 발생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베푸시는 주권적이며 동정 어린 ‘치유의 은사들’ 관점에서 우리는 치유를 구하는 담대함과 기쁨이 넘치는 자유를 소유한다(막 11:24).  비록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그분께서는 고통과 근심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도 여전히 애정과 온전한 지혜와 사랑으로 병든 사람들을 대하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성령께서는 목자장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예수님을 기름 부어 세우셨다.  성경은 증거 한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부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그 동일한 성령께서 목회자와 성도들에게도 나타나신다.  Jonathan Edwards는 『신앙감정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실 때 성령이 그리스도께 비둘기 같이 내려오셨다. 그런데 교회의 머리로 내려오신 성령은 그 지체들에게도 똑같이 내려오신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비둘기처럼 내려오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는다.”  Andrew Murray 역시 『The Spirit of Christ』에서 “신자가 성령을 한번 받았다 해서… 더 이상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롭게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 날마다 필요하듯이… 그 축복도 늘 성령의 충만함을 가지신 분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살아 있는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날마다 받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물론 고착화된 교리를 가지고 Edwards를 폄하하는 사람 중에 말 바꾸기, 거짓말, 주작(做作)의 달인으로 소문난 인품이 좋지 못한 천방지축,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목사가 있다고 한다.  확증평향에 사로잡혀 있고, 건설적인 대화, 즉 서로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신학적 의견 차이가 무엇이며, 그 차이를 어떻게 표현하거나 합의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무경험자인 목사가 Edwards에 대해 논평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개가 웃을 일이다.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끝까지  우기는 정신 나간 사람과 비슷한 것 같다.  나는 Edwards가 냉철하고 지성적이며 합리적인 성령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의심 없이 믿는다.  앞뒤가 꽉 막힌 벽창호가 아니란 말이다.  그는 히스테리에 기만당하기 쉬운 그런 유의 사람이 아니다.  폐일언하고 우리가 성부 하나님께 성령이 권능을 덧입혀 달라고 간구할 때, 그분은 분명 우리의 삶을 더 큰 성령의 권능으로 채워주실 것이다(막 11:24).  나아가 권능을 덧입은 목회 사역을 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그분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배워야 한다(마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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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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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교육에 뒤따를 수 있는 약간의 부작용에 대해 논하기에 앞서, 나는 학문적인 훈련의 네 가지 유익점을 간략하게 지적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신학 과목들에서 타인들을 철저하게 교육하고자 하는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진리의 말씀에 대한 사모이다.  어느 누구도 말씀에 대한 깊은 사모함 없이 성경학이나 신학을 배울 수 없다.  다음은 교회사에 대한 식견이다.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 역사하신 방식에 대해 조망하는 것은 큰 자산이 된다.  그리고 개인학습의 훈련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게으른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잠재력을 충분히 개발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강제적인 책임과 규칙적인 구조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신실한 교수들과의 만남이다.  성경의 진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스승들로부터 흘러나올 때 참된 목회 인격을 형성하게 된다.  이와 같은 학문적인 유익 외에 다른 유익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내가 경험했던 신학 교육에도 부작용이 뒤따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차례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가방 끈이 짧은 제자들은 공식적인 신학이나 수사학을 배운 적이 없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별 볼일이 없는 사람들이다(행 4:13).  한 마디로 '스펙'(한국식 잘못된 영어 표현)이 없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있어 목회적 자격을 증명해 주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목회자로서 목회관을 형성하거나 수행해야 할 필수적인 기초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요즘처럼 개나 소나 대통령이 되거나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는 것처럼, 그 흔한 대형 교단 안수 증명서나 유명무실한 신학교 박사학위 증서가 아니다.  사실 눈먼 교인들은 중심을 보지 못하고(삼상 16:7),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모 즉 교육 배경이나 사회적 신분을 가지고 판단한다(약 2:1).  이것은 패역한 이 시대에 가장 슬픈 현실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동역자인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종교성이 강한 엘리트 집단인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행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행 4:13).  이 구절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마가복음 3장 14절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동료가 되어 계속해서 그분과 함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자들의 목회관(행 4:19)과 깜짝 놀랄 만한 용기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나왔다.  이 친밀감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성령의 충만함과 담대함이다(행 4:8, 31, 9:27-28, 13:46, 14:3, 18:26, 19:8, 26:26, 28:31).  한마디로 어떤 신학적 배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예수님과는 아무런 친밀감이 없으면서도 세상적인 학위를 북한의 장성들이 갑옷 입은 것처럼 훈장을 주렁주렁 많이 달고 있으면 능력 있게 쓰임을 받느냐는 것이다.  물론 세상적으로 보면 유익한 것도 있다.  분별력이 없는 교인들로부터 칭송을 받거나 대접받는 것 말이다(마 23:7).  하지만 ‘모세의 자리’에 앉아 마귀의 새끼들처럼 십자가의 원수 역할을 할 때가 더 많다는 것이다(마 23장).      

내가 학교 교육과 어느 특정 교단 신학을 평가절하하고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학문적인 훈련을 통해 말씀에 대한 사모와 개인 학습 그리고 교회사에 대한 식견과 이름난 쟁쟁한 교수들과의 만남은 나로 하여금 학문적 교육에 큰 유익점이 되었다.  미국에서 가장 이름 있는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탁월한 교수들의 가르침과 수많은 토론을 통해 교육과 훈련받은 것에 대해 늘 감사를 하고 있다.  지나간 일이지만 그 당시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해 졸업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강의 시간에 성령의 은사 문제로 교수와 살벌한 논쟁을 벌여 학교 전체를 시끄럽게 한 적이 있었지만, 이 사건을 빼놓고는 모범 학생으로 생활했다.  

그런데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고 싶다.  우리가 배운 교육은 학문적 유익이 있는 반면에 부작용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학문적인 훈련이 목회 사역에 있어서 원천도 기초도 아님을 확신한다.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보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라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던 예수님(막 6:3)과 그분의 제자들은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고전 1:26).

심지어 신학 교육의 부작용은 서로 짝을 이루고 있는 교만과 소원(疏遠)이다.  자신이 배우고 습득한 성경 지식과 주경학적인 기술들이 마치 목회의 능력을 제공하거나 성경적인 것처럼 생각할 때 우리는 방자한 생각과 교만한 마음에 빠진다.  물론 지식과 기술도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매일매일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서 신학적 지식을 남용한다면 그것들은 목회의 도구가 아니라 형제들 간의 분열과 논쟁만을 일으키는 교만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고전 8:1).  이런 도구와 기술과 같은 부차적인 것이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그는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고’(딤전 6:4-5),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이단(異端)들처럼 목회를 타락시킨다. 

솔직하게 말해 신학적 논쟁을 일삼는 목사 치고 목회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있는가?  영혼 구령의 불타는 마음이 없으니까 이 짓거리를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관종’이라고 부른다.  놀라운 것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도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박수 엘루마처럼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함으로’ 사람들을 혼란시키고(행 13:10),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위적으로 혼잡스럽게 만들거나 잘못된 성경해석을 통해 하나님과 구원의 관계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조차 믿음을 파괴시킨다(딤후 2:18).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눅 11:52),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자도 막는다’(마 23:13).  한 마디로 지옥의 판결을 피하지 못하는 독사의 새끼들이다(마 23:33).  왜 이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불렀을까?(마 12:34).  이들이 받은 형벌은 게헨나, 즉 지옥과 그곳의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의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들은 구원받을 희망에서 이미 제외된 자들이기 때문에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끝없는 신화와 족보’(딤전 1:3-4) 이야기,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딤전 4:7), 즉 신학적 논쟁은 신앙생활에 유익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듣는 자로 하여금 멸망으로 이끄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딤후 2:14).  

이렇듯 교만은 소원을 수반하듯 자신이 배운 신학이 다른 교단 신학보다 높게 해 준다는 헛된 망상에 사로 잡혀 있는 신학자와 목사들이 있다.  자신이 배운 신학을 갖지 못한 자들을 비방하거나 배척하려고 하는 유해한 정신은 이미 예수님 당시 저주받은 지옥의 자식 바리새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마 23:33).  이들은 빈정거리는 말투로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요 7:48-49).  이 말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개혁주의 신학을 가지고 다른 교단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목회자가 예언과 방언을 인정할 수 있어?” 오늘날 이런 골빈 소리로 찌껄이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 교회를 다니는 같은 부류에 속한 눈먼 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 인간과 이웃이 되고자” 성육신 하신 지혜자이시라면(요 1:14), 참된 목회 지식과 기술들은 십자가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목시킨 것처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중간에 막힌 담(교단신학)을 무너뜨리고 서로에게 다가가게 할 것이다(엡 2:14-16).  예수님께서는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계셨지만 결코 자신의 지식과 기술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과의 사이를 소원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사도 바울 역시 최고의 신학교육을 받았고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빌 3:5-8),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골 1:5-6).  자신이 배운 가마리엘 신학을 가지고 소모적 교리 논쟁을 일삼지 않았다는 것이다(딤후 2:23). 

목회자는 그리스도 앞에서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을 나타내려면(고전 15:41), 자신의 삶 속에서 성령을 통해 깨달은 진리의 말씀(요 14:26)을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 전함으로써(딤후 4:2), 잃어버린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사람이다(단 12:3).  그 삶에는 자신을 변화시키고 주님을 닮고자 하는 진실하고 부단한 노력이 있을 뿐,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없다(딛 3:9).  다시 말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고전 1:13)라고 말한 것처럼 바울 신학, 아볼로 신학, 베드로 신학, 그리스도 신학을 가지고(고전 1:12), 서로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자신이 배운 신학만이 뛰어난 것처럼 나팔을 불거나 교조주의적인 태도를 갖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가?  책 한 권 만을 읽은 사람이다.  성경 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은 오직 자신이 읽은 책 한 권을 절대적인 지식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성경해석 능력이나 성경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지식과 추종하는 교주(敎主)로부터 받은 신학적 체계를 믿고 있어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 심각한 것은 열린 마음으로 상호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연합하려는 정신을 가져야 하는데, 문제는 자기의 해석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이 신학의 틀을 가지고 다른 신학을 비판하면서 당을 지어 자기편에 속한 사람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편에 선 사람에게는 입에 게거품을 물듯 무자비한 모습으로 마녀 사냥하며 몰아세운다.  심리학 용어로 확증편향(確證偏向)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이런 목사다. 이런 목사를 만난 교인들은 영혼을 마귀에게 팔아먹는 것과 같다.  마치 돌나라 박명호 밑에 있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분노를 사서 Pope Gregory XIII에 의해 사라질뻔한 책 『The Table Talk of Martin Luther』에서 Luther 이렇게 논평했다.  “우리가 겸손해야 할 수많은, 진정 셀 수 없는 증거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토록 거만하고 자신만만해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Craig S. Keener는 우리 안에 예수님이 임재하신다는 참된 표징을 겸손이라고 말했다(엡 4:2-3).  오늘날 목회자들은 비록 자신의 성경 해석과 견해에 대해 옳다고 믿더라도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실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겸손히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심각한 문제는 목사가 입만 열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거짓말은 보너스다.  양심이 화인을 맞은 목사의 특징이 무엇인가?  바리새인처럼 위선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교인들 앞에서는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딤전 4:1-2).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20세기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아버지 James W. Sire는 『Scripture Twisting』에서 말한다.  “우리들은 쉽게 오류에 빠질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전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날마다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며, 우리가 이해한 것에 순종하고 새로운 통찰력이 주어졌다면 이전에 읽었던 내용을 다시 수정해야 한다”   

Luther 역시 “하나님 앞에 나를 가르치소서,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말하는 겸손한 목회자만이 성경에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알듯이 성경을 알아가는 것은 평생에 걸친 작업이다.  이 길에는 지름길이나 왕도(王道)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가능한 안전장치들을 사용하면서 자신의 편견을 섞는 일 없이, 성경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을 받아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벧전 1:20-21).   나는 목회자들이 성경을 왜곡시키지 않으려고 주관주의와 싸우면서 터득한 성경 지식은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 덕이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주관주의와 싸우지 않고 객관적인 근거나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신학자 한 사람으로부터 전수받거나 성경에 자신의 생각을 과도하게 부과하는 자기 해석을 고수한다면 신자들은 이런 무지한 목사를 만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만 가르침을 전하시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자기 자신을 그 나라에 바치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밝혀질 것이지만 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귀로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마 13:13), 감추어질 것이라고 대답하신 적이 있다.  그러면서 이사야 6장 9-10절을 인용하여 눈으로 볼 수 있는 분명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눅 11:14-23), 자신의 고정관념 깨기를 거부하고 짐짓 소경으로 남아 있으려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셨다(마 13:14-15).  요지가 무엇인가?  신학적 박스 안에 갇혀 소모적 교리 논쟁만을 일삼지 말고 밖으로 나와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기 위해 시야를 넓히라는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이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물론 잘못된 고정관념이나 그릇된 교회 전통과 제도, 그리고 박제(剝製)와 같은 신학으로 인해, 이러한 폐쇄성을 나타낼 수 있는 바리새인 같이 소경으로 남아 있으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말이다(요 9: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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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 중에 어느 목회자가 성경을 백독 이상을 하면 굉장히 신령하거나 영적인 세계를 잘 알고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는 주의 종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남들이 알아주는 이름난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흔한 박사학위를 받으면 그 신학적 배경과 그 목사가 하는 말을 거의 진리인 것처럼 대단하게 여기는 분별력 없는 사람들도 없지 않나 있다.  그러나 내가 확신하는 것은 성경을 수 백독 하거나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사용하고 유명무실한 신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성경에 대해 다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려운 일이지만 개중에는 거듭나지 못한 신학자와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가?       

성경적인 예를 들어보자.  바리새인들은 평생 성경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지만(요 5:39), 영적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했고(요 3:7-10), 성경을 곡해(曲解)하며(마 15:9), 죽은 전통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막 7:1-10), 입만 열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다(요 8:44).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지만(마 3:9),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고(요 3:3), 마음속 깊은 곳에 가인의 살인적인 미움의 피가 흐르는(창 4:8), 예수님의 말씀대로 독을 뿜은 독사의 새끼들이었다(마 23:33).  다시 말해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달달 외우거나 원어성경을 막힌 없이 좔좔 읽어 내리고 남들이 알아주는 신학교를 졸업했어도 그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 아닌 마귀의 자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신학자나 목사가 어떤 신학적인 주장을 내세운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마지막 대변인이 되는 것처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Lloyd Jones는 오늘날 교회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일어날 것을 예측했던 것 같다.  그는 자기 고향인 South Wales 지방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개탄하면서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이 가지고 있는 학위로 그 사람의 말을 평가하는 경향을 유감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  Iain H. Murray의 『Life of Martyn Lloyd Jones』에 나오는 글을 인용한다면 Lloyd Jones는 웨일즈가 낳은 복음 전도자들 Daniel Rowland, Howell Harris, William Williams, John Elias 등의 예를 들면서 이들이 무슨 이름이 있거나 알아주는 학위를 가지고 있었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성경에서 나오는 제자들은 어떠한가?  사도 바울을 빼놓고(행 22:3), 다른 제자들은 신학교 근처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행 4:13).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인 학위를 많이 가진 사람들보다는 공식적인 훈련이나 사회적인 품위를 갖추고 있지 않는 소외되고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들어 사용하신 것을 알 수 있다(고전 1:26).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부르신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들로 하여금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고(사 43:7, 마 5:16),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신학적/신앙 배경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택하신 것이다(고전 1:29).  반면에 오늘날 현실에 비추어보면 세상적인 지위나 높은 학위를 가진 사람들은 자랑할 것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이들은 바리새인처럼 모세의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있고(마 23:2),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마치 성경에 가장 근접한 진리인 것처럼 어떤 골빈 주장을 강력히 내세울 수 있다.  

성경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 보면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릇들은 무엇인가?  나는 모든 사역자들이 유능하든 무능하든, 큰 교회를 목회하든, 작은 교회를 목회하든,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은사중지론자든, 은사지속론자든, 심지어 유익이 하나도 없고 듣는 자로 하여금 믿음을 무너뜨리고 망하게 하는 거짓된 가르침을 열심히 전하는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와 같은 가짜 선생이든 간에(딤후 2:16-18) 시몬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처럼(마 16:16), 자신의 신학적 울타리를 벗어나 위엄의 보좌 우편(히 8:1)에 계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그리스도’(히 12:2)를 바라볼 것을 거듭 요청하고 싶다.  다시 말해 교회의 썩어빠진 죽은 전통과 자신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병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선한 목자’(요 10:14)로 지칭하시는 분을 바라보는 일보다 우리를 자유롭고 활력 있게 만드는 요소는 없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지혜로운 목회자는 자신의 눈을 단호하게 예수님에게 고정시킬 것이다(히 12:2).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보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발견하게 된다(마 7:3).  이러한 사람은 교리적이며 교단적인 차이점이 있을지라도 자신에 대한 냉철한 평가로부터 서로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까지 개발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엡 4:13), 그리스도 안에서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만약 교리적이며 교단적인 광범위한 차이점들이 진정으로 목회자들을 서로 헐뜯고 비방하거나 논쟁을 일으키며(롬 1:2-32), 당을 지어 편 가르기를 하지 않는다면(유 19절), 나는 그것들을 환영하고 존중한다.  목회자 상호 간의 비교와 비판과 근거 없는 신학적 판단, 그리고 시기와 종교적 분쟁 같은 더러운 짓들을 일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것’이고(롬 2:24),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신학교 교육을 받거나 교단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목회 사역을 시작하신 분이 아니다.  그분의 목회관은 당시의 어떤 고등 교육 기관에 의해 형성된 것도 아니다.  Everett Harrison은 『A Shot Life of Chris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공식 교육을 거의 받지 않으셨다. 대중적으로 종교 교사 또는 랍비라고 알려졌지만 그분의 명성은 어떤 전문 교육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사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목회 이력상에 학문적 자격증이 없기 때문에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그분의 삶과 메시지에 대해 가혹할 만큼 조소 어린 비판을 가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예수님께서 오늘날 목회를 하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것이다.  다른 교단들은 잘 모르겠다.  아마 장로교단 합동이나 고신에서는 분명 이단으로 낙인을 찍었을 것이다.  먹이 만난 하이에나처럼 길길이 날뛰는 관종스러운 이단 사냥꾼들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 문제를 조금 더 살펴보려고 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적이 있었다(요 9:1-14).  문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행하던지 간에 그는 분명히 하나님에게서 온 자가 아니라고 재빨리 속 좁은 결론을 내렸다.  만일 하나님에게서 왔다면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요 9:16).  이들은 그 기적의 부당함을 골빈 신학으로 설명하려고 야단스럽게 부산을 떨었다.  그들이 게거품을 물듯 기를 쓰며 부정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명백한 해답을 전에 소경이었던 그 사람이 지적하자(요 9:25), 바리새인들은 그를 꾸짖으며 자기들 앞에서 쫓아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요 9:29).  여기서 소경이었던 자가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이 여긴 바리새인들의 빈정거리는 말속에서 우리가 주목할 대목이 있다.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이 말이 풍기는 뉘앙스가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지 않은가?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모세 신학에 충실하다는 것을 완강히 옹호했다.  골빈 목사들이 흔히 쓰는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칼빈의 제자야!!”라고 나팔을 불어댄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부정할 수 없는 예수님의 이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문 교육을 받은 종교 지도자들은 경멸의 눈으로 예수님을 여전히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가?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말한다(빌 3:5).  이 구절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이, 육신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다는 것이다.  당시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교육이 랍비를 존경받고 인정받는 ‘흠이 없는’ 중요한 인물로 만든다고 믿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그러한 교육과 훈련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승인된 발판을 마련해 준다고 여긴 것 같다.  우리들 역시, 어느 특정 신학을 큰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높이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목회자들 중에 이러한 위험스러운 바리새적인 정신세계에 빠져드는 것을 본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입만 열면 별 볼 일 없는 궤변주의 늙은 신학자의 말을 팔아먹는다. 

그렇다면 신학 교육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물론 교육이 중요하다.  나도 그 흔한 학위를 하나 갖기 위해 연방 정부 학자금을 빌려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 말씀에 비추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예수님께서 학벌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의존을 노골적으로 무시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smart 한 머리가 뜨거운 heart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머리가 똑똑해서 배운 것이 많아 천상 유수(靑山流水)처럼 말을 잘하는 자들은 많지만 가슴에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목회상을 형성하는 데 있어 머리로 배운 신학 교육보다는 더 강력한 원천이 잃어버린 영혼을 위한 뜨거운 가슴에 있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Derek J. Tidball는 『Skillful Shepherds』 에서 신학 교육 과정에서 발생하는 목회 상의 결핍을 다음과 같이 확인시켜준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신학적이고 학문적인 관심에서 교육을 받기 때문에 신약 성경의 목회 전략들과 목회적 가치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그들은 목회 현장에서 신학교 시절 직면했던 것과 다른 문제들에 봉착한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부적절하다고 배운 이론으로써 그 문제들을 대처한다. 그들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교리의 목회적인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며, 신약성경에 나온 목회 전략들이 자신들의 목회를 풍성하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목회는 자주 신학적 기반으로부터 멀어지고 결핍된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다음과 같이 자문해보아야 한다.  “목회자로서 수행할 모든 것들이 영구적이고 필수적인 기초는 무엇인가? 신학 교육이 실제로 목회관을 형성하는 데 있어 확고한 말씀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는가? 교육이 목회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걸림돌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신학 교육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미국 복음주의 운동의 선두 역할을 한 목사 안수도 받지 않은 평신도 사역자  Moody를 생각해 보면, 그것이 목회를 하는 데 있어 주된 기반이 아닌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다.  더욱이 예수님이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은 종교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에 의한 강력한 박해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핍박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가방 끈이 짧은 학력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행 4:13).  직업이 어부였던 베드로와 요한은 랍비 학교에서 공식적인 신학이나 수사학을 배운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세우거나 자랑할만한 학위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목회적 자격을 증명하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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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에서 자라고(마 2:23), 또래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셨지만 언제나 그들보다 훨씬 뛰어나셨다.  심지어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성전 뜰에서 모임을 가지고 있던 학자들을 놀라게 하셨다(눅 2:46-47).  다른 유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관례적인 교육을 받으며 부모에게 순종하고 그 지혜가 자라났다(눅 2:51-52).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지니신 분이지만 보통 인간과 동일한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거쳤음을 보여준다.  성장 과정에서 우리와 같은 단계를 밟아 나갔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과연 예수님에게 있어 목회 사역의 원천은 무엇이었는가?”  아마 그분에게 있어 학문적인 지혜도 중요하셨다.  하지만 그것이 꼭 필요하거나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주로 배우지 못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부르셨기 때문이다(행 4:13).  세상 기준으로 보면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권력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다(고전 1:26).  한 마디로 ‘가방끈(?)이 짧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회적 정체성의 근거를 학문적인 교육에 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분의 목회적 정체성의 근거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유능한 목회자가 되신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집착하는 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늙은 바리새인의 신학 강의나 골빈 사두개인이 개최하는 설교 세미나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셨지만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고(눅 2:39-40), 목수 일을 하셨던 예수님께서는(막 6:3) 어느 날 갑자기 무인가 신학교를 거쳐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로 변신하신 것도 아니다.  목자장으로서의 예수님의 삶과 사역은 성경의 계시라는 약속의 땅에서 자라났다.  그분은 매일매일 성부를 의존하는 가운데 자신의 삶과 사역에 대해 규정한 구약의 약속들과 예언들을 받아들이고 숙고하셨다(창 3:15, 사 53장, 슥 12:10, 말 3:1).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분의 사역을 절대적으로 결정했다(요 5:19, 30).  관계의 역학은 교육적인 요인들보다 목회적 유효성에 더 중요한 토대가 된다.  즉 목회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학교 교육과 학위 취득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다.  

Helmut Thielicke는 세상에서 가장 별 볼일 없고 보잘것없는 자들에게 사역의 초점을 맞추는 예수님의 경향에 대해 논하며 『Beyond Pushing and Producing』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분은 그들이 쓸모없고 뛰어난 점도 없고 중요한 인물도 아니며 단지 하늘 아버지께서 잃어버린 불행한 자녀들이라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으시는 듯하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귀하게 여기며 그들을 구원하셔야 했다. 그러한 자들에 대한 사역에 있어서 그분은 ‘절대적인 공평함’에 의거해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소위 ‘세속사적 관점들’을 무시하신 듯하다”  오늘날  목회 사역의 회복을 논함에 있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에 유의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목회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 목회적 소명에 대한 확고한 원천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세속사적 관점들을 무시하듯 날마다 성부 하나님께 의지할 때 활성화되는 성경의 약속이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는 살벌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나사렛에서 죽음을 직면하셨을 때, 전에는 이웃이었지만 이제 검은 색안경을 끼고 성난 폭도로 변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들 가운데로 지나서 자기 길을 가셨다(눅 4:22-30).  도대체 나사렛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어떠한 행동이 그런 미친놈들만 모여 있는 평상 마을 시위처럼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는가?  그분은 단지 자신의 성경의 약속의 현신(現身) 임을 선언했을 뿐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 오실 성령의 기름부음 받는 자에 대한 이사야의 약속의 성취라고 밝히셨다(사 61:1-3).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펴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눅 4:18)라는 구절을 읽으셨다.  약속이 사람이 되었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 1:14).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마귀와 치열한 접전을 펼치신 후, 그분은 ‘성령의 권능’을 덧입으셨다(눅 4:14).  다시 한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의 근거를 정확히 어디에 두셨는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목회 비전’ 말이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유능한 목사가 되기 위해 남들이 알아주는 훌륭한 신학 교육과 뛰어난 언어 소통술 그리고 화려한 경력들, 예를 들어 본인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들먹거리며, 눈이 빠질 정도로 성경을 수 백독 하고, 새벽기도를 많이 한 것처럼 천식 걸린 목소리, 그리고 공업용 본드 같은 끈끈한 ‘인맥’을 최우선 순위로 둘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갖추기보다는 먼저 성경의 약속이라는 영원한 기초와 성령의 능력에 뿌리를 내린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예언된 소명의 원천이 되었던 것은 학문적인 지혜의 축적이 아니라 계시의 약속인 성경(사 11:1-5)과 소유하신 성령의 능력이었기 때문이다(사 61:1-3).  Douglas Webster 박사는 『A Passion for Christ』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주님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자신의 정신과 감성과 영혼이 진리의 말씀에 기초하도록 훈련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지금 이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의 근거를 두신 곳에 목회자들도 자기 정체성의 근거를 두는 것만큼 시급한 일은 없다고 말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라는 바울의 질문에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라고 에베소의 제자들이 대답한다.  에베소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들었다면 분명 성령에 대해서도 들었을 것이다(요 1:32-34).  하지만 이들은 약속된 성령(행 1:4)을 이제 그들도 받을 수 있다는 것(행 2:17)과 성령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삼상 10:6, 고후 5:17).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 제자들과 똑같은 상태에 있는 것 같다.  이들도 성령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지만 그저 교회 안에서 하는 전형적인 얘기라고 치부해 버리거나 자신들처럼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사는 사람에게 해당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성령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시당하고 있는 성령의 사역을 기술하기 위해 성경은 여러 가지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고, 위에서 임하시고, 인치시고, 채우시고, 세례를 주시고, 말씀하시고, 인도하시고, 내주 하시고, 가르치시기도 하는데, 이러한 다양한 역사는 인격적인 그분의 측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는 면만 알기보다는(요 16:8-9), 병을 고치시고(눅 5:17, 행 10:38), 예언의 말씀을 주시며(고전 12:10-11), 동시에 거룩하게도 하시고(살후 2:13),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도 있다(롬 8:26-27). 뿐만 아니라 능력도 주시고(눅 24:49), 거듭나게 하시고(요 3:3-5), 하나님의 자녀임을 친히 증거해 주시며(갈 4:6), 삶 속에 아홉 가지 열매도 맺게 해 주신다(갈 5:22-23).  그 외에도 많이 있지만 성령의 다양한 사역을 다 알기 전에 그분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령의 사역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가설(假說)에 가까운 어떤 신학적 주장을 내세운다면 아마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교만하고 무지한 사람일 것이다(고전 8:2).  성령의 사역은 주님 앞에 겸손히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 조금씩 알아갈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이 가르쳐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는 것만을 알 수 있기에(요 14:26), 그분이 영적 세계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엡 1:17-19).  문제는 목사나 신학자들 중에 성령의 한 부분만 바라보고 얻은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성령을 안다고 속단해 버리는 경우다.  예를 들어 성령은 “이러한 분이시고 이런 분은 아니야”, “이런 일을 하시지만 저런 일은 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이들은 종종 스스로 계신 하나님과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제멋대로 구분하기도 한다. 

개혁주의자들은 성령의 내주 하시는 사역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 하시고 성숙하게 세워 가시는 데 있어 그 방법이 감정적이지 않고 경험적이지 않다고 가르친다.  이런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은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의 전부라고 생각해서 성령의 다른 사역이 나타나면 무조건 의심하고 이단이나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을 보듯 판단하고 비판한다.  반면에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 운동을 접한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 사역에만 초점을 맞추는 신비주의적 경향이 있다.  이런 교회들은 치유와 예언과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 초자연적인 능력, 영분별, 귀신 쫓아내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은 오직 능력 사역에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다른 신자를 바라볼 때 과연 저들 마음속에도 성령이 계실까 라는 의구심을 가진다. 그 결과 교회의 머리 되신 한 분 예수님을 두고(엡 4:15), 같은 지체인 그리스도인들끼리(고전 12:12-27), 두 파로 나누어져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며(갈 5:15),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나팔을 불어댄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교회가 너무 많이 여러 파(派)로 나누어져 있다(고전 1:12).  마치 ‘쪽파’, ‘실파’, ‘양파’, ‘대파’ 같이, 당시 고린도 교회의 분열된 그룹들이 각기 다른 이유들을 내세워 각각 다른 설교자들을 추종하고 있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이신데, 이들 말에 의하면 과연 어느 교파가 믿는 예수님이 진짜일까 궁금하다(고전 1:10-13).  사도 바울은 육신의 혈통으로 맺어진 형제자매보다 훨씬 더 깊은 유대감을 나누어야 할 그들에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라고 간절히 호소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어두움 세상 속으로 가져가는 그들의 사명이었다.  ‘내부 총질’로 인해 불신자들에게 교회가 손가락질과 조롱을 당하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롬 2:24).

오늘날 개혁주의에서는 말씀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인정하면 이단으로 정죄받기 쉽기 때문에 오직 말씀만을 강조한다.  진리의 말씀을 강조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무 문제도 없다.  물론 전하는 말씀이 북어포처럼 메말라 있지만 나는 그것이 정확히 옳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은사주의에서는 성경 지식보다는 능력만을 강조할 때가 많다.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무 문제도 없다.  이들이 남들보다 조금 시끄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언뜻 보면 복음주의자들은 자유를 두려워하는 것 같고, 은사주의자들은 질서를 불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복음주의에서는 내주 사역을 강조한 것이고, 은사주의에서는 능력 사역을 강조한 것으로 Lloyd Jones는 이것을 ‘일반 사역’과 ‘특수사역’, 즉 ‘성령의 간접 사역’과 ‘성령의 직접 사역’이라고 부른다.      

나는 대학원에서 웨슬리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두 진영에서 삼십 년이 넘게 있어본 경험자로서 말하고 싶다.  먼저 성령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유와 질서를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갈 5:22-24).  자유만 강조하거나(갈 5:1), 혹은 질서만 강조한다면(고전 14:33, 40),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게 된다.  신앙에 균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개혁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이 같은 교회 안에서, 혹은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평화와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아갈 수 없다면 이는 가장 큰 비극이다.  꼭 기억하길 바란다.  각 세대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연약함과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잡도록 반대세력을 항상 일으키신다.  마치 Calvin이 독주를 막기 위해 Wesley가 등장한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우리 세대에는 말씀 운동을 넘어 은사 운동이라고 부르는 놀라운 운동을 일으키셨다.  만일 교회가 하나님께서 배우기를 바라시는 교훈을 은사 운동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이 또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의 가족이 된 사람들은 모두 한 ‘형제와 자매’가 된다(마 12:50).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이 편지의 마지막 단락에서 가족 용어를 다섯 번이나 사용하고 있다(12, 14, 25-27절).  요지가 무엇인가?  개혁주의(비은사주의)자들에게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19-20절)라는 경고의 말씀과 더불어 오순절주의(은사주의) 자들에게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희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12-13절)고 권면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두 가지 권고는 1세기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사역을 하셨느냐는 것이다. 사복음서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삶에서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사역이 균형이 잡혀 있고, 또한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우리의 목자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회적인 정체성의 원천을 성부께서 구체화시킨 성경의 약속에서 찾으셨다.  그분은 또한 자신의 목회적 소명의 원천을 성령의 권능을 덧입는 일에서 찾으셨다.  즉 목회적 정체성과 소명의 기초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분에게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을 성경 계시의 약속과 성부의 실제적인 현존에 근거를 두셨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그곳에 근거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수면제 같은 설교와 머리만 커지는 성경 공부만 하지 말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치유사역도 해야 된다는 것이다(약 5:14-16).  그 이유는 예수님만이 우리 목회 사역의 유일한 모델이 되시기 때문이다(마 4: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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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든 싫든 목사와 신학자들은 자신의 신학적 혹은 신앙적 견해를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에게는 자신이 알고 있거나 인지하고 있는 견해도 있는 반면에 자신에게 길들여진 문화적 환경에서 터득한 어느 한 사람의 신학적 견해도 없지 않아 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거나 다양한 견해를 검토하는 작업을 착수할 때, 누구도 예외가 없이 인간 본성에 관한 여러 가지 복합적인 선입견이 우리 주의를 맴돈다.  문제는 자신이 성경에서 파악하는 내용이나 성경과 조화된다고 주장하는 생각이 이런 견해들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사실을 고집스럽게 인정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은 어떠한 한 가지 해석을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집단적인’ 강령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단지 그것만이 진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희미하고도 부분적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 자신의 해석이 하나님의 견해와 일치한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할 근거가 희박하게 된다.     

나는 엄청난 학비와 시간을 들여가면서 정식 신학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성훈련의 광범위한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영성에 관련된 책들을 읽으려면 언제나 부정적이고 심한 거부감이 들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것이 영성에 관한 책과 관계된 것이라기보다 교회 전통과 교단 신학에 짓눌려 내 영혼의 보잘것없는 초라한 상태에 대한 반증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마치 Bill Hull 목사가 목회 말년에 쓴 『성령의 놀라운 능력에 관한 솔직한 대화』에서 고백한 것처럼 “내가 깨달은 부끄러운 사실은 목사인 내가 교회에 임재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걸림돌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이유는 내가 성령의 임재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내가 받은 신학 교육 어디에서도 신앙생활에서 은혜롭게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실습해야 하는 고전적인 영성훈련 과정들은 없었다.  특히 영성훈련을 전혀 해보지 않은 목회자들로부터 여러 번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라고 권고를 받았다.  또한 영성에 있어 최고의 경지(?)에 오르려면 경건한 생활과 전도, 그리고 하기 싫은 금식을 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따라서 보다 다양한 영성훈련을 하라는 Dallas Willard나 Eugene Peterson, 그리고 내가 다녔던 대학교 영성신학 교수인 Richard J. Foster의 요청들은 지나치게 행위들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나는 종교 개혁가들이 특정 상황 속에서 주장한 진리의 법정적 paradigm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노력들을 은혜스럽지 않고 비신앙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제자 디모데처럼 성경을 읽고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며(딤후 3:14), 바리새인 같은 신앙을 갖지 않기 위해 골방에서 기도하고(마 6:1-15), 전도하는 것(마 28:18-20) 이외에 어떠한 영적인 지도를 받지 못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균형 잡힌 신앙을 가진 좋은 mentor를 만나지 못했다.  처음으로 고독과 침묵, 순종과 섬김, 그리고 고백과 명상에 대해 읽었을 때 나는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갈 2:16)라는 말씀 같이, 이것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스스로 획득한다는 의미의 ‘행위 구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다시 고백하지만 나는 수년 동안 고전적인 대부분의 영성훈련들에 대해 무지하고 불순종한 채 죽은 전통과 메마른 신학에 얽매어 사역해 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가 가진 목회 비전의 꿈과 계획이 서서히 깨어져 나가기 시작했고, 왜 그리스도를 닮는 일에 열매를 맺지 못하고 생명력 없는 정체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성훈련의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가 친히 그 훈련을 하셨다는 점이다.  목자장이신 분은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따를 모범으로서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벧전 2:21) 하시려고 그것을 행하셨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영적 거장 Dallas Willard는 예수님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그분의 삶의 방식 자체를 신중하게 고려할 것을 깨우치는데 교회에 크게 공헌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영성훈련의 견실한 연습 표본이다.  나의 생각은 영성훈련 없이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으며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는다.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었다(롬 8:29).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닮게 만들고자 하신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성도들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기도했고(갈 4:19),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 1:28)라는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한 가지 신념으로 사역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라는 도덕적인 명령을 내린 사람은 바로 사도 요한이었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이 말의 의미는 누군가 자신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이고 왕 같은 제사장이며(벧전 2:9),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산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도덕적으로 예수님께서 걸으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벧전 2:21).  이 구절에 대한 Glenn Baker의 말을 인용한다면 “저자는 예수님의 행적을 완전히 닮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사신 방식대로 살기를 진지하게 요청하는 신적인 명령”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님께서는 정확하게 어떻게 사셨는가?”  복음서를 읽어 보면 그분이 어떻게 사셨는지 해답이 나온다.  예수님은 금식과 기도와 고독(마 4:1, 막 1:35, 눅 5:16), 순종과 헌신(마 26:36-46, 눅 22:42, 요 5:30, 13:4-5), 그리고 묵상(눅 15장) 같은 경건한 삶을 사셨다.  예수님의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전달하기 위해 독창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시는 것은 그분이 깊은 영성 훈련을 하셨음을 보여준다.  만약 우리가 목자장과 같은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영성훈련을 해야만 한다(딤전 5:7).  이 진리를 부정하거나 피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훈련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벧전 2:21).  만약 예수님을 잊어버린 채 영성훈련을 한다면 우리는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신비주의자가 되거나 사마리아 여자처럼 율법주의자로 변할 수 있다(요 4:20-24). 

Dallas Willard는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는 일” 같은 용어를 사용할 때 복음주의적 완전성을 유지할 것을 강조한다.  Willard는 자신의 저서 『In Search of Guidance』에서 하나님께서 오늘날 성경 이외의 여러 가지 수단들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견해를 훌륭하게 옹호한다.  물론 개혁주의자들에게는 비위가 상하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결코 성경에 모순되는 것들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입증되는 것들이다.  성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한 친밀한 관계 속으로 인도한다.  사실 개인적이고 영적인 훈련이 없는 신학 교육은 치명적이고 박제(剝製)화 될 수 있다.  교육과 인격, 능력과 경험, 그 어느 것도 목회적 완전성과 권위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결코 대신할 수 없다.  영성훈련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으로 들어가는 통로다.  때때로 이 만남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거나 성경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연스럽고 침착하게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시키고, 그것을 일깨우고 우리로 하여금 목회를 위한 그분의 풍성하신 권능을 덧입게 하기 위해 이 만남을 계획하셨다. 

우리는 바리새인 같이 주관적인 경험에 극단적으로 반응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반응은 오랫동안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해왔던 구분을 무시하게 만든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음성’ 사이의 구분이 된다.  A. W. Tozer는 『The Pursuit of God』에서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진술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이다.  따라서 그것은 잉크와 종이와 가죽 등의 필수적인 용품들에 의해 한정되고 제한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절대자이신 그분께서 자유로우신 것처럼 살아 움직이며 자유롭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들은 영이며 생명이다’ 생명은 선포되는 말씀 안에 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우주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상응될 때에만 능력을 가진다. 기록된 말씀을 전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현재적인 음성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책 표지에 갇혀 잠들어 버린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끊임없이 대화하셨다.  인간으로서 그분은 사역을 하기 전에 기다리셨고(요 5:19),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고(요 8:28), 성부께서도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셨으며(빌 2:9-11), 성령께서 그 전 과정에 권능을 덧입히셨다(눅 4:18).  이사야서 50장을 살펴보면 마가가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 이유를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고독, 침묵, 경청하는 기도, 순종, 사역의 수용, 이 모든 것들은 날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행적의 일부였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면(갈 2:20), 우리는 그분이 하신 대로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사신 방식대로 살지 않고 ‘착하고 충성된’(마 25:21), 목회자가 되는 길은 결코 없다.

Dallas Theological Seminary의 교수였던 Howard Hendricks는 학생들에게 철저히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여러분이 사람들과 항상 함께 있다면 여러분은 그들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Hendricks는 학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단독적으로 만나는 일의 귀중함을 아셨던 분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목회자들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사람들과 어울려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런 대인 관계의 장점이 때때로 큰 약점이 되기도 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목회자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역자로 쉽게 변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실망시키는 올무인지 알고 있다. 

고독 훈련은 역설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성도들에게 영향력 있는 목사가 되고, 주님 앞에서 ‘충성된 종’이 되려면 목회자들은 성부 하나님과 단독으로 만나기 위해 성도들을 떠나야 한다.  Eugene H. Peterson도 성도들로부터 물러남이라는 이 필수적인 개념을 ‘바쁘지 않은 목회자’라고 표현했다.  우리가 목회하는데 있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질문보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라는 질문에서 보다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이사야서 50장 4-5절과 마가복음 1장 35절의 말씀은 모든 목회자들에게 두 가지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 영성훈련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로부터의 의도적인 고립과 하나님 앞에서의 의식적인 만남이 절대 필요하다.   

한 가지 더 붙이고 싶은 것은 개신교의 영성을 ‘거짓 성령운동’이라고 치부하거나, ‘영성훈련’이라는 단어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영성훈련을 하지 말고 성령께 순종하기를 힘쓰라”라고 주창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에게 질문하고 싶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영성훈련을 전혀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성령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가?”  이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이런 특정 신학과 오염된 교리, 바리새인 같은 종교적 자긍심에 얽매여 있는 무경험자들이 끔찍한 교만과 살벌한 편견 속에서 성령을 길들이려는 시도를 지금까지 해왔다고 생각한다.  확신컨대 이렇게 굳게 닫힌 마음으로 산다면 하나님께서 이들의 편견을 깨시는 일은 드물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적 교만의 편견을 침해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나의 고찰이다.  꼭 기억하길 바란다.  대다수 ‘골빈’ 신학에 묶혀있는 자들은 그들 자신의 전통과 편견의 정당성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면서 바리새인처럼 스스로 소경 되기 원하며 죽어갔다는 것이다(요 9: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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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Global Awakening에서 주최한 Randy Clark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영적으로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많은 시간을 준비하는 가운데 참석해서인지 시작하기 전부터 은혜가 밀려 왔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2박3일 간의 기간 동안 놀라운 은혜를 주셨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이어지는 설교, 찬양, 실습, 강의, 치유, 간증은 나에게 많은 도전을 주었고, 그날 일어난 사건들은 내 마음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나는 성령이 역사한 누가복음 4장18-19절의 살아 있는 실제를 끔찍한 속박 속에 있는 사람들이 구속의 역사를 경험하는 동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확인했다.     

Clark 목사가 아르헨티나의 복음 전도자 Carlos Annacondia를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한 적이 있다.   “부흥성회를 통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의 수가 북미보다 남미에서 훨씬 더 많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북미에서는 죄를 용서 받기에 충분할 만큼 복음이 선포되지만 남미에서는 자유를 체험하기에 충분할만큼 복음이 선포됩니다”  이삼백만 명의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회복시킨 성회에서 Annacondia는 회중 가운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싶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단상 앞으로 불러내어 영접기도를 시킨다.  그러나 그는 결신자들이 영접기도 후 곧장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이후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들이 이들에게 다가가 필요한 정보를 얻어낸다.  그리고 Annacondia는 이들에게 악한 영향력을 끼쳤던 더러운 영들을 대적하며 강력하게 기도하기 시작한다.  곧 수많은 사람에게서 귀신의 발작처럼 보이는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몸을 떨고, 또 다른 사람은 바닥에 꼬꾸라진다.  비명을 지르거나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고, “난 절대 안 나갈 거야!” 귀신의 절규를 발하는 사람도 있다.  스태프들은 이러한 현상을 보이거나 이와 비슷한 증상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가려내어 따로 마련된 축사사역 장소로 이동시킨다.  그곳에서 이들은 훈련된 평신도 사역자들에게서 축사사역을 받게 된다.  사역이 끝나면 피사역자들 대부분 치유되고, 압제로부터 해방감을 만끽하며 축사사역 장소를 나선다.

흥미롭게도 남미에서는 더 이상 “과연 크리스천도 귀신들릴 수 있는가?” “병 고치는 은사는 지금도 있는가?” 라는 것이 신학적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귀신들림의 현상들이 너무도 많이 또 자주 나타났고, 많은 사람들이 치유 받았기 때문이다.  축사와 치유사역의 필요성이 현격해졌을 뿐 아니라 축사와 치유가 남미 신학 일부로 자리 매김될 정도였다.  어느 누구도 “그것은 귀신의 장난이야?” 말하는 사람이 없다.  새신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후 곧바로 회개, 치유, 축사사역과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남미의 사역은 참으로 놀랍다.  반면 북미의 경우에는 한 달 동안 새신자의 수가 백 명이 넘지 않는 교회들이 다수다.  그중 한 달 내내 단 한 명의 결신자도 심지어 몇 개월에 걸쳐 한 명의 결신자도 얻지 못하는 교회가 대다수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 동산에서(창 2:8), 뱀이 하와를 유혹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로 충돌은 인간 관계의 특징이 되어 왔다(창 3:1-10).  다툼과 싸움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반목(反目)이라는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결과다(창 3:15).  고린도 교회처럼 두세 사람만 모여도 서로 신학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물고 뜯고 싸운다(고전 1:10-13).  인간 상호간의 다툼, 즉 자유의지 간의 충돌은 타락한 세상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지역 교회 역시 고린도교회 처럼 예외일 수 없다(고전 3:3, 11:18).  지나간 일이지만 나는 이러한 싸움에 정면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실제적인 싸움이 존재하는 영적 세계에 대해 무지하리만큼 아는 것이 없었다.  한 마디로 영적 소경이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6장12절에서 사용한 ‘씨름하다’(wrestle)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그것은 바울이 자신의 저서에서 단 한 번 사용한 단어다.  우리가 그 구절을 생각할 때 ‘씨름하다’라는 말은 언뜻 보기에 문맥상 매우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 씨름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전쟁을 위해 무장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씨름 선수는 전신갑주를 착용하지 않는다.  씨름 선수의 싸움은 실제 전쟁처럼 대대(大隊)나 연대(連帶) 등 무리를 짓지 않는다.  오늘날과 같이 바울 시대의 씨름 대회는 속된 말로 일대일 ‘맞짱’을 뜨는 것이다.  요점은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교전 지역처럼 보인다.  그것은 세상이 교전 지역이기 때문이다.  ‘영적 전쟁’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말로 성도들 삶의 도덕적 갈등을 묘사하는 목회적, 신학적 용어다.  그리스도인의 씨름은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중 권세를 잡은 악의 영들과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을 상대하는 것이다(엡 6:12).  실제적이고 매우 활동적인 영적 세계가 존재한다(살후 2:9-12).  기억하라.  목회는 바로 이 세계를 사역의 장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님이 처음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마귀와 일대일로 싸우신 것처럼 말이다(마 4:1-11).  목회자들은 신자들에게 영적 전쟁의 개인적 성격을 명백히 알려주며, 각각의 성도들에게 그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기술을 연마시켜야 한다.  하지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지 못하는 것처럼(마 15:14), 영적인 눈이 먼저 떠져야 이 전쟁이 무슨 싸움인지 안다.       

나는 어느 개혁주의자들 못지 않게 본문에서 벗어나지 않는 강해설교에 충실했던 목회자다.  많은 목회자들은 현대교회의 침체 원인 중 하나를 성경에서 벗어나지 않는 강해설교 부족이 상당한 부분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더 많은 훌륭한 강해설교의 필요를 주장하지만, 교회의 타락의 상당 부분이 영적 전쟁에 대한 진지하고 실재적인 대처 방법들의 부족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로마 카톨릭 사제이자 신학자인 Hans Küng은 사탄과 귀신에 대한 믿음을 시대에 뒤떨어진 중세 사상의 한 부분이라고 무시해 버린다.  사탄이나 영적 전쟁의 문제들을 다루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원수 사탄이 자신과 자신의 교활한 음모들에 대한 우리의 이러한 현실 도피적인 대응에 얼마나 기뻐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Lloyd Jones 박사는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대한 논의에서 영적 전쟁의 문제들이 거의 취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 통탄하며 『The Christian Warfar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룩과 성화에 대한 많은 가르침 가운데 사탄이나 어둠의 주관자들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그 문제는 단지 몇몇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제안된 많은 해결책들은 전혀 적절하지 못하다”  이 문제를 가지고 Lloyd Jones는 후임 목사 R. T. Kendal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회 안에 귀신들린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는데도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까?”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물리적 수준에서 지상적 권세와 싸우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분의 싸움은 하나님의 목적에 반대하고 창조계 안에서 파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타락한 권세와 상대하는 것이었다(골 2:14:15).  유감스럽게도 목회자들 중에는 마귀에 대해 신경을 쓰거나 이야기 하지 말고 오직 말씀에만 집중하라고 경고한다.  『The Prince of Darkness』의 저자 Jeffrey Burton Russell은 ‘이 세상의 신’(고후 4:4), 온 천하를 꾀하는 자로 묘사되는 마귀(계12:9)와 그의 귀신들은 신약에서 성령보다 거의 두 배 가량 많이 나온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성경이 사탄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목회자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령의 권능을 덧입은 목회자는 보이는 것 이면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통찰력이 있다.  이런 목회자는 원수 사탄과 악한 영들과 싸우면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그들은 영적으로 무장을 시킬 것이다. 

『Setting Your Church Free』를 쓴 공동 저자 Neil T. Anderson과 Charles Mylander은 이렇게 말했다.  “목회자들은 영적 투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며, 자기 자신이 대적 사탄의 목표물이라는 것을 분별한다. 이유없는 말다툼, 육체의 질병, 재정적인 문제, 친한 동료들과의 싸움, 무력감은 자주 목회자들을 괴롭힌다.  무서운 것은 이것들이 합리적인 설명을 마비시키며 너무 자주 그리고 명백한 이유 없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목회자들은 원수 사탄의 목표물이다.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 가운데 사탄이나 영적 전쟁의 문제들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셨는가?”(요일 3:8).  특정 신학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들은 귀신들과의 영적 전쟁이 아니라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고전 4:6).  나는 지금도 궁금한 것은 오늘날 현대교회가 지겹도록 말씀을 전하는데 왜 귀신에게 눌린 사람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셨다(마 8: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말한다(히 4:12).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고전 4:16).  그렇다면 진리의 말씀을 무시하는가?  말씀을 주야장천(晝夜長川) 외쳐도 성경의 정경을 최종적으로 선택한 이후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중지되었다고 나팔을 불면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사탄이나 귀신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셨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이 영적인 세계에서 악의 영들과 싸울 수 있도록 어떻게 무장시키셨는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  복음서들을 읽어보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탄과 귀신들이라 불리는 악한 영적인 존재들에 대해 시작하신 싸움의 실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메시야 소명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셨던 요단 강 세례 사건 직후(마 3:13-17),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이끌려 그곳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이 세상 임금(요 12:31), 기능적 ‘주’(functional Lord)가 되는 사탄(요 16:11)과 일대일 대결을 펼치셨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는 첫째 아담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범하도록 시험을 받으셨지만 첫째 아담과 달리 성령의 검, 말씀으로 무장한 하셨기에 사탄을 물리치셨다(눅 4:1-13).  

수없이 많은 영적 전투의 이야기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인생을 멸망시키는 유일한 사명을 가진 귀신들과 대결하며 그들을 쫓아내신다.  그 전형적인 예는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군대 귀신을 쫓아내신 이야기다(막 5:1-20).  이 본문은 Neil Anderson은  ‘진리 대결’(Truth Encounter)이라고 말한다.  Alan Tippet가 사용한 선교학 용어로 ‘능력 대결’(power encounter)이라고 알려진 사건이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해변의 북동쪽의 바위 절벽에서 파괴적인 군대 귀신에 맞서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는 유일하고 근본적인 이유 때문(창 1:27)에 사탄의 공격을 받고 있는 한 사람을 해방시킨 것이다.  사탄이 우리를 미워하는 이유는 주님의 말씀처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20).  한 마디로 그가 예수님을 지독하게 싫어하기 때문이다.   

영적 전쟁에 대한 생각이나 논의를 피하는 것이 최상의 접근법이라고 여기는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나는 그들이 과연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알고는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본다.  예배시간에 주기도문을 주문처럼 외우는 것이 아닌지 의심도 든다.  마태복음 6장13절, 이 한 구절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영적 전쟁이 발생하는 전쟁터로 들어가게 하신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예배 때에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하고, 그의 나라의 뜻을 바라며, 용서받고 용서하며,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공급받는다.  이제 다 끝난 것인가?  아직 시험과 악이 남았다.  Ed Murphy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적은 이미 패배했지만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한 마디로 영적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진행 중이다(계 12:12).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직접 영적 전쟁을 수행하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것에 대해 기도하라고 가르쳤을 뿐 아니라, 영적 전쟁을 위해 사람들을 무장시키기도 하셨다.  열 두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하늘의 권세를 주셨다(마 10:1).  이들 뿐만 아니라 파송된 칠십 명의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이렇게 보고한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  누가는 칠십 명의 제자들을 파송하는 이야기를 임박할 추수기의 문맥에 배치시킨다(눅 10:2).  누렇게 된 들판과 같이 사람들은 추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추수라는 측면에서 영적 전쟁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치유와 축사의 모든 사례를 하나님 나라를 전진시키고 사탄의 나라를 약화시키는 전쟁 행위로 여기셨다.  베드로는 이 주제를 가지고 주님의 사역을 고넬료에게 선포한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부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들을 고치셨으니’(행 10:38).  우리의 적은 Walter Wink가 말한 것 같이 어떤 원형적 이미지나 역사에 나타나 인간 상상력의 모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격체이다.  이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엡 2:2)의 목적은 하나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다’(요 10:10).     

목자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원수 사탄과 그의 세력들을 두려움 없이 효과적이며 당당하게 싸울 수 있는 영적 권위를 부여하셨다(막 16:17-18, 요 14:12).  두려움이 없는 것은 사탄과 그의 군대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가 영적 전투의 능력을 갖추었다는 의미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 논할 때마다 은사중지론자들이 hysterical 한 반응을 보이듯이,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할 때 귀신들은 사시나무 떨듯 떤다(약 2:19).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영적 세계의 전쟁을 할 수 있도록 교회를 무장시킨다.  ‘영분별’과 ‘능력행함’의 은사들과 귀신에 저항하며 그를 쫓아낼 교회의 책임과 권위는 상관관계가 있다.  교회는 영적 전쟁에 임하며 그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수행할 것을 명령받는다(막 16:15-18).  그리고 제자들처럼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는다(눅 24:49).         

오늘날 교회 안에서 정신적, 육체적, 영적으로 잘못되거나 고통을 당하는 신자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생겨난 현상인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이나 미국에 사는 한인들만큼 교회당을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열정적으로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는 민족도 많지 않다.  비록 그 말씀이 설교 원고지를 가지고 읽어내리는 메마른 말씀이 될지언정 신자들은 은혜가 되지 않더라도 수면제(?)와 같은 설교를 듣는다.          

문제가 무엇인가?  영적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경험자들이 가르치는 신학에 있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야고보서 5장14절에 나타난 치유에 대해 해석하기를 “주께서 잠시 동안 나눠주기를 기뻐하신 기적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오직 사도들과 관련이 있으며 우리와 관련이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런 치유의 능력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단정짓는다.  이것을 이어받은 현대판 계승자들도 신적 능력을 나타내는 필요성이 Athanasius of Alexandria가 성경의 정경을 최종적으로 선택한 이후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멈추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신학이다.  이런 가르침을 받은 신자들이 귀신에게 눌리거나 고통당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나는 평신도들이 이러한 가르침을 전하는 목회자를 만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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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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